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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전라북도

전통문화도시 전주, 고풍스런 한옥마을에서 옛 풍류에 취(醉)하다

by 혜강(惠江) 2008. 11. 17.

 

전주 한옥마을

고풍스런 한옥마을에서 옛 풍류에 취(醉)하다

- 천년의 세월에 농익은 문화적 향기 -

 

·사진 남상학 

 

 

 

 

  경기전을 나와 대한민국 전통문화를 대표하는 전주한옥마을로 향했다. 한옥마을은 경기전 바로 옆에 있다. 마을을 동서로 관통하는 태조로를 따라 들어선 작고 소박한 공방들과 옛 멋을 살린 찻집들, 계획 없이 만나는 수준 높은 공연들은 전주 한옥마을 여행의 덤이다.


  이곳에 서면 역사의 시계가 거꾸로 돌아간다. 전주 풍남동 일대에 자리한 한옥마을은 국내 최대 규모의 전통 한옥촌으로 고풍스런 700여 채의 한옥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이곳에서는 과거로 돌아간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


  천 년이 넘는 ‘완전의 땅’ 전주의 역사와 기운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 전주 한옥마을은 다시 천 년의 전통으로 이어질 문화와 예술이 매우 느리게 무르익고 있다. 몸과 마음의 걸음이 바빠서는 그 오묘한 정취를 놓치기 십상이다. 낮은 하늘 선과 구불구불한 골목길이 주는 여유를 향유할 수 있어야만 그곳에 녹아있는 기개의 역사와 기품 있는 문화의 향취를 느낄 수 있다. 

  평온해 보이는 이 기와집 마을, 이곳의 형성과정에서도 전주인들만이 지닌 기개를 확인할 수 있다. 을사조약이후 일본 상인들이 전주 최대의 상권을 차지하게 되자 한국인들은 1930년을 전후로 일본인들의 세력 확장에 대한 반발로 한국인들은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한옥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는 일본인 주택에 대한 대립의식과 민족적 자긍심의 발로였다. 성내를 점유해오는 일본인들의 ‘꼴’이 보기 싫어 성 밖 가까운 곳에 ‘우리들만의 터’를 잡는다고 기와집을 지으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1930년대에 도심에서 1㎞ 남짓한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형성된 한옥군은 일본식과 대조되고 화산동의 양풍(洋風) 선교사촌과 학교, 교회당 등과 어울려 기묘한 도시색을 연출하게 되었다.


  오목대에서 바라보면 팔작지붕의 휘영청 늘어진 곡선의 용마루가 즐비한 명물이 바로 교동, 풍남동의 한옥마을인 것이다.  6, 70년대까지만 해도 이 지역의 내로라하는 부자들이 모여 살았으니 전주의 문화 예술은 이곳을 중심으로 발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교동 남천교에서 풍남동 동부시장 사이를 지하수를 채수해 순환시킨 맑은 실개천이 흐른다. 폭 넓은 곳엔 자갈을 깔고 수초를 심었다. 인도가 교차하면 돌다리를 놓았다. 밤이면 무지개빛 조명을 번갈아 연출, 시원한 물 흐름을 즐기게 한다. 실개천 곁에는 정자와 작은 연못, 물레방아, 벽천(碧泉), 야생화 등으로 쌈지공원들을 조성했다. 

 

 

 



  마을 안쪽 골목골목에는 옛 사람들의 풍류와 멋이 묻어나는 볼거리도 적잖게 숨어있다. 한옥생활체험관, 술박물관, 한지공예원, 음식관, 전통찻집, 한의학박물관, 판소리극장 등이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문화공간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들 공간으로 이어지는 역사와 전통으로의 문화여행은 바로 이 골목들을 천천히 걸으면서 둘러봐야 제격이다.  부드러운 곡선의 기와지붕 용마루에 간결하고 단아한 내부구조와 낮고 소박한 토담의 따뜻한 옛날 집들이 각기 다른 삶과 사연을 품고 유서 깊은 것들이 아닌가.

 

 

 

 

  대한제국의 연호인 광무를 잇는다는 뜻이 담겨있는 승광재에선 고종황제의 손자이며 의친왕의 11번째 아들 이석이 살며 민박도 운영한다.

 

 이 시대의 마지막 황녀로 드라마로도 널리 알려진 고종황제의 딸로 태어나 평생 험한 고생을 하다가 시동생이 북으로 가며 생활에 보태 쓰라고 주고 간 금을 팔려다 이북에서 나오는 금이란 걸 알고 간첩으로 몰려 10년을 감옥에서 살았던 황녀 할머니도 전주 이 씨 들이 바로 이 곳 경기전에 모셔다 살게 했다는 것이다. 

 

 

 

 

 

 전통 문화공연을 관람하고 체험할 수 있는 전주전통문화센터와 한지 체험장에서는 우리의 한지로 아름다운 생활용품은 물론 수의까지 만든다. 막걸리 청주의 제조과정 관람과 시음까지 할 수 있는 전주전통술박물관에선 술잔이 가득 차면 저절로 모두 비우고 7할만 채웠을 때 제 기능을 하는 '계영배(戒盈杯)’ 술잔에 술을 붓는 실연장면도 볼 수 있다. 

 

 

 

 

 

  ‘계영배’는, 원래 고대 중국에서 과욕을 경계하기 위해 하늘에 정성을 드리며 비밀리에 만들어졌던 그릇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공자도 계영배를 보고 깨달은 바가 있어 탐욕을 멀리하고 고결한 삶을 살게 되었다고 한다.

 

 도공 ‘우명옥’이 만든 계영배가 거상(巨商) 임상옥에게 전해지고 그는 평생 이 술잔을 곁에 두고 욕망을 다스리면서 재물을 지키고 가난한 사람을 도왔다는 야사도 전해진다. (財上平如水 人中直如衡). "재물은 평등하기가 물과 같고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다" 그가 남긴 명언이다.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늘 부족하고 족하다고 생각하면 늘 족한 것이 사람의 삶인 것이다. 재물과 욕망의 지나치지 않은 삶이 진정으로 행복한 삶의 길임을 깨닫게 하는 교훈이다.

 

 

 

 

 

  무엇이든 빠르게 변하는 요즘, 온전히 우리 것을 지켜내기도 쉽지 않은 세상이다. 더욱이 옛 것보다는 새 것이, 지킬 것보다는 바꿀 것이 많은 도시에서 긴 역사를 통해 전해 온 그윽한 우리 고유의 멋과 맛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몇이나 될까? 서울의 인사동이 상업주의로 제 모습을 잃어가고, 장안에 소문난 대목들이 자존심을 걸었음직한 북촌의 한옥들도 개발에 밀려 태반 사라지면서 역사와 전통의 위축을 안타까워했었다. 

 

 다행히 요즘 들어 역사와 전통에 내재한 문화적 가치가 재평가되고 관광의 교육적 가치와 맞물리면서 우리 것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과거로의 회귀나 향수가 아니라 오랜 시간동안 우리가 만들고 가꾸면서 친숙해진 전통문화에 대한 재발견이 아닐 수 없다.

  고색창연한 옛날 한옥들이 도시 속의 쉼터처럼 오롯이 남아 고장의 역사와 뿌리를 짐작케 하는 전주는 경주와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드물게 도시여행지로 추천할 만한 곳이다. 크고 작은 기와집 800여 채가 빼곡하게 들어찬 전주 한옥마을은 비록 낡고 오래되긴 했지만 제대로 지키고 가꾼 우리 삶의 흔적들이 귀중한 문화자산이 될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곳이라고 풍운의 역사가 없었을까? 우리 고유의 전통을 보존해야 한다는 남다른 특성 때문에 영광의(?) 개발금지구역이 된 이곳은 산업화 과정에서 ‘새마을운동’ 식의 서구화 파고를 피해갈 수 있었고 다시 그 덕으로 전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전통문화마을로 거듭날 수 있었으니, 이 짧은 기간에 겪은 숱한 역사의 반전, 그 아이러니의 묘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보존구역이라는 것 때문에 민원이 가장 많은 슬럼가가 될 뻔한 이 지역을 한국에서 가장 전통문화를 대표하는 명소로 탈바꿈시킨 전주시민의 자긍심에 어찌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이 한옥마을을 중심으로 주변에 있는 경기전을 비롯하여 풍남문, 한벽당, 오목대, 전주향교, 전동성당 등 중요 문화재와 문화시설을 묶어 새로운 관광벨트를 형성, 전통문화를 체험하며 옛 선비들의 멋과 풍류를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배려하는 일에 박차를 가하는 것이 좋으리라.

 

 

 

 

 

  이 모두가  걸어서 돌아볼 수 있는 거리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그리고, 전주에는 전주의 대표적인 음식으로 전주비빔밥, 돌솥비빔밥, 콩나물해장국, 한정식 등이 있다. 전주에 와서 이들 음식을 맛보는 것 또한 여행의 한 즐거움이다. 

 

 

 

 


<찾아가는 길>


  호남고속도로 이용시 전주I.C에서 나오면 되고 서해안고속도로 이용시 동군산IC 또는 김제IC에서 나와 전주시청방향 또는 남원방향 약 30분을 달리면 한옥마을이 나온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남부시장 방면을 가는 버스를 타고 전동 또는 풍남문에서 하차하면 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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