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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충청북도

충북 영동, 국악의 향기 그윽한 난계 박연(蘭溪 朴堧)의 고향

by 혜강(惠江) 2009. 11. 13.

 

충북 영동

 

국악의 향기 그윽한 난계 박연(蘭溪 朴堧)의 고향

 

·사진 남상학

 

 

 

 

 

   영동군이 국악의 고장임을 아는 외지인은 많지 않다. 오늘날 영동군이 국악의 고장으로 자리 잡은 것은 무엇보다도 난계 박연(蘭溪 朴堧, 1378~1458) 선생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영동군은 난계박연의 얼을 기려 이 지역을 국악의 메카로 가꾸어 세계의 음악인들이 한국의 전통음악을 듣고 보고 느낄 수 있도록 성례지화 하였다.

  이곳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 일대에는 난계사를 중심으로 난계묘소와 난계생가, 그리고 난계국악박물관과 국악기 제작촌이 있어 난계로 인해서 파생된 국악의 모든 것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국악의 고장으로 꾸몄다.  

  고려 우왕 3년에 심천면 고당리에서 태어난 박연은 그의 정원에 난초가 많았기 때문에 ‘난계’라는 호를 사용했고, 석경·편경 등의 아악기를 만들고, 향악·아악·당악 등의 악보와 악기, 악곡을 정리한 인물로 우륵, 왕산악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악성으로 꼽힌다.

  난계 박연 선생은 고려우왕 4년인 1378년 8월 20일 이곳에서 출생 태종5년(1405년)인 28세에 생원이 되었고, 34세(1411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교리, 관습도관제조, 악학별좌, 대제학 등을 역임 후 세조 2년(1456년)에 삼남 계우가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되어 화를 당할 뻔하였으나, 세 임금에 봉직한 공으로 화를 면하고 관직에서 물러나 이곳으로 돌아와 살다가 세조4년(1458년)3월 23일 81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난계생가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00년 5월 안채(11.8평), 사랑채(6.6평)를 학술용역을 근거로 복원하였다. 생가의 평면은 정면 3칸 측면은 전후퇴가 있는 겹집에 전면퇴에는 우물마루를 설치하고 한켠에는 부엌과 곡식창고를 부설한 고미반자에 우진각의 기와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부속채는 1동으로 외양간, 광과 방1칸인 초가지붕으로 되어있다.

 

 

 

 


난계사=난계사당

  지방기념물 제8호인 난계사당은 난계 박연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1973년에 건립하였다. 난계사당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엔 지방기념물 제75호 박연 선생의 묘소가 있고, 난계사당 바로 옆엔 밀양 박씨 후손들이 난계 선생을 비롯 6위의 위패를 모신 세덕사가 자리잡고 있다.


  경내엔 신도비와 쌍청루ㆍ어서각ㆍ묘선재각ㆍ삼효각 등이 있다. 또한 주변에는 호서루ㆍ옥계폭포가 있어 관광과 역사기행을 겸할 수 있다.  난계사당은 다른 사당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사당으로 들어가는 길과 사당 내의 잔디밭 등의 아주 깔끔하고 단정하게 잘 정비되어 있다.

 

 

 



난계국악박물관과 난계국악기제작촌, 그리고 국악기 제작촌(043-740-3229)    

 

  난계국악박물관에서는 국악의 변천(국악의 연표)과 난계의 삶과 업적, 한국인과 한국음악, 국악기의 이해, 국악기전시, 국악기 체험장, 터치스크린 등 교육의 장 활용하고 있다. 그리고 가야금을 비롯한 현악기 14종, 타악기 37종, 관악기 19종 등 다양한 국악기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옆에는 우리나라 유일의 국악기제작촌이 이웃해 있다. 이 국악기제작촌은 예술적 혼을 계승 발전시키고, 국악기제작을 통하여 국악의 발전과 국악기의 계승, 보존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곳에선 가야금, 거문고, 아쟁, 북, 장구, 소고, 대금, 단소 등의 제작과정을 지켜보거나 직접 만들어 기념품으로 챙겨갈 수도 있다. 또한 주변에는 옥계폭포, 세덕사, 호서루, 선지당, 심천유원지 등 명소가 있다.  

 



* 난계국악박물관 *


* 난계국악박물관 내에 전시된 연주장면과 악기들 *

 

* 박물관 길 건너에 있는 난계국악기체험전수관(상)과 조형물(하) *  


* 난계국악기 제작촌(상), 악기를 제작하고 있는 모습 *

 

* 난계국악기 제작촌 앞 뜰에 설치한 북 *

 

 

 

옥계폭포와 관어대(觀魚臺)

 

 

  난계국악박물관 근처 월이산 기슭에는 충청도 폭포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웅장하다는 옥계폭포가 있다. 높이 20여m의 깎아지른 듯한 단애(斷崖)를 타고 마치 명주자락을 드리운 듯한 물줄기가 흘러내리고 있다. 이곳에 서면 그 옛날 나계 선생이 낙향하여 이곳에서 대금을 구슬픈 가락으로 취주하였던 오백여년전의 숨결과 가락이 아직도 남아 있는 듯하다 갈수기여서 흐르는 물의 양은 많지 않았으나 가지런히 쏟아지는 폭포수의 물소리가 아련하다.

  옥계폭포 아래에는 우렁쌈밥정식과 우렁 돌구이를 내놓는 폭포가든(043 -742 -1777)이 있다. 이 식당은 각종 채소와 우렁이를 고추장으로 양념한 뒤 곱돌그릇에다 구워낸 우렁돌구이가 특히 입맛을 돋운다. 


* 충청도 폭포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웅장하다는 옥계폭포 * 

 

 

  기호리에서 금강의 다리를 건너 금정리로 가는 길목에 관어대(觀魚臺)가 나온다. 영동군 향토유적 제3호 관어대는 심천리 약목리와 금정리 도로변 강가 벼랑끝에 우뚝 서 있다. 깎아지른 듯한 벼랑과 우거진 소나무 사이로 바람이 지나치는 정자가 그곳에 있었다. 조선중기 영동 출신 학자인 석계(石溪) 민욱이 그 아우 민성과 더불어 이곳에서 놀며, 아래 위로 고기가 노는 모양을 장난하며 보았기에 이름을 관어대라 했다고 안내판에 적혀 있었다.

  민욱은 영동출신으로 박사종, 조헌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으로 조헌의 순의비를 세우고 회곡서원을 설립하여 박연, 박사종을 제사 지냈다. 건물 구조는 목조기와 집으로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의 누각인데 "관어대"란 현판을 민병석이 직접 쓴 글씨로 그는 조선말 서화에 능한 문신이었다. 민씨 후손인 병익의 시 한 수(首)를 읽노라면 어느 덧 옛 선인들의 정취에 젖고만다.

   영동의 서남에서 제일의 망루니
   웅장한 하늘이 이 땅에 별천지를 열었구나
   금정리 아침햇살에 물고기는 뛰고
   어류산 저녁노을에 백로는 돌아온다.
   고개 들어 구름을 보니 종조의 은혜로움을 잊었었나니,
   정자에 오른 묵객들은 그런 까닭으로 술잔을 기울였다네.
   선조의 유적은 반 천년이나 되었건만
   오고 가는 세상사에 유유자적 어부가 돌아온다. 


    二水西南第一望(이수서남제일망)
    天莊此地別天開(천장차지별천개)
    錦汀朝日銀鱗躍(금정조일은린약)
    尼岫斜陽白鷺來(니수사양백로래)
    俯仰雲仍忘從履(부앙운잉망종이)
    登臨墨客故停盃(등임묵객고정배)
    祖先遺跡半千歲(조선유적반천세)
    往事悠悠漁父回(왕사유유어부회)


     - 孫丙益謹題(후손병익근제)


  민석계선생의 후손이신 병자익 선생이 지으시고 쓰셨다.

 

 

* 관어대와 안내판 및 현판, 그리고 관어대에서 바라본 강물 *



 저물녘 금강변의 작은 정자 관어대에 오르면 석양에 강물이 물고기의 비늘처럼 잘게 부서진다. 그 강변을 따라 구불구불 나있는 505번 지방도로를 따라가면 강 건너 적벽에 단풍이 물든 풍경도 만날 수 있다. 그 길에서는 굽이를 돌 때마다 물새들이 퍼드덕 날아오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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