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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맛집 정보/- 맛집

녹번동 '우주미', 곰국시에 담긴 디아스포라의 꿈

by 혜강(惠江) 2011. 5. 2.

 

                                                       

녹번동 '우주미'

 

곰국시에 담긴 디아스포라의 꿈

 

 월간외식경영 글·이정훈 기자 사진·변귀섭 기자

 

 

 

 

 

진한 곰국물에 말아낸 국수, 곰국시

  곰탕 하면 기자가 한 때 근무했던 어느 대기업체 사장님이 떠오른다. 그는 재계는 물론이고 정계와 문화체육계에서도 두루 활동했던 자수성가한 인물이다. 부하직원들과 사적인 술자리에서 어려웠던 지난 시절의 이야기를 가끔씩 들려주곤 했는데, ‘아버지와 곰탕’편이 그분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레퍼토리다. 막노동을 하셨던 그분의 아버지는 평소 ‘곰탕 한 그릇에 소주 한 병만 있으면 원이 없겠다’는 말씀을 입에 달고 사셨다고 한다. 그 후 자식들이 장성하여 이른바, 출세를 하고 생활이 안정된 이후에도 그분 아버지는 어떤 값비싼 산해진미보다 당신 아들이 사주는 ‘곰탕 한 그릇에 소주 한 병’을 세상에서 제일 최고의 음식으로 여기고, 드실 때마다 무척 흡족해 하셨다고 한다.

 

 

  서울 은평구 녹번동에 있는 <우주미>는 곰탕 국물에 국시(국수)를 넣은 ‘곰국시’를 판다. 곰탕이 일반적으로 밥을 동반한 형태라면, 밥 대신 국수를 넣어 만든 것이 바로 곰국시. 「고려도경」에 ‘식미(食味)에는 십여 가지가 있어 그 중 면식을 으뜸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밀이 귀했던 옛날에는 국수가 아주 특별한 날에 특별한 사람만 먹을 수 있던 고급 음식이었음이 틀림없다. 이처럼 귀족의 음식이었던 국수가 한국인의 입맛에 가장 친근한 곰탕과 만난 음식이 곰국시다.

 

 

 

푸짐한 곰국시에 수육, 와인이 전부 합해 6000원?

 

쇠뼈와 사태, 갈비를 각각 3~6시간씩 푹 고아 뽀얗게 우러난 곰국 국물 맛이 진하고 고소하다. 고기 건더기도 푸짐하고 먹을 때 부드러우며, 고명으로 들어간 호박도 두툼해 씹는 느낌과 맛이 모두 좋다. 곰국시를 주문하면 곰국시뿐만 아니라 수육 한 접시와 고창 선운사에서 가지고 온 복분자 와인 한 잔을 준다. 말하자면 ‘곰국시 3종세트’ 인 셈이다.

  적당하게 간이 밴 양파채에 얹은 수육은 기름기가 없어 담백하다. 곰국시를 다 먹고 난 뒤 입가심용으로 나온 복분자 와인은 향과 단맛이 강해 누구나 쉽게 마시지만 알코올 도수가 무시할 정도는 아닌 것 같다. 곰국시와 수육에 들어간 쇠고기의 무게는 200g, 모두 국내산이다. 그런데 이 곰국시 3종세트의 가격이 6000원이다. 식사 끝내고 계산하는 손님들이 저렴한 가격을 재차 확인하면서 내심 놀라는 눈치다. 맛도 훌륭하고 양도 푸짐한데 단돈 6000원이라니 믿기 어려울 수밖에.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이 집의 옥호가 ‘우주미’인 것은. 알고 보니 우주미란 ‘우리 주인이 미쳤어요’라는 말의 머리글자를 조합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종업원들이 손님에게 본전 생각 안 하고 마구 퍼주는 주인을 빗댄 말에서 나온 이름이란다. 아닌 게 아니라 주인장이 미치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가격이 파격적이었다. 저렴한 음식은 곰국시뿐만이 아니었다.

  이 곰국시 국물에 약간의 된장과 껍질 벗긴 들깨가루로 맛을 낸 소고기보신탕도 6000원이었다. 파와 깻잎과 들깨가 충분히 들어간 소고기보신탕은 맛과 성상이 보신탕이되, 들어간 고기가 개고기가 아닌 쇠고기다. 고기가 소라는 점만 빼고는 완전히 보신탕의 그것이었다. 브리지드 바로드가 와서 먹어봐도 맛있다고 칭찬할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최소한 이 집에서는 보신탕에 대한 안 좋은 추억은 깨끗이 잊어도 좋다.

 

 

 

 

“가족 이산의 아픔, 곰국으로 씻을 터”


  <우주미>의 주인장 송지훈(44) 씨를 만나보니 아주 멀쩡했다. 아니 누구보다 정신 건강이 건전한 대한민국의 시민이고 외식경영인이었다. 그런 그에게도 아픈 과거가 있었다. 그가 5살 때 부모님이 이혼 해 어머니가 어린 두 동생을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가고, 송씨는 외할머니와 살았다. 아직 철이 들기도 전에 엄마 아빠의 기운을 쐬지 못하고 외할머니의 손에서 컸던 것이다.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부친과 MBC방송국 아나운서 출신의 활동적인 ‘신여성’이었던 모친의 의식 사이에는 서로 좁힐 수 없을 만큼 간극이 너무 넓었다.

  비록 이혼해 부부로서의 연은 끊었지만 송씨 부모님은 서로 간에 인간적인 정리는 지켜나갔다. 모친이 1년에 한 두 번씩 귀국하면 아버지를 비롯해 온 가족이 함께 모여, 가족 간의 정을 나누고 아버지와 어머니로서의 사랑을 보여주었다. 송씨는 이후 고교 시절에 한국을 떠나 일본으로 가서 어머니와 동생들과 합류한다. 일본에서 고교와 대학을 나와 호주에서 생활을 하던 그는 아버지의 정이 그리워 2000년에 다시 한국에 들어온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송씨의 부친은 환갑도 채 안 된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부친이 돌아가시자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의 고향에서 올라온 사촌들을 만난다. 초면인 사촌들은 ‘숙부는 잃었지만 사촌형제를 얻어서 기쁘다’는 말을 하였다. 갑자기 나타난 생면부지 사촌들의 등장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들의 위로와 따뜻한 가족애에 깊은 감동을 받은 그는 ‘한국의 정과 피붙이문화’에 대해 희미하게나마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한국에 정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LED 관련 무역업을 하다가 일본 거래선과의 불협화음으로 큰 손해를 보고 몇 해 전에 접었다. 그 후 새로운 사업을 모색하던 중 신촌 ‘아저씨네 낙지찜’ 유민수 대표를 만나 곰국시 등의 메뉴와 식당 경영방법 등을 배워 지금의 <우주미>를 열게 된 것.

  “요즘 새벽 2시에 일어나 곰국을 끓일 때면 아버지 생각이 납니다. 아마 외로우셨을 거예요. 제게도 지금 7살짜리 아들이 있거든요. 조금만 더 사셨으면 제가 만든 이 곰국물을 아버지께 맛보여드릴 수 있었을 텐데 아쉽습니다. 하늘에서도 열심히 사는 제 모습 보시면 기뻐하시겠지요?”

 

그러고 보니 필자도 부모님 뵌 지가 가물가물하다. 이번 주말에는 아무리 바빠도 시간을 내서 부모님 모시고 뜨거운 곰국시에 수육 한 점 해야겠다. 02-354-7788

 

 


<출처> 2011. 3. 28 / 조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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