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첩첩산중’ 겨울풍경 삼척
바람을 품고도 거침없이 솟았구나
박경일 기자
▲ 삼척 준경묘에 장쾌하게 솟은 금강소나무들의 위용. 이렇듯 힘차게 솟아 수백년의 시간을 지탱해왔던 준경묘의 소나무는 베어진 뒤에도 경복궁이나 남대문의 들보가 돼서 역사를 떠받치게 된다.
차가운 겨울 한가운데를 걸어 소나무들이 힘차게 도열한 숲으로 갑니다. 깊어가는 겨울의 소나무 숲에서는 알싸한 박하향이 풍깁니다. 강원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의 준경묘. 조선 태조 이성계의 5대조인 이양무 장군의 묘소로 알려진 곳입니다. 가파른 시멘트 포장도로를 숨이 턱에 차서 넘어가면 이윽고 부드러운 흙길이 시작됩니다. 그 길에서는 한아름이 넘는 굵은 금강소나무들이 마중을 나옵니다. 사실 그곳에서는 희미한 역사에 대한 감회보다는, 오히려 거칠 것 없이 시원스레 뻗은 금강소나무 군락에서 느껴지는 상서로운 기운이 마음을 붙잡습니다. 굳이 피톤치드 얘기를 꺼내지 않더라도, 이 금강송 숲길을 마주보거나 걷는 것만으로도 마음과 몸에 시원한 바람이 지나는 것 같습니다.
삼척은 겨울의 서정으로 가득한 여행지입니다. 삼척이라면 가장 먼저 바다를 연상하겠고, 삼척 겨울바다의 매력도 빼어나지만 첩첩 산중을 이룬 내륙의 정취도 그에 못잖습니다. 준경묘의 금강소나무 숲에 마침 함박눈이라도 내린다면 흰 눈에 소나무의 붉은 둥치와 짙푸른 녹색이 어우러져 환상적인 풍경을 그려낼 것이고, 통리역에서는 태백선 열차가 험준한 고갯길을 갈지(之)자의 스위치백 구간을 헐떡거리며 넘어가는 풍경도 만날 수 있습니다. 이곳에는 곧 철도터널이 뚫릴 예정이어서, 열차가 스위치백 구간을 운행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시간도 한 해가 채 남지 않았습니다.
여기다가 산촌마을의 투박한 너와집을 지나 427번 지방도로에 오르면 길가에 넓게 펼쳐지는 호밀밭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사방은 겨울의 황량한 무채색으로 가득한데 호밀밭에서는 이제 막 푸릇푸릇한 새싹이 돋고 있었습니다. 다 얼어붙는 혹독한 추위에도 호밀 새싹이 밀어내는 진초록빛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겨울이 깊어질수록 호밀밭은 초록빛으로 반짝이며 이국적인 풍경을 선사할 것입니다.
427번 지방도로를 따라 상마읍, 중마읍, 하마읍마을을 지나면 삼척의 바다에 당도하게 됩니다. 겨울바다의 정취야 동해안 어디고 다 비슷하겠지만, 어쩐지 삼척의 바다가 겨울에 더 가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원평, 궁촌, 부남, 덕산, 맹방, 한재밑, 오분…. 해안선을 따라 줄줄이 이어진 해수욕장들은 적막하면서 쓸쓸한 바다의 짙은 냄새를 품고 있습니다. 새천년해안도로를 달리며 파도가 해안을 때리면서 만들어낸 흰 거품으로 가득한 바다를 내려다보는 정취도 빼놓을 수 없겠지요. 겨울의 서정으로 가는 길. 바로 삼척으로 향하는 길입니다.
능선 휘감은 열차의 느릿한 뒷걸음…
시간 멈춰선 마을엔 애잔함만 흘러
자연과 역사를 품은 ‘삼척 겨울풍경’
▲ 삼척시 도계읍 신리의 너와집에서는 첩첩산중에 들어 터전을 이뤄 살던 옛 화전민들의 고단한 삶이 읽힌다.
▲ 강릉을 출발한 청량리행 영동선 열차가 나한정역에서 갈 지(之)자 형태의 스위치백 구간을 따라 후진하면서 힘겹게 고개를 넘어가고 있다. 내년 이곳에 솔안터널이 개통되면 스위치백 구간은 걷히게 된다.
# 금강 소나무의 위용이 주는 감격
순수혈통의 금강소나무의 우람한 위용을 가장 감격적으로 느낄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강원 삼척의 준경묘다. 강원 평창의 대관령에도, 경북 울진 소광리에도 붉은 수피의 금강소나무들이 도열해 있는 풍경을 만날 수 있지만, 준경묘의 소나무에게서는 유독 힘찬 기운과 건강함이 느껴진다. 이곳의 소나무들을 특별하게 하는 것은 하늘을 찌를 듯한 큰 키다. 대관령이나 소광리의 소나무들이 건장한 것들은 베어져나가고 남은 것들만 있다면, 준경묘의 소나무는 비록 수령은 200년 안쪽으로 짧긴 하지만, 순수혈통 그대로 손대지 않은 건강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이곳에서는 그저 솔 숲에 드는 것만으로도 숲의 건강함이 몸안으로 스미는 듯하다.
준경묘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5대조인 이양무 장군의 묘소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곳이 진짜 묘소인지는 사실 명확하지 않다. 조선 건국 직후 태조는 물론이거니와 태종, 세종 등 역대 왕들이 이 묘소를 찾으려 노력했으나 찾지 못했다. 예나 지금이나 새로운 변혁의 시기이거나, 위기의 시대에 정권의 정통성을 부여해 주는 기본과 ‘뿌리’를 찾는 법.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나 태종 이방원이 조상인 이양무 장군의 묘소를 찾아나섰던 것은 당연하겠다.
한글 창제 후 조선왕조의 창업을 기리기 위해 ‘용비어천가’를 지었던 세종도 이양무 장군의 묘소를 찾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던 모양이다. 그러다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침략으로 나라의 명운이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태로웠던 고종 때서야 비로소 이양무 장군의 묘소를 찾아내고 ‘준경’이란 묘이름을 붙였다.
600여년 동안 찾지 못했던 묘를 단박에 찾아냈다는 점이 영 미덥지 않긴 하지만, 묘소 앞에 서면 좌청룡 우백호의 선명한 지세와 함께 거칠 것 없이 시원스레 뻗은 금강소나무 군락에서 대번에 상서로운 기운을 느낄 수 있다.
# 시간과 역사를 받치고 선 소나무 군락
전북 전주에 뿌리를 내리고 살았다던 이양무가 어찌 이렇듯 삼척의 첩첩산중에 묻혔을까. 그건 바로 이양무의 아들인 이안사(목조) 탓이다. 이안사는 전주에 새로 부임한 산성별감이 자신이 사랑하던 기생에게 수청을 들게 하자 크게 싸웠다. 이 때문에 별감이 이안사의 일가를 해하려 하자, 이를 피해 외가가 있던 머나먼 강원 삼척땅으로 숨어들었다. 그런 와중에 아버지인 이양무가 숨을 거뒀다. 이안사는 삼척 일대를 헤매며 묏자리를 찾다가 도승으로부터 길지를 점지받았다. 도승은 “소 100마리를 잡고 황금관을 함께 묻어 묘를 쓰면 5대 후에 왕이 나올 자리”라고 했다. 이에 이안사는 소 100마리 대신 백(百)자를 흰 백(白)자와 한 일(一)자로 파자(破字)해서 흰(白) 소를 한(一)마리 잡고, 황금관 대신 귀리짚을 감싸 장사를 지냈다고 전한다.
사실 준경묘는 이런 희미한 역사의 흔적보다 소나무의 위용이 더 마음을 끄는 곳이다. 준경묘를 찾아가려면 1.8㎞의 숲길을 걸어들어가야 한다. 초입 800m 정도는 낙엽을 다 떨군 활엽수림의 가파른 시멘트도로다. 숨이 턱에 닿을 무렵에 부드럽고 평탄한 흙길이 시작된다. 여기서부터 한두 그루씩 모습을 보이는 소나무 둥치의 굵기에 압도된다. 이윽고 준경묘에 이르러 빽빽한 군락을 이룬 소나무들을 마주치면 그 위용에 감동마저 느껴질 정도다. 소나무들 사이로 묘역이 모습을 드러낼 무렵, 오른편 흙계단 위에 유독 늘씬하게 뻗은 미인송이 있다. 속리산 정이품송의 품종보전 교배용으로 전국을 뒤진 끝에 찾아낸 우리나라 최고의 소나무다. 이 소나무의 수술 꽃가루를 정이품송 암술에 뿌려 얻은 2세 소나무 200여그루가 충북 보은의 산림과학원에서 자라고 있단다.
어디 미인송뿐일까. 준경묘를 둘러치고 있는 순수혈통의 소나무는 역사의 기둥이라 부름 직하다. 고종 때에는 경복궁 중건 때 쓰였고, 지난해 베어진 21그루는 남대문의 들보가 돼서 앞으로 수백년 동안 국보를 받치고 서게 된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의 5대조를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을 받치고 서 있었던 이곳의 소나무는 베어져서도 역사를 버티고 서게 된 셈이다.
# 쇠락해가는 것들을 정면으로 마주하다
삼척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38번 국도에서 만나는 영동선 열차의 수위치백 구간이다. 스위치백이란 가파른 산악지대에 갈지(之)자로 선로를 놓아 열차가 전진과 후진을 거듭하면서 능선을 넘어가도록 만든 선로. 지금이야 곳곳에 터널이 뚫리는 세상이니 지형극복을 위한 스위치백 선로는 구시대의 낡은 길이 됐지만, 한때 스위치백은 최첨단의 기술로 인정받았다. 중년 이상이라면 학창시절 국토지리 시간에 스위치백 구간을 달달 외웠던 기억이 선명하리라. 강릉 정동진의 해돋이를 보러 청량리에서 출발하는 밤열차를 타본 청춘들에게는 열차의 진행방향이 몇번이고 바뀌었던 것으로 이 구간이 기억되겠다.
영동선의 스위치백은 삼척시 도계읍의 나한정역에서 흥전역 사이에 설치됐다. 38번 국도로 삼척 시내에서 태백 쪽으로 향하다가 나한정 역을 지나 언덕마루에 오르면, 열차가 역구내로 들었다가 속도를 줄인 뒤 뒷걸음질로 언덕을 넘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후진으로 힘겹게 언덕을 넘어간 열차는 다시 정방향으로 진로를 잡아 흥전역을 지나 태백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이곳의 스위치백 구간은 곧 걷히게 된다. 연화산을 똬리처럼 감고 도는 국내 최장 터널인 솔안터널(15.2㎞)이 개통되면 스위치백 구간과 함께 통리역, 심포리역, 나한정역과 같은 산골의 작은 역들도 모두 폐쇄된다. 솔안터널의 개통이 내년말쯤이라니 스위치백 구간의 생존연한도 1년이 채 남지 않았다.
터널이 개통되면 선로는 단축되고 열차 운행시간도 짧아지겠지만, 사라지는 것들은 늘 아쉬움을 동반하는 법. 사실 이쪽의 산간에서는 고단했던 탄광마을도, 누추했던 산촌마을의 살림살이도 사라져 가고 있다. 탄광이 호황을 누릴 때는 흥청거렸다던 도계읍도 을씨년스러운 소도시의 풍경으로 변한 지 이미 오래다. 사실 스위치백 구간을 찾아가본대도 이미 그것은 새로운 볼거리나 멋진 풍경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곳을 찾아가는 것은 쇠락하는 것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애잔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 초록의 들판을 지나 싱싱한 바다풍경까지
삼척시가 관광명소로 꼽는 도계읍의 신리 너와마을. 너와로 지붕을 올린 집은 300년이나 됐다지만, 사람사는 훈기가 없으니 복사꽃이며 앵두꽃이 피는 봄이라면 모를까, 겨울에는 을씨년스럽기 그지없다. 이쪽에서는 너와집보다는 427번 지방도로를 따라가는 길이 훨씬 더 권할 만하다.
도계 쪽에서 삼척시 쪽으로 향하면 상마읍리, 중마읍리, 하마읍리를 지나게 되는데, 이쪽에서 볼 것은 초록의 호밀밭이다. 겨울의 칙칙한 무채색으로 가득한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상마읍리에 이르러 왼편으로 초록의 들판이 나타난다. 호밀이 이제 막 싹을 틔워 널찍한 구릉이며 밭들이 연초록으로 물들어가고 있다. 이제 막 싹을 틔웠지만, 겨울이 더 깊어지면 매서운 추위에도 호밀밭은 초록이 더 짙어지게 된다.
이곳에 심어진 호밀은 재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소의 먹이로 쓰기 위한 것. 마을 집집마다 소를 키우고 있어 저마다 가을걷이가 끝난 밭에 호밀을 심고 겨우내 길러낸다. 초록으로 물든 들판은 다른 계절이라면 눈길도 주지 않을 풍경이겠지만, 겨울철에 펼쳐진 초록의 빛깔은 탄성을 지르게 한다.
이 길을 따라가면 삼척의 바다에 닿게 된다. 사실 바다라고 다 같은 바다는 아니다. 여름의 바다는 대개 비슷한 색깔이지만, 겨울의 바다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같은 동해를 끼고 있더라도 속초의 바다와 강릉의 바다, 삼척의 바다가 저마다 다르다. 속초의 바다는 오래 써서 닳은 느낌이고, 강릉의 바다는 둔탁하고 무딘 느낌이다. 겨울철과 가장 잘 어울리는 바다라면 동해 북단 고성의 거친 바다다. 그러나 아직 겨울의 절정에 도달하지 않은 이즈음에는 삼척의 바다가 단연 매력적이다.
삼척에서 아름다운 겨울바다 풍경을 따라가는 길이 바로 정라항에서 삼척해수욕장까지 4.6㎞를 잇는 새천년해안도로다. 삼척시가 2000년 1월 새로 놓은 해안도로인데, 아름다운 풍경을 염두에 두고 놓은 길이니만큼 낭만이 물씬 느껴진다. 말끔히 단장된 새천년해안도로는 마치 당의정처럼 단맛의 깔끔한 낭만이 느껴진다. 곳곳에 주차장이 설치된 전망대와 조각공원도 잘 정비돼 있어 곳곳에 차를 세워두고 겨울바다의 풍경을 바라볼 수 있다. 겨울바다의 바람이 매섭다면 정라항의 식당들에서 저마다 내놓는, 이즈음 제철을 맞은 뜨끈한 곰칫국으로 몸을 덥히는 것도 좋겠다.
가는 길 - 묵을 곳 & 먹을 것
영동고속도로를 따라 강릉까지 가서 동해고속도로를 타고 동해나들목에서 나간다. 7번 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 삼척 못미처 단봉삼거리에서 38번 국도로 우회전, 미로면 소재지 지나 10여분 오르면 오른쪽으로 영경묘 입구가 먼저 나온다.
영경묘는 이양무 장군의 부인 묘다. 영경묘 입구를 지나쳐 38번 국도를 따라 더 가면 천기1교 건너자마자 준경묘로 드는 길이 나온다. 여기서 우회전해 4㎞ 들어가면 준경묘 입구에 작은 주차장이 있다. 차를 세우고 맞은 편 산길을 1.8㎞ 걸어오르면 준경묘다. 왕복 1시간 30분쯤 걸린다. 영경묘는 차를 세우고 200m만 걸어들어가면 된다.
바닷가 쪽에서 묵을 것인지, 산촌마을에서 묵을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바다풍경을 보고 싶다면 새천년해안도로 인근의 숙소를 찾아보자. 호텔 펠리스가 가장 손꼽히지만, 비용이 부담스럽다면 새천년해안도로변에 횟집과 민박을 겸하는 곳을 찾아봐도 좋겠다. 민박 요금은 4만~5만원선. 산촌마을에서 묵겠다면 도계읍 신리 너와마을 인근의 산목련펜션(033-553-3229)을 추천한다.
삼척의 횟집으로는 새천년해안도로의 평남횟집 펠리스호텔점(033-572-8851)을 추천할 만하다. 제철을 맞은 곰칫국은 정라항의 바다횟집(033-574-3543)이 원조 중의 원조로 꼽히는 맛집이다.
<출처> 2009. 12. 16 /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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