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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충청남도

부여 부소산, 백제의 흥망성쇠를 간직한 역사의 보고(寶庫)

by 혜강(惠江) 2009. 5. 8.

 

부여 부소산


백제의 흥망성쇠를 간직한 역사의 보고(寶庫)

 

- 낙화암 절벽 아래 쓸쓸히 앉은 고란사 - 

 

 

글·사진 남상학

 



 

* 부소산성 표지석 *

 

 

  부여는 공주와 함께 백제문화의 흔적들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다. 좋은 의미에서 부여는 완성된 백제의 문화모습을 보여주면서, 한편으로는 백제 패망의 아픔도 고스란히 전해 준다. 부여에는 왕궁지와 수많은 불교유적, 왕릉유적, 그리고 부소산과 궁남지 등 발전했던 백제문화가 밀집되어 있다. 


  그러나 이곳에는 이같이 화려한 백제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낙화암의 백제여인들이나 황산벌에서 산화한 한맺힌 백제 최후를 지킨 영령들의 숨결도 함께 살아 있기 때문이다. 나당연합군의 말발굽 아래 무참히 도륙 당하고 치욕적인 굴복을 겪어야 했던 백제 최후의 현장인 부여.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부소산에 올라 백마강을 바라보며 백제의 애환을 노래한다. 나는 부여방문의 첫걸음으로 먼저 부소산을 찾기로 했다. 

 

  부소산(扶蘇山) 은 부여 시가지 바로 북쪽에 여느 동네 뒷산처럼 나지막하게 자리 잡고 있다. 해발 106m로 그리 높지 않지만 북쪽은 가파르고 백마강과 맞닿아 있고 백마강이 산의 동서쪽으로 돌아 흐르고, 남쪽은 완만하여 앞쪽에 시가지를 이루고 있다. 산에 오르고 나서야 부여가 한 나라의 도읍이 될 수 있었던 사정을 느끼게 해 준다. 백제의 성왕이 웅지의 뜻을 펴고자 웅진(지금의 공주)에서 도읍을 옮겼던 사비성 부여. 123년간 백제를 지켜왔던 힘이 바로 부소산에 있다. 부소산은 백제의 흥망성쇠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역사의 보고이자 신성감마저 감도는 웅지의 터였다.

 

 

* 부소산 종합안내도(상)과 정문에 해당하는 사비문(아래) *

 

 

부소산성

 

  부소산에는 산을 빙 둘러쌓은 산성이 있다. 『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사비성, 소부리성(所扶里城)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우리는 부소산성이라 부른다. 토성인 부소산성은 사비시대의 도성(都城)으로 백마강 남쪽 부소산을 감싸고 있다. 부소산성의 축조 시기는 웅진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수도를 옮기던 시기인 백제 성왕 16년(538)에 왕궁을 수호하기 위하여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동성왕 22년(500)경에 이미 산 정상을 둘러쌓은 테뫼식(머리띠를 두르듯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쌓은 모습) 산성이 있던 것을 무왕 6년(605)경에 포곡식(包谷式:산 능선과 골짜기의 자연지형을 따라 쌓은 모습)이 혼합된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한 것으로 짐작되어 백제 성곽 발달사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지금도 부소산에는 곳곳에서 부소산성의 자취를 볼 수 있다. 지금은 나무가 자랐지만 좌우 지형의 높이가 확연하게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산성은 군창지와 영일루를 중심으로 840m 테뫼식 산성이고, 군창지에서 반월루를 거쳐 사자루를 향해 골자기를 감싸며 1,655m의 포곡식 산성이 부소산을 크게 둘러싸고 있다.  ‘부소’는 소나무라는 뜻인데, 성곽을 따라 이어진 소나무 숲길인 토성 산책길은 부소산성의 진가를 발휘한다. 부소산 능선과 골짜기를 따라 약 2.5㎞ 길이로 조성돼 있다.

 

 

* 부소산을 빙 둘러싸고 있는 산성의 흔적 *

 

 

삼충사

 

  나는 부여관광안내소에서 부소산성의 안내책자를 받아들고 정문격인 사비문을 들어선다. 우선 매표소를 지나 산성 안으로 들어가면 길이 양 갈래로 나뉜다. 대개 삼충사 쪽으로 길이난 오른쪽부터 산책을 시작한다. 삼충사(三忠祠: 도문화재자료 제115호)는 백제 말의 충신 세 사람(성충·홍수·계백)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957년에 세운 사당이다. 외삼문·내삼문·사우로 구성된 삼충사는 깨끗하게 잘 단장되어 있다.

 

  성충과 홍수는 백제 최고의 관직인 좌평을 지냈는데 국운이 위태로워지자 주색에 바진 의자왕에게 주색을 삼가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을 것을 건의했다가 투옥, 유배를 당한 적이 있다. 그리고 계백은 무너져 가는 조국 백제를 구하기 위하여 5천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나가 황산벌에서 장렬한 최후를 마친 인물이다. 부소산에 이들의 충절을 기리고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세운 것인데, 견학 온 대부분 학생들은 해설자의 설명을 귓전으로 흘리는 것이 안타깝다.   

 

 

* 성충, 흥수, 계백 세분의 영정이 모셔진 삼충사(중, 하) *

 

 

영일루

 

 

  삼충사를 지나 길을 오르면 영일루(迎日樓: 도문화재자료 제101호)다. 부소산 동쪽 봉우리에 자리 잡고 있는 영일루는 ‘해를 맞이하는 누각’이란 뜻인데 백제의 왕과 귀족들이 계룡산 연천봉에 떠오르는 해를 보며 국정을 구상했다고 한다. 이 건물은 고종 8년(1871)에 당시 홍산 군수였던 정몽화가 지은 조선시대의 관아문인데, 1964년에 지금 있는 자리인 부소산성 안으로 옮겨 세운 뒤, 집홍정이라는 건물의 이름을 영일루라고 고쳐 불렀다고 한다. 계단을 올라 2층으로 올라가 보았지만 나무가 우거져 지금은 떠오르는 태양을 잘 볼 수 없을 정도다.

 

  영일루의 현판글씨는 부여 출신 서예가 김기승 선생의 글씨로, ‘영(迎)’과 ‘루(樓)’의 글자는 크고 ‘일(日)’자는 작게 썼다. 이것은 산봉우리 사이에 해가 떠 있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누각 안에 걸어놓은 액자 ‘인빈출일(寅賓出日)’은 정향 조병호 선생의 작품으로 ‘삼가 공경하면서 해를 맞이한다.’는 뜻으로 서경에 나오는 말이다. 

 

 

* 영일루를 향해 올라가는 길(상), 영일루와 액자 ‘인빈출일(寅賓出日)’ (중, 하) *

 

 

군창지와 수혈병영지

 

  좀더 오르면 군창지(軍倉址)를 만나게 된다. 이곳은 백제 때 군대에서 쓸 식량을 비축해 두었던 창고터로 부소산 동쪽에 있는 부소산성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다. 군창지는 1915년 땅 속에서 불에 탄 곡식이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1981년과 1982년 두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로 건물터의 규모를 자세히 밝혀냈다. 4기의 조선시대 건물지가 '□'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아마도 백제 때부터 자리 잡은 이곳 군창지를 조선시대에도 다시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 군량미를 비축해 두었던 군창지 *

 


 조금 더 가다보니 수혈병영지가 나타났다. 선사시대의 움집과 같은 모양을 한 이 곳은 백제 병사들의 병영으로 쓰였다고 한다. 움집 바닥에는 아궁이 자리와 토기를 놓던 자리들이 구덩이 모양으로 패여 있었다. 

 

 

* 수혈병영지 *

 

 

반월루

 

 

   수혈병영지 바로 옆에는 반월루가 위치해 있는데 영일루가 동쪽에서 떠오르는 해를 볼 수 있는 곳이라면, 반월루(半月樓)는 지는 해와 달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이곳에 오르면 현재 부여의 시가지와 부여를 감싸며 유유히 흐르는 백마강이 아련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 반월루(상)와 반월루에서 내려다 본 부여시기지의 일부(하) *

 

 

궁녀사

 

   이제 부소산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사자루를 향해 발길을 옮길 차례다. 그런데 갈래길에 팻말이 서있다. 좌측길은 사자루, 낙화암, 고란사로 가는 길이고, 우측길은 궁녀사로 가는 길이란다. 궁녀사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호기심이 발동하여 우측길로 접어들어 내리막길로 향했다.

 

 궁녀사는 백제 의자왕 20년(660)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의해 사비성이 함락되던 날, 적군에게 붙잡혀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낙화암에서 꽃처럼 떨어진 삼천궁녀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965년 세운 사당이다. 사당 안 세 여인의 영정에 의문이 갔다. 천명을 하나로 쳐서 세 여인을 등장시킨 것일까 마음대로 생각하며 내려온 길을 올라 사자루로 향했다.

 

 

* 궁녀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궁녀사와 영정 * 

 

 

사자루

 

   사자루가 서있는 자리는 원래 달구경을 했다는 송월대(送月臺)가 있었던 곳이다. 영일루가 해맞이를 위한 장소였다면 사자루는 달을 보내는 장소였다. 사자루가 있는 곳은 해발 106m로 부소산에서는 가장 높아서 동으로는 계룡산, 서로는 구룡평야, 남으로는 성흥산성, 북으로 울성산성과 증산성 등이 보여 전망이 아주 좋다. 아마 백제 시대에는 망루가 있어서 부소산성의 서쪽 장대 구실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19년 임천면의 문루였던 배산루(背山樓)를 이곳에 옮겨 지으면서 사비루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사비루의 현판 글씨는 조선말 의친왕 이강공이 쓴 것이며, 당시에는 사자루라 현판하여 사자루와 사비루는 병용해서 씌였다. 편액은 기미년 (1919) 5 월에 고종의 아들인 의왕(義王) 이강(李堈)공이 썼고, ‘백마장강(白馬長江)’ 편액은 조선 말기 명필인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이 썼다.비루에는 금운(錦雲) 정순규(鄭淳圭)의 '부여회고(扶餘懷古)' 편액이 걸려 있다.

 

   百濟都城摠古丘(백제도성총고구)
   桑田碧海使人愁(상전벽해사인수)
   天政無形山歷曆(천정무형산역역)
   軍倉如夢水悠悠(군창여몽수유유)
   花落高巖千載淚(화락고암천재루)
   龍呑白馬一朝秋(용탄백마일조추)
   三忠義魄今來吊(삼충의백금래조)
   忽憶羅江競渡舟(홀억라강경도주)

    백제 도성이 모두 옛 언덕이 되었구나.

    상전이 벽해가 되었으니 시름 겨워라.
    천정은 형체도 없으나 산 모양은 역력하고 
    군창터는 꿈같지만 강물은 유유히 흐르네 
    꽃이 높은 바위에서 떨어지니 천년 눈물이요
    용이 백마를 삼키니 하루아침에 스러졌구나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의 넋을 오늘 와서 조문하니
    문득 라강을 다투어 건너던 배 생각나는구나. 
 

 

백제 도성의 패망으로 인한 슬픔이 짙게 배어 있다.

 

 

* 부소산 정상에 있는 사비루(사자루)와 사비루에서 바라보이는 풍경 *

 

 

낙화암과 백화정

  낙화암으로 접어드는 길목의 돌비에 춘원 이광수의 시 한편이 적혀 있다. 이 시에는 김대현이 곡을 붙여 가곡으로 불리곤 했다. 그렇게 부소산성과 백마강에는 시비, 노래비 몇 기로도 짐작하고 남을 만한 백제의 옛이야기가 흐르고 있다. 그래서 방문객들의 심사를 더욱 처연하게 만들어 준다.

 

 

    사자수 내린 물에 석양이 빗길 제

    버들꽃 날리는데 낙화암이란다

    모르는 아이들은 피리만 불건만
    맘 있는 나그네의 창자를 끊노라
    낙화암 낙화암 왜 말이 없느냐

 

 

   

  사자루에서 내려와 그 유명한 낙화암(落花巖)으로 향했다. 백마강과 절벽단애를 이루는 낙화암은 백제 멸망의 한이 깃든 장소이다. 백제 멸망 당시(서기 660년) 나당연합군의 침략을 받아 국토가 유린당하자 도성을 빠져 나온 백제의 궁녀들은 이곳에서  "차라리 자결할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고 백마강 푸른 물에 몸을 던졌다.

 

  낙화암은 『삼국유사』「백제고기」에 타사암(墮死巖)으로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본래 명칭은 타사암이었는데 뒷날 궁녀를 꽃에 비유하여 미화한 이름인 것 같다. 이곳은 부소산에서 가장 전망이 뛰어난 장소기도 하다. 낙화암을 제대로 보려면 백마강에서 운항되는 황포돛배를 타는 게 좋다. 

 

 

 * 낙화암 뒤 언덕에 세운 백화정 *



  궁녀들의 슬픔이 투영된 시를 읽고나서 백화정에 올라본다. 백마강을 시원하게 내려다 볼 수 있는 낙화암 정상 바위에 육각 지붕으로 세워진 백화정은 1929년 당시 이곳 군수의 발의하여 백제 멸망 당시 절벽에서 꽃잎처럼 떨어진 백제여인들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낙화암에서 떨어진 3천 궁녀는 궁녀가 아니고 대부분 쫓기던 민초와 병사라는 설이 있다. 3천의 궁녀가 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뿐더러 패배한 의자왕의 방탕을 확대하기 위해 과장시켰거나 처절한 항쟁의 결과 많은 인명이 상하고 죽어서 그렇게 부른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러나 의자왕이 그렇게 방탕한 왕이 아니었다는 설과 함께 왜곡된 역사일 것이 분명하다는 주장이 오히려 설득력이 있다. 

 

 

* 낙화암 천년송과 백화정 *

 

  백화정에 서니 문득 조선 중기의 문신 홍춘경(洪春卿, 호는 石璧, 연산군3∼명종 3) 이 백제의 옛일을 회고하면서 쓴 칠언절구의 시가 생각난다. 

    國破山河異昔時(국파산하이석시)
    獨留江月幾盈虧(독류강월기영휴)
    落花巖畔花猶在(낙화암반화유재)
    風雨當年不盡吹(풍우당년부진취)


     나라가 망하니 산하도 옛 모습을 잃었고나
     홀로 강에 머문 달은 몇 번이나 차고 이즈러졌을꼬
     낙화암 언덕엔 아직 꽃이 피거니
     비바람도 그 해에 불어 다하지 못했구나

 

 

* 낙화암(낙화암에서 내려다 보이는 백마강 푸른 물

 


  당나라 군대에게 철저히 짓밟힌 백제의 통한(痛恨)이 짙게 나타나 있다.  백제의 마지막 임금 의자왕은 알려진 대로 그렇게 사치와 방탕에 빠진 무능한 통치자가 아니었으며 낙화암에서 몸을 던졌다는 삼천궁녀는 과장된 역사라기보다 왜곡된 역사일 것이 분명하다. 삼천궁녀의 이야기는 아마도 당나라로 끌려가 노예가 되느니 자살을 선택한 아리따운 백제 처녀들이었으리라.

 

  조선 중기의 강직한 선비였던 홍춘경이 백마강 달밤에 낙화암에 올라가 백제가 무너지던 때를 생각하며 감회에 젖어 지은 이 시에도 그런 생각이 엿보인다. 낙화암 절벽에 피어 있는 꽃은 면면히 이어 오는 백제의 혼을 의미하며 왜곡된 채 고쳐지지 않은 역사가 배어있다. 역사는 승자를 위해, 승자에 의해 쓰인, 승자만의 것이니까. 까마득하게 내려다 보이는 백마강은 유유히 옛일을 아는지 모르는지 말이 없다. 

 

 

고란사, 고란사약수

 

 

* 고란사로 내려가는 길(위)과 고란사 정경 * 

 


  낙화암 절벽 아래에는 꽃잎처럼 스러져간 백제 영혼들을 달래려 세워진 작은 절 고란사가 자리하고 있다. 200m 계단을 돌아내려가면 된다. 고란사는 마치 망국의 한이라도 달래고 있는 듯 산그늘 속에 숨듯이 바위 절벽 아래 좁은 터에 법당 한 채만이 조금 쓸쓸하게 자리 잡았다. 고란사는 절집 뒤 절벽에 자생하는 고란초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 고란약수가 나오는 고란정 *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고란초는 관광객들의 손을 타서 멸종 위기에 이르렀고, 바위틈에 몇 포기만이 보호돼 남아 있다. 고란초와 함께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이 곳의 약수도 유명하다. 주변에 고란초가 많이 자라 '고란약수'로 불린다. '한 잔을 마시면 3년이 젊어지니 욕심 부려 많이 마시면 아기가 될 수 있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백제의 왕들은 이 약수만을 마셨고, 고란약수를 한 잔 마시면 3년씩 젊어진다는 전설도 있다.  고란사 아래 선착장에서 유람선을 타고 백마강을 유람하고 구드래 국민관광지 쪽으로 나올 수 있다.

 

 

백마강 유람

 

* 고란사 밑 선착장(구드래 조각공원을 왕복하는 황포돛배가 이곳에서 떠난다 *  

 

     

  나는 선착장으로 내려와 낙화암을 제대로 보기 위하여 황포돛배 선착장으로 내려와 유람선을 탔다. 유람선 난간에서 올려다보면 가파른 절벽 풍경과 함께 이런저런 상념이 스쳐 지나간다. 지형상 백제 때의 수위(守衛)의 요지였지만, 660년에 당(唐)나라 소정방(蘇定方)이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침공할 때 당나라 군사가 쉽게 상륙하여 백제군을 치고 신라군과 연합하여 사비성을 공격한 루트가 된 곳이기도 하다. 이 때 궁녀들이 실제 강물로 자진했는지는 중요치 않다. 어느 시대건 나라가 망하면 여인들이 가장 큰 수난을 당하는 법이니까.  

 

  백제의 흥망성쇠를 말없이 지켜본 백마강. 백마강은 금강의 일부분이다. 부소산을 휘돌아 도는 16km 구간을 백마강이라 부른다. 당나라 소정방이 부소산성을 공격할 때 안개가 자욱해서 강을 건너기 어려웠다고 한다. 그 때 사람들이 이르기를 백제의 의자왕은 낮에는 사람으로, 밤에는 용으로 변해 있어 안개가 걷히지 않는 것이라 했고, 그 말을 들은 소정방이 백마의 머리를 미끼로 삼아 용을 낚아 올리자 짙은 안개가 걷히고 백제를 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때부터 부여를 감돌아 흐르는 금강을 백마강으로, 소정방이 용을 낚았다는 바위섬을 조룡대로 불렀다고 한다.

 

                   

  * 항해하는 황포돛배 절벽 위로 낙화암과 백화정이 보인다 *

 

 

 그런저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백마강 유람선 스피카에선  옛 가요 “꿈꾸는 백마강”(김용호 작사, 임근식 작곡) 의 구성진 가락이 흐른다.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잃어버린 옛날이 애달프구나
    저어라 사공아 일엽편주 두둥실/ 낙화암 그늘아래 울어나보자

    고란사 종소리 사모치는데/ 구곡간장 오로지 찢어지는 듯
    누구라 알리요 백마강 탄식을/ 깨어진 달빛만 옛날 같으리



 그런데 유유히 흐르는 유람선 선실에선 관광지에서 흔히 보는 풍경이 한판 벌어졌다. 귀를 찢는 듯한 음악에 맞춰 중년이 넘은 아주머니들이 한을 풀 듯 몸을 흔든다. 예부터 가무(歌舞)에 능한 민족이었지만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닐까. 상념이 젖어들 겨를도 없이 황포돛배는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며 구드래 국민관광지 선착장에 닿았다. 

 

 

구드래조각공원

                           

* 구드래조각공원의 여러 조각 작품들 *

 


  구드래는 ‘큰 나라’라는 뜻으로 백제를 의미하는 것으로, 당시 일본, 중국과 교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나루터였다. 구드래 공원에는 1999년 개최된 국제 현대조각 심포지움에 참가한 국내외 유명 조각작가의 작품 60여 점이 전시되어 있어 강바람을 맞으며 현대 조각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휴식공간이다. 사적 및 명승 제6호로 지정되었다.


  구드래공원 입구에 세워진 '정한모시비'가 눈길을 끈다.  시비에는 그의 작품 중에서 <새>라는 작품이 새겨져 있다. <새>에서도 느껴지듯이, 그의 시는 창조된 생명에 대해서, 그리고 자연물에 대해서도 아름다운 시어를 사용해 청명함을 전달하고 있다. 특히 시비에 새겨진 <새>는 `연보랏빛 안개의 저편에서/보이지 않는 모습으로/날으고 있는/ 한 마리/ 새여`로 시작해 어둠과 시련 등을 거쳐 훨훨 날아오르는 새의 생명력을 노래하고 있다.

    연보라빛 안개의 저편에서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날으고 있는  

    한 마리 

    새여


    햇빛을 받아
  

    金빛 날개를 반짝  
    하늘을 누비고


    어둠 속
 

    가는 빛으로 線을 그으며  

    내 가슴에 울려오는  

    맑은 바람소리


    문득 눈드는 새벽
 

    연보랏빛 새벽안개 저편에서 
    보일 듯 나타날 듯 날으고 있는
  

    한 마리 새여! 

    새여

     - 정한모의  '새' 전문

 

 

* 정한모의 시비 *

 


  문화공보부 장관을 지낸 바 있는 정한모 시인은 부여군 석성면 석성리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생가는 오랫동안 시인의 가족이 살다가 95년에 새로 지어지면서 옛모습을 찾기가 힘들다. 다만 그의 시비가 부여의 구드래공원과 계룡산 동학사 부근에 세워져 있을 뿐이다. 

 

  볼거리가 넘쳐나는 부여 여행의 첫 방문지를 구석구석 돌다보니 시장기가 느껴졌다. 주변에는 토속음식이나 별미를 즐길 수 있는 식당이 많으나, 그 중 구드래돌쌈밥(부여읍 구아리96-2,  041-836-0463)은 돌쌈밥, 돌쌈정식, 돌솥밥, 돌솥비빔밥으로 소문난 별미식당이다.  유기농야채와 약초잎에 돌솥밭을 곁들인 식단으로 관광공사 선정 ‘깨끗한 집 맛있는 집 100집’에, 충청남도 ‘대표(별미)식당’으로도 선정된 바 있다. 각 TV에도 출연한 것은 말할 것 없다. 내부는 향토적인 옛날 생활도구들로 꾸며놓아 구경거리가 많다.  

 

  이 외에 구드래나루터에 위치하고 있는 나루터식당( 041-835-3155 )은 부여를 대표하는 터줏대감으로, 부소산과 백마강이 인접해 있어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장어구이와 민물매운탕이 유명하다. 규암나루 주변에도 백마강에서 서식하는 장어를 이용하는 장어구이집들이 많다.

 

 

* 부여를 찾는 이들이 즐겨먹는 구드래돌쌈밥집과 푸짐한 쌈 한 상, 내부모습 *

 

 

* 가는 길 : 수도권에서 갈 경우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천안에서 논산으로 가는 민자고속도로로 갈아탄 다음 서논산에서 나오면 된다. 바로 만나는 31번 도로에서 부여방향으로 우회전해 계속직진하면 부여시내로 진입하게 된다. 부여시내에서는 구드래관광지쪽으로 길을 잡고 가면 중간에 부소산성이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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