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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광주. 전남

전남 곡성, 추억이 물안개처럼 피어오르는 골짝나라

by 혜강(惠江) 2008. 7. 20.

                   전남 곡성

   추억이 물안개처럼 피어오르는 골짝나라 

 

                                              르포라이터 민병준의 향토기행

 

 

 
  강과 계곡이 그리운 계절, 호남땅 곡성(谷城)으로 간다. 호남의 으뜸 강물인 섬진강이 흐르고, 깨끗한 보성강이 젖줄을 이루고 있는 곡성은 ‘골짝나라’다. 백제시대엔 욕내군(欲乃郡), 혹은 욕천군(浴川郡)으로 불렸는데, 이는 골짜기라는 우리말을 한자로 빌려 표현한 것이다. 지금의 한자도 같은 뜻을 지니고 있다. 이렇듯 곡성은 호남정맥에서 뻗어나온 ‘통명지맥’이 부려놓은 골짜기에 소박하게 자리 잡은 심심산골이다.

  하지만 이런 자연 조건 때문에 곡성은 발전이 늦다는 전남에서도 제일 낙후된 지역으로 손꼽혀왔다. 나라에서 세운 광역개발권역 어디에도 들지 못했다. 그래서 곡성 주민들은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기도 했다. 하긴 순창처럼 고추장을 자랑할 수 있나, 남원처럼 광한루와 춘향이를 내세울 수 있나, 구례처럼 지리산 화엄사가 있나, 화순처럼 고인돌이 있나.
 

 

                                    
                                    ▲ 섬진강에서 유일하게 남은 호곡나루 줄배. 안타깝게도 이번에 들렀을 때는 뱃줄이 끊어져 있었다.

 

 
  돌이켜보면 이런 박탈감은 1990년대까지만 해도 그랬던 것 같다. 곡성은 지리산을 찾는 사람들이 그냥 스쳐 지나가는 고을이란 색깔이 강했다. 전라선 열차를 타고 가며 스치는 차창 밖 섬진강 풍경을 감상하면 끝이었다. 간혹 광주 등 인근 대도시 사람들이 태안사나 도림사 같은 데를 알음알음 찾아들긴 했어도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리기엔 힘이 많이 부족했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 곡성은 서서히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보물은 의외로 가까이에 있었다. 섬진강과 보성강의 깨끗한 자연이 최고의 자산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전라선 폐선 구간의 활용, 효의 상징인 심청전 근원설화 발굴 등은 곡성을 짧은 시간에 전국적인 명소 반열에 올려놓았다. 21세기 욕구에 어울리는 자연·문화·놀이의 삼박자가 딱 맞게 떨어진 것이다.

  곡성 여행의 동선은 읍내에서 섬진강 따라가다 압록에서 보성강을 거슬러 오르는 것을 큰 줄기로 삼으면 된다. 곡성의 때깔을 찾으려면 읍내의 곡성장(3·8일장)을 빼놓을 수 없다. 옛날 시골의 5일장은 생필품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이웃 마을 사람들을 만나 서로의 안부도 전하며 농사 정보도 교환하기도 했다. 그러나 유통수단이 발달한 요즘엔 이런 5일장은 겨우 그 명맥만을 유지해 가고 있을 뿐이다.

  그나마 곡성 5일장은 아직 예전의 장점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옛날 시골장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에 속한다. 주민들의 여유로운 발걸음과 구수한 남도 사투리엔 정겨움이 듬뿍듬뿍 묻어난다. 수십 년 전의 정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순댓국집에서 배를 채우거나 막걸리 한 사발 들고 장터를 이리저리 둘러보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튀밥 튀기는 소리에 깜짝 놀라기도 하고, 대장간도 들러 어릴 적 추억에 젖어들기도 하며. 운이 좋다면 이따금 “깽매, 깽매” 흥겨운 꽹과리 소리 울리는 호남좌도 농악도 구경할 수 있다.
 
 

 

▲ 1 곡성을 전국적인 관광지로 끌어올리는 데 큰 역할을 한 섬진강 기차마을 상품. / 2 곡성읍의 전라 좌도 농악. 각종 전국 대회에서 여러 차례 수상한 바 있다. / 3곡성장터에서 만난 대장간. 곡성읍내에선 매월 3, 8일자로 끝나는 날에 5일장이 선다.

 

  
 곡성장 구경을 했다면 곡성의 진산인 동악산(動樂山·735m)을 만나야 한다. 원효가 도림사를 창건할 때 하늘에서 울리는 풍악에 산이 춤을 췄다고 하여 동악산이라 했다던가. 읍내 어디서나 도드라진 동악산이 바라뵈고, 곡성팔경에 동악조일(動樂朝日)이라는 말이 있기도 하지만, 동악산이 돋보이는 까닭은 다름 아닌 계곡 덕분이다.

  사방으로 흘러내리는 동악산의 여러 계곡 중에서 남동쪽으로 흐르는 도림사 계곡의 풍치가 으뜸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계곡 안엔 도림사란 절집이 들어앉아 있다. 절집의 운치야 전쟁 때마다 상처를 많이 입었어도 그런대로 봐줄 정도지만, 너른 반석 깔린 계곡의 풍치는 근동에선 둘째라면 서운할 정도다. 곡성 주민들은 ‘수석의 경치는 삼남에서 으뜸’이라고 자랑한다. 이는 좀 과장이 섞인 표현이긴 하지만, 계곡에 어리는 기상만큼은 충분히 삼남의 으뜸이 되고도 남을 자격이 있다.

  도림사 계곡을 다르게는 청류동(淸流洞) 계곡이라고도 부른다. 이곳에도 구곡(九曲)이 있다. 청류동이란 연유와 구곡의 풀이는 여러 자료 중에서 박혜범 선생이 도림사 계곡에서 시작된 개혁사상과 항일독립운동의 비사에 대해 쓴 책 ‘도채위경’(박이정, 2007년)에 충실하게 실려 있다.

  청류동은 글자대로 풀면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 정도로 이해할 수 있지만, 원래 청류(淸流)는 청렴과 선비들을 상징한다. 이 도림사 계곡을 청류동이라 한 연유를, 저자는 조선 말기 어지러운 국내외 상황에서 점차 수렁으로 빠져드는 조선을 구하려 했던 위정척사론자들의 개혁사상을 상징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 계곡에 구곡의 이름을 붙인 분은 조병순(曺秉順·1876-1921)이다. 일곡은 쇄연문, 이곡은 무태동천, 삼곡은 대천벽, 사곡은 단심대, 오곡은 요요대, 육곡은 대은병, 칠곡은 모원대, 팔곡은 해동무이, 구곡은 소도원이다. 여느 명소의 구곡이 대부분 음풍농월하면서 경치를 읊은 것이라면, 여기의 구곡은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한 우국지사들의 피눈물 나는 의지가 담겨 있다. 그중 사곡 단심대(丹心臺)는 나라와 고종황제를 향한 우국지사들의 굳은 결의를 들여다볼 수 있는 흔적이고, 팔곡 해동무이(海東武夷)엔 힘을 길러 바다 건너 오랑캐를 무찌르고 자주 독립을 이루려는 염원이 묻어있다.

  지금도 단심대 너럭바위엔 간재(艮齋) 전우(田愚·1841-1922)의 단심가(丹心歌)가 새겨져 있다. 이 시는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를 잃어버리고 고뇌하는 우국지사들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단심대엔 100여 년 전 우국지사들이 나라 바로 세우기 위해 뜻을 모을 때 곁에서 내려다보던 늙은 소나무가 있었다. 하지만 그 소나무는 20여 년 전 겨울 폭설에 가지가 부러져 죽었고, 2007년 옛 소나무와 비슷하게 생긴 소나무를 구해 심어놓았는데, 이름은 ‘단심송’이다. 참 잘 어울리는 작명이다. 우국지사의 마음이 서린 이 단심송이 잘 뿌리내리길 진심으로 기원해본다. 
 
 

 

   

  ▲ 곡성 동악산 품에 안겨있는 도림사. 도선국사가 중창할 때 도인들이 숲같이 모여들어 절 이름을 도림사라 했다고 한다.

 

 
   조선 말기에 위정척사운동의 발원지이자 항일독립운동의 호남 내 최대 거점이었던 도림사 계곡. 그러고 보니 철마다 행락객들의 발길이 멈추지 않는 저 널따란 반석 위를 흐르는 청류엔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 걸었던 우국지사들의 피눈물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이 계곡의 풍치를 즐기면서 편안히 하루를 쉴 수 있는 까닭은 모두 그분들이 목숨 바친 충절 덕분이 아니겠는가. 경관에 눈이 즐겁고, 사연에 가슴 아린 청류동 계곡이다.
   도림사 계곡의 청류는 흘러 흘러 섬진강으로 몸을 섞는다. 이젠 섬진강을 둘러볼 차례. 섬진강은 이름이 여럿이다. 곡성 주민들은 예전엔 섬진강을 순자강(瞬子江)이라 불렀다. ‘순자(瞬子)’란 명칭은 이긍익이 지은 <연려실기술> 지리전고에 나온다. ‘섬진강은 근원이 진안의 중대(中臺) 마이산에서 나와서 합하여 임실의 오원천(烏原川)이 되고, 서쪽으로 꺾어져 남쪽으로 흘러 운암(雲巖) 가단(可端)을 지나서 태인의 운주산(雲住山) 물과 합하여 순창(淳昌)의 적성진(赤城津)이 되는데, 이것을 화연(花淵)이라고도 한다. 이 물은 또 저탄(猪灘)이 되고, 또 동쪽으로 흘러서 남원(南原)의 연탄(淵灘)이 되며, 또 순자진(瞬子津)이 된다.’ 하지만 대동여지도엔 순자진이란 명칭이 나오지 않는다. 다만, 곡성 북쪽의 옥과(玉果) 근처에 이르러 방제천(方悌川)이라는 이름이 비로소 보일 뿐이다.

  옛 사람들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요즘 섬진강을 즐기는 방법은 여럿이다. 하나는 제일 쉬우면서도 싱거운 드라이브, 둘은 추억의 기차 여행, 셋은 두 바퀴로 즐기는 자전거 하이킹, 넷은 천천히 걷는 일이다. 이 네 가지를 모두 해봐야 섬진강을 제대로 구경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쉽지 않은 일이지만.

  곡성 읍내를 지나면서 섬진강변을 향해 달리다보면 ‘섬진강 기차마을’이라는 표지판이 눈길을 붙든다. 곡성군이 섬진강변을 지나는 전라선 폐선구간 17.9km를 활용해 관광자원화한 섬진강 기차마을은 곡성의 최고 효자상품이다.

  1999년 전라선 일부 구간이 폐선되자 곡성군은 철도청으로부터 이를 사들여 관광객을 태울 증기기관차와 전시용 증기기관차, 기차카페 2량, 철로자전거를 갖추는 등 6년간의 철저한 준비작업 끝에 섬진강 기차마을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시험 운행을 거쳐 본격 운영한 지 3년만에 곡성은 ‘추억 속의 친자연 관광지’라는 명성을 얻게 된 것이다.

  곡성의 명물로 떠오른 섬진강 기차는 옛 곡성역 자리인 기차마을에서 고달면 가정마을 간이역까지 약 9km 구간을 왕복 운행한다. 섬진강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구간을 시속 30km로 달리는 기차를 타고 감상하는 맛은 색다르다. 섬진강 맑은 물과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 그리고 차창으로 달려드는 강바람은 도시에서 묻혀온 찌든 때를 말끔히 씻어준다. 아마 곡성 읍내서 만난 외지 차량 중 열에 여덟아홉은 섬진강 기차를 타려는 손님이라고 봐도 그다지 틀리지 않을 것이다.

  줄배도 섬진강을 돋보이게 하는 여러 콘텐츠 중 하나다. 예전엔 섬진강에 줄배가 많았다. 화개장터, 운천나루, 염창나루, 금천나루, 한동나루, 섬진나루…. 곡성에도 동산나루, 무너미나루, 호곡나루, 두계나루, 가정나루…. 나루터마다 줄배가 있었다. 하지만 다리가 하나둘 놓이면서 줄배는 점차 추억으로 사라져갔다.

  고달면의 호곡나루는 주민들이 실제 사용하는 줄배로는 섬진강 전 구간에서 유일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화개장터에도 줄배가 있었으나 그 아래로 남도대교가 생기면서 이젠 추억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마지막 남은 호곡나루 줄배에 큰 기대를 하고 찾았으나 안타깝게도 큰물 때문인지 줄이 끊어진 채였다.

  배는 깊은 강으로 둘러싸인 마을과 외부를 이어주는 유일한 끈이다. 배를 이용하지 않고 산길을 돌아가려면 보통 반나절은 더 걸린다. 더 오랜 옛날엔 줄배가 아니라 노를 젓는 나룻배였다고 한다. 그래서 배가 강 건너에 있으면 행인은 “배 대시오!” 하고 외쳤다. 그러면 강 건너의 뱃사공이 소리를 듣고 나와 행인을 건네준다. 하지만 사공이 늘 붙어있어야 하니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게 바로 줄배였다.
  줄배는 사람이나 짐뿐 아니라 소, 닭, 돼지까지 실어 날랐다. 강마을 산골 동네로 시집오는 각시도 가마 타고 줄배로 강을 건넜다. 줄배의 생명은 보통 3~4년 정도밖에 안 된다고 한다. 또 큰물이 지면 반드시 줄을 풀어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줄이 끊어져 배가 떠내려가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주민들은 한밤중에 큰비가 갑자기 내리기라도 하면 모두들 나와 힘을 합쳐 배를 강기슭에 올려놓았다. 아차, 하는 사이 배가 떠내려가는 경우도 적지 않다. 비가 그친 뒤 다시 줄을 매다는 일도 어려웠지만, 이따금 배가 뒤집혀 주민들이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다.

  그랬다. 줄배는 우리처럼 한번 타보고 훌쩍 떠나는 외지인에겐 여행의 낭만이었지만, 주민에겐 현실이었다. 그래서 섬진강 마지막 줄배가 있는 호곡리 주민들도 이곳 나루터에 다리를 놓아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관광용 줄배는 저 아래쪽에 따로 설치해놓더라도 말이다. 호곡나루를 벗어나며 이방인의 이기심(?)으로 빌어본다. 그래도 섬진강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이 호곡나루 줄배는 꼭 간직해달라고.

  쏘가리 노리는 호곡나루 강태공들을 뒤로 하고, 섬진강 물줄기를 따른다. 흐르는 강물처럼 서둘지 않고 주변 풍광을 쉬엄쉬엄 구경하며 간다. 이즈음에서 잠시 강물이 들려주는 전설 한 토막 들어보자.

‘  옛날 옛적 전남 곡성 섬진강변에 훗날 장군이 될 마천목이란 소년이 살았어요. 소년은 어느 날 어머니에게 드릴 물고기를 잡으러 강변에 나갔다가 반짝이는 푸른 돌 하나를 주웠답니다. 그 날 밤 소년의 집 앞에 푸른 불을 번쩍이며 도깨비들이 나타났지요. 그중 한 도깨비가 말했어요.
 

 

▲ (위)우국지사들의 굳은 결의가 서려 있는 도림사 계곡의 단심대. 최근에 옮겨 심은 단심송이 너럭바위를 내려다보고 있다. / (아래) 섬진강 기차가 섬진강 강변 철도를 달리고 있다.

 

 
  “당신이 낮에 강에서 주워간 돌은 우리 대장이니 돌려주시오.”
그러자 소년은 대답했어요.
  “내가 고기를 잡을 수 있도록 강에 독살을 쌓아주면 너희 대장을 놓아주겠다.”

  독살은 물고기를 잡기 위해 돌로 쌓은 방죽을 말해요. 그날 밤 도깨비들은 도깨비 방망이로 조화를 부려 독살을 쌓았어요. 이후 마천목 소년은 어머니에게 드릴 물고기를 손쉽게 잡을 수 있게 되었답니다.’

  지금도 고달면 두계리 강변엔 ‘도깨비살’이라 부르는 독살의 흔적이 남아 있다. 17번 국도변에 표지석을 세워놓긴 했지만, 주변에 차댈 곳도 마땅치 않아 구경하기 어렵다. 여유롭게 살피려면 하류의 다리를 이용해 강을 건너가야 한다. 강 건너의 ‘도깨비살’ 앞엔 익살스런 표정의 ‘도깨비 대장’ 조각이 세워져 있다.

  곡성의 섬진강을 살린 또 하나의 콘텐츠는 심청이다. 심청전은 설화로 구전되어 온 우리나라 고대 소설로 작자와 연대 미상인 작품. 그런데 곡성 관음사의 역사인 관음사 사적기엔 이와 유사한 원홍장(元洪莊) 설화가 전한다. 옛날 대흥에 장님인 원량이 딸 홍장과 살고 있었는데, 원량이 딸을 스님에게 시주했고 그 딸이 나중에 바다를 건너가 진나라 황후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원홍장의 고향이 바로 섬진강변에 있는 오곡면 송정리라는 것이다. 곡성군에서는 이곳에 심청마을을 조성중인데, 현재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다.

 

▲ 1 섬진강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 가족. 섬진강은 여름을 즐기기에 아주 좋은 강이다. / 2 섬진강에서 자전거 하이킹을 즐기는 사람들. 송정리와 가정리 두 곳에 자전거 대여소가 있다. / 3 어린아이가 있는 가족이 가족용 네발자전거를 타고 섬진강을 돌고 있다.

 

 
  이렇게 되면 심청마을은 섬진강의 또 하나의 명물로 떠오르겠지만, 심청에 관해 말들이 없는 건 아니다. 이곳 곡성은 물론 인천 옹진군, 충남 예산군, 그리고 중국까지도 심청 설화의 주요 무대가 자기 고향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 나름대로 근거가 있다.

  곡성은 원홍장 설화를 근거로 내세우고, 옹진군은 심청이 뛰어든 인당수가 백령도와 장산곶 사이에 있고, 바로 그곳이 한·중간의 주요 해상교통로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산은 관음사 사적기와 홍법사 사적기에 나타난 심청의 고향 대흥현이 지금의 예산 대흥면이라고 주장한다. 또 중국의 저장(浙江)성 닝보(寧波)항 앞바다에 위치한 조우산(舟山)시엔 심청전 원형 설화와 똑 같은 내용의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래서 얼마 전엔 그곳에 심청원(沈淸園)을 조성할 예정이라는 보도도 있었다.

  이렇듯 효도를 위해 자기희생을 하는 심청형 설화는 여러 곳에 전해오는데, 전문가들은 심청형 설화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 등 주변 나라에도 퍼진 일반적인 효도 설화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섬진강 기차 종착역인 가정역 주변은 여행객들로 붐볐다. 곡성읍에서 섬진강 기차를 타고 와서 자전거 페달을 밟는 가족이나 연인이 가장 많았다. 어떤 이들은 강변에 텐트를 치고 루어로 꺽지를 희롱하기도 하고, 강 안쪽까지 들어가 다슬기를 줍는 사람들도 보였다. 무엇을 선택하든 섬진강에선 자유다.

  섬진강을 실컷 즐겼으니 이제 보성강으로 가보자. 보성강의 발원지는 갯내음 물씬 풍기는 보성 고을 호남정맥의 일림산(626.8m) 자락이다. 특이하게도 보성강은 해안 가까운 곳에서 발원해 순천·곡성 고을을 적시고 북으로 거듭 진로를 잡으며 흐르다가 깊은 산간 내륙 분위기가 물씬한 곡성의 압록(鴨綠)에서 섬진강에 몸을 섞는다.
  보성강 여정은 물빛이 청둥오리의 모가지 빛깔을 닮았다는 압록부터 시작한다. 곡성 주민들은 보성강 하류, 곧 석곡에서 죽곡을 거쳐 압록에 이르는 20여km의 물줄기를 따로 대황강(大荒江)이라고 부른다. 대동여지도엔 대황천(大荒川)이라 적혀 있다. ‘대황강 8대 어전(魚田)’이라 불리는 소(沼)는 곡성 주민들이 자랑해마지 않는 어족 자원의 보고. 귀한 별미로 꼽히는 은어와 참게는 최근 눈에 띄게 개체수가 줄어들었으나, 꺽지·쏘가리를 비롯한 어종은 여느 강에 비해 개체수가 많다. 그리고 대사리라 부르는 다슬기도 흔하다. 곡성팔경 중 대황어화(大荒漁火)라는 게 있는데, 이는 밤에 횃불을 켜들고 물고기나 다슬기를 잡는 광경을 말한다.

  보성강 하류로 흘러드는 동계천을 거슬러 오르면 태안사(泰安寺). 입구에서 절집까지의 2km쯤 되는 계곡길은 화려하진 않지만 아기자기한 맛을 지니고 있다. 고로쇠나무·떡갈나무·단풍나무, 소나무들이 우거진 숲속을 지나면 절집이다.

  길손은 여기서 한 시인을 만난다. ‘국토’ 연작시와 ‘식칼론’ 연작시로 ‘국토와 식칼의 시인’으로 불리던 고 조태일(趙泰一·1941-1999) 시인이다. 태안사는 조태일 시문학의 탯자리다. 1941년 태안사에서 대처승의 아들로 태어난 시인은 생전에 “나의 시는 태안사에서 비롯되었고 태안사에서 끝이 난다”고 말하곤 했다. 그를 기리는 시문학기념관이 태안사 입구에 터를 잡게 된 연유다. 소외된 민중과 우리 땅을 사랑했던 시인의 노래를 한번 들어보자.

 

▲ 1 섬진강 기차의 종점인 가정역 근처의 강변 풍경. 현수교를 이용해 강을 건널 수 있다. / 2 심청마을 느티나무 아래서 심봉사가 딸 심청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 3 커다란 연꽃에서 나타난 심청전 장면을 형상화한 조각상. / 4 섬진강변 송정리 언덕에 세워진 심청마을. 심청전의 원류인 ‘원홍장 설화’의 주인공이 이 마을에 살았다고 전한다.

 

 
 ‘발바닥이 다 닳아 새살이 돋도록 우리는 / 우리의 땅을 밟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 결이 다 타올라 새 숨결이 열리도록 우리는 / 우리의 하늘 밑을 서성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 야윈 팔다리일망정 한껏 휘저어 / 슬픔도 기쁨도 한껏 가슴으로 맞대며 우리는 / 우리의 가락 속을 거닐 수밖에 없는 일이다. // 버려진 땅에 돋아난 풀잎 하나에서부터 / 조용히 발버둥치는 돌멩이 하나에까지 / 이름도 없이 빈 벌판 빈 하늘에 뿌려진 / 저 혼에까지 저 숨결에까지 닿도록 // 우리는 우리의 삶을 불 지필 일이다. // 우리는 우리의 숨결을 보탤 일이다. / 일렁이는 피와 다 닳아진 살결과 / 허연 뼈까지를 통째로 보탤 일이다.’

                                       (조태일 시인의 ‘국토 서시’전문)

 


  조태일시문학관을 나와 다리를 건넌다. 절집에선 다리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해 거기에 의미를 새겨 넣는다. 태안사엔 모두 다섯 개의 다리가 있다. 속세의 미련을 못 버렸다면 여기서 돌아가라는 귀래교(歸來橋), 마음을 씻으라는 정심교(淨心橋), 세속의 번뇌를 씻고 지혜를 얻으라는 반야교(般若橋), 깨달음을 얻어 도를 이루라는 해탈교(解脫橋),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속에서 불계로 들어가는 경계라는 능파각(凌波閣). 



                                 
  

 

                                           ▲ 지난해 초가을의 보성강 풍경. 보성강 맑은 물에 몸을 담그고 낚시에 열중하고 있는 저들이                                           정말 부러웠다.  

 

 
  하지만 요즘 절집을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승용차로 오르기 때문에 많은 방문객들은 이 다섯 개의 다리를 모두 그냥 지나쳐 절 앞마당에 닿게 된다. 그러나 마지막 다리인 능파각은 반드시 걸어야 한다. 여기서 경내까지는 아무리 천천히 걸어도 5분이면 충분하다.

  능파각은 계곡을 잇는 다리 위에 누각을
세운 누교(樓橋)다. 다리에 지붕을 씌워 누각 역할도 겸하고 있는 것이다. 사찰의 다리 중 운치로 손꼽히는 다리는 여기서 가까운 순천 선암사의 승선교, 송광사의 삼청교, 여수 흥국사의 홍교, 그리고 멀리로는 강원도 고성 건봉사의 능파교가 떠오르는데, 태안사 능파각도 목록에서 빠지지 않는다.

  ‘능파(凌波)’란 원래 물결 위를 가볍게 걸어 다닌다는 뜻으로, 미인의 가볍고 아름다운 걸음걸이를 이르는 말이라 한다. 스님은 말씀하신다. ‘파도를 넘는다’는 뜻이라고. 그렇다. 파도를 넘듯 세속의 모든 번뇌를 버리고 청정한 부처님의 품으로 들어오라는 의미다.
 

 

▲ 1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셨다는 태안사 삼층석탑. / 2 세속에서 불계로 들어가는 경계인 능파각. 계류에 걸린 누교가 제법 운치있다. / 3 태안사를  찾는 사람들이 증명사진을 즐겨 찍는 일주문. 원래는 능파각 아래에 있던 것으로 위쪽으로 옮겨놓았다. / 4 목사동면 구룡리에 조성되어 있는 용산. 고려 개국 공신인 신숭겸 장군이 태어난 곳이다.

 

 
  능파각은 비록 사천왕은 모시지 않았지만, 천왕문 역할도 맡고 있다. 능파교를 지나 돌계단을 밟고 오르면 태안사 일주문이다. 일찌감치 지났어야할 일주문이 여기에 있는 까닭은 주변에 충혼탑과 연못을 조성하면서 능파각 아래쪽에 있던 일주문을 위쪽으로 옮겨놓았기 때문이다. 부도밭 옆에 있는 일주문은 주변 분위기와 잘 어우러져 그런대로 위치 선정에 애쓴 흔적이 보이긴 하지만 격식엔 맞지 않는다.

  태안사는 인근의 조계산 송광사나 선암사, 지리산 화엄사 등에 가려 명성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으나 한때 이들 세 곳의 절집을 모두 말사로 거느렸던 대찰이었다. 6·25전쟁을 겪으며 많은 피해를 입었음에도 선문구산의 하나인 동리산문을 연 적인선사 혜철(785-861)의 부도, 제2대 조사인 광자대사 윤다(864-945)의 부도 및 탑비, 효령대군이 세종을 위해 만들었다는 대바라 등 살펴볼 만한 보물급 문화유산이 여럿 있다.

 

▲ 조태일 시문학전시관 안에 꾸며놓은 시인의 작업실. 이곳엔 이외에도 시인의 유품과 작품, 시인을 기리는 문학작품 등 2,0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 (인물) 태안사 입구의 조태일 시문학전시관 안에 걸려있는 조태일 시인의 초상화. 시인은 태안사에서 대처승의 아들로 태어났다.

 

  또 한 분, 청화(淸華·1924-2003) 스님의 흔적도 남아있다. 치열한 수행 정신과 청빈한 삶으로 수행자들의 귀감이 되었던 청화 스님은 상무주암·백장암·사성암 등 20여 곳의 토굴을 옮겨 다니며 수행한 선승이었다. 40여 년간 하루에 한 끼 식사만을 하는 일종식(一種食), 자리에 눕지 않는 장좌불와(長坐不臥)의 수행을 계속해 성불의 경지에 올랐다. 청화 스님은 무소유의 실천적 삶을 산 우리 시대의 큰 스승이었다. 몇 년 전 출간된 소설 ‘청화 큰스님’(랜덤하우스, 2005년)엔 청화 스님의 어린 시절부터 출가 이후의 치열했던 구도의 길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1985년 태안사에 주석하게 된 청화 스님은 6·25전쟁에 폐허가 되다시피 한 절을 맡아 지금의 태안사를 있게 했다. 길손은 1990년대 후반 태안사에서 스님을 우연히 뵌 적이 있다. 당시 길손은 전국의 유명한 샘물을 찾아다닐 때였는데, 태안사 돌샘 물맛이 좋다는 말을 듣고 동백꽃 피는 이른 봄날에 태안사를 찾아갔다.

  대웅전에서 선방으로 가는 길을 따라 2~3분쯤 가면 작은 계류가 나온다. 그 계류에 걸린 돌다리 아래에 이끼를 잔뜩 머금은 석간수가 돌샘이다. 계곡가에 있는 샘물이지만 잡수가 끼어들지 않아 수량은 일정했고, 물맛은 태안사 터처럼 순하고 아늑한 맛이 혀 안에서 감돌았다. 그런데 사진을 찍으려니 샘물에 떠있는 벌레 때문에 여의치 않았다. 머뭇거리고 있는데,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샘물에 가재밥이 있어야 사람도 먹을 수 있지요.”

  돌아보니 가냘프고 눈빛 맑으신 노스님이 빙긋 웃고 계셨다. 노스님은 차 달일 샘물을 직접 길러오신 참이었다. 길손이 비켜서자 표주박을 저어 물 위에 떠있는 벌레를 조심스럽게 치운 뒤 주전자에 퍼 담으면서 “돌샘은 달고 순한 물”이라는 말씀을 곁들이셨다. 맑은 샘물에 사는 새우 닮은 벌레의 이름이 가재밥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으나, 그보다는 가재밥 같은 벌레도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상생(相生)의 진리를 깨우쳐준 귀한 말씀은 오랫동안 가슴에 남았다. 그때 스님께 합장도 못했으나 나중에야 그 노스님이 바로 청화 스님이었음을 알았다.
 
 

 

▲ (위)조선 개국 공신인 마천목 장군을 기리는 석곡면 방송리의 마천목 장군 사당. / (아래) 금랑각 앞에서 본 관음사 전경. 심청전의 원류인 ‘원홍장 설화'는 관음사 사적기에 등장한다.

 

 
  태안사를 벗어나 다시 보성강을 거슬러 오른다. 곡성엔 원두막이 많다. 곡성군이 섬진강에 보성강, 그리고 유명 관광지 주변에 일부러 세워놓은 원두막은 여행객들에게 좋은 쉼터 역할을 하고 있었다. 실제로 강변길을 걷다보면 경치 좋고 쉬어가고 싶은 곳에 서있는 원두막이 자꾸 발길을 잡는다. 그리하여 시원한 바람을 쐬며 잠시 누워 쉬다보면 곡성의 하늘, 곡성의 숲, 곡성의 산, 곡성의 강줄기가 가슴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는다.

  이번에 돌아다니다 보니 곡성의 아름다운 자연과 원두막은 참으로 절묘하게 호응을 이루고 있었다. 이는 지금은 곡성만이 가진 장점이지만, 길손은 원두막이 곡성을 벗어나 전국적으로 퍼져나갔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전국 곳곳 풍경 좋은 명소마다 원두막이 있다고 상상만 해도 흐뭇해지지 않는가.


 

▲ 1 섬진강에서 다슬기를 잡는 사람들. 이 지역에선 다슬기를 대사리라 부른다. / 2 제법 잘 생긴 가곡리 석장승. 왕방울 눈과 벌렁코는 무섭다기보다는 정겹게 느껴진다. / 3 곡성 출신의 마천목 장군이 어린 시절 도깨비들의 도움을 받아 독살을 만들었다고 전하는 도깨비살 근처엔 ‘도깨비 대장’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해가 기울 무렵, 목사동면 구룡리에선 옛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申崇謙·?-927) 장군을 모신 용산단에 들러 의리로 무장한 영웅의 흔적을 살피고, 석곡면 방송리에선 고려 말에 조선을 세우는 데 큰 공헌을 한 마천목(馬天牧·1358-1431) 장군을 만난다. 두 분의 생가는 20리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나, 500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으면 한 사람은 고려를 세우는 데, 또 한 사람은 그 고려를 무너뜨리는 데 목숨을 걸었으니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이 정도면 곡성은 거의 둘러본 셈이었다. 예전엔 그랬다. 하지만 오산면의 관음사는 빼놓고 싶지 않았다. 심청전의 근원설화 중 하나라는 원홍장 설화가 사적기에 실려 있는 절집이기 때문이다. 이 책이야 현재 송광사에서 보관하고 있지만, 대체 어떻게 생긴 절집인지 궁금증이 일었다. 관음사 가는 길에 보물인 가곡리 5층석탑을 찾다가 가곡리 입구에서 제법 잘 생긴 석장승과의 만남은 뜻밖의 소득이었다.


 

▲ (위)곡성읍내에 조성되어 있는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 비록 1km도 안될 듯 짧지만 지나는 관광객의 눈길을 끌기엔 충분하다. / (아래) 곡성군이 섬진강 보성강 주변의 관광지 주변에 세워놓은 원두막은 여행객들에게 좋은 쉼터 역할을 하고 있다.

 

 
  석장승은 동네 앞 100m 지점 도로 양쪽에 서로 마주 보고 서 있었는데, 이곳을 마을 사람들은 장승거리라고 불렀다. 왼쪽이 할아버지 장승이라고 하며, 오른쪽이 할머니 장승이라고 구분하고 있다. 두 석장승 모두 높이 230cm로 제법 큰 편이다. 손은 위로 올라간 형태를 하고 있으며, 배 부분에서 서로 교차하고 있어서 몸체에 비해 앙증맞다. 또한 왕방울 눈과 벌렁코는 무섭다기보다는 정겹게 느껴졌다.

  원홍장 설화로 호기심을 끄는 관음사(觀音寺)는 300년(백제 분서왕 3) 처녀 성덕(聖德)보살이 전남 벌교에서 금동관세음보살상을 모셔와 봉안하여 창건한 사찰이다. 창건자가 의상·원효 같은 고승이 아니고, 보통 사람이라는 게 특이하다. 사연인즉, 창건주인 성덕이란 여인이 바로 심청, 원홍장이 보낸 관음상을 발견하고 이곳에 모신 장본인이다.

  관음사 가는 길은 장하다. 숲은 짙었고 계류는 맑았다. 아름드리 느티나무에서 1,700년이라는 절집의 내력을 읽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절 입구 개울엔 다리가 걸려 있었다. 금랑각(錦浪閣). 비단결 같은 물결에 떠있다는 이 다리는 관음사 일주문 노릇을 하는 누각인데, 태안사의 능파각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태안사에선 파도를 넘었는데, 관음사에선 비단결 같은 물길을 건넌다. 금랑각 너머는 아늑하고 고요한 관음의 품속이다. 실로 관음사는 몇 십 걸음만 걸으면 다 둘러볼 수 있는 아담한 절집이지만, 관음보살이 현현할 것 같은 맑은 기운이 경내에 넘쳐났다.
이 절집은 예전엔 제법 큰 고찰이었으나 6·25전쟁 때 국보이던 원통전(圓通殿)과 그 안에 보존된 금동관음보살상이 불에 타버리고 말았다. 지금의 원통전 건물은 전쟁 후 부속암자였던 대은암(大隱庵)의 건물을 옮겨다가 복원한 것이다. 특이하게도 원통전엔 관세음보살과 함께 염라대왕도, 산신령도 모두 함께 들어와 계신다. 6·25전쟁 때 명부전·산신각이 모두 불탔기 때문이리라.

  절마당 한 쪽에서 왼손에 물고기 한 마리를 보듬고 앉아 계신 어람관음불상을 뵙고, 누구나 알 수 있게 한글로 써놓은 극락전 주련을 읽는다. ‘극락전의 아미타불 보름달 같은 얼굴 / 한량없는 지혜의 빛 온 허공을 비추나니 / 누구든지 일념으로 그 이름을 부르오면 / 무량공덕 원만하게 한순간에 이르리라’ 절마당에 비껴드는 초여름 햇살이 참 편안하다.

 

 

<출처> 2008. 7월/ 월간산 46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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