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내여행기 및 정보/- 부산. 경남

밀양의 봄, 아름다운 풍광과 역사의 향기 그리고 전설

by 혜강(惠江) 2009. 4. 9.

눈부신 밀양의 봄

아름다운 풍광과 역사의 향기, 그리고 전설…

 

박경일기자

 

 

 

농사를 위한 저수지로 만들어졌으되 주위에 왕버드나무 등 나무를 심어 선비들이 노니는 명소로 가꿔진 위양못의 전경. 작은 섬에 들어서 물 쪽으로 문을 낸 정자 완재정이 정취가 빼어나다.

 

 

이른 아침, 봄볕이 퍼지면서 자그마한 위양못의 물 가운데 섬에 들어앉은 정자 완재정을 비춥니다. 위양못을 둘러치고 있는 우람한 왕버들과 이팝나무, 팽나무, 서어나무 가지마다 새로 난 연초록 이파리들이 눈부시게 반짝거립니다. 바람 한 점 없어 수면은 고요한데, 인기척에 놀란 물오리 몇마리가 푸드득 날아오릅니다. 파릇파릇 머리를 내미는 봄나물이 발바닥을 간지럽히는 건너편 제방 둑에 서서 위양못과 완재정이 그려낸 ‘완벽한 풍경화’를 감상합니다. 이런 풍경 앞에서 ‘아름답다’는 말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할까요.

경남 밀양은 여행자들의 발길이 좀처럼 닿지 않는 곳입니다. 수도권에서 멀기도 하지만, 여행목적지로는 그다지 알려진 것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한때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이 화제가 되면서 반짝 관심을 끌기도 했지만, 사실 고통과 구원이란 묵직한 영화의 주제가 오히려 밀양을 쉽게 가닿을 수 없는 곳처럼 여겨지게도 했습니다. 밀양에서 영화 촬영 현장을 ?杵틈募磯摸?이내 실망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 속에서 ‘밀양이 어떤 곳이냐’는 질문에 주인공 ‘종찬’(송강호)이 답했던 “똑같아요. 사람 사는 곳이 다 똑같지요”라는 말을 되뇔 수도 있을 겁니다.

사실 ‘생활의 공간’으로만 들여다본다면 밀양이 다른 중소도시와 무어 그리 다를 게 있겠습니까. 그러나 생활의 틈 사이에 슬쩍 끼어든 여행자에게 밀양은 매력이 넘치는 곳입니다. 아름다운 자연풍광과 격동치는 역사의 자취 여기다가 오래 묵은 전설까지…. 밀양에서는 무궁무진하게 이야기가 실타래처럼 풀려나옵니다. 그 실타래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숨이 다 찰 지경입니다.

누대에 걸쳐 공적인 공간을 정취 넘치는 정원처럼 가꿔 놓은 위양못의 아름다움과 수백년 세월을 건너온 영남루 누각의 웅장함, 성리학의 거두였던 점필재 김종직의 서릿발 같은 정신, 그리고 만어사에 깃든 돌로 변한 수만마리 물고기 이야기를 따라갑니다. 풍경과 역사, 여기다가 전설까지 겹쳐져 여정은 풍성해집니다. 밀양에 가시겠다면, 당도했을 때 마침 따스한 봄볕이 가득한 날이었으면 합니다. 밀양처럼 봄볕이 아름다운 곳도 드물기 때문입니다.

아 참,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의 영어제목(Secret Sunshine) 탓에 밀양이란 이름의 뜻이 ‘은밀한 볕’이라고 알려졌지만, 기실 한자의 뜻을 풀어본다면 빽빽할 밀(密)에 볕 양(陽). 즉 ‘빽빽한 볕’이 내리쪼이는 곳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밀양이란 이름도 사실 미르(용의 옛이름)벌(벌판)이란 우리말의 소리를 한자로 옮기면서 나온 것이니, 밀양의 본 뜻은 ‘용이 사는 벌판’정도로 풀이해야 옳겠습니다.

 

 

불공 드리던 수만마리 물고기 돌이 돼 萬魚寺앞 바위천지로…

풍광·역사·전설의 오버랩 ‘밀양의 봄’

 

 

 

 

# 더 이상 아름다울 수 없다…위양못의 봄 풍경

밀양에서 봄 풍경이 가장 아름다운 곳을 꼽으라면 단연 위양못이다. 위양지는 신라 때 혹은 고려 때 만들어진 저수지로 ‘위양’이란 이름은 ‘양민(良)들을 위한다(位)’는 뜻. 위양못이 특별한 것은 그것이 농사를 짓기 위해 축조한 것이긴 하나, 선비들이 노니는 명소로도 가꿔졌기 때문이다. 세도가의 고택 정원들이 ‘사적인 공간’으로 꾸며졌다면, 위양못은 드물게도 ‘공적인 공간’을 운치있게 꾸며놓은 곳이다. 저수지에 다섯 개의 섬을 만들었고, 주위를 둘러가며 왕버드나무와 이팝나무, 갖가지 꽃을 심어 빼어난 명소가 됐다. 한때 있었다던 다섯개의 섬은 이제 하나만 남았지만, 아직도 위양못의 둑에는 오래묵은 아름드리 버드나무 가지들이 척척 늘어져 있다.

위양지에 정취를 보태는 것은 못 가운데 섬에 들어선 정자인 완재정이다. 완재정은 지어진 지 이제 100년 남짓이지만, 이름이 지어지고 시로 읊어진 것은 500년이 넘었다. 임진왜란 당시 왜적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12년만에 사신을 따라 돌아와 이곳에 자리를 잡았던 안동 권씨의 일족이 위양못에 정자를 짓고자 ‘완재’란 이름부터 먼저 지었다. 실제 정자는 짓지 못했으나 마음 속에 정자을 짓고는 그 풍류를 시로 남겼던 것. 그렇게 수백년의 세월이 흐른 뒤 1900년에 안동 권씨 후손들이 유지를 받들어 비로소 완재정을 지었던 것이다.

자그마한 섬에 들어선 정자와 휘휘 늘어진 버드나무와 이팝나무 가지가 한데 어울려 물그림자를 그려내는 경관은 마치 실재하지 않는 ‘완벽한 이상(理想)의 공간’처럼 느껴진다.

위양못은 못 주위의 왕버드나무에 신록이 피어나기 시작하는 이맘 때부터 이팝나무 꽃이 피는 늦봄까지가 가장 아름답다. 못 주위로 폭신한 산책로 흙길이 만들어져 있어 완연한 봄 기운 속에서 산책을 하는 맛이 각별하다.


# 수만마리 물고기가 돌로 변해 불도를 닦는 곳…만어사

 

만어사 앞의 너덜겅. 끝간데 없이 펼쳐진 바위들은 불법을 닦기 위해 수만마리 물고기가 돌이 됐다는 전설을 갖고 있다. 신기하게도 이 바위를 돌로 두드리면 쇠종소리가 난다.

 

밀양이란 이름은 용을 뜻하는 옛말인 ‘미르’란 우리 말의 발음을 한자로 쓰면서 ‘밀(密)’자를 따왔고, 벌판을 뜻하는 벌이 ‘볕(陽)’으로 쓰이면서 만들어진 이름이다. 이렇게 어원을 풀어보자면 밀양이란 이름의 뜻은 ‘용의 벌판’이다. 밀양이 최근 미르(용)와 유토피아를 합성해 ‘미르피아’란 별칭을 쓰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밀양에는 용에 얽힌 이야기들이 많다. 그중 눈길을 끄는 것이 절집 만어사에 대한 전설이다. 만어사는 해발 670m의 만어산의 9분 능선쯤에 자리잡고 있다. 가파르고 좁은 시멘트 포장 임도를 한참을 오르면 도무지 민가가 있을 것 같지 않는 산간 오지에 갑자기 마을이 나타나고, 여기서 더 오르면 만어사다. 만어사는 신라시대 창건했다는 절집도 제법 운치있지만, 그보다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바로 절집 앞에 펼쳐진 너덜겅이다. 너덜겅이란 돌이 무너져내려 흩어져 있는 비탈을 뜻하는 말. 돌이 무너져 내린 것이 무슨 볼거리가 되나 싶지만, 광활하게 펼쳐진 너덜겅 앞에서는 누구든 탄성을 지른다.

만어사 너덜겅에는 용과 물고기의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옛날 옛적 만어산에 다섯 명의 처녀 악귀가 독을 품은 용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농사를 방해해 4년이나 흉년이 계속됐다. 만어산을 찾아온 수로왕이 주술로 악귀와 용을 물리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부처에게 청해서 설법을 했더니 독룡이 부처의 제자로 받아줄 것을 간청했다. 이렇게 용이 부처의 제자가 되자, 이 소문을 들은 용왕의 아들이 자신도 제자가 되길 소원해 수만마리의 물고기 부하를 이끌고 부처를 찾아 간청했다. 그래서 만어사에는 용왕의 아들과 그를 따라온 온갖 물고기들이 불공을 드리며 불도를 닦게 됐다는 얘기다. 물을 떠나 만어사에 당도한 물고기들은 돌로 변했고, 그것이 끝없이 펼쳐진 너덜겅의 바위라는 것이다.

이런 전설이 기록된 삼국유사에는 ‘돌이 된 물고기들은 종과 경쇠의 소리가 난다’고 적었다. 과연 말그대로 너덜겅의 바위는 신기하게도 돌을 들어 내리치면 쇳소리와 종소리를 낸다. 특히 몇개의 바위에서는 도무지 돌에서 나는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맑은 쇳소리가 난다. 그래서 절집을 찾은 사람들은 저마다 작은 돌을 하나씩 쥐고는 가장 맑은 종소리를 내는 바위를 찾는다.


# 영남루의 현판 글씨가 일곱살짜리 아이의 솜씨라고?

 

영남루는 누각의 웅장한 규모답게 시원시원한 필치의 현판들이 즐비하게 걸려있다. 앞쪽의 ‘영남루(嶺南樓)’란 현판은 한말의 명필 성파(星波) 하동주가 쓴 것이고, 그 아래로 보이는 안쪽의 현판은 1844년 소실된 영남루를 다시 지은 이인재 밀양부사의 일곱살짜리 둘째 아들 이현석의 글씨다.

 

 

밀양 사람들에게 ‘가볼 만한 곳’을 물으면 십중팔구 영남루를 첫 손으로 꼽는다. 영남루는 그만큼 밀양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곳이다. 양쪽에 침류당과 능파당이란 건물을 거느린 웅장한 규모의 영남루에 오르면 왜 영남루가 진주 남강의 촉석루와 평양 대동강의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으로 꼽히는지 단박에 알게 된다. 사실 촉석루는 6.25 때 불탄 것을 새로 지은 것이고, 부벽루는 갈 수 없는 곳이니, 영남루가 이 땅에서는 최고의 누각이라 할 만하다. 누각의 규모며 품격도 좋지만, 누각 위에 올라서 발아래로 펼쳐지는 밀양강과 잘 정비된 강둑의 시원한 전망을 누리는 맛도 그만이다.

웅장한 규모답게 영남루 현판의 글씨도 시원시원하다. 영남루에는 현란할 정도로 많은 현판이 걸려있는데 그중 눈길을 끄는 것이 누각 정면 안쪽의 ‘영남루(嶺南樓)’란 현판과 누각 안쪽의 ‘영남제일루(嶺南第一樓)’란 현판이다. 이 현판은 밀양부사였던 이인재가 1844년 화재로 소실됐던 영남루를 새로 지으면서 자신의 7세, 11세짜리 아들에게 쓰도록 해 내건 것이다.

당대의 명필도 아니고, 그렇다고 추앙할 만한 선비도 아닌, 자신의 코흘리개 아들의 글을 현판으로 걸어 놓은 부사의 행동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보다 더 궁금한 것은 유교의 전통이 시퍼렇게 살아있던 당시에 코흘리개가 쓴 현판을 지금껏 아무도 떼지 않고 남아있다는 것이다. 전직 대통령의 글씨쯤은 정권이 바뀌면 다 헐어내버리고 마는 이즈음의 풍토와 비교해보아도 마찬가지다.

영남루에 갔다면 누각만 둘러보고 돌아와서는 안될 일이다. 영남루 아래 밀양강변에는 아랑각이 있다. 밀양 부사의 딸 아랑이 영남루로 달구경을 갔다가 능욕을 당하게 되자 죽음으로 몸을 지켰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오는 곳이다. 아랑각에는 아랑의 정절을 기리는 누각과 아랑의 시신이 유기됐던 대숲에 돌비석이 세워져있다. 부사들이 부임 첫날밤 귀신을 만나 족족 죽어나가고, 새로 부임한 젊은 부사가 마침내 억울하게 죽은 처녀귀신의 원한을 풀어준다는 이른바 ‘전설의 고향’류의 이야기가 바로 이곳에서 시작됐다.

영남루 위쪽에는 근래들어 복원하고 망루도 정자로 지어놓은 밀양읍성이 있다. 정자에서 내려다보는 조망은 영남루에 올랐을 때보다 훨씬 더 시원하다. 영남루 인근에는 또 작곡가 박시춘의 옛집이 복원돼 있다.


# 점필재 김종직의 서릿발같은 정신이 남아있는 곳

 

 

▲점필재 김종직의 묘소 옆에 세워진 ‘인망호폐’ 비석. 김종직이 죽자 무덤 옆에서 날마다 슬피 울다가 숨을 거뒀다는 호랑이를 기리기 위한 것이다.


 유교문화 전통의 도시로 경북에 안동이 있다면, 경남에는 밀양이 있다. 밀양에는 조선 성리학의 전통을 잇는 큰 인물이 있으니, 바로 점필재 김종직이다. 밀양 땅에 들어섰다면 김종직의 흔적을 건너 뛸 수는 없는 일. 밀양에는 김종직이 태어나고 죽은 생가가 있고, 그를 배향한 서원이 있고, 그가 묻힌 무덤이 있다.

고려 성리학의 맥을 계승한 김종직은 조선전기 사림파의 종장이자, 영남 유학의 태두로 일컬어진다. 이조참판, 한성부윤, 형조판서 등 중앙 관직을 두루 거쳤으며 정여창, 김굉필, 김일손 같은 기라성같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말년에 벼슬자리에서 은퇴하고 고향인 밀양으로 내려와 추원재를 짓고 소일하다가 세상을 떴다.

그러나 김종직이 세상을 뜬 뒤 훈구파 대신들은 김종직이 생전에 쓴 ‘조의제문’이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을 일을 비방한 것이라며 문제삼았고, 이에 격분한 연산군은 김종직의 관을 파헤쳐 그 시신의 목을 베는 ‘부관참시’를 했다. 이른바 ‘무오사화’다.

김종직이 썼다는 ‘조의제문’은 중국 초나라 마지막 왕손인 의제가 반란을 일으킨 항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며 의제를 추모하는 조문을 쓴 글이다. 글은 중국의 예화를 들어 세조의 왕위찬탈을 교묘하게 빗대 세조에게 정통성이 없음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세조의 뒤를 이은 예종, 성종, 연산군 또한 국왕으로서의 정통성이 없는 역적의 후예라는 의미일터. 연산군이 김종직을 따르는 사림파들을 무참히 살육하거나 귀양을 보낸 것도 이 때문이다.


 김종직의 생가 추원재는 작은 마을에 고즈넉하게 자리잡고 있다. 정비사업이 진행되고 있긴 하지만 생가는 다소 초라하다. 사랑채도 안채도 없이 추원재 건물 한 채만 덩그라니 남아있다. 성리학의 대가이자 조선시대 사림파 유학자들의 정신적인 고향과도 같은 곳임에도 생가는 다소 초라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생가 뒤편의 산자락을 오르면 김종직의 묘가 있다. 묘 옆에는 ‘인망호폐(人亡虎斃)’란 검은색 빗돌이 서있다. 생가 정비사업을 하면서 2008년 4월에 세운 이 비석은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하자 큰 호랑이가 날마다 무덤 옆에서 슬피 울다가 무덤 옆에 죽어 있어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었더니 마을에 도둑이 없어졌다며 이를 기려 세운 비석이다.

 

가는 길

경부고속도로로 대구까지 가서 대구~부산간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밀양나들목으로 나가면 된다. 수도권에서 가자면 영동고속도로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를 타고 김천갈림목에서 경부고속도로로 갈아탄 뒤 다시 대구~부산간 고속도로를 이용하면 시간을 조금 단축할 수 있다. 밀양에서는 시내 한복판의 영남루를 중심으로 위양지, 추원재, 표충사, 만어사 등이 사방으로 펼쳐져 있어 이동시간이 길어질 수 있으므로, 미리 관광안내지도로 이동 순서를 잘 짜서 움직여야 시간 낭비가 없다.

 

묵을 곳 & 먹을 것

밀양에는 가족단위 여행자들이 묵을 이렇다할 호텔이나 콘도가 없다. 대신 체험마을과 펜션들이 발달돼 있는 편이다. 가장 추천할 만한 곳이 밀양시 초동면 봉황리의 ‘꽃새미마을’이다. 마을을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데다 다양한 체험프로그램도 운영하므로 가족단위로 이용하면 좋다. 마을 안에 6개 집에서 민박을 한다. 방도 깔끔하고 주민들도 친절하다. 숙박료는 4만원선. 펜션은 표충사 인근의 단장천이 흘러내리는 밀양시 단장면 일대에 많다. 단장면 구천리의 ‘통나무 숲속마을’(055-353-6378)이 운치도 있고, 깔끔하다. 수영장까지 갖춘 있는 제법 큰 규모다. 단장면 고례리의 ‘물안개 피는 마을’(055-352-4400)도 추천할 만하다.

밀양의 먹을거리로는 단연 ‘돼지국밥’이 꼽힌다. 돼지고기로 끓여낸 국밥이라 좀 꺼림직할 수도 있겠지만, 담박한 순댓국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무안면소재지의 동부식육식당(055-352-0023)이 원조격으로 꼽힌다. 밀양시내 내이동의 ‘조방돼지국밥’

(055-352-1161)도 인근 주민들사이에 알려져 있다. 전통 반가의 한정식을 맛보고 싶다면 밀양시 교동의 ‘열두대문’(055-353-6682)을 찾아가도 좋겠다. 대문이 열두개나 됐다는 고택을 음식점으로 운영하는 곳인데, 소고기를 다져 만든 약장, 문어로 만든 수란 등 전통음식을 맛볼 수 있다. 1인 2만5000원부터.

 

 

 

<출처> 2009. 4. 8 / 문화일보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