서울 다동의 '용금옥(湧金屋)'
장안의 재사들 모여 낭만과 기행의 일화 남겼던 곳
월간외식경영 글·이정훈 실장 사진·엄태헌 기자
1932년 신석숭(申石崇) 홍기녀(洪基女) 부부가 처음 문 열어
<용금옥>은 1932년 신석숭(申石崇) 홍기녀(洪基女) 부부가 처음 문을 연 추탕집이다. 서울 한복판 청계천 다동에서 무교동으로 나가는 어귀에 자리 잡았던 <용금옥>. 이곳을 드나들었던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당시 <용금옥>의 위상과 무게를 새삼 느끼게 된다.
이집의 단골손님 중 세상 사람들이 알만한 인사로는 정치인 유석 조병옥과 이만섭을 비롯하여 문인으로는 수주 변영로, 월탄 박종화, 팔봉 김기진, 공초 오상순, 김성한, 정지용, 구상, 언론인으로는 선우휘, 이용상, 이관구, 최상덕, 고정훈, 홍종인, 만화가 김용환, 이홍우 등이 있다.
이때의 일화와 뒷이야기를 책으로 엮은 「용금옥 시대」(1993년 서울신문사 간, 이용상 지음)가 나왔을 정도로 <용금옥>은 현대사의 현장이자 문화인 언론인들의 아지트였으며, 그 자체로 한 시대의 얼굴이었다.
여장부, 홍기녀 할머니와 조병옥 박사
지금은 신석숭 씨의 장남, 신태영 씨의 아들인 신동민(창업자의 손자) 씨가 대표를 맡고 있다. 창업자 신석숭 씨는 「용금옥 시대」에 의하면 유명한 ‘난봉꾼’이었다고 한다. 신동민 현 대표가 기억하는 할아버지도 ‘한량’이셨다고 한다. 따라서 <용금옥>의 실질적인 운영은 신 대표의 할머니인 홍기녀 씨가 주도했었다. 홍 할머니는 정도 많고 포용력도 넓었으며 지혜로우면서도 남편의 바람기를 감싸줄 정도의 도량도 지닌 여장부였다고 한다. <용금옥>에 드나드는 인사들과도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그들의 친구처럼 때로는 누님처럼 스스럼없이 대하기도 했다.
유석 조병옥 박사와의 일화는 유명하다. 1960년 1월, 조병옥 박사가 미국으로 수술 받으러 가기 전날 마지막 점심을 <용금옥>에서 먹었다. 유석이 추탕을 두 그릇이나 먹는 걸 보고 홍 할머니가 “그렇게 식성이 좋으면서 어디가 아파 미국에 수술하러 가십니까?”하고 물었다고 한다. 그런데 유석은 미국 월터리드 육군병원에 입원, 수술하였으나 끝내 싸늘한 시신으로 고국에 돌아왔다. 유석의 주검이 서울에 오던 날 홍 할머니는 가게 문을 닫고 밤새도록 술을 마셨다고 한다. 그 뒤 홍 할머니는 두고두고 “그렇게 건강한 이가 왜 세상을 떠요? 반드시 무슨 야로가 있지... 암, 있고말고요”라고 했다고.
휴전회담 시 기자들 사이에서 유명세 타
소설가 겸 언론인 선우휘는 ‘서울에 사는 신문기자나 문화인치고 <용금옥>을 모른다면 그는 막말로 가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정치인 문화예술인 언론인들의 모임 장소였던 <용금옥>의 존재가 일반인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한국전쟁 말기의 휴전회담 때였다. 당시 북쪽 대표단 일원으로 영어통역관으로 나온 사람이 김동석이라는 사람이었는데, 이 사람은 고려대학교 영문과 교수였다가 한국전쟁 당시 월북한 사람이다.
휴식시간이 되면 김동석 씨가 항상 서울 <용금옥>과 주인 홍기녀 씨의 안부를 남한 기자들에게 물었다고 한다. 젊은 기자들 사이에는 도대체 김씨가 궁금해하는 <용금옥>이 어떤 곳인가 하여 신문사로 돌아와 간부들에게 물었다고. 그러면 간부들은 “용금옥도 모르는 놈이 무슨 기자야”라며 핀잔을 주었다고 한다. 야단맞은 기자는 반드시 <용금옥>에 들러 홍 할머니에게 김동석 씨의 안부을 전달하고 <용금옥>의 새로운 멤버로 등극하게 되었다. 당시 정부가 부산에서 아직 서울로 돌아오지 않은 시기여서 갈 곳 마땅치 않은 정계나 언론계 인사들이 북적이고 최신정보가 모이는 <용금옥>이 이래저래 기자들의 최고 출입처가 되었다.
북한 김일성 전 주석 동생, 김영주도 다녀간 집
<용금옥>은 북한 김일성 주석의 친동생 김영주가 다녀간 곳이기도 하다. 「용금옥 시대」의 저자인 이용상 씨가 일제시대 때 중국에 있던 일본군대에서 탈출하여 중국군 부대에서 일본군 무장해제 업무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9개월간 함께 먹고 자며 일했던 사람이 바로 김영주였다고 한다. 이용상 씨가 기억하는 김영주는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민족성이 강하고 예의 바르며 명랑했다고. 광복이 되어 이용상 씨는 김영주와 함께 배를 타고 부산으로 들어와 서울 집을 찾아왔다고 한다. 그때 옛집이 비어있어 수소문 끝에 <용금옥>에서 시인 정지용 등과 함께 친형이 술을 마시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김영주와 함께 처음 <용금옥>에 찾아가서 친형과 눈물의 재회를 했다. 바로 그 자리에 김영주가 함께 있었고 같이 울었다고 한다.
<용금옥>은 단순히 오래된 점포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용금옥>을 만들고 지켜온 사람들은 그들만의 정신이 있다. 비록 창업자 신석숭 씨가 ‘한량’이었다지만 인간적인 매력과 통이 크고 너그러운 성품의 소유자였다. 당시 손님들의 외상전표는 출입문 앞 계산대 위에 있는 조미료 깡통 속아 모아 두었다. 몇 십 년 단골손님을 비롯 수많은 인사들의 외상내역이 그곳에 있었다. 신석숭 옹은 운명하면서 그 외상전표를 모두 불태우라고 유언했고 세 아들은 아버지의 유언대로 실행했다. 자잘한 이해관계에도 법정까지 가는 요즘 세태에는 전설처럼 들리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홍기녀 할머니도 며느리와 함께 시장을 보러가서 며느리가 식재료 값을 깎으려고 하면 절대 깎지 못하게 나무랐다고 한다. 공짜를 바라지 않고 남의 덕을 보려고 하지 않으면서 남에게 베풀고자 하는 것. 그것이 <용금옥>의 정신 아닐까.
신동민 대표, “용금옥 정신 길이 이어갈 것”
신동민 대표는 오랫동안 기업체 경리부서에서 근무하다가 퇴사하여 <용금옥>을 맡았다. 그는 ‘남에게 과시하는 것보다 내가 떳떳하고 당당하면 그만’인 것이 우리 집안의 내력이라고 한다. 신옹의 장남이자 현 신동민 대표의 부친, 신태영 씨는 공무원이었다. 당시 <용금옥>에 드나들던 내로라하는 고위 인사들에게 청탁했으면 출세도 하고 ‘좋은 자리’로 갔을 것이다. 하지만 본인은 물론 식구들 어느 누구도 그런 얘길 입 밖에 낸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주변에서는 돈 많이 벌었을 텐데 고급 승용차도 타고 놀러도 다니라며 권하지만 신 대표는 그런 게 다 부질없는 일이라고 한다.
신 대표는 조상님들의 땀과 정신이 배어있고 손님들의 추억과 이야기가 스며있는 <용금옥>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지금 비록 좁고 협소하지만 확장하거나 새로 인테리어를 꾸밀 생각은 전혀 없다. 최대한 원형 그대로 보존하여 몇 십 년 째 꾸준히 대를 이어 찾아오는 고객, 특히 외국에 나가 있다가 오랜만에 귀국하여 찾아오는 고객들에게 작은 위안과 반가움을 주고 싶다고. 그래서 그는 음식값도 맘대로 올리지 못하고 있다. 추탕값도 몇 년 째 9000원이다. 장사라는 측면에서 보면 잘 하는 일은 분명 아니다. 그래도 잊지 않고 <용금옥>과 추탕을 찾아오는 고객들이 감사하다고 신 대표는 말한다. 주변에서는 프랜차이즈를 해보라는 권유도 있지만 신 대표는 그럴 마음이 조금도 없다. <용금옥>을 유지하는 정도의 범위 안에서 돈에 대한 미련도 일찍 접었다. 조상님들에게 물려받은 그 모습 그대로 간직해서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것이 그의 작은 소망이다.
<용금옥>의 추탕은 서울식이다. 따라서 된장을 기본으로 하면서 미꾸라지를 갈아 쓰는 남도식 추어탕과는 조금 다르다. 양곱창과 양지머리로 뽑은 육수에 유부 두부 버섯 호박 대파 양파 등을 넣고 끓여 얼큰한 맛이 난다. 여기에 면과 밥을 말아 먹는데 육개장처럼 개운한 맛이 일품이다. 옛날처럼 큰 뚝배기에 내어와 양도 푸짐하고 넉넉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리와 이해관계가 종잇장처럼 얇은 부박한 시대에 돈보다 문화와 역사의 가치를 알아보고 그 가치를 지키려는 식당 주인이 있다는 사실. 추탕 한 그릇이 들어간 뱃속이 더 든든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출처> 2011. 3. 29 / 조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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