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야누스를 닮은 울산의 모든 것
르포라이터 민병준
▲ 장생포항 풍경. 포경선과 어선이 드나들던 풍광은 사라지고 주변엔 공장들이 가득 들어서 있다. / 우리나라에서 일출이 가장 빠르다는 울산 간절곶 앞바다에 붉은 태양이 떠오르고 있다. 등대와 어우러진 일출이 예쁘다.
야누스-. 울산은 로마신화에 나오는 야누스를 닮았다. 공업도시가 갖고 있는 산업현장 특유의 활기찬 느낌은 좋았지만, 일상처럼 뒤덮고 있는 건조하고 메케한 공기는 도시의 많은 부분을 짓누르고 있었다. 여기에 대형 화물차들의 질주, 잠시 한눈을 팔면 이방인을 미로로 안내하는 불친절한 이정표. 그렇지만 공단지역을 벗어나면 달랐다. 특유의 비릿한 내음을 되찾은 바다는 맑은 해조음으로 마음을 달래주었고, 높은 산은 다정스런 목소리로 사랑을 속삭였으며, 깨끗한 하천은 시민들을 포근히 감싸안아 주고 있었다.
울산이 야누스라는 느낌이 강하게 다가온 까닭은 아마도 간절곶 일출을 보기 위해 어둠을 가르고 달려갈 때 울산공단 한가운데를 지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길손은 평소 내비게이션을 그다지 신봉하는 편은 아니다. 아직도 10만분의 1 축척의 도로지도와 겸해서 사용한다. 하지만 이번 울산에선 지도보다 내비게이션의 도움을 훨씬 많이 받았다. 아니 내비게이션이 없었다면 어쩌면 처음 접하는 넓디넓은 공단지역을 들쑤시고 다니다 미아가 되었을 것이다.
간절곶은 두 개의 예쁜 등대와 갯바위 외엔 그다지 특징 있는 일출 풍광을 자랑하는 곳은 아니지만, 새천년 우리나라 첫 해돋이 해안으로 유명해졌다. 2000년 1월1일의 일출시각은 오전 7시31분17초. 이는 당시 포항의 호미곶보다 1분, 강릉의 정동진보다는 5분 앞선 시간이라 해서 큰 인기를 끌었던 것이다. 물론 지금도 간절곶 일출은 주가가 높은 편이다.
간절곶엔 조각공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무엇보다 큼직한 우체통이 눈길을 끈다. 이름 하여 ‘소망 우체통’. 높이 5m, 가로 2.4m, 세로 2m, 무게는 무려 7톤이나 된다. 우체통 뒤쪽엔 관광객들을 위해 무료 우편엽서를 비치해놓고 있었다. 그냥 형식적으로 세워놓은 게 아니라 남울산우체국에서 관리하고 있는 진짜 우체통이다. 평일엔 매일 1회(13:00) 우편물을 거둬간다고 친절한 문구도 적혀 있다.
둘레의 조각상들도 뭔가 간절하게 구하는 자세다. 그러고 보니 간절곶 해맞이공원의 주제는 ‘소망’이었다. 그것도 아주 간절한 소망. ‘간절(懇切)’이란 한자어를 차용해 소망을 더욱 간절하게 빌고 있었다. 그렇지만, 원래 간절곶의 뜻은 먼 바다에서 바라보면 이곳이 뾰족하고 긴 간짓대(대나무 장대)처럼 튀어나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간절곶 일출을 감상하며 새해 새 희망을
간절히 기원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울산을 둘러볼 차례. 간절곶이 울산의 남단에 있으므로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된다. 울산은 한반도 남동쪽 동해안에 자리 잡은 공업도시다. 울산 서부엔 문복산·가지산·능동산·신불산 등 낙동정맥의 일부인 이른바 ‘영남 알프스’가 남북으로 이어지고, 남부엔 정족산·문수산·천성산, 북부엔 천마산·치술령으로 이어지는 ‘호미지맥’이 지나간다. 물줄기는 영남알프스에서 시작한 태화강이 울산 시내를 지나 동해로 흘러들고, 천성산에서 시작한 회야강은 울산 남부를 적시고 동해로 흘러든다. 태화강과 회야강 하구는 항구가 들어서기 좋고, 공업용으로 쓸 수 있는 물도 풍부해 울산이 우리나라 최고의 공업도시로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울산 지역을 돌아다니다 보면 울산에게 붙이는 ‘대한민국의 산업 수도’라는 수식이 전혀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단일 규모로는 세계 최대라는 현대자동차 울산공장부터 시작해 세계 최대의 중공업체인 현대중공업, 현대미포조선,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은 석유화학단지의 공장들…. 수직으로 솟은 높은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는 이방인을 압도한다. 그리하여 일단 울산 여행에서는 바닷가, 특히 항구가 주는 평소의 어촌 이미지는 잠시 거두는 게 좋다. 울산이 초행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서생포 왜성에 올랐다가 공단지역을 지나 외황강을 건넌다. 외항강 하류 개운포 주변은 바로 처용설화의 무대다. 처용은 신라 헌강왕 때의 설화에 등장하는 사람인데, 신라 백성들은 동해 용의 아들이라고 전해지는 처용의 얼굴을 그려 귀신을 물리쳤다고 한다.
처용가와 처용설화는 국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문학유산이다. 또 처용가에서 유래된 처용희(處容戱)는 신라·고려·조선시대에 궁중과 민간에서 널리 행해져온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이기도 하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처용은 지금의 울산 개운포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주민들은 개운포 앞바다에 떠있는 바위섬을 처용암이라 부른다. 매년 10월마다 태화강 둔치와 시내에서 열리는 처용문화제는 처용설화를 주제로 해서 전통문화와 현대문화 예술을 조화시킨 울산의 대표 축제로 꼽힌다. 개운포에 제단을 마련하고 처용을 모시는 의식을 시작으로 처용무, 처용가면 페스티벌, 처용과 헌강왕 행렬 등 다양한 행사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렇지만 예전 울산의 대표축제는 1962년 처음 시작된 ‘울산공업축제’였다. 이는 당시 새롭게 공업도시로 지정된 울산이 공업도시로서의 성격을 명확히 한 것이다. 그러다 1991년 이 축제를 폐지하고, 울산 남구문화원에서 지내던 처용제의(處容祭儀)를 처용문화제로 바꾸면서 울산시를 대표하는 축제로 삼았다. 그렇지만 처용문화제가 울산의 대표축제 자격이 있는가에 관한 논란은 현재 진행형이다.
▲ 처용이 처음 나타났다고 전하는 개운포. 주민들은 포구 앞바다에 떠있는 이 바위섬을 처용암이라 부른다. / 장생포고래박물관 옆에 있는 포경선. 장생포의 옛 명성을 되찾고 싶어 하는 상징처럼 보인다.
그 논란을 들여다보면, 우선 처용가 자체가 외설적이라는 것이다.
서울 밝은 달밤에 / 밤 늦도록 놀고 지내다가
본디 내 것(아내)이다만 /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
따라서 아이들까지 참여하는 울산 대표축제로서 부적합하다는 지적이다. 그럴 듯하다. 또 처용설화의 정신이 흔히 알려진 것처럼 ‘관용’과 ‘화합’이 아니라 ‘불륜’과 ‘야합’의 성격이 더 강하다는 지적도 있다. 전문가들은 부인과 역신의 간통을 목격하고서도 참을 수밖에 없었던 처용의 태도에서 부인의 상대가 왕이나 권력자였다고 추정하는 것이다.
▲ 대왕암공원 바닷가 쪽에 세워져 있는 울기 등대.
한 걸음 더 나아가 처용은 자신의 부인을 이용하여 권력과 야합하였을 가능성도 있다고도 한다. 그래서 처용정신이 관용이라는 학설은 이제 폐기처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더불어 모 종교단체에서는 처용문화제를 전통문화행사로 보지 않고 종교행사로 해석하고 있다.
어쨌든 처용문화제는 현재 울산 대표축제로 인정을 받고 있으나 앞으로는 어찌 될지 그 운명은 짐작할 수 없다. 그렇지만 종교 문제나 처용에 대한 해석 여부를 떠나 처용가나 처용무는 우리의 소중한 유산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개운포 처용암을 벗어나 장생포로 방향을 잡는다. 역시 양쪽으론 공단이 계속 이어진다. 그래도 장생포 고래박물관 가는 길은 이정표가 잘 되어 있는 편이었다. 울산은 ‘고래의 고을’이다. 특히 장생포는 예로부터 고래잡이의 중심 항구로 전국적으로 유명한 항구였다. 어림잡아 한 해에 1천여 마리의 고래가 잡혔으며, 당시 장생포항 주변엔 고래고기 전문식당이 어림잡아 40집이 넘게 줄지어 있었다. 하지만 세계 여러 나라가 1986년 고래를 잡는 포경업을 금지하면서 장생포 경제는 빠르게 쇠퇴하기 시작했다.
지금 장생포 해양공원엔 거창한 고래박물관이 있고, 건물 왼쪽엔 위압적인 포경선 한 척을 올려놓았다.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귀신고래가 나타나는 ‘귀신고래 회유 해면(천연기념물 제126호)’임을 알리는 표석과 귀신고래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원래 이 천연기념물 명칭은 ‘극경 회유 해면’이었다. 그런데 이 극경(克鯨)이라는 단어가 귀신고래를 뜻하는 일본식 조어인데다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너무 어렵다 하여 논쟁 끝에 최근 귀신고래로 낙점이 되었다.
쇠고래로도 불리는 귀신고래는 해안가에 가깝게 사는 고래다. 북태평양에서 주로 서식하는데, 우리나라 동해안에 나타나는 귀신고래의 무리는 겨울엔 동해에서 새끼를 낳기 위해 번식하고 여름엔 먹이를 찾아 오츠크해 북단으로 이동한다. 몸길이는 15m, 몸무게 36톤까지 자라며, 평균 수명은 50~60년이다.
귀신고래라는 이름은 갯바위 사이를 헤엄치고 다녀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이야기가 있고, 몸체에 따개비가 돌처럼 붙어 있어서 불린 이름이기도 하다. 해안 가까이에 있기 때문에 해녀들이 작업하다 머리만 내민 모습을 보고 귀신인 줄 알고 놀라는 일도 잦았다고 한다. 또 포경선원들은 귀신고래가 다른 고래와 달리 신출귀몰할 뿐만 아니라, 모성애가 강해 그 새끼를 공격하면 이들도 사람을 공격해 생명을 잃거나 다치는 포경선원들이 많아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 신라 문무대왕의 왕비가 죽어서도 호국룡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 하여바위섬 아래에 묻혔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대왕암.
지금은 커다란 화물선만이 가득 들어찬 장생포에서 고래잡이 어항의 흔적을 찾긴 쉽지 않다. 그래도 항구엔 고래고기를 파는 식당이 여러 곳이다. 법적으로 고래를 포획할 수 없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적지 않은 고래고기집이 이렇게 영업할 수 있을까. 기본적으로 고래고기가 유통되는 것은 다른 어류를 잡기 위해 쳐놓은 그물에 고래가 걸려 죽는 경우가 가장 많다 한다. 이 경우 해안경찰에 신고하면 간단한 조사를 거쳐 소유권을 인정받게 된다. 이렇게 잡히는 고래가 1년에 수십 마리에 이르는데, 일부 어부들은 다른 고기를 잡는 척하다가 고래의 이동경로에 그물을 쳐서 포획하는 경우도 있어 해안경찰이 정밀수사에 나서기도 한다고 한다.
▲울산 시내 한중간에 남아있는 울산동헌. 울산읍성은 정유재란 때 왜군들이 왜성을 쌓으면서 거의 훼손되었다. / 울산동헌 안쪽에 모아놓은 공덕비들.
멸종위기에서 벗어나고픈 ‘고래의 꿈’에 적극 동조하면서도, 혀끝으로는 고래고기의 ‘금지된 맛’을 즐기고 싶은 이율배반적인 감정에 혼란스러움을 느끼게 되는 장승포. 이곳의 분위기는 하루라도 빨리 제한적으로나마 포경업이 재개되어 옛 영광을 되찾게 되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었다. 특히 고래박물관 옆에 전시해놓은 포경선은 그 날을 학수고대하고 있는 상징처럼 보였다.
장승포를 벗어나면 길은 태화강을 건너 북쪽 해안으로 이어진다. 대왕암으로 방향을 잡고 울산만 해안도로를 따라 달린다. 세월이 흐를수록 어항이라기보다는 산업항 냄새가 짙어지는 방어진항을 지나 다다른 대왕암. 신라시대 문무대왕의 왕비가 죽어서도 호국룡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 하여 바위섬 아래에 묻혔다는 전설을 들으며 솔밭과 갯바위 산책로를 어슬렁거린다. 두 개의 어여쁜 등대는 간절곶 등대의 아름다움에 뒤지지 않았다.
울산항은 신라 때 무역을 담당하던 항구였다. 울산항 북쪽의 작은 항구인 율포에선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다. 신라 눌지왕 때의 충신인 박제상은 고구려와 왜국에 볼모로 붙잡혀간 왕의 아우들을 데려오라는 명령을 받고, 418년 고구려왕을 설득해 아우 복호를 데려왔다. 하지만 곧 왜국으로 가서는 아우 미사흔을 빼돌려 신라로 도망치게 하였다.
그러나 자신은 붙잡힌 뒤 귀양을 갔다가 죽게 되는데, 그 당시 박제상이 배를 타고 왜국으로 떠났던 율포항이 바로 지금의 강동동 정자해변이다. 그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파도만 무심히 드나드는 아담한 정자해변에서 박제상의 뒷모습을 상상하면 이제 울산 바다와는 이별이다.
울산 시내로 들어가기 전에 울산의 대표 경관에 대해 잠깐 짚어보자. 조선시대엔 울산8경 중 두 곳이나 국방과 관련이 있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나타난 울산8경에 성루화각(城樓畵角)이라 하여 세종 초기에 완공된 병영성의 규모와 튼튼함을 찬미했고, 전함홍기(戰艦紅旗)는 왜구의 침범에 대비해 개운포·염포·서생포에 정박한 조선 전함 홍기가 나부끼는 위용을 노래한 것이다. 광복 후 새로 정한 신울산8경은 전통방식으로 경관만을 짚었다.
그리고 2002년 다시 대표경관을 지정하면서 8개만으로는 부족하다 하여 모두 12개를 꼽게 된다. 여기엔 가지산 사계, 간절곶 일출, 대왕암 송림 등이 포함되어 있는데, 특이하게도 ‘무룡산에서 본 울산공단 야경’도 속해있다. 울산 경제발전의 상징인 공단의 야경을 대표 경치에 포함시킨 것이다.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른 뒤 이 기록을 보면 울산이 20세기에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공업도시였음을 알게 될 것이다.
조선시대엔 군사적인 이유로 경상도를 경상좌도와 경상우도로 나누었다. 태종 때인 1417년에 쌓은 울산 병영성(사적 제320호)은 경상좌도를 다스리던 병마절도사가 머물던 곳이고, 울산읍성은 울산 지역을 다스리던 고을 수령이 머물던 곳이다. 지금도 태화강 북쪽을 일컫는 ‘울산 강북’엔 병영성·동헌·내아·향교 등이 남아있는데, 그토록 오랜 전통의 무게에 비해 문화적인 향기는 그다지 진하지 않다. 가장 큰 원인은 임진왜란이다. 당시 왜군은 평양까지 쳐들어갔다가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에 패하자 후퇴하게 되는데, 울산을 비롯한 양산·부산 등 경남 해안지방에 머물며 다시 전쟁 준비를 한다. 당시 울산에 머물던 왜군들은 병영성과 왜성을 허물어 지금의 학성공원에 왜성을 쌓는 데 사용했다.
이후 문화유산은 일제강점기 때 많이 허물어졌다. 식민지시대의 울산 근대 도시는 조선시대 읍성터에 들어서면서 남아있던 흔적마저 철저히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1960년대 들어 공업화 정책으로 중공업 도시로 떠오르자 울산의 현대 도시는 또 다시 이전의 흔적을 뒤엎은 뒤 조성된다. 얼마 전 어떤 도시학자가 울산 답사 때 이 지역 학자에게 들었다는 ‘울산에서 역사 이야기를 하면 바보 소리를 듣는다’는 말은 이런 식으로 수백 년간 급격하게 변해온 역사 탓이 아닐까 짐작해보게 된다.
▲ 울산 시민들의 자랑인 태화강 십리대밭. / ‘경주 망부석’에서 바라본 일출. 그 옛날 박제상 부인도 이곳에 올라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지아비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간절히 빌었을 것이다. / ‘울산 망부석’에서 바라본 조망. 저 멀리 ‘영남알프스’ 산군을 이루는 영남알프스 마루금이 장쾌하다.
영남알프스에서 흘러내리는 태화강은 울산 시민들의 젖줄이다. 건조한 도심 한가운데에 태화강이 있고, 태화강은 십리대밭을 품고 있다. 동강병원 앞에서 태화강을 따라 삼호교 근처의 불고기단지까지 형성된 대밭의 길이는 무려 4km에 이른다. 폭은 20m 내외로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니다.
이 십리대밭은 일제강점기에 큰물로 이곳의 논밭이 모두 모래밭으로 바뀌었을 때 어떤 일본인이 헐값에 백사장을 사들여 대밭을 처음 조성했다고 한다. 이후 울산 주민들이 이곳에 서로 대나무를 심으면서 지금처럼 바뀌었다. 이곳은 한때 주택지로 개발될 위기에 처했으나 시민들의 반대로 보존할 수 있었다. 이후 친환경 호안 조성, 산책로 조성 등을 통해 지금은 울산의 대표적인 생태공원으로 탈바꿈하였다. 태화강 십리대밭 보존은 그동안 앞만 보고 질주했던 울산 시민들의 마인드를 바꾸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던 것이다.
도심의 강줄기에서 사각거리는 댓잎의 노래를 들으며 발이 시리도록 걸어봤다면 이젠 서쪽의 울주군이다. 울산과 울주. 아마 토박이나 오래된 지역 주민이 아니라면 이 지명이 제법 헷갈릴 것이다. 잠시 짚어보면, 울산은 1960년 이후 우리나라 공업의 중심 도시가 되면서 갑작스레 발전하게 된다. 그러면서 1962년 울산군의 울산읍·방어진읍·하상면 등이 울산시가 되었고, 나머지 울산군은 울주군으로 이름을 바꿨다. 그리고 1991년 울주군은 울산군으로 바뀌었고, 1995년 울산군이 울산시에 포함될 때는 다시 울주군으로 되돌렸다. 그러다 2년 뒤인 1997년 울산시와 울주군을 합치면서 광역시로 바뀌게 된 것이다.
울산시 울주군 두동면과 경주시 외동읍의 경계에 있는 치술령(致述嶺)은 꼭 한번 올라보고 싶었던 고개다. 박제상이 떠난 뒤 그 부인은 두 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가 왜국쪽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죽었는데, 한이 얼마나 깊었는지 몸은 돌로 변하여 망부석이 되었고, 영혼은 새가 되어 날아가 은을암(隱乙岩) 바위에 숨었다고 전해온다.
원래 답사 동선과 분위기 등 여러 점을 고려해 쓸쓸함이 감도는 저녁 무렵에 치술령으로 오르려 했으나, 박제상의 부인이 올라와 간절히 빌었을 대상인 치술령 일출을 보기 위해 어둑새벽에 길을 나섰다. 그리하여 치술령 정상에서 맞이한 일출. 길손은 망부석에 기대어 울산 앞바다로 떠오르는 일출을 보며 만고충신과 열녀의 명복을 빌 수 있었다.
▲ 최근에 세워진 암각화 전시관. 어린이들의 단골 답사지로 인기를 끌고 있다. / 천전리 각석 맞은편에 있는 공룡발자국 화석. 계류 너머의 바위가 천전리 각석이다.
신라 사람들은 그녀를 ‘치술신모’라 부르며 치술령 정상에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 지금 치술령 정상엔 신모사지(神母祠址)란 비석이 세워져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망부석은 두 개였다. 하나는 정상에서 경주쪽으로 10m 정도 지점에, 하나는 울산쪽 능선으로 300m 지점에 있다. 그런데 안내판엔 자신들 행정구역에 속한 망부석만 표시해 놓았기 때문에 만약 사전 지식 없이 오르면 둘 중 하나를 놓칠 수도 있었다.
사람들은 이를 ‘경주 망부석’, ‘울산 망부석’이라 구분해서 부른다. 나름대로 장점이 있었다. 경주 망부석은 남동쪽으로 울산 앞바다가 한눈에 들어왔으나 울산 망부석은 나뭇가지가 울산 앞바다의 시원한 조망을 방해했다. 대신 서쪽의 영남알프스 산군과 장쾌한 낙동정맥 산줄기가 한눈에 들어왔다. 거칠 것 없이 흘러가는 낙동정맥 산줄기는 참으로 장관이었다.
박제상의 아내는 서라벌 사람이다. 그녀는 고구려에 가서 눌지왕의 아우 복호를 구출해온 지아비가 한시라도 빨리 서라벌 집으로 돌아오길 고대했으나, 이번엔 왕의 다른 동생 미사흔을 구출하기 위해 집에도 들르지 않고 왜국으로 출발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얼굴이라도 한번 보려고 말을 타고 뒤쫓아 율포에 이르렀다. 그러나 지아비를 태운 배는 이미 부두를 떠난 뒤였다. 그녀는 넋을 잃고 멀어져가는 배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언양 작천정 계곡의 늦봄 풍경. 일제강점기에 3·1만세운동의 계획을 세운 유서 깊은 곳이다. / 영남알프스 산군에 속하는 신불산 깊은 산중에 조성된 신불산폭포자연휴양림. 울산을 포함한 영남 사람들의 휴양 공간으로 사랑받고 있다.
이윽고 뒤따라온 친척들에게 이끌려 서라벌로 돌아가다 망덕사 남쪽의 남천 모래벌에 이르렀다. 문득 정신을 차린 박제상 부인은 울부짖으며 모래벌에 길게 누워 버렸으니, 서라벌 사람들이 이곳을 긴 장(長)자를 써 장사(長沙)라 불렀다. 또 그렇게 누워 슬피 우는 부인을 친척들이 겨드랑이에 팔을 넣어 잡아 당겼지만, 그럴수록 몸이 굳어 버티었으니 이곳을 ‘벋디디’라 부르다가 한자를 빌어 ‘벌지지(伐知旨)’가 되었다. 박제상의 아내가 목을 놓아 울었다는 장사 벌지지(長沙 伐知旨)는 비록 경주에 있으나 치술령 답사와 함께 엮이므로, 일정의 여유가 있다면 치술령 오르기 전에 꼭 들러봐야 할 곳이다.
치술신모와 헤어진 뒤 대곡천으로 간다. 태화강의 지류인 대곡천은 백악기 공룡시대부터 선사시대를 거쳐 신라시대 화랑의 흔적을 한꺼번에 더듬을 수 있는 곳이다. 바로 공룡발자국 화석(울산문화재자료 제6호)과 울주 천전리 각석(국보 제147호), 그리고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국보 제285호)를 한 코스로 꿸 수 있기 때문이다.
천전리 각석은 태화강의 지류인 대곡천 암벽에 새겨진 그림과 글씨다. 위쪽엔 가운데 태양을 상징하는 원을 중심으로 양옆에 네 마리의 사슴이 뛰어가는 모습 등 청동기 시대 사람들이 그린 무늬가 새겨져 있고, 그 아래엔 신라 법흥왕 때 이곳을 찾은 왕족의 행차에 대한 기록과 기마 인물상 등을 그렸다. 이 글엔 영랑(永郞) 정광랑(貞光郞) 등 화랑들의 이름과 당시 벼슬이름 등이 포함되어 있어 신라 역사 연구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예전에 화랑세기의 진위를 따질 때도 이곳에 적힌 명문이 판단 근거가 되었을 정도로 중요하다.
천전리 각석 맞은편 바위엔 공룡 발자국이 수백 개나 흩어져 있다. 1억 년 전인 백악기 시대에 살았던 공룡들의 발자국 화석이다. 학자들은 발자국이 일정한 방향으로 이동한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돌아다닌 점, 육식 공룡 발자국 화석이 발견되지 않은 점 등으로 미루어 이 일대가 초식 공룡들의 평화로운 생활공간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는 이곳에서 하류의 2~3km 지점에 있다. 천전리에서 대곡리로는 물줄기를 따라 길이 이어진다. 예전엔 이곳에 길이 없었다. 그러나 몇 년 전 공룡발자국 위쪽의 가파른 벼랑에 나무계단을 설치하고 나니 백악기~청동기~신라~신석기시대 이렇게 수억 년의 시간을 단숨에 잇는 연결고리가 탄생한 것이다.
그래서 ‘울산반구대 암각화 2.3km’라는 이정표를 보는 순간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다. 한겨울은 물줄기를 따라 여행하기엔 그다지 좋은 계절은 아니다. 그럼에도 강을 내려다보며 걷는 이 길은 감동 그 자체였다. 어디에서 이토록 짧은 시간에 수억 년의 세월을 넘나들 수 있겠는가.
산책로 입구에서 만난 두 분의 마을 아주머니는 이 산책길을 자주 이용한다며 왕복 1시간10분이 걸린다고 했다. 정말로 이렇게 짧은 시간에 수억 년의 세월을 오갈 수 있는 타임머신 장치는 세계적으로도 그다지 흔치 않을 것이다. 아주머니들의 뿌듯해하는 표정에서 세계적인 코스에서 산책한다는 자부심을 읽을 수 있었다.
▲ 태화강의 지류인 대곡천 암벽에 새겨진 천전리 각석. 청동기시대와 신라시대의 유적이다. / 언양읍성에서 바라본 조망. 맨 뒤쪽으로 영남알프스 산줄기가 올려다 보인다. / 울주군의 중심지인 언양엔 제법 큰 언양시장이 형성되어 있다. 1919년 4월2일 울산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언양장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길손도 아주머니들을 따라 걸었다. 공룡발자국에서 처음 500m 거리는 그야말로 호젓한 강변 오솔길이다. 각석과 암각화 중간지점엔 암각화 전시관이 세워져 있었다. 최근에 문을 연 이 전시관은 천전리 각석과 반구대 암각화에 대해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다.
초등학생을 안내하는 문화유산 해설사의 설명을 귀동냥하며 암각화 전시관을 둘러본 뒤 다시 대곡천을 오른쪽 옆구리에 끼고 걷는다. 이후 길은 차량통행도 가능할 정도로 조금 넓다. 그래도 경주최씨 문중 정각인 집청정(集淸亭), 고려 말기에 성리학 발전에 공이 큰 포은 정몽주, 희재 이언적, 한강 정구 등 삼현을 모신 반구서원(盤龜書院) 등이 들어서 있는 서원마실의 정취도 괜찮다.
맞은편으로 보이는 경치 좋은 바위가 바로 반구대(盤龜臺)다. 20~30m 정도의 단애 층암이 흡사 거북의 머리를 닮았다 하여 붙은 이름인데, 대곡천 물길이 크게 굽이 돌아간다.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부분엔 ‘포은 정몽주’의 유배를 기리기 위한 작은 사당이 있다. 그래서 이곳을 ‘포은대’라고도 한다. ‘반구대 암각화’의 명칭은 바로 이곳에서 유래했다.
서원 마실 앞의 나무다리를 건너고부터는 다시 걷기 좋은 길이다. 짧은 대숲과 또 하나의 공룡발자국 화석을 지나 한 굽이를 돌면 드디어 암각화 조망대에 닿는다. 여름엔 강변 풍광이 시원해서 좋긴 하지만 수량이 불어나면 물에 잠겨버리니 애써 먼 걸음하고도 맨 바윗덩이만 바라보다 그냥 씁쓸히 돌아서야만 했으나, 때마침 갈수기라 참 다행이었다.
암각화란 선사시대 사람들이 성스러운 장소에 새긴 바위그림을 말하는데, 이 그림은 선사시대 사람들이 사냥을 안전하게 잘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바위에 새긴 그림이다. 바위면엔 고래·호랑이·사슴·멧돼지·곰·거북·물고기·사람 등의 형상과 고래잡이 모습, 배와 어부의 모습, 사냥하는 광경 등이 그려져 있다. 이 암각화는 선사시대 사람의 생활과 풍습을 알 수 있는 최고 작품으로 평가되는데, 안타깝게도 1965년 사연댐을 만들 때 물속에 잠겨버린 것이다.
조망대에 설치된 망원경으로 암각화를 찾는다. 그렇지만 망원경으로 목표물을 확인하기란 그리 수월하지 않았다. 게다가 암벽에 그려진 그림은 물때가 묻은 탓에 탁본보다 훨씬 덜 선명하다. 갈라진 바위틈과 주변 지형지물을 몇 번 확인하고서야 겨우 목표물을 찾을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암각화 찾기에 애를 먹게 마련인데, 이런 이들을 위해서인지 물가엔 대나무 한 그루가 꽂혀 있었다. 그곳에 초점을 맞추면 손쉽게 찾을 수 있으니, 누군가의 작은 배려가 고맙기만 하다.
그런데 현재 이곳은 해안에서부터 물길로만 계산해도 어림잡아 30km가 넘게 떨어져 있는데, 어떻게 해서 이런 곳에 고래사냥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일까. 아마도 당시엔 반구대 지역이 사냥과 어로의 풍요를 빌고 사냥물의 영혼을 달래는 주술과 제의를 행하던 성스러운 장소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암각화 하나밖에 없는 것일까. 혹시 저 호수 속 어딘가에 또 다른 암각화가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상상의 나래는 한없이 펼쳐진다.
문득, 과거로의 황홀한 시간여행에서 깨어나면 영남알프스가 애타게 손짓한다. 서둘러 길을 재촉하는데, 울주의 중심지인 언양이 발길을 붙잡는다. 언양은 현재 울산광역시에 속해 있지만, 나름대로 자존심이 상당한 고을이었다. 작천정과 언양장터는 일제강점기에 언양 사람들의 기개를 드높인 언양 만세운동의 민족혼이 서려있는 곳이다. 국내에서는 매우 드물게 평지에 정사각형으로 쌓은 언양읍성(사적 제153호) 성벽에 올라서니 영남알프스의 신불산·간월산이 또 손짓한다.
언양 번화가를 벗어나 석남사 부처님께 삼 배 올리고, 배내고개를 넘으면 드디어 영남알프스의 품이다. 만약 가을이라면 저 힘차게 솟은 고산 평원에서 억새의 은빛 노랫소리가 들려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게 꽁꽁 얼어붙은 한겨울. 그런데 어쩌자고 그리운 사람 찾아가듯 이 산들 품으로 달려온 것일까. 내일은 등산화 신고 발품이라도 팔아야 할까보다. 그렇다면 누굴 만날까. 가지산? 천황산? 재약산? 아니, 그도 아니라면 간월산? 신불산? 간절한 눈빛으로 사방을 둘러보아도 어둠에 묻혀가는 산봉우리들은 아무 말도 없다. 사람을 그토록 애타게 불러놓고.
울산, 어떤곳인가
울산광역시(蔚山廣域市)는 경상남도 북동부에 있는 광역 지방자치단체다. 동쪽은 동해를 끼고 멀리 일본열도와 마주하고, 서쪽은 가지산·신불산·재약산 등이 솟은 산악지대를 경계로 경상남도 밀양시, 남쪽은 부산광역시 기장군, 북쪽은 경상북도 경주시와 접하고 있다.
영남알프스에서 시작한 태화강이 울산 시내를 지나 동해로 흘러들고, 천성산에서 시작한 회야강은 울산 남부를 적시고 동해로 흘러든다. 태화강과 회야강 하구는 항구가 들어서기 좋고 공업용으로 쓸 수 있는 물도 풍부해 울산이 우리나라 최고의 공업 도시로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울산의 면적은 약 1천㎢로 우리나라 7대 도시 중 가장 넓다. 공업도시 울산의 면적이 이렇게 넓은 이유는 1995년에 산지와 논밭이 많은 울주군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현재 울산의 4개 구와 1개 군 중에서 울주군의 면적이 약 755㎢로 가장 넓고, 동해와 붙어 있는 동구는 약 36㎢로 가장 좁다.
원래 울산은 농업과 어업 등에 종사하는 1차산업의 인구가 많았다. 그런데, 1960년대 이후 공업도시로 바뀐 뒤 1차산업 인구는 크게 줄어들었고, 2차와 3차산업 인구가 많이 늘어났다. 특히 울산은 2차산업 인구가 가장 많고, 3차산업 인구는 다른 대도시에 비해 적은 편이다. 현재 울산의 전체 인구는 약 110만 명이다.
울산의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 외에 배추·무·미나리 등이다. 특히 배는 과육이 곱고 달며 물이 많아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수산업은 온산 공업단지의 폐수로 해수가 오염되어 부진하나 강동면에서 나는 자연산 돌미역이 유명하다. 목축업은 언양면·두동면·두서면·상북면·삼남면 등에 낙농단지가 조성되어 한우·젖소·닭·돼지 등의 사육이 활발하며, 특산물로는 언양면의 자수정과 싸리세공품이 유명하다.
1 울산 반구대 암각화
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국보 제285호)는 선사시대 사람들이 사냥을 안전하게 잘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바위에 새긴 그림이다. 바위면엔 고래·호랑이·사슴·멧돼지·곰·거북·물고기·사람 등의 형상과 고래잡이 모습, 배와 어부의 모습, 사냥하는 광경 등이 그려져 있다. 이 암각화는 선사시대 사람의 생활과 풍습을 알 수 있는 최고 작품으로 평가되는데, 1965년 사연댐을 만들 때 물속에 잠겨버렸다.
2 울주 천전리 각석
태화강 지류인 내곡천 암벽에 새겨진 천전리 각석(국보 제147호)은 청동기시대와 신라시대의 유적이다. 위쪽엔 가운데 태양을 상징하는 원을 중심으로 양 옆에 네 마리의 사슴이 뛰어가는 모습 등 청동기 시대 사람들이 그린 무늬가 새겨져 있다. 그 아래엔 신라 법흥왕 때 이곳을 찾은 왕족의 행차에 대한 기록과 기마 인물상 등이 새겨져 있다. 이 글엔 화랑들의 이름과 당시 벼슬 이름 등이 포함되어 있어 신라 역사 연구에 큰 도움이 된다.
3 울산 암각화전시관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에 있는 울산 암각화전시관은 국보인 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와 울주 천전리 각석 등을 홍보하기 위해 2008년 5월 개관한 국내 유일한 암각화 전시관이다. 건물은 지하1층 지상2층 규모로서 반구대암각화의 대표적 문양이자 울산시의 상징인 고래를 형상화했다.
1층의 전시공간, 어린이 공간, 2층의 체험공간으로 크게 구분된다. 전시공간엔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각석 재현 모형과 함께 실시간 중계영상, 고래·새·호랑이·사냥도구 등 각종문양에 대한 입체적 영상해설 등을 감상할 수 있다. 어린이 공간엔 암각화 친구들, 선사마을생활, 선사미술실 등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쉽고 재미난 전시 공간이다. 2층의 체험공간은 반구대 암각화 속 사냥체험, 천전리 각석 속 농경체험, 선사인과의 만남 등 첨단 정보영상을 이용한 흥미로운 체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주차료와 입장료 없음. 관람시간 09:30~17:30 전화 052-276-4293
4 박제상 유적지
울주군 두동면 만화리에 있는 박제상 유적(울산기념물 제1호)은 신라의 충신 박제상과 관련된 유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박제상은 박혁거세의 후손으로 눌지왕이 즉위하자 고구려에 잡혀 있던 왕자 복호를 먼저 구해낸 후 일본으로 가 왕자 미사흔을 구출하고 자신은 심한 고문 끝에 불에 타 숨졌다. 두동면 만화리 동쪽 치술령엔 박제상의 부인이 두 딸과 함께 남편을 기다리다 죽어 망부석이 되었고, 영혼은 새가 되어 날아가 숨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망부석과 은을암이 남아 있다. 눌지왕은 박제상의 딸을 둘째 며느리로 삼고 박제상에게는 대아찬을 추증하고, 그 부인은 국대부인에 추봉하였다. 박제상 부부의 위패를 모시고 충절을 기려 배향한 곳이 치산서원이다.
5 석남사 부도
울주군 가지산에 있는 석남사(石南寺)는 824년 도의 국사가 왜적으로부터 신라의 안전을 빌기 위해 세운 사찰이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허물어지다가 6·25전쟁 때 완전히 폐허가 되었으나 1959년 복원되어 울산 시민들의 휴식처 역할을 하고 있다. 절엔 석남사 부도(보물 제369호) 등의 문화재가 남아 있다. 이 석남사 부도는 신라 시대에 중국 당나라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도의 국사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체적으로 넓이에 비하여 높이가 높은 부재로 구성되어 길쭉해 보이며, 바닥돌의 폭이 좁아 안정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래받침돌의 구름무늬나 탑신의 신장상이 형식적으로 표현되었고, 특히 가운데받침돌의 안상 조각에서 시대가 내려옴을 볼 수 있으나 각 부분이 완전히 보존된 아름다운 작품이다.
6 간월사지 석조여래좌상
울주군 상북면에 있는 간월사지는 신라 진덕여왕 때 자장이 창건한 간월사(澗月寺)가 있던 자리다. 조선 말기에 폐허가 된 뒤 방치되어 있던 석조여래좌상(보물 제370호)을 신도들이 암자를 지어 모시고 있다. 이 불상은 대좌 일부와 광배가 없어졌으나 신체는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다. 풍만하고 둥근 얼굴에 작고 단정한 입, 긴 눈, 짧은 귀 등이 부드러운 부처님 표정을 나타내고 있다. 손은 왼손을 무릎 위에 놓고 오른손을 내리어 땅을 가리키고 있는 항마촉지인이다.
망해사지 석조부도
울주군 청량면 율리의 망해사지 석조부도(보물 제173호)는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2기의 부도가 망해사의 법당 북쪽에 동·서로 자리하고 있다. 전체적인 구성이나 조각수법이 다소 빈약하지만 우아함과 단아함을 잃지 않은 통일신라 하대(下代)의 훌륭한 작품에 속한다. 망해사(望海寺)는 헌강왕(재위 875-886) 때 동해 용왕을 위해 세운 절이라고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 부도들도 그때 세워졌다고 전해져 온다.
7 청송사지 삼층석탑
울주군 청량면 율리 남암산 청송사(靑松寺) 절터에 있는 청송사지 삼층석탑(보물 제382호)은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이다. 이 탑은 기단의 짜임새가 정연하지 못하고, 1층 몸돌이 지나치게 큰 반면 지붕돌이 작아서 좋은 비례로 보기 어려우나, 지방에 분포된 신라 석탑의 한 예로 주목할 만하다. 기단 일부가 파손된 채 묻혀있던 것을 1962년에 해체·복원하였는데, 당시 상층 기단에서는 청동으로 만든 여래입상 1구를 비롯하여 유리·구슬·수정·옥 등 30여 점이 들어 있는 사리함이 발견되었다.
8 태화사지 12지상부도
중구 학성공원에 있는 태화사지 12지상부도(보물 제441호)는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우리나라에 있는 종 모양의 부도 중에 가장 오래된 유물일 뿐만 아니라 표면에 12지상(十二支像)을 조각한 것으로도 유일한 사리탑이다. 전체 높이는 110cm이다. 태화사(太和寺)는 643년(신라 선덕여왕 12)에 자장율사가 창건한 사찰로, 고려말 왜구의 침입이 극심하던 시기에 없어졌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남아있는 유물로는 이 부도가 유일하다. 태화사 절터에 묻혀 있던 것을 1962년에 발굴하여 학성공원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9 울산 동헌 및 내아
조선시대 지금의 중구 성남동·옥교동·북정동·교동에 울산읍성이 있었다. 성벽 길이는 1.7㎞ 정도였는데, 1597년 정유재란 때 왜군이 이 성의 돌을 가져다가 울산왜성을 쌓는 바람에 지금은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현재 이곳엔 울산동헌과 내아(시유형문화재 제1호)가 남아있다. 울산동헌은 옛 읍성 안의 중심 건물로서 울산도호부 수령이 일을 하던 곳이고, 내아는 수령이 살던 살림집이다. 예전 건물은 정유재란 때 불타버렸고, 지금 있는 건물은 1681년(숙종 7)에 다시 지은 뒤 여러 번 고쳐지었다.
1 언양읍성
언양읍 동부리·서부리 일대에 있는 언양읍성(사적 제153호)은 예부터 경주·울산·밀양·양산과의 교통 중심지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던 옛 언양 고을의 읍성이다. 국내에서는 매우 드물게 평지에 정사각형으로 쌓은 성이다. 원래 이곳엔 삼국 시대에 흙으로 쌓은 토성이 있었는데, 1500년(연산군 6)에 지금처럼 돌로 쌓았다. 임진왜란 때 무너진 것을 1617년에 새로 쌓았다. 성안 동쪽엔 동헌이, 서쪽엔 객사가 있었다. 지금의 언양초등학교 자리가 바로 객사가 있던 곳이다.
2 울산 병영성
1417년(태종 17)에 쌓은 중구 서동의 울산 병영성(兵營城·사적 제320호)은 경상좌도를 다스리던 군대의 수령인 병마절도사가 머물던 곳이다. 초기엔, 성벽 위에서 담처럼 생겨 몸을 숨긴 채 총이나 활을 쏘는 시설인 여장을 비롯한 기본적인 시설만 갖추었다. 그 후 세종 때에 이르러 국방력 강화를 위해 성을 보호하고 공격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옹성·적대·해자 등 여러 방어시설을 설치했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당시 성의 둘레는 3,723척(약 1.2㎞)이고, 높이는 12척(약 3.7m)이며, 성 안엔 우물·도랑·창고 등이 있었다고 한다. 정유재란 때 왜군이 울산 왜성을 쌓기 위해 이곳의 돌을 가져가는 바람에 훼손되었다.
3 외솔 최현배 선생 생가터
울산시 중구 동동에 있는 외솔 최현배 선생 생가터(울산광역시기념물 제39호)는 한글학자인 최현배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선생은 일제강점기인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에 참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이던 중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3년간 감옥살이를 했다. 광복 후에도 평생 한글 보급과 교육에 앞장섰다. 세월이 흐르면서 건물은 없어지고 집터와 돌담만 남아 채소밭으로 이용되고 있었으나 최근 복원 중에 있다.
학성 이천기 일가묘 출토복식
학성 이천기 일가 묘 출토복식(중요민속자료 제37호)은 이천기(1610-1666) 묘와 그의 부인 흥려박씨의 묘, 그리고 이천기의 셋째 아들인 이지영과 그의 부인 평해황씨의 부부 합장묘에서 1969년에 출토된 유물이다. 이천기의 묘 출토복식(2종 3점)은 광다회대 1점, 면포 솜소모자·명주 솜소모자 2점이다. 이천기의 부인 흥려박씨의 묘 출토복식(3종 3점)은 면포 솜장옷 1점, 옷감 1점, 면포 홑치마 1점이다. 이천기의 셋째 아들인 이지영과 그의 부인 평해황씨의 부부 합장묘 출토복식(3종 4점)은 난봉화문단 겹장옷 1점, 명주 솜누비치마 1점, 면포 솜버선 1쌍이다. 2004년 ‘울산 이휴정 소장 출토복식’에서 ‘학성 이천기 일가 묘 출토복식’으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4 울산향교
중구 교동의 울산향교(鬱山鄕校·시유형문화재 제7호)는 선조(재위 1576-1608) 때 처음 세웠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졌다. 그 후 1652년(효종 3)에 현 위치로 옮겨 다시 지은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공자를 비롯한 유학자들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과 학문을 연마하던 명륜당을 비롯하여 동무와 서무, 동재와 서재, 청원루, 전사청, 전교실 등의 건물이 남아 있다.
5 천황산 요지군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천황산 요지군(天皇山 窯址群·사적 제129호)은 천황산 평평한 고원지대에 위치한 조선시대의 백자 가마터다. 해발 1,100m 이상의 이 고원의 완만한 경사를 이룬 초원지대에 철화문을 반출하는 거대한 백자요지가 5∼6기 있다.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가마터 중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품질이 좋은 편이 아닌 중·하품의 백자를 굽던 곳으로, 순백자뿐 아니라 검은 빛깔로 그림이 그려진 철화무늬 백자조각들도 발견된다. 철화무늬는 소박하고 화려하지 않은 풀무늬 또는 원 모양과 원점 모양의 무늬가 그려져 있다. 경상도 해안 가까운 지역에서 드물게 발견되는 조선 중기의 지방 철화백자 가마터로 의의가 있다.
울주 검단리 유적
울주군 웅촌면 검단리에 있는 울주 검단리 유적(사적 제332호)은 청동기시대의 대규모 집단 마을터로서 낮은 구릉의 비탈면에 위치한다. 마을 둘레에 V자 형태로 못(환호)을 파 놓았는데, 이것은 당시 마을의 방위개념을 보여주는 자료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것이다. 이 못의 길이는 약 300m, 너비 50∼200㎝, 깊이 20∼150㎝인데, 이전엔 더 깊고 넓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집자리와 움집터가 확인되었고, 다양한 토기류와 석기류, 가락바퀴(방추차), 그물추 등 약 4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어 당시의 생활문화를 밝히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은현리 적석총
울주군 웅촌면 은현리 서리 마을 뒷산에 있는 적석총(울산기념물 제8호)은 삼국시대의 돌무지무덤이다. 이 무덤의 주인은 삼국시대 초기에 이곳에 자리 잡고 있던 부족 국가인 우시산국의 지배층이라고 알려져 있다. 적석총은 대부분 고구려 무덤이나 백제 초기의 무덤에서 볼 수 있는데, 그래서 일부 전문가들은 이 무덤의 주인공이 고구려에서 내려온 사람이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6 영남알프스
남한땅 동부를 지탱하는 산줄기인 낙동정맥이 부산 앞바다를 앞두고 여력을 다해 빚은 산군이 영남알프스다. 가지산(1,240m), 운문산(1,188m), 천황산(1,189m), 신불산(1,209m), 취서산(1,059m), 간월산(1,083m), 고헌산(1,032m), 문복산(1,031m) 등 1,000m가 넘는 연봉으로 이루어진 영남알프스의 억새평원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장관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취서산에서 신불산으로 이어지는 신불평원은 늦가을이면 온통 은빛 억새의 천국으로 변해 수많은 탐승객을 불러모으고 있다.
7 작천정계곡
신불산과 간월산 동쪽 자락에서 흘러나온 물이 계류를 이루는 작천정계곡은 암반과 노송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일찍부터 사랑을 받아온 곳이다. 예전엔 ‘작천’이라 불리었으나 1902년 경관 좋은 청암사 부근 암반 위에 정자를 세우고, ‘작천정’이라 한 뒤부터 작천정계곡으로 불리게 되었다. 주변 경관이 뛰어나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언양의 대표적인 명소라 할 수 있다. 또한 작천정은 일제 때 언양 사람들의 기개를 드높인 ‘언양 만세 운동’의 민족혼이 서려있는 곳이다.
천전리 공룡 발자국 화석
울산엔 천전리·유곡동·대곡리 등 여러 곳에 공룡 발자국 화석이 있다. 그 중에서 천전리 공룡 발자국 화석(울산문화재자료 제6호)은 약 1억 년 전인 백악기 시대에 살았던 공룡들의 발자국이다. 학자들은 발자국이 일정한 방향으로 이동한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돌아다닌 것으로 보아 이 일대가 공룡들의 생활공간이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약 200개의 공룡 발자국 화석이 발견되었다.
8 울주 구량리 은행나무
울주군 두서면 구량리의 울주 구량리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64호)는 수령은 약 550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높이 22.5m, 가슴 높이의 지름은 3.8m, 가슴 높이의 둘레는 8.37m. 가지의 길이는 동서 18.1m, 남북 24.7m이다. 2003년 태풍 매미로 인해 수관의 1/3 정도가 훼손되었다.
이 은행나무는 약 500년 전에 이판윤(李判尹)이 벼슬을 그만두고 이곳에 내려올 때 서울에서 가지고 온 나무를 자기집 연못가에 심었던 것이라고 전해진다. 연못은 사라지고 논밭만이 남아 있다. 은행나무 옆엔 ‘한성부판윤죽은이공유허비(漢城部判尹竹隱李公遺墟碑)’가 서 있다. 나무 밑의 썩은 구멍에 아들을 못 낳는 부인들이 정성을 들여 빌면 아들을 나을 수 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1 울주 목도 상록수림
울주군 온산읍 방도리 앞바다의 작은 섬 목도(目島)에 있는 목도 상록수림(천연기념물 제65호)은 우리나라 동해안쪽엔 드문 상록수림이다. 섬엔 동백나무, 곰솔나무, 사철나무, 후박나무, 다정큼나무, 벚나무, 팽나무, 자귀나무, 두릅나무, 노린재나무, 칡, 멍석딸기, 인동덩굴, 등나무, 감나무, 구기자나무 등을 비롯해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있다. 목도(目島)는 섬의 모양이 눈처럼 생겼다 해서 얻은 이름이다. 동백나무가 많고 그 꽃이 아름다워 춘도(椿島·동백섬), 신라 때 화살을 만드는 대나무를 재배하였다하여 죽도(竹島)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다.
2 가지산 철쭉나무 군락
가지산 철쭉나무군락(천연기념물 제462호)은 울산광역시 울주군, 경상남도 밀양시, 경상북도 청도군에 걸쳐 있는 가지산(1,240m) 정상부에 위치한다. 이곳엔 나무 높이 3.5∼6.5m, 폭이 6∼10m, 추정 수령이 약 100∼450년이나 되는 40여 주의 철쭉나무 노거수를 비롯해 약 219,000여 주의 철쭉나무가 산정 상부에 집중적으로 군락을 형성하고 있다.
3 울산 귀신고래 회유해면
쇠고래는 해안가 암초가 많은 곳에서 귀신같이 출몰한다 하여 귀신고래라고도 불린다. 예전엔 극경(克鯨)이라 했다. 북태평양에서만 분포하는데, 우리나라 동해안에 나타나는 쇠고래의 무리는 겨울엔 한반도와 일본 앞 바다에서 번식하고, 여름엔 먹이를 찾아 오츠크해 북단으로 이동한다. 쇠고래는 몸길이가 평균적으로 수컷 13m, 암컷 14.1m이다. 체중은 평균 500㎏ 정도이다.
울산 귀신고래 회유해면(천연기념물 제126호)은 고래 사냥으로 멸종위기에 처해 있는 쇠고래가 새끼를 낳기 위해 이동하는 경로에 속한다. 현재 울산 쇠고래 회유해면이 속해있는 서부 북태평양과 북대서양의 쇠고래는 멸종 위기에 처해있다. 쇠고래는 멸종위기에 처한 국제적 보호대상 동물로 이를 보호하고자 울산광역시를 포함한 강원도·경상북도의 동해안을 귀신고래 회유해면을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였다.
장생포 고래박물관
2005년 문을 연 남구 매암동의 장생포 고래박물관은 1986년 상업포경 금지 이후 사라져가는 포경유물을 수집·전시·보존해 고래와 관련된 각종 정보를 제공하고, 해양생태계는 물론, 교육 연구를 위한 체험 공간을 위해 건립하였다.
1층은 어린이체험관으로 고래의 생태와 반구대 암각화 관련 영상물 등 고래에 대한 상식을 쉽고 알 수 있는 공간이다. 2층의 포경역사관엔 브라이드고래·범고래의 골격, 반구대 암각화 모형, 한국과 세계의 포경 역사를 한눈에 알 수 있는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3층의 귀신고래관에선 귀신고래의 울음소리와 영상을 비롯해 귀신고래의 두개골, 먹이섭취 과정 등 귀신고래에 대해 알 수 있다. 4층은 야외광장 포경선, 야외데크, 기념품 판매소 등이 있는 전망대다.
관람 시간은 09:30 ~ 18:00, 1월1일과 설·추석 당일, 명절·공휴일 다음날엔 문을 닫는다. 어린이 1,000원, 청소년 1,400원, 어른 2,000원. 052-256-6301
처용 문화제
매년 10월 태화강 둔치와 시내에서 열리는 처용 문화제는 설화를 주제로 해서 전통문화와 현대문화 예술을 조화시킨 축제다. 처용이 처음 나타났다는 신라시대 국제 무역항인 개운포에 제단을 마련하고 처용을 모시는 의식을 시작으로 처용무, 처용가면 페스티벌, 처용과 헌강왕 행렬 등 다양한 행사가 펼쳐진다. 울산광역시에서는 처용 문화제의 주요 행사인 월드 뮤직 페스티벌을 아시아의 대표 문화축제로 만들어 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장생포 고래 축제
울산만의 장생포는 우리나라 고래잡이의 전진기지로 한때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리던 곳이었다. 울산은 이러한 사실을 널리 알리기 위해 매년 5월마다 해양공원 일대에서 장생포 고래축제를 열고 있다. 배를 타고 귀신고래가 나타나는 바다를 돌아보는 행사뿐만 아니라 고래 퍼레이드, 고래잡이 재현, 고래 마라톤 등 재미있는 행사가 많이 열린다.
외고산 옹기마을
옹기는 질그릇(진흙만으로 구워 만든 그릇)과 오지그릇(유약을 입히고 다시 구워낸 그릇)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울산의 외고산 옹기마을은 6·25전쟁 무렵 전국 각지에서 옹기 장인들이 모여들어 현재 국내 최대 규모의 옹기촌을 이루고 있다. 한편, 매년 10월 초가 되면 이곳에서는 옹기·도자기 전시회를 비롯해 옹기 만들기, 옹기 콩나물 기르기 등의 체험 행사를 즐길 수 있는 옹기 문화 축제가 열린다.
방어진과 일산진에 전해져오는 별신굿
무당이 마을 수호신에게 드리는 제사를 별신굿은 대부분 지방에서는 사라졌고, 지금은 동해안 지방에서만 고기가 많이 잡히기를 비는 풍어제로 남아 있다. 울산에서는 방어진과 일산진에서 별신굿이 지금까지 계속 전해져오고 있다. 두 곳에서 1년마다 번갈아가며 매년 5월과 10월 중에 별신굿을 지낸다.
4 신불산폭포 자연휴양림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신불산폭포 자연휴양림은 신불산과 간월산 사이를 흐르는 백련계곡에 자리하고 있다. 이 계곡엔 주민들이 기우제를 지내던 파래소폭포가 있다. 신불산폭포 자연휴양림의 이름은 ‘신불산의 파래소폭포를 끼고 자리 잡은 휴양림’이라는 뜻이다. 휴양림은 상단지구와 하단지구로 나뉘어져 있어 승용차로 접근할 때는 상단과 하단 진입로가 다르므로 주의해야 한다.
입장료는 어른 1,000원, 청소년 600원, 어린이 300원. 주차료는 승용차 3,000원. 산막은 7평형 44,000원, 10평 55,000원, 12평형 60,000원이고, 야영데크는 4,000원, 오토캠프장은 5,000원. 전화 하단지구 052-254-2123 상단지구 052-254-2124
5 간월 자연휴양림
울주군 상북면 등억리 간월산 북동쪽 계곡에 자리한 간월 자연휴양림은 접근이 그다지 어렵지 않으면서도 깊은 산중에 들어선 듯한 분위기에서 지낼 수 있는 휴양림이다. 면적은 60ha로 수용인원은 최대 1,000명이다. 휴양림 안엔 캠프파이어장, 야외풀장, 체력단련시설과 어린이놀이터 등도 있어 어린이를 동반했을 때 함께 즐길 수 있다.
산막 사용 기본요금은 7평(5인실) 70,000원, 9평(7인실) 90,000원, 17평(15인실) 150,000원이다. 성수기(7월1일~8월 31일, 그리고 공휴일과 공휴일 전일, 토·일요일)엔 20%의 할증, 비수기 평일엔 20% 할인한다. 야영장 사용료는 5,000원. 입장료는 고등학생 이상 2,000원, 초등학생 이상 1,500원. 주차료는 승용차 3,000원. 전화 052-263-6644
길에서 만난 별미
장생포 고래고기
울산을 대표하는 별미는 특유의 향과 부위별로 12가지 맛이 난다는 고래고기다. 포항·부산 등지에서도 고래고기를 맛볼 수 있으나, 전통적으로 고래잡이 항구였던 울산의 장생포항 주변은 지금도 고래고기로 전국적인 명성을 날리고 있다.
장생포항의 장생포고래박물관 주변에 고래막집(052-266-1585) 등 고래고기를 전문으로 차리는 식당이 많다. 대부분 장생포 토박이들로서 오래 전부터 식당을 해왔기 때문에 나름대로 고래고기 손질·보관법·조리법 등에 비법이 있는 곳이다.
고래박물관에서 장생포초등학교 방향으로 300m 정도 떨어진 해안에 위치한 원조고래할매집(052-261-7313)은 1951년 창업해 3대째 이어온 원조 고래고기집이다. 밍크고래만 전문적으로 취급한다. 수육·육회·생고기·우네·오베기를 골고루 담은 고래고기모듬(5종) 하나(소 60,000원)를 시키면 부위별로 골고루 맛볼 수 있다.
언양 불고기
언양은 예로부터 한우 도축장이 있었던 고을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싱싱한 한우 고기 공급이 쉬웠다. 이곳은 2006년엔 ‘한우불고기 특구’로 지정될 정도로 불고기가 유명하다. 언양 불고기는 질 좋은 한우를 재료로 해 육질이 부드러운데다 먹기 좋게 다져져 부드럽다. 바깥에서 구워 가져오는데, 적당한 양념에 부드러운 육질, 그리고 구우면서 숯향이 은근히 베어들어 맛있는 불고기가 탄생한다.
언양시장 주변에 언양기와집불고기(052-262-4884), 한마당한우촌(052-262-2047) 등 언양 불고기를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 20여 개나 된다. 다들 나름대로 비법을 자랑한다. 언양불고기 1인분 16,000원, 한우모듬 1인분 20,000원, 등심 20,000원.
일정별 길라잡이
●시내권 울산의 중심부로서 태화강을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되어 있다. 태화강 북쪽엔 울산 병영성, 외솔 최현배 선생 생가터, 울산향교, 학성공원엔 태화사지 12지상 부도와 울산왜성이 있다. 태화강 십리대밭 구경도 놓칠 수 없다. 태화강 남쪽엔 울산대공원 등이 있고, 망해사지 석조부도와 청송사지 삼층석탑도 이 권역에 넣을 수 있다.
●동해권 동해권은 태화강을 경계로 동해 북부권, 동해 남부권으로 나눌 수 있다. 북부권엔 박제상이 떠난 강동동 정자해변, 주전 봉수대, 울기등대와 대왕암 등이 있다. 남부권 매암동엔 장생포 고래박물관, 울산 귀신고래 회유해면, 황성동엔 처용이 도착했다는 개운포·처용암 등이 있다. 또 가장 남쪽의 서생면 해안엔 서생포 왜성, 일출로 유명한 간절곶 등이 있다.
●울주권 언양 읍내엔 언양읍성, 작천정, 자수정 동굴나라, 간월사지 석조여래좌상 등이 있고, 영남알프스 기슭엔 신불산 자연휴양림, 간월산 자연휴양림 등의 휴양시설이 있다. 또 북부엔 반구대 암각화, 천전리 각석 등 국보가 있고, 두동면엔 신라 충신 박제상 유적지와 치술령이 있다.
<일정짜기>
●당일 같은 영남권이 아니라면 접근하는 데 보통 4시간 내외가 걸리므로 아무래도 어려운 일정이다. 머무는 시간이 4시간 정도라면 명소 2~3곳을 돌아볼 수 있다. 간절곶 일출, 반구대 암각화전시관, 장생포 고래박물관, 박제상 유적지 등이 인기 있다.
●1박2일 어느 정도 일정을 잡을 수 있다. 첫날 정오쯤 울산에 도착했을 경우 추천 일정은 다음과 같다. 경부고속도로 서울산 나들목~반구대 암각화~천전리 각석~석남사(숙박)~간절곶 일출~처용암~장생포 고래박물관~학성공원~대왕암~강동 해변~귀가
●2박3일 울산을 비교적 자세히 둘러볼 수 있는 일정이다. 그렇지만 태화강 십리대밭 산책(2시간), 대곡천 산책(왕복 2~3시간), 치술령 산행(왕복 2시간)을 모두 곁들이려면 전체적으로 빠듯한 일정이 된다. 하루는 진하 해수욕장·일산 해수욕장·정자 해수욕장 등이 있는 해변에서 묵고, 하루는 신불산폭포 자연휴양림·간월 자연휴양림 등이 있는 영남알프스 자락에서 묵는 게 좋을 듯하다.
<교통>
●자가운전
수도권 서울→경부고속도로→언양 분기점→울산고속도로→울산 나들목→울산 <4시간30분 소요>
영남권 부산→부산-울산고속도로(2008년 12월 말 완공 예정)→울산 나들목→울산 <40분 소요>
호남권 광주→호남고속도로→고서 분기점→88올림픽고속도로→금호 분기점→경부고속도로→언양 분기점→울산고속도로→울산 나들목→울산 <4시간 소요>
충청권 대전→경부고속도로→언양 분기점→울산고속도로→울산 나들목→울산 <3시간 소요>
강원권 춘천→중앙고속도로→경부고속도로→언양 분기점→울산고속도로→울산 나들목→울산 <4시간30분 소요>
●현지교통
울산→대곡리 시외버스터미널에서 1703번, 1713번, 1723번을 타고 언양에서 하차. 다시 308번, 313번, 318번을 타고 반구대 입구에서 하차.
울산→천전리 시외버스터미널에서 1703번, 1713번, 1723번을 타고 언양에서 하차. 다시 308번, 313번, 318번을 타고 방말에서 하차.
울산→박제상 유적지 시외버스터미널에서 1703번, 1713번, 1723번을 타고 언양에서 하차. 다시 318번, 328번, 338번을 타고 박제상 유적지에서 하차.
울산→석남사 시외버스터미널에서 1713번, 807번을 타고 석남사에서 하차.
울산→장생포 해양공원 시외버스터미널에서 246번을 타고 장생포 해양공원에서 하차.
울산→간절곶 시외버스터미널에서 1715번, 715번을 타고 대송에서 하차.
*울산 시외버스터미널 052-264-8900
<출처> 2009. 1 / 월간산 4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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