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강의 백미 동강(東江)
얼지도 울지도 않는다… 그저 침묵하고 흐를뿐…
박경일기자
▲ 백운산 칠족령에 올라 내려다본 동강의 물굽이. 까마득한 붉은 직벽을 진초록의 강물이 굽어흐르는 동강의 풍광은 시야를 가린 나무들이 이파 다 떨군 겨울에야 비로소 진면목을 드러낸다.
겨울 동강에 갑니다. 혹한에도 얼지 않는 힘찬 여울, 벼랑 사이를 유연하게 굽이치는 물길, 고요한 강변에서 물오리 푸드덕 날아오르는 푸른 새벽을 만나러 동강에 갑니다. 묵은 텃밭과 빈집이 늘어가는 강변마을의 굽잇길을 지나서 겨울 강을 찾아갑니다.
겨울 강의 정취라면 단연 동강입니다. 아직 추위가 채 풀리지 않아 매서운 강바람에 눈물마저 찔끔 났지만, 사실 겨울 강의 정취는 추울수록 제 맛인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압니다. 동강의 저 맑고 차가운 심장이 겨울에 더 힘차게 펄떡거린다는 것을….
겨울 동강에는 행락객들의 발길이 뜸하고, 청춘의 함성과 함께 줄지어 내려가는 래프팅의 행렬도 없습니다. 그저 새소리, 물소리로만 가득 차서 겨울의 한복판을 흘러갑니다. 강변 기슭 쪽은 얼음이 쩡쩡 얼어붙기도 했지만, 강의 한가운데는 얼지 않은 물살이 여울을 이루며 힘찬 물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강의 여울마다 햇볕을 받은 잔물결이 은박지처럼 반짝거렸고, 수확을 끝낸 강 마을의 텃밭에는 아무도 밟지 않은 눈으로 가득했습니다. 차가운 물속에서 꼬리를 흔들고 유영하는 몇 마리의 물고기들은 물론이고, 쇠락한 강 마을 풍경까지도 겨울 강의 서정적인 정취에 한몫을 해내고 있었습니다.
강변마을을 따라 난 길을 따라가면서 가까이서 들여다보는 동강의 아름다움이 서정적이었다면, 멀찌감치 물러나서 고도를 높이고 강의 굽이를 내려다보는 맛은 서사적인 풍광을 선사합니다. 문희마을에서 백운산 산길을 걸어 당도한 칠족령에서는 발아래로 크게 굽이쳐 흘러가는 동강의 힘찬 물굽이를 만났습니다.
꼭 얼음판에 올라 왁자지껄하며 썰매를 지치지 않아도, 초고추장을 준비하고 얼음구멍에 낚싯줄을 드리우지 않아도 겨울 강은 그 곁을 걷거나, 멀찌감치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아니 어쩌면 겨울 동강의 아름다움은 오히려 이런 고요함이 만들어내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고요한 겨울 강을 만나러 동강을 찾아갑니다.
절경 곳곳서 만난 ‘소박한 마을’… 숨은 보물 찾은 기분
▲ 정선에서 동강의 물길을 따라가다보면 가수리 뒤편으로 해발 1024m의 계봉(鷄峰)이 솟아 있다. 진초록의 솔숲이 펼쳐진 산자락 위로 닭벼슬처럼 펼쳐진 계봉 정상에 흰 눈이 덮여 이국적인 정취를 선사하고 있다.
▲ 문희마을 앞 동강변에서 마을 주민들이 차가운 겨울강에 들어 고기를 잡고 있다.
# 문희마을에서 만난 겨울 동강의 아름다움
동강은 영월에서 보자면 ‘동쪽의 강’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 조양강이 정선 읍내를 돌아 동남천 물줄기와 만나는 가수리에서 시작해 영월읍 남쪽에서 서강 물과 합수 하는 곳까지 50여㎞에 이르는 물길을 말한다. 동강의 물길은 차고 맑으며, 빠르고 탄력 있다. 조양강이 가수리에서 동남천과 합해지면서부터 물길은 속도를 낸다. 동강이 가장 아름다운 때는 한여름이거나 한겨울이다. 봄과 가을에도 못지않다지만, 미루나무 늘어선 초록의 여름의 동강과 적막한 강가에 눈이 내린 순백의 겨울 동강에는 아무래도 못 미친다.
동강은 빼어난 풍광을 갖고 있으되 오래도록 그 진면목이 알려지지 않았다. 동강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강으로의 접근이 어렵기 때문이었다. 거룻배로 강을 건너던 강변마을마다 시멘트 다리가 놓인 이즈음에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동강에 당도하려면 좁고 험한 길을 달려야 한다. 그 길마저도 겨울철에는 빙판이 되기 일쑤다. 겨울철 동강의 아름다움이 알려지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동강을 쉽게 만나보겠다면 강원 평창군 미탄면 문희마을을 찾아가야 하겠다. 미탄면소재지에서 42번 국도를 타고 백운리 쪽으로 향하다 물길을 따라 우회전하면서 따라가면 마하리 어름치마을이다. 민물고기생태관이 들어서 있는 여기서부터 동강을 바짝 옆에 붙이고 달리는 시멘트 도로다. 길은 잘 다듬어져 있고, 눈도 다 녹았다. 길옆의 강변에는 줄배가 매어져 있고, 그 배로 건널 수 있는 강 건너편에는 띄엄띄엄 낡은 집들이 들어서 있다. 매서운 한파에도 이쪽의 강은 연안에만 살짝 살얼음이 붙었을 뿐 물줄기는 얼지 않았다. 그 길의 막다른 끝에 문희마을이 있다. 동강의 물길이 푸근하게 내려다보이는 마을이다.
마을주민 몇 명이 강에 들어 반두를 들고 고기잡이를 하고 있다. 허리춤까지 올라오는 장화를 신은 채 강물에 들어 바윗돌을 뒤집고 족대를 들이댔다. 환성과 함께 제법 굵은 메기며 꺽지가 잡혀 올라왔다. 오늘 저녁에는 이렇게 잡아낸 물고기로 끓여낸 얼큰한 매운탕 한 그릇을 앞에 두고 마을주민들의 흥겨운 술추렴이 벌어지리라.
# 굽이치는 동강을 내려다보는 최고의 전망대…칠족령
동강의 물길이 굽이치는 모습을 만날 수 있는 가장 뛰어난 전망대가 바로 문희마을에서 오르는 백운산 자락에 있다. 문희마을을 지나 백운산 등산로로 접어들어 2㎞쯤 발품을 팔면 동강 최고의 전망이 펼쳐지는 칠족령 전망대에 서게 된다. ‘칠족령’이란 고개 건너편 제장마을에서 옻을 굽던 집의 개가 이 고개 마루턱을 넘나들며 발자국을 찍었다고 해서 ‘옻 칠(漆)’자에 ‘발 족(足)’자를 붙여 지은 이름이다.
백운산의 반대쪽 점재마을에서 오르는 등산로는 아찔한 벼랑길의 연속이지만, 문희마을의 이쪽 능선은 순하디순하다. 숨이 차오를 만큼 경사도 급하지 않고, 길도 부드러운 흙길이다. 등산로가 남쪽으로 트인 양지라 겨우내 내린 눈도 거의 다 녹았다. 그렇더라도 겨울에는 간혹 낙엽 밑으로 얼음이 버석 버석 얼어 있는 구간이 있어 조심해야 한다.
문희마을에서 칠족령까지는 40분 정도. 나뭇가지 사이로 강을 바라보며 천천히 간다 해도 1시간쯤이면 넉넉하다. 칠족령 정상 부근에 당도하면 갈림길을 만난다. 왼쪽으로는 칠족령을 넘는 길이고, 오른편으로는 전망대를 향하는 내리막길이다. 전망대 쪽으로 방향을 잡아 내려가면 까마득한 벼랑에 제비집을 매달듯 나무데크가 만들어져 있다. 워낙 고도감이 높게 느껴져 발이 후들거리는 전망대에 오르면 탄성부터 터져 나온다. 강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전망이다. 산태극, 수태극을 이룬 풍경. 오른쪽으로 멀리 흘러들어온 동강이 발아래까지 굽이쳤다가 왼쪽으로 빠져나간다. 강물은 진한 옥빛으로 빛난다. U자형으로 머리를 내밀고 있는 강 건너편의 마을에는 인적 하나 없다. 온통 눈으로 뒤덮인 강변마을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동강변의 물길과 마을을 따라 드라이브하는 맛
동강은 자연이 빚어낸 절경이 으뜸이지만, 그 강이 환기해내는 ‘고향의 정서’도 못지않다. 강변을 천천히 달리면서 마주치는 풍경이란 이런 것들이다. 미루나무가 선 여울목의 자갈밭. 함석지붕에 흰 눈을 이고 있는 낡은 옛집. 강 이쪽과 저쪽에 줄을 매서 오가는 줄배…. 이런 풍경들은 강에서 유년시절을 보내지 않았던 사람들에게조차 금세 ‘고향의 정서’를 환기한다. 누구나 마음이 품고 있는 이상향으로서의 고향을 동강의 마을들은 그대로 풍경으로 그려 보여준다.
동강 마을의 정취를 느긋하게 바라보면서 달릴 수 있는 길이라면 정선읍 광하교 아래에서 시작해 예미리까지 이어지는 강변길이다. 도로번호조차 붙여져 있지 않지만, 이 길은 조양강이 동강으로 이름을 바꿔 흘러가는 물길을 따라가는 최고의 강변길이다. 광하교 밑 강변길로 들어서면 귤암리와 나팔봉을 지나기까지는 조양강이다. 동남천이 합수되는 가수리에서 물길은 비로소 동강이란 이름을 얻는다. 가수리에서는 왼편으로 산 정상에 흰 눈을 두르고 있는 계봉이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계봉을 지나 운치리까지 이르는 길에서는 건너편의 수직절벽 밑을 감돌아 흐르는 물줄기와 커다란 소의 고요함이 어우러지는 풍경을 만날 수 있다. 다만 해가 일찍 넘어가는 응달쪽의 도로에는 군데군데 얼어 있어 운전에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운치리에서 고성분교로 넘어가는 고갯마루 부근에는 숨겨진 전망대가 있다. 차를 대고 희미한 등산로 자취를 더듬어 찾아가면 10분여 만에 깎아지른 절벽 위에 당도한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면 촛농처럼 흘러내린 백운산 능선 끝자락을 휘감고 도는 동강의 모습을 대할 수 있다. ‘절경’이란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것이겠다.
운치리에서 고성분교를 향하다 우회전해 들어가면 강물에 깎이고 깎여서 물방울 모양이 된 땅으로 들어설 수 있다. 백운산 등반의 기점인 제장마을이다. 제장마을에는 옛 주민들은 다 떠나고 몇 곳의 민박집들만 남아있다. 이곳에서 보아야 할 것은 사방을 둘러친 붉은 절벽과 그 아래를 흘러가는 물길, 그리고 겨울 강의 적요함이다.
가는 길
문희마을을 가자면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새말 나들목으로 나와 국도 42호선을 타고 방림, 평창, 창리삼거리를 지나 미탄을 지난다. 미탄에서 정선으로 가다가 기화리 쪽으로 좌회전하면 외길로 한탄교, 마하교, 진탄나루를 지나 문희마을에 가닿는다. 조양강부터 동강에 이르는 강변길을 드라이브하려면 일단 미탄에서 42번 국도로 정선 쪽으로 비행기재를 넘어 광하교를 건너자마자 좌회전해 물길을 따라 나 있는 도로를 따라가면 된다. 이 길을 계속 따라가면 귤암리와 가수리를 지나고 나리소를 거쳐 고성분교장까지 동강의 강변길이 계속 이어진다.
묵을 곳 · 먹을 것
문희마을에서는 우문제씨의 문희농박(033-333-9435)을 비롯해 동강산장(033-333-9509), 두룬산방(033-334-0920) 등에서 묵을 수 있다. 제장마을에는 동강킴스캐빈(033-378-8844), 정희농박(033-378-3838)이 있고 운치리에는 상구민박(033-378-3738)이 있다. 가수리에도 향원 황토펜션(033-563-3303), 여유펜션(033-562-5730) 등이 있다.
먹을거리로는 평창군 미탄면 창리의 대림장(033-332-3844)을 추천한다. 한때 막국수로 명성을 날리던 곳인데, 정작 막국수보다는 게장백반(9000원)이 훨씬 뛰어나다.
산골마을에서 게장을 내놓는 것이 좀 의외이긴 하지만, 포항이 고향인 주인아주머니가 무쳐서 내놓는 고추장 게장무침과 간장게장이 입맛을 돋운다. 양념을 아끼지 않고 만든 푸짐한 반찬들도 일품인데 특히 알싸하게 담근 갓김치 솜씨가 빼어났다. 동강을 둘러본다면 미탄면은 꼭 지나쳐가는 곳이므로 일부러라도 이곳에서의 식사를 염두에 두고 시간을 맞춰서 움직이는 게 좋겠다.
<출처> 2010. 1. 29 /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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