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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충청남도

역사가 숨쉬는 공주 & 금강, 백제도, 동학군도 품어안은 ‘붉은 비단’

by 혜강(惠江) 2009. 9. 18.

 

역사가 숨쉬는 공주 & 금강

 

백제도, 동학군도 품어안은 ‘붉은 비단’

 

 

박경일 기자

 

 

 

▲ 국사봉 등산로를 따라 금강변의 창벽에 올라 내려다본 금강의 낙조 풍경. 백제의 옛 도읍지였던 공주와 부여 땅을 적시며 흘러가는 금강은 저물녘에 내려다보아야 애잔함이 더 짙게 느껴진다.

 

 

  ‘예부터 이곳은 모여 썩는 곳, 망하고 대신 정신(精神)을 남기는 곳….’
시인 신동엽은 그의 시 ‘금강’에서 백제의 옛 땅과 동학혁명 격전지인 우금치를 가로질러 흘러가는 금강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전북 진안에서 발원해 서해의 군산까지. 금강은 무려 400㎞가 넘는 물길을 유장하게 흘러갑니다. 금강은 공주 땅을 흘러가면서 웅진강이란 이름을, 부여 땅을 흘러가면서 백마강이란 이름을 얻습니다. 그렇게 백제의 옛 땅을 가로지르며 백제 흥망의 꿈 자취를 따라 흘러갑니다.

  공주를 끼고 흐르는 금강은 물굽이도 유순하고 흐름도 그리 급하지 않습니다. 강변의 깎아지른 절벽인 창벽에 올라 내려다보니 비단(錦)이란 그 이름처럼 물은 부드럽게 흘러내립니다. 해 질 녘 멀리 강물 위로 붉게 번지는 노을을 바라봅니다. 이곳은 백제의 옛 도읍지. 어쩐지 일출보다는 석양이 더 잘 어울리는 곳. 그래서일까요. 강 너머로 해가 지는 풍경이 이리도 애잔하고 쓸쓸할 수 없습니다.

  공주에서 더 말을 보태지 않아도 꼭 들러 봐야 할 곳. 옛 백제의 영화를 들여다볼 수 있는 공산성과 무령왕릉입니다. 날이 저물고 공산성에 은은한 나트륨 조명이 비춰지면, 1500여년 전의 옛 고대도시가 어둠 속에서 또렷하게 떠오릅니다. 무령왕릉이 쏟아 낸 유물들에는 백제의 화려하지만 허망하게 무너지고 말았던 시간이 켜켜이 묻어 있습니다.

  또 공주에는 봄가을에 최고의 경치를 빚어낸다는 마곡사와 갑사도 있습니다. 갑사의 5리 숲길을 걸으면 제멋대로 자연스럽게 자라난 아름드리 고목들이 쏟아 내는 초록의 마지막 기운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갑사에는 계곡 옆에 사방을 유리창으로 두르고 계곡의 물소리를 빨아들이는 운치 있는 찻집이 있습니다.

거기다가 이즈음 공주에서는 잘 익은 단단한 육질의 밤이 후두둑 떨어지고 있습니다. 가족과 함께 느긋하게 밤나무 숲을 거닐며 잘 여문 밤을 줍는 맛도 즐겁습니다. 눅눅한 습기로 가득했던 여름을 보내고 날마다 하늘이 높아지는 청명한 가을을 맞이하러 떠난 여정이라면 여기서 더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갑사가는 길… 애잔한 ‘古都의 숨결’이 기지개를 켠다

공주&금강서 만난 운치있는 풍경들

 

 

 

▲ 계룡산 갑사로 드는 5리 숲길. 인위적으로 전나무며 소나무를 일렬로 심어 놓은 다른 절집들과 달리 갑사의 숲길은 다양한 수종의 아름드리 나무들이 자연스럽게 짙은 숲을 이루고 있다. 요즘처럼 볕이 맑은 가을날에 걷기 좋은 길이다.

 

 

▲ 갑사에서는 절집보다 계곡을 끼고 있는 전통찻집에 반한다. 사방으로 미닫이 유리문을 낸 찻집에 들면 물소리가 안으로 들어온다.

 

 

▲ 정안면 산마루알밤농원에서 밤줍기 체험을 하는 아이들.

 

 

  공주는 백제의 두 번째 수도였다. 백제 개로왕이 위례성을 침략한 고구려 장수왕에 패해 죽임을 당하면서 한강 유역을 빼앗긴 백제는 475년 웅천(공주의 옛 이름)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 후 백제가 수도를 부여의 사비성으로 옮길 때까지 64년 동안 공주는 백제의 ‘서울’이었다. 뒤돌아보면 백제의 흔적은 애잔한 정서를 동반한다. 웅혼한 기상과 활달한 기운이 먼저 느껴지는 고구려나 신라와는 많이 다르다. 공주에는 1500여년 전 고대왕국 백제의 영화를 짐작하게 하는 유물이 쏟아져 나온 무령왕릉도 있고, 백제시대 왕궁지로 추정되는 공산성도 있다. 공주를 들르는 여행자라면 빼놓지 않고 가는 곳이다.



# 금강의 물길에서 백제의 애잔한 역사를 들여다보다

  그러나 이런 유적지보다 백제의 애잔함을 더 짙게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금강이다. 전북 장수의 뜬봉샘에서 발원해 공주의 한복판을 흘러가면서 웅진강이란 이름을, 부여의 낙화암 아래를 휘돌면서 백마강이란 이름을 따로 갖는 금강은 백제의 젖줄이었다. 남에서 북으로 물길이 흐른다 해서 ‘반역의 강’이라 이름 붙었던 금강은 백제 왕조의 비극적인 최후를 지켜봤고, 우금치 전투에서 몰살당한 동학농민군의 피가 흘렀던 곳이다.

금강에서 옛 백제의 애잔한 정취를 느껴 보겠다면 저물녘 붉게 물드는 강물을 내려다보는 게 걸맞겠다. 공주 땅으로 들면서 물굽이가 유순해진 금강은 해 질 무렵 물줄기가 온통 붉게 물든다. 이런 풍경은 국사봉에 오르는 창벽(청벽)에서 내려다보는 것이 단연 최고라 할 수 있다. 창벽(蒼壁)은 금강이 공주시 반포면 도남리에 이르러 국사봉 자락을 적시고 남쪽으로 휘돌아 가는 곳에 펼쳐진 폭 100m, 높이 25m의 기암괴석의 암벽이다. 지금은 주로 청벽(靑壁)이라고 불리는데, 똑같이 ‘푸르다’란 뜻을 갖고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청(靑)’자 보다는 ‘창(蒼)’자가 더 푸르고 짙은 느낌이다.

청벽대교 아래에서 국사봉 등산로를 따라 30분쯤 오르면 금강의 물줄기를 따라 넘어가는 낙조가 강물을 온통 붉게 물들이는 모습을 만날 수 있다. 금강을 적시며 사그라지는 붉은 낙조의 풍경 속에서 무너진 백제 왕조의 애잔함과 우금치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던 동학군들의 깊은 한이 느껴지는 듯하다.

 


# 무령왕릉에서 보아야 할 다른 것들

  공주는 백제의 도읍지였지만, 생각보다 백제시대의 유적들이 많지 않다. 그중 단연 최고가 백제시대 최고의 유적으로 꼽히는 무령왕릉이다. 무령왕릉은 원형 보전을 위해 1997년 영구 폐쇄됐지만, 경내에 원형과 똑같이 만든 모형전시관을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모형전시관에 재현된 무령왕릉은 잘 꾸며져 있지만, 그러나 그곳에서 봐야 할 것은 비단 유적과 유물만은 아니다.

안내판에조차 한 줄 언급되지 않았지만, 무령왕릉의 발굴은 지금까지도 ‘고고 발굴사의 가장 큰 불행’으로 꼽히는 사건이었다. 무령왕과 왕비의 합장무덤인 무령왕릉은 1971년 7월 5일, 송산리 고분에 물이 새어 드는 것을 막기 위해 배수로 공사를 벌이다가 우연히 발견됐다. 수수께끼로만 남아 있던 백제의 왕릉이 1450여년의 깊은 잠을 깨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너도나도 흥분했고, 발굴을 맡은 문화재관리국도 허둥거렸다. 기자들이 몰려들자 급기야 문화재관리국은 사진기자들을 발굴이 시작되지도 않은 무덤 안으로 들여보내는 초유의 일이 발생했고, 이 와중에 철제장식과 청동 숟가락이 밟혀 부러지기도 했다. 이후의 발굴 상황은 더 가관이었다. 보도가 나가고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발굴책임자는 한시바삐 조사를 끝내야 한다는 절박감에 사로잡혀 밤샘 발굴을 통해 불과 하룻밤 사이에 모든 발굴조사를 마치고 말았다. 무덤이 갖고 있었을 고대사 해독의 열쇠를 흔적도 없이 지워 버린 셈이다.

 


# 봄에는 마곡사, 가을에는 갑사라던가

  ‘춘(春) 마곡, 추(秋) 갑사’라고 했다. 봄이면 마곡사가 아름답고, 가을에는 갑사가 아름답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공주의 마곡사와 갑사를 다 들러 보면, 이런 말에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마곡사와 갑사는 전혀 다른 느낌의 절집이다. 제법 큰 물길을 끼고 있는 마곡사가 웅장하면서도 열린 느낌이라면, 5리(2㎞) 숲길을 걸어 들어가 만나는 갑사는 소박하면서 깊고 은밀한 느낌이다.

계절의 변화를 느끼기로는 갑사 쪽의 손을 들어주는 게 옳겠다. 대개 이름난 절집은 일주문으로 드는 길에 전나무며 소나무 등을 인위적으로 심어 놓았지만, 갑사로 드는 5리 숲길은 천연림에 가깝다. 단풍이 들면 아름답기야 이루 말할 것 없겠지만, 봄 신록이 돋을 때의 풍경도 이에 못지않을 듯싶다.

갑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간을 꼽으라면, 절집보다는 갑사계곡 쪽에 바짝 붙여 지어진 ‘전통찻집’을 들 수 있겠다. 계곡을 끼고 있는 한옥의 자태가 한눈에도 범상치 않아 보인다. 이 집은 일제강점기 중추원 부의장과 경기도 관찰사를 역임했던 윤덕영의 별장이었다. 그는 1910년 경술국치 때 순종의 두 번째 정비였던 조카 순정효황후가 옥새를 감추고 내놓지 않자 이를 강탈해 순종에게 합방조약에 옥새를 찍게 했던 인물이다.

별장 주인이 누구였든 사방에 유리창을 댄 찻집은 계곡의 물길과 어우러져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여 준다. 특히 오후 나절 계곡에 들어 찻집 한쪽의 툇마루가 설핏 기우는 해를 받아 반짝이는 모습을 보면 누구든 단박에 반하게 될 터다. 찻집으로 들어 계곡이 바라보이는 창가 자리에서 솔잎차 한잔을 앞에 두면 물소리가 찰랑찰랑 집 안으로 가득 담긴다.

공주에서 부여로 향하는 길에서 주미산에 걸쳐 있는 우금치는 전봉준이 이끌던 동학농민군과 정부·일본의 연합군이 최후의 처절한 싸움을 벌이던 곳이다. 그러나 우금치 고개는 너무도 평범해서 오히려 낯설다. 지금의 우금치 고개는 그저 공주와 부여를 잇는 잘 포장된 고갯길일 뿐, 어디에서고 그날의 비장함이나 비극의 정서를 느낄 수 없다. 우금치 고개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로 세워진 동학혁명 위령탑이 있다. 위령탑에 새겨진 글귀를 읽는다. “5·16혁명 이래 신생 조국이 새삼 동학농민혁명군의 순국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면서….” 박 전 대통령은 이 위령탑을 세우면서 자신이 주도한 5·16군사쿠데타를 동학농민혁명에 비유했다. 누가 그랬을까. 위령탑에 적힌 이름 몇 개가 문질러져 있다.

 


# 가을 햇살에 단단하게 익어 가는 밤

  이즈음 공주를 찾았다면 밤따기 체험을 빠뜨리고 갈 수 없다. 공주 일대의 나지막한 야산들에는 가을 햇살에 툭툭 벌어지는 밤송이를 매단 밤나무들이 가득하다. 특히 700여 농가가 밤을 재배하고 있는 정안면에는 밤송이가 가득 달린 우람한 밤나무들이 산자락을 가득 메우고 있다. 정안에서 나는 밤은 유독 단단하고 달다.

‘정안 밤’이 유명세를 누리게 된 것은 1960년대 중반부터. 혹벌이란 해충이 번지면서 전국의 밤나무들이 줄줄이 죽어 넘어질 때 정안에서 가장 먼저 해충에 강한 신품종 밤나무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이전에도 밤농사에 적합한 토질과 일조량 등으로 맛 좋은 밤이 났으나 신품종을 들여온 뒤부터 정안 밤은 전국 최고의 당도를 자랑한다.

공주시 일원에서는 정안면, 사곡면, 의당면 등 관내 45개 농가에서 알밤줍기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산마루알밤농원( 0...) 등 체험 농가에서는 1만원을 내면 손수 주운 밤을 3㎏까지 가져갈 수 있다. 밤나무 숲을 거닐며 마치 보물찾기를 하듯 굵은 알밤을 찾는 재미가 쏠쏠하다. 체험까지 즐기면서 일반 소매로 구입하는 것보다 더 저렴하게 신선한 밤을 가져갈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가는 길·묵을 곳·먹을 것

# 공주 가는 길 = 밤줍기 체험을 하러 공주시 정안면을 찾아간다면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천안∼논산간 민자고속도로로 들어선 뒤 정안나들목으로 나오면 된다. 일대에 체험농장이 몰려 있다. 공주시내나 갑사를 목적지로 삼았다면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천안~논산간 민자고속도로로 들어선 뒤 공주갈림목에서 새로 놓인 당진∼대전간 고속도로로 접어들자마자 나오는 공주나들목으로 내리면 된다. 마곡사로 가려면 당진∼대전간 고속도로 마곡사나들목으로 나가면 된다.

#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 = 공주에는 단체여행 수요가 많아 일찌감치 유스호스텔이 들어섰다. 개인 가족에게도 방을 내준다. 공주유스호스텔( 0...), 계룡산 갑사유스호스텔( 0...)이 있다. 3~4인 가족에게 적당한 방이 6만5000원 선. 공주고속터미널 인근의 신관동 일대에는 호텔과 모텔이 많다. 3만~5만원 선. 창벽 일대에는 매운탕과 장어구이를 내놓는 맛집들이 즐비하다. 어씨네옛날장어구이가 원조 격.

 

 

<출처> 2009. 9. 9 /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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