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담양 정자 기행
배롱나무 꽃그늘 드리워진 정자 탐방
- 명옥헌, 면앙정, 소쇄원, 환벽당 등
박경일 기자
▲ 명옥헌 주위를 병풍처럼 둘러친 오래 묵은 배롱나무들이 일제히 붉은 꽃을 틔워냈다. 화르르 붙은 꽃불은 지금이 절정이다. 선혈처럼 붉은 빛이 황홀할 지경이다
남도 땅에 배롱나무 붉은 꽃이 폭죽처럼 터졌습니다. 붉은 꽃잎이 선혈처럼 낭자합니다. 배롱나무가 아름답기로는 전남 담양의 명옥헌 원림(園林·집터에 딸린 숲)이 단연 최고지요. 운치있게 지어진 정자 아래 연못 둘레로 심어진 배롱나무도 좋지만, 연못에 띄워놓은 작은 섬에 가지를 뻗고 선 아름드리 배롱나무는 지금 불이 붙은 듯 붉게 타오르고 있습니다.
배롱나무는 100일 동안 꽃이 피어 있다고 해서 백일홍이라고도 부릅니다. 이 꽃이 다 질 무렵이면 추수가 시작된다네요. 명옥헌 누정마루에 걸터앉아 만발한 꽃을 바라보던 한 노인은 “없이 살았던 시절, 배고파 우는 아이에게 ‘저 꽃이 다 지면 쌀밥을 먹을 수 있다’고 달랬다고 해서 ‘쌀나무’라고도 부른다”고 했습니다. 배곯던 아이는 아마도 좀처럼 꽃이 지지 않는 쌀나무가 야속했지 싶습니다. 꽃잎을 떨구면 새 꽃잎이 돋아 세 번씩 다시 피어 여름 내내 피어오르기 때문입니다.
담양 땅에는 도처에 배롱나무입니다. 담양에서 창평으로 가는 887번 지방도로는 배롱나무들이 열병식을 하듯 늘어서 있습니다. 남도 땅의 배롱나무는 유독 꽃이 붉은 듯합니다. 소쇄원에도, 송강정에도, 독수정 원림에도, 환벽당에도….
담양의 수많은 정자 주변으로는 배롱나무꽃이 만발해 있습니다. 반들반들한 수피에 붉고 화려한 꽃잎이 수수하고 소박한 정자와 그렇게 잘 어울릴 수 없습니다.
여름도 이제 막바지입니다. 배롱나무 붉은 꽃그늘을 밟으며 담양 땅으로 향하는 여정은 어떠신지요. 잘 알려진 메타세쿼이아 숲길을 걸어도 좋고, 울울창창한 대나무숲의 서걱거리는 바람소리를 듣는 것도 좋겠습니다. 서늘한 바람이 소쇄소쇄 부는 소쇄원의 짙은 이끼로 가득한 옛 정원도, 그림자도 쉬어간다는 식영정도 빼놓으면 아쉬울 곳들이지요.
여기다가 산자락을 부드럽게 곡선으로 켜켜이 돌을 쌓아올린 금성산성과 조선 선조때 10년 넘게 일기를 써왔다는 미암일기가 남아있는 모현관을 보탭니다. 올여름은 유난히 더웠습니다. 합죽선을 소리나게 착 펴서 들고, 슬슬 바람을 부쳐가면서 물러가는 여름날에 정자에 올라 배롱나무꽃 구경을 떠나보면 어떠시겠습니까. 그러다 출출해지면, 덕인관의 떡갈비도 좋겠고 슬로시티로 지정된 창평면의 북적거리는 장터에서 질박한 창평국밥 한그릇도 좋겠습니다. 밤이면 스티로폼 상자를 메고 다니며 목청껏 외치는 떡장수를 불러 망개떡의 진한 망개나무 잎사귀 향을 음미해보는 것도 빼놓지 마시길….
이제 곧 여름도 다 가고 배롱나무도 하나둘 꽃잎을 떨구겠지요. 담양 정자문화의 원류로 꼽히는 면앙정을 짓고 풍류를 읊었던 송순이 지은 한시 ‘석춘가’의 한 대목을 읊어봅니다. “꽃이 진다고 새들아 슬퍼 마라. 바람에 날리니 꽃의 탓이 아니로다….” 을사사화때 추풍낙엽처럼 목이 떨어지던 올곧은 선비들을 기리며 지은 이 한시는 지금 되짚어 읽어도 새록새록합니다.
권력에 등돌리고 자연과 마주앉은 ‘대쪽 선비’를 만나다
명옥헌… 면앙정… 소쇄원… 환벽당… 담양 ‘정자기행’
▲ 원림을 끼고 있는 명옥헌. 정자는 활짝 열려있어 누구든 정자 마루에 올라 연못 주위에 피어난 배롱나무꽃들을 감상할 수 있다.
전화기 저쪽에서 전남 담양의 지인이 달뜬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명옥헌에 배롱나무가 선혈처럼 낭자합니다.” 한 번 꽃을 틔우면 세 번을 피고 또 지면서 100일이 간다는 배롱나무. 그러니 100일 동안은 배롱나무 붉은 꽃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도 다 때가 있는 법. 피고 지기를 거듭한다지만, 배롱나무꽃도 화닥닥 절정에 이를 때가 있다. 그때가 바로 지금이다.
이즈음부터 앞뒤로 일주일여가 남도 땅에서 배롱나무의 붉디붉은 꽃의 절정을 만날 수 있는 시기라면, 가장 화려한 꽃을 만날 수 있는 장소는 단연 전남 담양군 고서면 산덕리의 명옥헌 원림이다. 명옥헌은 조선 중기 예문관 관원에 올랐던 오희도의 넷째 아들 오이정이 지은 정자. 정자 앞에는 연못을 두고 연못 가운데는 섬을 띄워놓았다. 이 연못과 정자 주위로 100여년이 훌쩍 넘는 거목 배롱나무 20여그루가 심어져 있다. 아름드리 나무에 화려한 붉은 꽃이 매달린 장면은 말할 것도 없고, 척척 늘어진 가지에 매달린 꽃들이 연못에 반영되는 모습은 황홀할 정도다.
명옥헌은 활짝 열려 있어 누구든 정자 마루에 앉아서 배롱나무꽃을 감상할 수 있다. 그 자리에 앉게 된다면, “아, 좋다”는 감탄사가 저절로 터지게 된다.
남도 땅에는 유독 배롱나무가 많다. 그 중에서도 담양에는 도처에 배롱나무다. 담양읍에서 창평으로 가는 887번 지방도 길가에는 양옆으로 환하게 꽃을 터뜨린 배롱나무들이 끝간 데 없다. 담양에 이렇게 배롱나무가 많은 것은 예로부터 선비들이 정자나 서원, 혹은 집터에 배롱나무 한두그루쯤 심어놓았기 때문이다. 붉은 꽃이 화를 물리치는 ‘척화(斥禍)’의 의미를 담고 있는데다, 붉은 꽃이 불붙듯 피어나는 모습에서 학문의 번성을 기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배롱나무는 ‘선비나무’로도 불렸다.
# 정자 기행의 출발점…송순의 면앙정
▲ 시가문학의 뿌리이자, 담양이 거느린 수많은 정자의 원류 격인 면앙정. 벼슬에서 은퇴하고 낙향한 송순이 이 정자를 짓고 은거했다.
담양에는 명옥헌 말고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누정(누각과 정자)과 원림이 있다. 사실 정자의 모습이래야 다 비슷비슷한 법. 건축물의 모양새나 들어앉은 자리만 보고 다니면 곧 지루해진다. 담양 땅의 ‘정자기행’에 나섰다가, 실망하고 돌아섰다면 십중팔구 다 이런 이유다.
담양의 정자들은 현실 정치에 실망해 낙향한 선비들의 은거 공간이었다.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등을 목격한 뒤 현실 정치에 침을 뱉고 돌아선 선비들은 신선을 꿈꾸며 정자 위에 올라 한시를 읊었다. 이 공간에는 자연스럽게 젊은 후학들이 찾아들었다. 만남은 교육에 선행하는 법. 면앙정 송순이며, 송강 정철, 고봉 기대승, 제봉 고경명, 석천 임억령 같은 쟁쟁한 학자들과의 만남은, 그 자체만으로도 후학에게 훌륭한 교육이었다.
담양의 정자 중에서 가장 먼저 찾아가야 할 곳은 가파른 계단을 올라서 만나는 면앙정이다. 대사헌을 거쳐 우참찬까지 오른 송순이 관직에서 물러나 담양 땅에 지은 정자가 면앙정이다. 면앙정을 먼저 찾아야 하는 까닭은 송순이 ‘자연을 예찬하는 시가’를 뜻하는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선구자인 탓도 있지만, 담양 땅에 소쇄원의 양산보, 송강정의 정철, 식영정의 임억령의 스승 격이기 때문이다. 시가문학의 뿌리는 그 출발이 송순이었고, 면앙정이 호남 제 1의 누정으로 꼽히는 것도 이런 연유 때문이다.
송순이 후학들로부터 얼마나 존경을 받았는지를 알려주는 예화 하나. 송순이 87세때 벼슬자리에 오른 지 60년을 기념하는 희방연을 올렸단다. 불콰하게 취한 송순이 처소로 들어가려는데, 정철이 스승에게 남여(가마)를 메자고 제안했고 고경명, 임제 등과 함께 송순이 탄 가마를 멨다. 아무리 스승이라고 하지만, 당대의 최고 선비들이 가마를 멘 일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 깨끗하고 시원한 바람이 ‘소쇄소쇄’ 부는 곳
▲ 숲그늘에 잠겨 사방에서 부는 서늘한 바람이 통과하는 소쇄원의 광풍각. 광풍각이 그늘 속 풍류의 공간이라면 뒤편 언덕 위의 제월당은 양지쪽 관조의 공간이다. 소쇄원의 정원은 작은 돌멩이 하나에도 ‘의미’와 ‘형식’이 잘 어우러져 있다.
면앙정을 거쳐서 찾아가볼 곳이 소쇄원과 식영정, 환벽당이다. 세 곳의 원림과 정자가 깃들여 있는 담양군 남면 지곡리 일대의 산을 성산(星山·일명 별뫼)이라고 부른다. 예로부터 세 곳의 누정을 묶어 ‘성산동 삼승’이라고 일컬었다. 정철의 ‘성산별곡’에서 노래한 ‘성산’도 바로 이곳이다.
이 중에서도 예나 지금이나 첫손에 꼽히는 곳이 양산보의 소쇄원이다. 먼저 양산보가 소쇄원을 짓기까지의 내력을 보자. 양산보는 조광조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열일곱의 나이에 현량과에 급제했다. 양산보가 급제한 그해 겨울, 스승 조광조가 기묘사화에 연루돼 전남 화순으로 유배돼 사약을 받고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유배지까지 따라나섰던 양산보는 스승의 죽음에 얼마나 충격을 받았던지, 고향 담양으로 내려가 소쇄원을 짓고 평생을 은거한다. 요즘으로 치자면 ‘정치 신인이 정계에서 은퇴한 셈’인데, 그때 그의 나이 고작 열일곱이었다.
‘소쇄(瀟灑)’란 중국의 문장가 공덕장의 ‘북산이문’에 나오는 말로 ‘깨끗하고 시원하다’는 뜻. 소쇄원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는 언덕 위에 세워진 누각 제월당(霽月堂)은 ‘비 갠 하늘의 상쾌한 달’을, 그 아래 광풍각(光風閣)은 ‘비 갠 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을 뜻한다.
# 제월당의 누정마루에서 소리를 듣고 빛을 보다
▲ ‘푸르름을 둘러쳤다’는 이름답게 환벽당은 주위에 아름드리 소나무들을 거느리고 있다. 환벽당은 특히 찾아드는 이가 없어 적요하다.
소쇄원의 풍류와 멋은 오감을 동원해야 비로소 보인다. 제월당 툇마루에 앉아 귀를 기울이면 물소리, 바람소리, 댓잎 흔들리는 소리가 청명하다. 소쇄원에서는 빛도 극적이다. 입구에 들어서 어둑한 대숲을 지나면 볕 환한 계곡으로 들어서게 된다. 언덕 위에 올라선 제월당은 밝은 빛이 드는 곳이고, 그 아래 광풍각은 짙은 나무그늘로 어둠이 깔려 있다. 손님을 맞는 초가의 누정을 ‘봉황을 맞는다’는 뜻으로 이름 붙인 대봉대도 그렇거니와, 계곡물이 굽이치듯 담벽에 우암 송시열의 솜씨로 쓴 ‘오곡문(五谷門)’의 글씨며, 볕이 맑고 밝게 쪼이는 담벽에 씌어진 애양단(愛陽檀)이란 글씨도 풍류가 넘친다.
성산 자락의 식영정과 환벽당은 언제 찾아도 좋다. 특히 ‘푸르름을 둘렀다’는 환벽당은 주위의 숲과 고즈넉한 아름다움이 빼어나지만, 주말이나 휴일에도 인적이 드물다. 큰길에서 고작 300m쯤 더 들어간 곳에 있지만, 행락객들은 무엇이 그리 바쁜지 스쳐 지나칠 뿐이다. 석천 임억령이 은거한 식영정은 ‘그림자도 쉬어가는 곳’이란 이름답게 평화로운 정적으로 가득하다.
# 담양에서 발길에 덜 닳은 명소를 돌아보다
담양은 바람에 서걱이는 대숲과 장쾌한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을 먼저 떠올리게 한다. 덧붙여 말할 것도 특급 여행목적지다. 그러나 때론 이것들이 다른 명소들을 가리기도 한다.
그렇게 가려진 명소 중의 하나가 담양 남쪽 전북 순창과의 산성산(603m)의 산 어깨쯤에 걸쳐 있는 금성산성이다. 이 성의 매력은 산의 형세를 따라 유려하게 굽어진 성벽의 아름다움이다. 방어와 전투를 위한 성에서 미감을 찾는 것이 어색하긴 하지만, 능선을 따라 길게 뽑아 세운 남문을 바라보면 조형미가 느껴진다. 금성산성은 절집터인 연동사지 쪽에서 오르는 편이 낫다. 고려 때의 사찰이었던 연동사 터에는 부드러운 인상의 지장보살 입상과 석탑이 바위벽 앞에 세워져 있다.
담양 남쪽의 노루골로 불리는 창동에는 대사헌과 이조참판을 지낸 미암 유희춘의 정자인 연계정과 사당이 있다. 미암은 ‘타임캡슐’인 미암일기를 남겼다. 그는 기록벽이 있었는지 조선 선조 즉위 첫해부터 11년 동안 일상생활을 꼼꼼히 기록한 일기인데, 당시의 정치·경제·사회상을 얼마나 꼼꼼하게 기록했던지 훗날 사관이 선조실록을 쓰는데 이를 기초로 했을 정도다. 연계정 앞에는 연잎이 멋지게 떠있는 운치있는 연못이 있고, 그 연못 가운데 섬에는 후손들이 미암일기를 보관하기 위해 1959년 석조로 지은 독특한 양식의 모현관이 들어서 있다.
칼로만 다진 떡갈비·장터 주변의 돼지국밥 ‘일미’
# 담양 가는 길 = 호남고속도로 백양사 나들목으로 나와 장성호반을 따라 백양사 입구를 지난다. 여기서 월산면 바심재를 넘으면 바로 담양읍내다. 서해안고속도로를 타면 고창나들목에서 나와 석천온천을 지나 백양사 방면으로 향하면 된다. 소쇄원과 식영정 등 이름난 정자들은 담양읍 남쪽 창평면과 남면쪽에 주로 몰려 있다.
#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 = 담양에는 담양리조트( 061-380-5000 )가 있다. 대부분 리조트란 이름을 내건 콘도미니엄들이 대규모의 고층건물 일색으로 멋대가리없이 지어지고 있지만, 담양리조트는 아담한 규모에 차분한 조경으로 ‘리조트’란 이름이 아깝지 않은 곳이다. 깔끔한 야외 수영장과 사우나 시설도 갖추고 있다.
숙박비는 방 크기에 따라 15만~20만원선. 되도록 수영장 주변의 단층 독립객실을 택하는 편이 좋겠다. 담양에서 가장 내세우는 음식은 떡갈비다. 흔히 떡갈비라면 햄버그스테이크처럼 고기를 갈아서 내오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읍사무소 근처 덕인관( 061-381-2194 )의 떡갈비는 순전히 칼로만 다진 뒤 모양을 잡아서 내오는 것이라 쫄깃하게 씹는 맛이 살아있다. 창평면소재지의 장터 주변에는 돼지국밥집들이 즐비하다. 이른바 ‘창평국밥’을 내놓는 곳인데, 그 중 3대를 내려온다는 시장국밥( 061-383-4424 )이 원조로 꼽힌다.
<출처> 2008-08-20 /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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