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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부산. 경남

거제, 남해 절색 해금강 품은 한려수도의 맏형

by 혜강(惠江) 2009. 4. 7.

 

경남 거제

남해 절색 해금강 품은 한려수도의 맏형  

 

르포라이터  민병준 

 

 

 

 ▲ 거제도 최남단의 여차~홍포 간 해안도로는 지중해 어느 해안에 비해도 결코 뒤지지   않는 풍광을 자랑한다.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인 거제도는 예로부터 유배지로 이름이 높았지만, 임진왜란 당시엔 조선의 함대가 왜군의 함대를 맞아 싸운 호국의 현장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눈을 놀라게 하는 자연풍광도 나그네의 눈길을 빼앗는다. 눈이 시린 쪽빛 바다엔 거센 바닷바람과 파도가 다듬은 기묘한 모양의 섬과 바위들이 넘쳐나고, 봄이면 핏빛 동백꽃이 팔색조를 부르는 섬. 바로 거제도다.

 

  남해의 큰 섬, 거제도(巨濟島)로 들어서려면 통영에서 거제대교를 건너야 한다. 통영과 거제도 사이의 좁은 해역인 견내량(見乃梁)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 함대의 서진(西進)을 막아 호남·호서를 지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길목이다. 당시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를 본부로 삼아 이곳을 굳게 지켰고, 왜군의 함선들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해 학익진으로 대파하면서 전쟁의 흐름을 바꿔놓았으니 우리 민족에겐 고마운 호국의 현장인 셈이다.  

 

  일단 거제도에 들어서면 14번 국도를 계속 따라 북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돌아볼지, 아니면 1018번 지방도를 타고 남쪽부터 시계 반대방향으로 둘러볼지 선택해야만 한다. 견내량엔 두 개의 거제대교가 걸려 있는데 만약 전자라면 신거제대교를, 후자라면 구거제대교를 건너는 게 편리하다.   이번 기행은 일반인들의 코스를 따라 신거제대교를 건너 시계 방향으로 해안도로를 돌면서 거제 이야기를 풀어보자. 견내량을 넘어 14번 국도를 따라 20여 분 달리면 고현(古縣)에 자리한 전쟁포로수용소 유적지가 나온다. 여기는 한국전쟁 중 유엔군에 포로가 되었던 공산군을 수용하던 곳이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남한은 단 3일 만에 서울을 빼앗기고 낙동강 근처까지 후퇴하였다. 하지만 그해 9월 15일 유엔군 맥아더 장군의 지휘 아래 펼쳐진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서울을 수복하고 북진을 하게 되는데, 이때 포로들이 많이 생겨났다.   처음엔 이들을 부산·경북 등에 분리 수용하였으나, 그해 11월 거제의 고현·상동·용산·양정·수월·해명·저산지구 등에 포로수용소를 설치해, 인민군 15만 명, 중공군 2만 명, 여자 포로와 의용군 3,000명 등 약 17만 명을 옮겨왔다. 당시 거제의 인구는 약 10만 명. 포로가 훨씬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당시 15만 명이나 되는 피난민도 이 섬으로 들어왔다. 거제도(巨濟島)의 한자를 우리말로 풀면 ‘크게 구제하는 섬’이라 해석했으니 그 이름값을 톡톡히 한 셈이다.  

 

  하지만 당시 이곳 포로수용소에서는 반공포로와 친공포로 사이에 유혈참극이 자주 벌어졌다. 1952년 2월 18일엔 송환 심사에 항거하는 집단폭동이 발생해 포로 77명이 사망하고, 162명이 부상당하기도 했다. 이때 미군은 1명이 사망, 38명이 부상을 당했다. 또 그해 5월 7일엔 수용소 소장인 돗드 준장이 납치되었다가 4일 만에 풀려나면서 세계적인 주목을 끌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사건은 여러 문학작품의 모티브가 되었다. 분단의 문제를 남북 모두 비판적으로 다룬 최초의 작품으로 알려진 최인훈의 중편소설 ‘광장’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여기서 주인공 이명준은 남한도 북한도 아닌 중립국을 택하게 되고, 결국 그는 인도로 떠나다가 투신하고 만다.

 

 

          

▲ 1 거제면 장터 풍경. 거제도 서부에 자리한 거제면은 조선 후기 거제현 행정· 군사의 중심지였으나 지금은 조용한 시골로 물러앉았다. / 2 원균의 함대가 왜군 함대에게 참패를 당한 해전의 현장인 칠천량. 이 바다 속 어딘가에 거북선이 잠겨 있을 것으로 보고 탐사 작업을 하고 있다.

 

   김성종의 추리소설 ‘최후의 증인’도 당시 피비린내가 넘쳤던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비극적인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쟁 당시 이곳 포로수용소 탈출사건과 관련이 있는 50년 전의 일기에서 단서를 발견하면서 시작된다. 1980년에 개봉한 이두용 감독의 ‘최후의 증인’은 이 소설을 원작으로 했고, 2001년 개봉한 배창호 감독의 ‘흑수선’은 이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이렇듯 거제는 첫 만남에서 단지 경관만 빼어난 게 아니라 이데올로기에 매몰된 동족상잔의 아픔까지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섬이었음을 알게 된다. 동족 간에 두 번 다시는 전쟁 같은 비극이 발생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다시 한 번 새겨둔다.

   거제포로수용소를 오가다 보면 시청 옆에 있는 고현성(古縣城·도기념물 제46호)을 보게 된다. 어쩐 일인지 안내판이 허술해서 놓치기 쉽지만 고현성은 거제포로수용소와 함께 거제를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유적이다.

  거제는 산성의 도시다. 왜구의 노략질이 심했던 시기에 이를 피하고자 산성을 쌓았는데 현재 흔적이 남아있는 것만도 모두 28개나 된다. 기록을 보면 거제의 치소는 자주 바뀌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1271년(고려 원종 12년) 왜적의 침입으로 거제도 주민들은 뭍으로 올라 진주·거창 방면으로 피란하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1422년(세종 4년)에 지금의 사등리로 관아를 옮겨 성을 쌓았는데, 지금의 사등성지(沙等城址·도기념물 제9호)가 그곳이다. 

  그렇지만 사등성은 좁은 편이고 식수가 모자라 새로운 대상지로 찾은 게 바로 지금의 고현이고, 그때 쌓은 성이 고현성이다. 당시 2만 명이 넘는 경상도민을 동원해 9년간에 걸쳐 쌓았다는 이 읍성은 거제에 남아있는 수많은 성들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웅장하다. 당시 고현성 산하에 기성(岐城) 7진(鎭)을 두게 된다. 이는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한 수군기지로서, 거제도 둘레의 옥포·조라포·오아포(가배량진)·영등포·장목(장문포)·지세포·율포를 이른다. 1422년(세종 4년)엔 고현성의 중심 건물로서 군영본부인 기성관(岐城館)도 세운다. 

  고현성에 올라 거제의 중심부 주변을 둘러보고 다시 14번 국도를 타고 가다 북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사실 거제 북쪽에는 유명 관광지가 없다. 그렇지만 임진왜란의 전투 상황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고자 하는 이들은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곳이기도 하다.  연초면 삼거리에서 1018번 지방도를 타고 10분쯤 달리면 왼쪽으로 칠천도라는 새끼섬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이 바로 임진왜란 당시 원균이 조선 함대를 말아먹은 칠천량(漆川梁) 해전의 현장이다. 

  잘 알다시피 1597년(선조 30년) 이순신 장군이 한양으로 압송되면서 그 후임으로 삼도수군통제사 자리에 오른 원균은 함대 170여 척을 이끌고 왜군의 함대 600여 척과 10일간 전투를 벌이게 되는데, 이 싸움에서 조선 수군은 거북선·판옥선 등 150여 척이 격침되고 1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조선 수군 전체가 몰락한 이 칠천량 해전은 임진왜란 최악의 패전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조선 수군은 왜군이 극도로 두려워할 정도의 전투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멸이란 표현이 더 정확할 정도로 참패를 당하고 말았으니 과연 패인은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많은 전쟁사 연구자들은 1차적으로 선조와 조정 대신들의 책임으로 꼽길 주저하지 않는다. 이들은 현장에 있는 장수의 의견을 무시하고 정보 분석도 제대로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적이 가장 두려워하는 장수를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고문까지 가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했다. 둘째는 의외로 권율을 꼽는다. 이순신의 상관으로서 조정에 의견 제시를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고, 그 후임으로 온 원균을 잡아다가 볼기까지 치면서 수군의 사기를 뚝 떨어뜨린 탓이다.

 

  마지막으로 패전의 가장 큰 책임자는 당연히 원균이다. 그의 전략·전술이 이순신에 훨씬 미치지 못했음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많은 기록들은 원균이 이순신에 대한 개인 감정으로 국익을 해쳤고, 부하들을 지휘하는 능력과 인품도 부족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칠천교 위에서 바다를 내려다본다. 현재는 굴양식업의 중심지로 탈바꿈한 평화로운 풍광에서 당시의 참혹했던 상황을 떠올리긴 쉽지 않다. 역사가들은 거북선도 대부분 이 일대에서 침몰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 칠천량 주변 해역은 오래전부터 거북선을 비롯한 조선 수군의 유물이 발견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으로 주목받아 왔다. 그래서 1970년대 초반부터 해군·문화재관리국·한국해양연구소 등 여러 기관에서 발굴을 시도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1996년엔 해군의 해전유물발굴단장이 가짜 별황자총통을 한산도 앞바다에 빠뜨린 뒤 진짜인 것처럼 둔갑시켰다가 구속되는 불상사도 있었다. 

 

 

        

▲ 1 옥포 대우조선해양의 골리앗 크레인. 대우조선해양은 고현의 삼성중공업과 함께 거제 경제를 이끌어가는 쌍두마차라 할 수 있다. / 2 거제도와 부산의 가덕도를 잇는 거가대교. 예정대로 2010년에 이 다리가 완공되어 거제도의 교통은 더욱  편리해졌다.

 

 

  이에 굴하지 않고 경상남도는 지난해부터 칠천량 해역에서 거북선을 찾기 위한 ‘이순신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성과도 있었다. 최근 이곳에서 조선 수군이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도자기·술병·옹기 등 43점을 바다 속에서 발굴한 것이다. 이 중 대접 6점과 술병 1점은 임진왜란 전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어 거북선도 발굴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높였다.  

비록 패전의 현장이나마 이곳에서 거북선 관련 유적을 건지게 되기를 기원하면서 1018번 해안도로를 따르면 거제도 최북단의 장목면을 한 바퀴 돌게 된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이영남과 작전회의를 한 적이 있다는 장목진 객사에 들렀다 거제도와 부산 가덕도를 잇는 거가대교 건설공사현장을 먼발치에서나마 구경한다. 이어 율천리 석장승과 눈인사하고, 외포리 대계마을의 김영삼 전 대통령 생가를 지나면 이내 대우조선소가 위치한 옥포만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곳엔 옥포대첩 기념공원이 있다. 

이전에 들렀던 칠천도 앞바다가 조선 수군 최대의 패전지라면, 이곳은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이 첫 승리를 건져낸 옥포대첩의 현장이다. “가벼이 움직이지 말라. 침착하게 태산같이 무거이 움직이라(靜重如山)”는 명언으로 유명한 그 전투……. 

 

         

▲ 1 지심도 전통 고기잡이 도구인 뜰채낚시. 봄엔 학꽁치가 많이 잡힌다. /  2 갈곶 선착장 부근에서 바라본 해금강 사자바위. 일찍이 명승으로 지정된 거제 해금강은 거제 미학의 핵심을 이룬다.

 

  이번엔 임진왜란 초기로 돌아가 보자. 경상우수사 원균은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와의 전투에서 패하자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이순신은 5월 1일 여수 앞바다에 판옥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 46척과 수군 4,000여 명을 집결시켜 당포(唐浦)에서 원균의 함대와 합류했다. 이때 원균은 거느리고 있던 70여 척의 전선을 모두 잃고 겨우 6척(판옥선 3척, 협선 3척)만 끌고 왔다.

   5월 7일 낮 12시경, 조선 함대는 옥포에 정박하고 있는 적선 50여 척을 발견하고 이를 포위해서 적선을 향해 맹렬히 포격을 가했다. 화력이 우세했던 조선 함대는 이곳에서 왜선 26척을 격침시키고, 달아나는 왜군을 계속 추격하여 마산에서 5척, 통영에서 11척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해전에서 왜군 4,000명을 수장시켰는데, 조선 수군은 단 1명도 전사자가 없는 완벽한 승리였다.

 

            

▲ 1 햇살도 파고들지 못할 정도로 빼곡한 지심도 상록수림. / 2 조물주의 창작에 인간의 정성이 더해져 완성된 외도에서는 수많은 남국의 식물들이 이국적인 정취를 한껏 발산한다.

 

   잘 알려진 ‘삼가 적을 무찌른 일로 아뢰나이다’로 시작하는 이순신 장군의 장계는 이 전투에 대한 보고서였다. 여담이지만, 이순신과 원균의 악연은 바로 이 장계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처음에 원균이 이순신에게 구원병을 청하여 적을 물리치고 연명(聯名)으로 장계를 올리려 하였다. 이에 순신이 말하기를 ‘천천히 합시다’ 하고는 밤에 스스로 연유를 갖춰 장계를 올리면서 원균이 군사를 잃어 의지할 데가 없었던 것과 적을 공격함에 있어 공로가 없다는 상황을 모두 진술하였으므로, 원균이 듣고 대단히 유감스럽게 여겼다. 이로부터 각각 장계를 올려 공을 아뢰었는데 두 사람의 틈이 생긴 것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선조수정실록의 기록이다. 

  이 옥포대첩 현장엔 지금 대우조선해양, 즉 대우조선소가 들어서 있다. 거제 여행에서 거제를 1인당 소득이 3만 달러를 넘어선 고장으로 만든 1등 공신인 대우조선해양을 방문하지 않는다면 거제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핵심을 놓치는 게 된다. 홈페이지를 통해 미리 견학신청을 해놓으면 20~30분이라는 짧은 시간이나마 공장 안을 둘러볼 수 있다. 길손도 이렇게 구경했다.  

임진왜란 첫 승전지인 옥포만에 자리 잡은 대우조선해양은 1973년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건설을 시작해 1978년에 설립되었다. 현재 130만 평의 대지 위에 세계 최대 크기의 900톤 골리앗 크레인과 정규 축구장 9개 넓이의 100만 톤급 드라이 도크 등 초대형 최신 설비들을 갖추고 있다. 

  그렇지만 지난 1999년 모기업인 대우그룹의 해체와 함께 워크아웃을 겪었고, 이후 대주주인 산업은행이 관리하고 있는데 정부의 공적자금 회수방침에 따라 매각 대상자를 찾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한화그룹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지만 한화가 진행 중 포기하면서 현재는 어수선한 분위기다. 그럼에도 대우조선해양은 지난 해 사상 최대인 1조 원이 넘는 영업이익을 내는 저력을 발휘했다.

 

  조선업은 단일 업종으로는 드물게 우리나라 기업이 세계 1~3위를 차지하고 있다. 규모면에서 울산의 현대중공업이 1위이고, 거제의 경제를 일으킨 1등 공신인 옥포의 대우조선해양은 거제 고현에 있는 삼성중공업과 2위를 다투고 있다. 이 둘은 거제의 경제를 이끄는 쌍두마차다. 두 조선소의 근로자와 그 가족이 인구 21만 명인 거제도 전체 인구의 76%나 된다고 하니, 가히 ‘거제도=조선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골리앗 크레인과 헤어지니 장승포 앞바다에선 지심도가 손짓한다. 거제도엔 모두 70여 개의 새끼섬이 딸려 있는데, 이 중에서 지심도와 외도는 누구라도 한 번쯤은 반드시 둘러봐야 할 곳으로 꼽힌다.

 

  예전 거제도는 섬 전체가 동백 천지였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학동 동백림(천연기념물 제233호)과 지심도를 비롯한 몇몇 군락지 외엔 동백이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이유는 싱싱한 꽃봉오리 채로 뚝 하고 떨어지는 동백꽃이 마치 죄인의 목이 잘리는 형상이라 귀양 온 선비들이 꺼려 주변의 동백나무를 마구 베어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경제적 이득을 노린 남벌 때문이었겠지만,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더 믿는 눈치다.         

 

   장승포항에서 뱃길로 10~20분 정도 떨어져 있는 지심도는 동백나무 원시림이 터널을 이루고 있는 섬이다. 지심도(只心島)라는 이름은 섬의 모양이 마음 심(心)자를 닮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멀리서 보면 보리알과 비슷하다 하여 보리섬으로도 불려왔다. 요즘엔 동백섬으로 더 알려져 있다. 지심도엔 희귀종인 풍란을 비롯해 후박나무·팔손이·해송 등 모두 30여 종의 식물이 자생하고 있다. 그 중 동백나무가 무려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으니 이렇게 불려도 어색치 않을 성싶다.

   지심도 해안은 대부분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선착장에서 마을로 오르는 200m 가량의 비탈진 길 말고는 대부분 부드럽고 평평하다. 원시림으로 들어찬 작은 섬 치고는 길이 비교적 잘 나있는 편이고, 선착장과 민가 사이의 비탈길에만 콘크리트를 깔아놓았을 뿐 나머지는 부드러운 흙길이다. 따라서 어린이들도 2~3시간 정도 발품을 팔면 안전하게 지심도 전체를 둘러볼 수 있다.

   선혈 같은 동백꽃이 수북하게 떨어져 있는 어둑한 동백터널, 하늘 높이 솟아오른 아름드리 해송, 햇살도 파고들지 못할 정도로 빼곡한 상록수림, 동박새 지저귀는 소리에 문득 뒤돌아보면 붉은 동백꽃 너머로 몸을 뒤척이는 쪽빛 바다……. 지심도 상록수림 오솔길을 산책하며 누릴 수 있는 즐거움들이다. 지심도 동백꽃은 보통 11월부터 피기 시작해 한겨울에도 피고 지기를 거듭하는데, 3월에 절정을 이루고 4월 초순이 되면 대부분 스러진다.

 

 

▲ 1 수령 200년 정도로 추정되는 외간리 동백나무. 동서로 두 그루의 나무가 마주보고 있어 ‘부부나무’라고도 불린다. / 2 1170년 정중부의 난으로 폐위된 고려 의종이 3년간 머물렀던 폐왕성. 의종은 복위를 위해 경주로 나갔다가 이의민에게 살해당하면서 한 많은 일생을 마쳤다.

 

  한편 지심도 선착장에서 배를 기다리다보면 지심도 특유의 어로방법을 구경할 수도 있다. 이는 대나무 끝에 매단 큼직한 그물로 뜰채를 만들어 물고기를 잡는 뜰채낚시인데, 주민들은 이 재래식 낚시장비를 ‘반대(반두)’라고 부른다. 뜰채낚시를 바다에 던져놓고 크릴새우나 홍합 부스러기 등의 밑밥을 던져 넣으면 이를 먹기 위해 물고기가 몰려든다. 이때 그물을 들어 올리면 되는 것이다. 잡히는 어종은 학꽁치·놀래미·우럭·볼락·자리돔 등 매우 다양하다. 요즘엔 학꽁치가 주종을 이룬다. 

  지심도보다 조금 더 유명한 섬, 조물주의 창작에 인간의 정성이 더해져 완성된 외도(外島)는 선착장에서 들어가는 길부터 심상치 않다. 아름드리 동백나무와 하늘을 뒤덮은 후박나무, 남국의 내음 물씬 풍기는 야자수, 그리고 섬을 온통 울긋불긋 수놓은 많은 남국의 식물들이 이국적인 정취를 한껏 발산한다. 

  외도가 거제도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탈바꿈한 것은 젊은 시절 무인도였던 외도로 바다낚시를 하러왔던 고 이창호(2003년 작고)씨가 1969년 사들인 후 30년간 공을 들인 끝에 가꾼 결실이다. 그는 처음엔 이곳에서 감귤농장도 해보았고 돼지도 키워봤지만 모두 실패했다. 결국 해금강을 찾는 사람들이 쉬어가는 공간으로 만들기 위한 섬으로 꾸미기 시작해 지금에 이르렀다. 유리창을 통해 바다 풍경이 보이는 ‘명상의 언덕’, 에게해에 온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하는 ‘외도성’ 같은 풍광에 이끌려 다니다보면 시간이 후딱 지나간다. 

  외도와 지심도는 거제도에서 인기로 쌍벽을 이루는 섬이다. 그래서 길손은 둘 중 어느 섬이 더 좋으냐는 질문을 이따금 받곤 한다. 둘 다 나름대로 매력과 장점이 있지만, 길손은 인공이 보태어진 외도보다는 자연스럽고 정갈한 맛이 넘치는 지심도에 조금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무엇보다 외도는 개인 소유라 사람의 온기가 없지만, 지심도는 배만 타면 12가구 20여 명의 순박한 주민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아름다운 풍광이 곳곳에 펼쳐진 거제 남부권에서도 필수 산책코스인 몽돌해안을 거닐었으면 드디어 거제 해금강이다. 거제도 미학의 화룡점정인 거제 해금강을 감상하려면 유람선을 타거나 육로를 따라 갈곶리 갯바위로 가야 한다. 물론 두 가지를 모두 취해야 거제 해금강을 봤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거제도에서 해금강 유람선은 장승포 등 여러 곳에서 출항한다. 그 중에서 거제도 남쪽에 있는 도장포는 해금강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다. 이곳에서 배를 타면 해금강을 금방 만나게 된다. 바다를 향해 포효하는 사자바위, 바위 꼭대기에서 오랜 세월을 버티고 해금강을 지켜온 천년송, 그 사이로 일출과 월출을 볼 수 있다는 일월관암 그리고 은진미륵바위·신랑신부바위·거북바위……. 모두 오랜 세월 바닷바람과 파도가 빚어낸 명품들이다. 진시황의 명으로 불로초를 구하던 서불 일행이 여기서 그네를 탔다는 전설은 해금강의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해금강 유람은 오랜 세월 파도와 바람이 깎아낸 십자동굴에서 절정을 맞는다. 배가 좁은 해벽 틈새로 비집고 들어가면 바위에 부딪치며 솟아오른 높은 파도가 선상까지 튀어 올라 오싹 소름까지 돋는다. 

  거제도는 유럽풍의 펜션이 넘쳐나는 곳이다. 따라서 숙박할 곳이 많은데, 길손은 해금강 가까운 갈곶리를 선호하는 편이다. 해금강의 사자바위 너머로 떠오르는 일출 감상을 위한 시간 맞추기가 수월할 뿐만 아니라, 그 다음 이어지는 신선대나 바람의 언덕 아침 산책은 언제나 흐뭇한 즐거움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이제 거제도 최남단의 해안 드라이브를 즐길 시간이다. 거제도는 대체적으로 해안 풍광이 아름다운 섬이다. 특히 최남단의 여차~홍포 간 해안도로는 지중해 어느 해안에 비해도 뒤지지 않는 풍광을 자랑한다.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쪽빛 바다에 징검다리처럼 혹은 그리움처럼 둥실둥실 떠 있는 대병대도·소병대도 같은 바위섬, 그리고 가왕도·매물도 풍광은 한 폭의 수채화가 된다. 거제도 해안도로는 거의 전 구간이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있지만, 여차~홍포 구간은 아직도 비포장이라 그런지 가슴 설레는 풍광이 더욱 운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능하면 천천히 이곳을 지나게 된다. 물론 산을 좋아하는 이라면 거제도 최고 조망을 자랑하는 망산(373m)의 유혹을 도저히 뿌리칠 수 없을 테지만 말이다. 

  많은 관광객들이 거제도 북부와 동부를 거쳐 최남단의 여차~홍포 해안도로를 달리며 한려해상의 아름다움을 감상했다면 거제는 거의 다 돌아본 셈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거제 서부 역시 허투루 여길 수 없는 자신만의 때깔을 지니고 있는 지역이다. 

  거제도 서부의 중심은 거제면. 임진왜란 때 고현성이 왜군에게 함락될 때 기성관이 불에 타버린 뒤 거제읍성은 200여 년간의 고현시대를 마감하고 1663년(현종 4년) 지금의 거제면 소재지로 옮기게 되었다. 이후 거제면은 300여 년간 거제도 행정·군사의 중심이 되었다. 현재 이곳엔 거제 관아의 중심건물로서 진주의 촉석루, 밀양의 영남루, 통영 세병관과 함께 영남 4대 누각으로 불리는 기성관, 유배 온 우암 송시열이 제자를 가르치던 반곡서원 그리고 지방교육기관인 향교 등이 남아 있다. 거제도라는 지명 역시 이곳에서 유래했음을 알 수 있는데, 지금의 거제면은 거제에서 지명도가 그리 높지 않지만 주민들의 자부심은 제법 높다.

 


▲ 1 거제도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사시사철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 2 학동 동백림은 규모도 클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팔색조가 번식하는 대표적인 지역이라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 3 거제현 관아의 중심건물인 기성관, 진주의 촉석루, 밀양의 영남루, 통영 세병관과 함께 영남 4대 누각으로 꼽힌다.

 

  이제 슬슬 거제 여행을 접어야 할 시간. 둔덕면에서 생명파 시인인 청마 유치환(柳致環1908~1967년) 시인을 만난다. 청마는 1908년 둔덕면 방하리 산방산 아래에서 태어나 3살까지 살다가 통영으로 이사 갔다. 한때 청마 유족은 통영과 청마의 고향을 두고 소송까지 벌이는 논란을 벌이기도 했다. 통영에 있는 청마문학관의 청마 연보에 ‘통영시 태평동’으로 잘못 기재돼 있는 청마 출생지를 고쳐 달라고. 그 결과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도 네이버나 야후 등의 사전에는 청마의 고향이 통영으로 적혀 있다. 

  현재 이곳엔 청마가 태어난 당시의 모습 그대로 복원한, 아담하고 포근한 청마 생가가 자리 잡고 있다. 바로 옆의 청마기념관은 청마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2008년 조성된 문화공간이고, 청마 묘소는 이곳에서 약 2km 정도 떨어진 양지바른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일제강점기를 지낸 많은 지식인이 그러하듯 청마도 친일 시비에 휘말렸다. 그 동안 청마의 시 중에서 ‘전야’ ‘북두성’ 등이 친일 의혹을 받으면서도 시어 해석에 따른 것이라 하여 비난을 그럭저럭 피해갈 수 있었지만, 2007년 발견된 <만선일보(만주에서 발행된 친일 성향의 한국어 일간신문)>의 ‘대동아전쟁과 문필가의 각오’란 제목의 산문은 청마 옹호론자의 말문을 막아 놓았다.

 


▲ 1 둔덕면 방하리에 있는 청마 생가. 흔히 청마는 통영 태생으로 알려져 있지만, 1908년 이곳에서 태어나 3살까지 살다가 통영으로 이사 간 것이라 한다. / 2 청마문학관 앞에 세워져 있는 청마 유치환 동상. / 3 청마 유치환 시인의 고향인 둔덕면 입구에 있는 청마 시비. 고향의 정경을 잔잔하게 노래한 ‘거제도 둔덕골’이라는 시가 새겨져 있다.

 

  산방산이 굽어보는 생가 마루에 앉아 학창시절 외우고 다니던 청마의 시를 떠올려본다. 뭐가 있을까. 그렇지.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으로 시작하는 시 ‘깃발’이 있었지. 아니면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懷疑)를 구하지 못하고 / 내 또한 삶의 애증(愛憎)을 다 짐지지 못하여 /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잔뜩 힘을 줘 읊던 시 ‘생명의 書’도 여전히 좋다. 물론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하고 바다를 향해 울부짖는 ‘그리움’ 같은 이별시가 있지만, 이 시는 통영항에서 소주 마시며 읊는 게 훨씬 낫지 싶다. 그렇다면 시인의 생가에 왔으니 고향에 관한 시도 한 편 들어보자. 둔덕면 길가 비석에 새겨진 시.
 
 
   ‘거제도 둔덕골은 / 팔 대로 내려 나의 부친의 살으신 곳 / 적은 골안 다가 솟은 산방산 비탈 알로 / 몇백 두락 조약돌 박토를 지켜 / 마을은 언제나 생겨난 그 외로운 앉음새로 / 할아버지 살던 집에 손주가 살고 / 아버지 갈던 밭을 아들네 갈고 / 베 짜서 옷 입고 / 조약 써서 병 고치고’(유치환 시인의 ‘거제도 둔덕골’ 중에서)

 

  원래 이번 거제 기행은 청마의 시편을 읊으면서 마무리하려 했으나 폐왕성지(廢王城址)에서 고려 의종을 만나는 것으로 일정을 바꿔야겠다. 1170년 고려 의종이 정중부의 무신정변으로 폐왕이 된 뒤 추방되어 3년간 머물렀다는 폐왕성지는 청마 생가에서 승용차로 5분 거리에 있다. 승용차를 타고 임도를 따라 산성 바로 아래까지 올라갈 수 있다.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세우는 데 중추적 역할을 했던 무인들은 제4대 광종 이후 점차 힘을 잃기 시작했고, 11대 문종에 이르러 문신관료 중심체제가 확립된다. 이후 무신들의 불만은 점차 높아졌고, 결국 18대 의종 때인 1170년(의종 24년) 무신들이 문신들을 참살하는 ‘보현원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정중부 등 주동자들은 ‘무릇 문관을 쓴 자는 비록 서리라도 죽여서 씨를 남기지 말라’고 선동하며 거의 모든 요직의 문신들을 제거하고는 의종마저 폐위하고 왕의 동생인 익양공을 19대 임금인 명종으로 삼았다. 

  몇 년 전 방영되었던 역사드라마 ‘무인시대’는 바로 1170년 일어난 ‘보현원 사건’으로 시작했다. 폐위된 의종은 거제도로 추방되어 3년간 이 폐왕성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복위를 꾀하기 위하여 경주로 나갔으나 1173년(명종 3년) 장군 이의민에게 시해당하고 말았다. 

  그 후로 80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거제엔 의종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최근 폐왕성 우물을 복원할 때 고려 때 쓰던 그릇 조각이 많이 나왔고, 오량 석조여래좌상도 의종이 폐왕성에 머물 때 만들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견내량 주변엔 의종이 배를 타고 건넜다는 전설을 간직한 전하도목(殿下渡目)이라는 지명이 있고, 고려골이라 불리는 곳엔 고려인들의 무덤이 남아 있다고 전한다. 또 지금 둔덕면 일대에 살고 있는 반씨들은 그 당시 왕을 모시고 왔던 장군의 후손이라고 한다. 

  폐왕성 망루였음직한 바위에 올라 북서쪽을 바라보니 견내량으로 이어지는 한산도 앞바다가 한눈에 펼쳐진다. 옅은 해무 사이로 폐위된 의종이 탄 배가 건너오는 것도 보이고, 이순신 장군의 함대가 왜군 함대를 맞아 학익진을 펼치는 장면도 보인다. 이렇듯 한없이 이어지는 상상의 날개. 그때 문득 어디선가 들려오는 툭 하는 소리. 의종의 눈물이 떨어지는 소리인가? 아니면 왜군의 동태를 감시하던 조선 초병의 발자국 소리? 아니면 멀리 지심도 동백꽃 떨어지는 소리? 그래, 거제를 찾은 봄의 여신이 살포시 내려앉는 소리였구나.

 

거제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거제 포로수용소(문화재자료 제99호)는 한국전쟁 중 유엔군에 포로가 되었던 공산군을 수용하던 장소다. 1950년 11월부터 고현·상동·용산·양정·수월·해명·저산지구 등 360만 평에 포로수용소를 설치하여, 인민군 15만, 중공군 2만, 여자 포로와 의용군 3,000명 등 최대 17만3,000명을 수용했다. 현재 수용소 부지엔 포로생활관·체험관·디오라마관 등 한국전쟁과 포로생활에 관한 다양한 시설이 들어서 있다. 요금 어른 ?,000원, 어린이 ?,000원. 주차 2시간 1,000원.

 

 

옥포대첩 기념공원

 

옥포동에 위치한 옥포대첩 기념공원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일본 수군을 무찌른 것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한 공원이다. 1592년 5월 7일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 장군이 경상우수사 원균과 함께 현재 대우조선이 위치한 옥포만에서 왜선 26척을 격침시켰다. 기념탑·참배단·옥포루·팔각정·전시관 등을 건립했다. 입장료 어른 1,000원, 어린이 400원. 주차료 승용차 2,000원. 문의 055-639-8129

 

▲ 1 거제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2 옥포대첩 기념공원. 3 거제 해금강. 4 외도 보타니아.

거제 해금강

 

남부면 갈곶리의 거제 해금강(海金剛·명승 제2호)은 두 개의 큰 바위섬이 서로 맞닿고 있어 마치 금강산의 해금강을 연상하게 한다는 명소다. 원래 이름은 ‘갈도’인데, 중국 진시황제의 불로초를 구하는 서불이 동남동녀 3,000명과 함께 찾았다는 ‘서불과차’라는 글씨가 새겨질 정도로 약초가 많다 하여 약초섬이라고도 불렸다. 십자동굴을 비롯하여 석문·사통굴·일월봉·미륵바위·사자바위 등이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다. 장승포 등지에서 유람선이 운항하고 있다.

 

외도 보타니아

 

거제도에서 남동쪽으로 4km 떨어진 곳에 있는 외도는 개인 소유의 섬이다. 해안선 길이 2.3km로 해발 80m의 기암절벽에 둘러싸여 있다. 개인이 1976년 관광농원으로 가꾸기 시작해 1995년 외도해상농원을 개장했다. 천연 동백숲에 아열대 식물인 선인장·코코스야자수·가자니아·선샤인·유카리·병솔·잎새란·용설란 등 3,000여 종의 수목으로 수많은 아열대 식물이 어우러져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섬엔 전망대·조각공원·야외음악당·휴게시설 등이 갖추어져 있고, 공룡굴·공룡바위·공룡발자국 등이 있다. 외도로 가려면 장승포나 일운면 구조라, 동부면 학동리, 남부면 갈곶리, 일운면 와현리 등에서 유람선을 타야 한다. 입장료 어른 8,000원, 어린이 3,000원. 문의 관리소 070-7715-3330 

 

지심도

거제 남동쪽 장승포 앞바다에 떠있는 지심도(只心島)는 동백나무 원시림이 터널을 이루고 있는 섬이다. 동백나무가 많다 하여 요즘엔 동백섬이라고도 불린다. 실제로 지심도 안엔 희귀종인 풍란을 비롯해 후박나무·팔손이·해송 등 모두 30여 종의 식물이 자생하고 있는데, 그 중 동백나무가 무려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다. 지심도의 면적은 0.356km2, 해안선의 길이는 10리가 채 안 되는 3.7km, 가장 높은 지점이 해발 97m이니 아담하고 낮은 섬이다. 장승포항에서 매일 5회(08:00, 10:30, 12:30, 14:30, 16:30) 운항한다.

 

 학동 흑진주 몽돌해변

 

 남동쪽의 학동해안은 몽돌이라 불리는 조약돌이 길이 약 1.2km, 폭 50m, 면적 3만km2에 펼쳐져 있다. 흑진주 같은 검은 몽돌로 이루어져 있어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으로 꼽힌다. 한여름이 아니더라도 맨발로 산책하며 즐길 수 있다. 근처엔 천연기념물 제233호인 동백림 야생 군락지가 있다.

 


▲ 1 지심도. 2 학동 흑진주 몽돌해변. 3 여차-홍포 해안도로. 4 바람의 언덕.

여차-홍포 해안도로

 

거제도 최남단 해안으로 드라이브를 하면서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한려수도 해상국립공원의 풍광을 감상할 수 있고, 망산(373m)에 오르면 한려수도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일부 구간을 비포장도로로 남겨놓았지만 일반 승용차도 무난히 지나갈 수 있다. 중간 중간 조망 좋은 곳에 전망대를 설치해 놓았다. 기암절벽을 끼고 자리 잡은 여차마을엔 몽돌해안도 있다.  

 

바람의 언덕

 

남부면 해금강 마을 가기 전 좌측의 도장포 해안으로 내려가면 ‘바람의 언덕’이라는 곶이 보인다. 잔디로 이루어진 부드러운 언덕으로 바다가 시원스레 바라다 보이는 전망이 좋은 곳이다. 뒤쪽 산기슭엔 빼곡한 동백나무 숲이 펼쳐져 있다. 텔레비전 드라마 ‘이브의 화원’(2003년 SBS 아침드라마), ‘회전목마’(2004년 MBC 수목드라마)에 배경지로 나오면서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고 있다. 

 

거제현 관아

 

거제면 동상리의 거제현 관아(사적 제484호)는 조선시대 거제의 행정과 군사를 통괄하던 곳이다. 비록 동헌 건물이 헐리고 그 자리에 면사무소가 들어서 있지만 주요 건물인 객사와 부속건물이 남아 있다. 중심 건물이었던 기성관(岐城館)은 1422년(세종 4년) 기성(岐城) 7진(鎭)의 군영본부로 사용하기 위해 건립했다. 임진왜란 중 고현성이 함락되고 1663년 현령 이동고가 부임해 거제현을 거제면에 옮기면서 기성관도 그때 옮겼다. 단청이 화려하고 웅대한 누각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반곡서원

 

거제면 동상리에 있는 반곡서원은 조선 숙종 때 우암 송시열 선생이 유배 와서 거처한 곳으로, 1704년(숙종 30년)에 우암 선생의 학맥을 이어온 거제 지방 유림이 창건했다. 서원 뒤엔 우암 선생의 유허비가 있고, 오른쪽엔 우암 선생을 모시고 제례를 지내는 제당과 왼쪽으로 독록 정운성 선생을 모신 독록당이 있다. 

 

장목진 객사

 

장목면 장목리의 장목진 객사(長木鎭 客舍·도유형문화재 제189호)는 조선시대 거제부 소속 7개 진영 중 하나였던 장목포진의 관아건물이다. 세워진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장목리 동구에 있던 것을 정조 9년(1785년)에 이곳으로 다시 옮겨 지었다고 한다. 진해만 일대를 방어하고 대한해협을 바라보기 위한 전략의 요충지였던 이곳은 항상 장수들이 모여 전략을 의논하는 장소로 사용됐다.

 


▲ 1 거제현 관아. 2 반곡서원. 3 장목진 객사. 4 거제향교. 5 거제 장흥사 지장보살시왕탱. 6 오량 석조여래좌상.

거제향교

 

거제향교(도유형문화재 제206호)는 1432년(세종 14년) 고현에 처음 세워졌으나 1664년(현종 5년)에 동헌을 거제로 옮겨 올 때 거제면 서정리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임진왜란 때 고현성(古縣城)이 함락되면서 성 밖에 있던 향교가 불탔기 때문에 향교의 그 이전 사적에 대하여는 알 길이 없다고 한다. 다른 향교에 비해 영역이 넓으며 전체에 토속적인 돌담을 둘렀다. 

 

거제 장흥사 지장보살시왕탱 

 

거제 장흥사 지장보살시왕탱(도유형문화재 제454호)은 조선시대의 작품이다.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시왕과 판관 등 전체적인 구도가 짜임새 있다. 제작 시기나 봉안처가 분명하며, 시주자 중엔 상궁이 포함되어 있어 당시 시주자 계층의 일면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양질의 안료를 사용한 것이 돋보인다.  

 

오량 석조여래좌상

 

사등면 오량리의 석조여래좌상(도유형문화재 제48호)은 1950년경에 오량리 절골의 석불암(石佛庵) 앞산에서 출토되어 이 암자에 봉안하고 있는 불상이다. 1170년 고려 의종이 거제도에 폐왕성(廢王成)을 쌓고 3년간 머물면서 만들었다는 설이 전해진다. 손 모양은 오른손을 무릎 위로 올리고 손가락이 아래로 향한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석가모니불임을 알려준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는 연꽃무늬가 새겨진 원추형의 상대와 하대만 남아 있다. 하체의 조각이 소홀하고, 옷주름이 형식적으로 처리된 점에서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불상으로 추정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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