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내여행기 및 정보/- 충청남도

부여 정림사지, 사비성 백제 사찰의 중심 절터

by 혜강(惠江) 2009. 5. 7.

 

부여 정림사지

 

사비성 백제 사찰의 중심 절터'

 

정림사지 넓은 공터엔 오층석탑과 석불좌상만 남아' 

 

 

·사진 남상학

 

 

 

* 정림사지 오층석탑 (국보제9호) *

 

 

  백제 왕실의 자취 궁남지를 둘러보고 정림사지(定林寺址, 사적 제301호)로 발길을 옮겼다. 시내 중앙로에서 동쪽으로 조금만 안쪽으로 들어가면 멀리에서도 담장 너머로 우뚝 솟은 석탑 한 채가 보이는데 그곳이 정림사터이다.

 

  백제 때의 유구가 거의 남지 않은 부여에서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이 정림사터 오층석탑은 백제 시대의 부여를 대표한다. 중국역사서인 「주서(周書)」의 '백제전'에는 '사탑심다(寺塔甚多)’라고 하여 백제에는 탑이 많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수도인 부여 땅에 남은 것은 오직 이 정림사 터뿐이다.

 

  정림시지는 백제가 부여로 왕도를 정했던 때의 중심 절터이다. 경내에는 백제시대에 세워진 오층석탑 (국보제9호)과 고려시대에 조성된 석불좌상(보물 제108호)이 남아있다. 몇 차례의 학술조사가 이루어져 절의 건물배치와 각 시대의 유물들이 수습되었다. 이곳에서는 백제시대와 고려시대의 막새기와를 비롯한 벼루, 토기 등 사찰 생활용품과 소조불상 등이 출토되어 당시의 생활 문화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사찰의 건물 배치는 중문, 오층석탑, 금당, 강당의 중심축선이 남. 북 일직선상에 놓이고 이를 회랑으로 두룬 <남북일탑식가람(南北一塔式伽藍)>으로 전형적인 백제시대의 가람배치이다. 다만 특이한 것은 중문과 탑 사이에 연못을 파서 다리를 통하여 지나가게 한 점이다.

 

 

 

 

  지금은 금당 자리에 최근에 복원한 건물만이 덩그렇게 서 있지만 절 전체가 회랑으로 빙 둘러 있는 가운데 긴 네모꼴의 못에 연꽃을 기르고 잉어라도 몇 마리 놓아길렀다면 시내 한가운데에 자리잡은 매우 운치 있는 공간이었을 듯하다. 이러한 건물 배치에 영향을 받아 고대 일본의 사찰은 모두 이 형식을 따르고 있다.

 

  정림사지는 3만 4155㎡의 넓이의 면적이만 지금은 사찰인 정림사의 웅장한 모습은 간데없고 백제 미술의 백미인 정림사지오층석탑(국보 제9호)과 고려시대 정림사지석불좌상(보물 제108호)이 남아있다. 넓은 뜰은 아직도 진행 중인 발굴 현장이 푸른색 천으로 덮여 있다.

 

  한동안 이 탑은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세운 것이라고 잘못 알려져 왔었다. 그것은 1층 탑신부 한 면에 새겨진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濟國碑銘)'이라는 글자 때문이다. 뚜렷하지는 않지만 지금도 어렴풋이 알아볼 수 있는 그 글자는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킨 뒤에 그것을 기념하려고 이미 세워져 있는 탑에 새긴 것이다.

 

  그러나 이 절터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기와에서 "태평 8년 무진정림사대장당초(大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라고 새겨진 기와가 발견됨으로써 사찰명이 '정림사'였으며 탑과 기공문과는 아무 상관도 없이 소정방이 기공문을 써 넣기 전 백제 시대에 건립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태평 8년은 고려 헌종 19년(1028)에 해당되며, 당시 정림사라고 불렀던 이 절의 강당 터 위에 다시 건물을 짓고 대장전이라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정림사는 백제의 사비천도 즈음인 6세기 중엽에 창건되어 백제 멸망 때까지 번창했던 사찰이다. 이로써 정림시는 백제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법통이 이어져왔음을 뚜렷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 

 

    정림사지에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오층석탑은 백제가 멸망해 간 애절한 사연을 간직한 채 1400년을 버텨왔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백제 시대에 만들어진 남아 있는 석탑 2개 중 하나이다. 이 탑은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함께 백제시대에 세워진 탑으로, 백제의 석탑이 목조건축을 따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어 우리나라 석탑의 발전과정을 찾아볼 수 있는 아주 중요한 탑이다. 

 

  높이 약 8.33m의 이 탑은 목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는데 익산 미륵사지탑보다 더욱 정돈되고 세련된 수법으로 창의성을 보이고 있다.  당시 백제 장인들은 부식과 화재 위험 등 목조가 가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화강암 석재를 택했다. 기단부가 매우 좁고 낮은 단층 기단 구조를 이루어 마치 탑이 땅에서 솟아난 듯한 느낌을 준다.

 

  크고 작은 149매의 석재로 탑을 짜 맞추었는데 모서리에 배흘림(엔타시스) 양식의 귀퉁이 우주(기둥돌)을 세우고 층마다 넓은 옥개석(지붕돌)을 올려 축조했다. 특히 지붕돌의 네 귀 단부를 살짝 들어올린 장인의 솜씨는 찬사를 불러일으킨다. 전체적으로 정돈된 형식미와 세련된 아름다움이 돋보이고  안정감이 있어 백제인의 예술성과 품성을 엿볼 수 있는 격조 높은 탑이다.

 

 

 *  정림사지 석불좌상(보물 제 108호) *

 


   석불좌상을 보호하기 위한 지금의 건물은 1993년에 새로 세웠다. 석불좌상은 오랜 세파 속에서 원형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훼손돼 있다. 불신의 입체감이 없이 단순하게 처리되었고 그 형태를 자세히 알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우나 친근감을 주는 형상과 조각이 우수하여 주목되는 걸작으로 고려 때의 번성함을 보여준다.

 

   머리 위에는 둥근 보관이 올려져 있으며, 이목구비가 희미하게 남아 있다. 신체는 불신과 불두를 잇는 짧은 목에 삼도표시가 없으며, 수인과 자세 또한 형체만 겨우 남아 있어 세부적인 양식과 수법을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한 손상을 입은 모습이다. 어깨가 밋밋하게 내려와 왜소한 몸집을 지니고 있는데, 올라간 왼손의 표현이나 오른손의 모양으로 보아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이 앉아있는 대좌는 상대, 중대, 하대로 이루어진 8각으로 공들여 만든 흔적이 역력하다. 이곳에서 발견된 명문기와를 통해 이 작품은 고려시대에 중건하고 세운 보존불로 보인다.

 

  정림사지 옆에 위치한 정림사지박물관은 백제 사비시기의 불교문화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이 박물관은 백제 불교문화와 정림사지를 이해시키고 백제고도 부여의 상징적인 명소로 만들기 위하여 2006년 9월 29일 개장하였다.    

   외양은 불교의 건축 양식을 따라 건축하였는데, 일본 사찰 모습과 흡사한 대가 있다. 우리의 백제 건축 양식은 거의 자취를 감추어버렸는데 백제의 후예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가르쳐준 일본 건축 양식은 일본에는 흔하다는 것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박물관은 중앙홀, 백제불교문화관, 정림사지관, 기획전시실, 야외전시장으로 구분하였다. 중앙홀은 백제 건축양식을 볼 수 있도록 배흘림기둥, 주두, 첨차, 소로, 인자방 등 고증을 바탕으로 한 건축 양식으로 20여 개의 기둥을 설치하여 웅장했던 백제 건축 기술을 느껴볼 수 있게 했다. 백제불교문화관은 백제의 불교 전래, 기록과 출토 유물을 통하여 확인된 사비성 사찰의 분포와 백제의 대표적인 유물인 전돌과 기와 등을 제작하는 과정과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정림사지관은 백제 불교의 중잇이었던 정림시지를 1/12로 축소하여 복원하고, 정림사지 발굴 모습과 사진들, 그리고 발굴 현장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전사하고 있다. 그리고 기획전시실을 운영하고 있다.  

 

 

 

  늦은 감은 있으나 백제의 고도 정림사터 옆에 박물관을 짓고 이곳을 찾는 관광객에게 백제 문화를 소개하게 된 것이 그나마 다행이 아닌가. 정림사가 완전히 복원되는 날을 하루속히 고대해 본다. 

 

 

 

<끝>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