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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부산. 경남

산청(山淸), 연둣빛 물드는 지리산은 지금 신록 세상

by 혜강(惠江) 2009. 4. 16.

경남 산청

연두빛 물드는 지리산은 지금 신록 세상

 

- 꽃비에 젖은 새순이 ‘배시시’

 

 

박경일 기자

 

 

 

▲지리산 자락의 내원사 계곡 입구에서 만난 신록풍경. 물오른 나뭇가지마다 돋아난 반투명한 연두색 여린 새순이 햇빛에 반짝이고 있다. 바닥이 환히 비치는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을 따라 이런 신록의 길이 이어진다.

 

 

봄 꽃들이 일제히 지고 있습니다. 봄 바람에 우수수 꽃비가 쏟아지고, 마른 꽃잎이 길 위에서 뒹굽니다. 며칠만 더 두고 보고 싶건만,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들은 왜 이리 찰라처럼 지나가고 말까요. 봄 꽃이 하나 둘 지고 나면 이제부터는 신록의 계절입니다.

환하게 피어나는 꽃들이야 절로 눈길이 가지만, 나뭇가지 끝을 연두색으로 물들이는 신록의 아름다움은 마음의 여유가 있을 때라야 비로소 보입니다. 이맘 때면 물이 차오른 가지마다 돋는 새순에서는 연두색 보드라운 잎이 고개를 내밉니다. 마치 겨우내 숨겨서 접어놓은 연두색 색종이를 천천히 펼치는 듯합니다. 순식간에 화다닥 피어나는 봄꽃의 행로를 바쁘게 쫓다가, 이제서야 차분하게 신록을 찾아나섰습니다.

지도를 펼치고 정갈한 신록이 펼쳐지는 곳을 짚어보다가 지리산 자락의 경남 산청을 떠올렸습니다. 이름부터가 뫼 산(山)에 맑을 청(淸). 이름 그대로 ‘맑은 산’입니다. 지리산을 끼고 있는 산청은 사방이 산입니다.거대한 지리산을 품고도 모자라 웅석봉(1099m), 황매산(1108m), 구곡산(961m), 왕산(923m) 등 해발 1000m를 오르내리는 산들을 병풍처럼 거느리고 있지요.

가까운 산봉우리는 먼 산의 능선을, 먼 산의 능선은 더 먼산의 산자락을 가립니다. 출렁거리며 이어지는 산자락이 도대체 끝이 없습니다. 거창과 함양을 지나 산청을 관통하고 진주로 이어지는 3번 국도는 평탄하지만, 국도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길은 굽이치면서 산속으로 들어갑니다. 그 굽이치는 길의 안쪽, 깊은 산의 능선과 능선사이에는 예외없이 마을이 자리잡고 있지요.

땅 한 뙈기가 아쉬웠던 산청 사람들은 비탈진 사면을 다랑이 논으로 차곡차곡 포갰고, 거기에 고단한 삶을 기대며 살아왔습니다. 아마 그래서일 겁니다.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산청에 대해 말하면서 ‘산음은 흐리고 어두워서 살 곳이 못 된다’고 쓴 것도. 지리산 자락을 끼고 있는 산청은 지금도 험준한 산과 계곡들로 가로 막혀있는데, 당시야 오죽했을라구요.

일제 강점기이던 1910년의 경남지방 호구조사 기록을 들춰보니 당시 산청군의 인구가 3만7047명이었더군요. 그후 100년. 터널이 뚫리고 도로가 놓였지만 지금의 산청군 인구는 그 때보다 오히려 더 줄어 3만5274명(2008년 기준)에 불과하답니다. 이중환이 산청을 ‘살 곳이 못 된다’고 단언한 것은 삶을 ‘거친 자연과의 대결’로 보았기 때문이겠지요.당시만 해도 까마득히 높은 산들을 병풍처럼 둘러치고 이렇다할 너른 들판 하나도 갖지 못한 산청은 살기에 꽤나 팍팍했을 겁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펄펄 뛰는 날 것과도 같은 산청의 자연은 싱싱하고 건강합니다. 지금 뫼 산(山)에 맑을 청(淸)이란 이정표를 따라 산청에 들어서면 폐부를 말끔히 씻어낼 것만 같은 청량한 공기와 물속이 다 비치는 맑은 계곡물, 그리고 지리산 깊은 골짜기에서 번져나가는 연초록의 신록까지, 다 그곳에 있습니다. 산청의 이곳저곳을 돌아보며 떠오른 생각 한가지.

이중환이 지금 이 땅에 환생한다면 산청이야 말로 ‘사람이 살 만한 곳’으로 꼽았을 터이고, ‘살 데가 못되는 곳’으로는 숨이 턱턱 막히는 빌딩 숲의 도시를 지목했을 것이 틀림없겠다 싶었습니다.

 

 

바위절벽 절집서 내려보면 세상도 욕심도 한 점이더라

초록 덧입는 나무·지각쟁이 봄꽃 있는 산청

 

 

 

 

 

# 신록을 찾아 산청의 지리산 계곡으로 들다.



산청에는 계곡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다른 지역의 이름깨나 났다는 웬만한 계곡으로는 이쪽에서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 계곡의 제철은 여름이지만, 굳이 봄철에 계곡으로 찾아드는 것은 청량감 가득한 연초록의 신록을 보기 위함이다. 신록뿐만 아니다. 깊고 짙은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 이제야 한창인 봄꽃이 흐드러진 풍경도 만날 수 있다. 저 아래 마을에는 다 지고만 진달래며 산벚꽃들이 어둑한 산중에서는 이제서야 하나 둘 피어나고 있는 것이다.

산청의 계곡을 꼽자면 열 손가락이 모자란다. 마야계곡, 지막계곡, 청개골계곡, 도창골계곡, 거림계곡, 중산리계곡…. 그러나 산청 사람들이 단연 최고로 꼽는 계곡은 지리산 자락의 대원사 계곡이다. 대원사 계곡은 다른 관광지의 계곡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너른 암반들로 이뤄진 아기자기한 계곡이 아니라, 집채만한 바위들이 구르는 힘차고 원시적인 풍모의 계곡이다. 겨울가뭄으로 웬만한 산들의 계곡에는 물이 다 말랐다지만, 지리산 자락의 대원사 계곡에는 여전히 호탕한 소리를 내며 맑은 계곡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산청읍내에서 밤머리재를 힘겹게 넘어 감투봉 앞에서 우회전해 들어가면 바로 어둑한 숲과 함께 대원사 계곡이 시작된다. 숲은 이제 막 내놓은 새 잎으로 반짝인다. 짙은 숲 안쪽에 떨어지는 햇살을 받아 연두색으로 빛나는 이파리들로 가득한 풍경 앞에 서면 ‘신록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계곡을 끼고 있는 절집 대원사는 신라 진흥왕 때 연기조사가 창건했다는 비구니들의 수행도량. 내력은 깊지만 소실과 중건을 거듭해 지금의 절집 건물은 1959년에 지어진 것. 같은 지리산을 끼고 있는 구례쪽의 화엄사나 하동쪽의 쌍계사와 견주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다. 하지만 대원사 돌확에서 솟아나는 시원하고 달큰한 물맛 만큼은 일품이다.

대원사를 넘어 더 가면 계곡의 이름은 대원사 계곡에서 유평계곡으로 바뀐다. 그 길의 끝에 있는 산청군 삼장면 유평리의 이름을 딴 것이다. 지리산 자락의 해발 800m에 자리잡은 유평리는 ‘하늘아래 첫동네’다. 계곡을 타고 오르는 길이 산으로 막혀버린 곳에 들어선 마을은 이제 막 연초록의 신록과 더불어 산벚꽃과 목련, 개나리와 붉은 진달래로 꽃대궐을 이루고 있다.

계곡으로 치자면 내원사 계곡도 못지 않다. 장당골 계곡과 내원골 계곡이 합류하는 지점에 절집 내원사가 있다. 산문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절집이 초라하고, 계곡의 수량도 대원사계곡만 못하지만 신록만큼은 이쪽이 더 아름답다. 계곡을 따라 늘어선 활엽수의 가지 끝

이 신록으로 물든 모습은 절로 탄성이 터질 정도다.

 


# 정취암 뒤 바위절벽 오르면 ‘높이가 주는 성찰’

 

 

▲ 절벽에 위태롭게 매달리듯 지어진 암자 정취암의 뒤편에 솟은 암봉에서 내려다본 풍경. 정취암에 올라 내려다보면 저 아래 세상과의 거리가 아득하다. 정취암은 차로 닿을 수 있는데, 예전에는 마음을 졸여가며 비좁고 아찔한 벼랑길을 이용해야 했지만 최근 능선을 따라 길이 새로 나서 단숨에 쉽게 오를 수 있다.

 


산청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은 의외로 지리산이 아닌 대성산(일명 둔철산·593m) 자락에 있다. 이름하여 정취암(淨趣庵)이다. 신라 신문왕 때 의상조사에 의해 창건됐다는 암자지만 그 내력보다는 절집의 앉음새와 절집에서 내다보는 경치가 빼어난 곳이다. 암자가 세워진 기암절벽은 상서로운 기운이 금강산에 못지않다고 해서 한때 소금강이라고 불리기도 했단다. 암봉아래에 절묘하게 매달려 들어선 암자의 모습이 빼어나다.

절집으로 오르는 도로는 예전에는 아찔한 벼랑길이었다는데, 산청군에서 대성산 일대에 생태체험숲을 조성하면서 산을 깎아 대형버스도 너끈히 교행할 수 있을만큼 폭이 넓은 아스팔트 도로를 만들어놓았다. 이 도로에서 올라 건너편 산자락을 올려다보면 그곳에 정취암이 그림처럼 앉아있다. 아스팔트 도로 끝에서 절집까지는 좁은 시멘트 도로지만 거리는 짧다.

절집에 오르면 선경이 따로 없다. 정취암은 말이 암자일뿐이지 원통보전과 응진전, 삼성각 등을 두루 갖춘 웬만한 사찰 규모다. 벼랑에 위태롭게 서있는 삼성각 앞마당에 서면 멀리 황매산과 자굴산, 한우산 능선이 주르륵 펼쳐지고 그 앞의 벌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가슴이 탁 트이는 듯한 장쾌한 풍경이다.

정취암에 갔다면 절집 마당에만 머물지말고 응진전 뒤쪽에 불쑥 솟은 암봉에 올라서보자. 아래에서 보기에는 아찔하지만, 오르는 길은 그리 험하지 않다. 암봉 위에는 가지를 한껏 뻗은 운치있는 소나무 한 그루와 누군가 정성껏 쌓은 돌탑, 그리고 너럭바위가 있다. 너럭바위에 오르면 마치 몸이 허공에 떠있는 듯하다. 정취암의 기와지붕이 내려다보이는 까마득한 벼랑 아래를 내려다보면 발바닥이 간질간질해온다. 이렇듯 높이 올라서면 발 아래 세상이 한낱 티끌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저 아래 세상에서 탐했던 것들의 무게도 조금쯤 가벼워진다. 그건 아마 높이가 주는 성찰이지 싶다.



# 고택 늘어선 남사예담촌과 시간 멈춘 단계마을

 

 

▲ 남사예담촌의 이씨고가로 드는 돌담길에 서로 둥치를 교차하며 자라는 두 그루의 회화나무가 독특한 미감을 빚어낸다.

 


 산청에는 고택들이 즐비한 마을이 두 곳 있다. 그 중 널리 알려진 곳이 ‘남사예담촌’이다. 남사란 마을이름이고 예담이란 ‘옛스러운 담’ 혹은 ‘옛사람을 닮자’는 뜻이라 했다. 마을은 500년의 시간들이 첩첩이 접혀있다. 고색창연한 고가와 수백년 묵은 매화나무, 감나무, 회화나무가 있는 마을이다. 매화는 다 지고 말았지만 마을의 돌담에는 담쟁이 넝쿨이 아이 손바닥같은 여린 잎을 내놓기 시작했다.

남사마을에서 빼놓지 말고 들러봐야 할 곳은 돌담길 양쪽에서 뻗어나온 회화나무 두 그루가 X자로 걸쳐 자라고 있는 이씨 고가와 솟을대문을 갖춘 재실인 사양정사. 자연과 돌담, 그리고 옛 건축물이 빚어내는 절묘한 조화에 탄성을 지르게 된다. 남사마을에 들어서면 푸근한 마음이 드는 것은 고택들이 그저 오랜 건물로만 남아있지 않고, 지금도 사람들이 깃들어 살며 훈기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굳이 흠을 들자면 과속차량들이 위태롭게 지나가는 20번 국도에 딱 붙어있어 고즈넉한 맛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단계마을의 한옥단지를 찾아가보자. 같은 한옥촌이지만 단계마을은 남사마을과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작은 마을 전체가 고즈넉한 한옥의 분위기로 가득하다. 그렇다고 마을 전체가 고택들인 것은 아니다. 흙기와를 올린 솟을대문의 당당한 고택들도 간혹 눈에 띄지만, 그보다 시멘트 기와를 올린 이른바 ‘근대의 한옥’들이 더 많다. 기와지붕을 올렸으되 낡은 슬레이트 집의 구조를 갖춘 집들도 있다. 마을의 유일한 학교인 단계초등학교도 정갈한 한옥의 솟을대문을 세워 정문으로 삼았다.

단계마을은 한옥의 추녀며 지붕기와의 선을 감상하거나 건축물의 아름다움을 들여다보는 곳은 아니다. 그러나 마을 전체를 감싸고 있는 한옥 특유의 고즈넉한 분위기로 가득차 있는 곳이다. 남사마을의 고택들도 삶이 깃들어있는 곳이긴 하지만, 이곳 단계마을만큼 삶의 냄새가 짙게 풍기지는 않는다. 낡은 약방과 무너질 듯한 구멍가게, 그리고 한옥집 사이를 세발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아이들이 있는 곳이다. 시간의 태엽을 뒤로 감았으되 아주 많이 감지는 않은, 그런 느낌의 마을이다.



# 칼 찬 유학자 남명 조식, 그리고 역사의 흔적들.



조선 중기 성리학자이자 영남학파의 거두였던 남명 조식. 그는 61세 되던 해에 고향인 합천을 떠나 산청으로 찾아들어 지리산 천왕봉이 한눈에 바라다보이는 곳에 산천재를 짓고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남명이 일흔 둘의 나이로 운명할 때까지 열정적으로 기라성같은 제자를 길러낸 산청 땅 곳곳에는 남명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남명 조식은 당대에 영남사림계를 함께 이끌었던 퇴계 이황과 자주 비견된다. 퇴계가 ‘사람의 도리’를 앞세워 가르쳤고, 남명은 이른바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의 자세를 가르쳤다. 늘 칼을 차고 마음을 흐트리지 않기 위해 방울을 달고 다녔다는 남명은 스스로 옳다고 믿은 것에 온몸을 던졌다. 그래서일까. 이런 남명의 정신은 후대로 이어져 조식의 문하에서는 수많은 의병장이 나오기도 했다. 남명의 학맥은 치열한 당쟁 속에서 맥이 끊기고 사그라지고 말았지만 그의 정신만은 생전의 행적 속에 오롯이 남아있다.

남명 조식의 말년에 후학들을 길러내던 서실 산천재 인근에는 기념관과 유적지가 조성돼 있다. 기념관 옆의 여재실 뒤편 동산에는 남명의 묘소도 있다. 남명매란 이름을 갖고 있는 산천재 앞의 400년 된 매화나무는 꽃을 다 떨구고 말았지만, 산천재 툇마루에 앉아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남명이 생전에 바라보았던 천왕봉이 한눈에 들어온다.

남명의 사후에 후학들이 세운 덕천서원도 인근에 있다. 아담한 서원은 남명의 품성대로 정갈하고 단아하다. 서원 앞에는 은행나무 거목이 한 그루 서있는데, 한길 높이의 둥치에 난데없이 흰 꽃이 피어있다. 은행나무 썩은 둥치 한쪽에서 벚나무 씨가 싹을 내려 자란 모양인데 은행나무 둥치에서 굵게 뻗어난 가지에서 벚꽃이 피어난 풍경이 신기하다.

 

가는 길

 

 



수도권에서 출발하자면 경부고속도로나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대전까지 가서 대전~통영간 고속도로로 갈아탄다. 함양 갈림목을 지나면 곧 산청나들목이 나온다. 대원사 계곡이나 정취암으로 가려면 산청나들목에서 나가는 편이 낫고, 남사예담촌이나 남명 조식 유적지를 찾아간다면 남쪽으로 더 내려와 단성나들목에서 나오는 편이 더 가깝다. 산청에는 가파른 고개를 넘는 길들이 많아 이동에 충분한 시간을 두고 여유있게 움직여야 한다.

 


묵을 곳 & 먹을 것

‘남사예담촌’의 고택이 민박집을 운영하고 있다. 첫손으로 꼽히는 숙소다. 숙박과 함께 갖가지 체험도 할 수 있다. 숙박요금도 4만~5만원선으로 그리 부담스럽지 않은 편이다. 단속사지 인근의 청계저수지 일대에는 새로 들어선 낭만적인 펜션들이 즐비하다.

산청의 대표적인 음식이라면 한방약초를 먹고 자란 한우와 산청흑돼지. 산청한의학박물관 부근의 ‘약초와 버섯골식당’( 055-973-4479 )은 갖가지 산나물, 약초와 함께 쇠고기를 데쳐서 먹는 ‘약초버섯전골’을 내놓는다. 마치 샤부샤부처럼 약초와 산나물과 고기를 한데 데쳐 먹는 것이 생소하긴 하지만, 의외로 깊고 짙은 맛이 우러난다.

 

 

<출처> 2009. 4. 15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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