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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광주. 전남

남도문화의 일번지 강진의 다산초당

by 혜강(惠江) 2008. 4. 28.

강진 다산초당

남도문화의 일번지 강진의 다산초당 

- 정약용의 발자취를 따라서 -

 

글·사진 남상학

 

 

 

  국토의 끝, 전라 남도 강진은 남도 문화의 일번지이다. 월출산 아래 멀리 다도해를 바라보며 남단으로 자리 잡은 강진은 예로부터 많은 선비들이 서러운 유배 생활을 하곤 했던 곳으로 당대 최고의 실학자였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무려 18년간이나 유배됐던 곳이다. 다산은 이곳에서 수많은 명저(名著)를 저술했다.

  강진으로 이동하여 처음으로 다산초당(茶山草堂)을 찾아갔다.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다산 정약용이 18년간의 강진 유배생활 중 10여 년간의 안식처가 되었고, 후학을 가르치고, 「목민심서(牧民心書)」를 집필했던 곳 다산초당. 

  다산박물관이 개관되기 전에는 귤동마을 앞에 주차하고 다산초당을 관람하였으나 박물관이 개관된 지금은 다산박물관으로 가는 것이 주차하기에도 좋고, 박물관도 관람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산초당을 관람하는 데도 거리가 더 가까워 좋으므로 다산유물전시관 앞에 차를 세웠다. 

  오후 늦은 시간이라  숲속에 있는 다산초당을 먼저 보기로 했다. 다산초당은  전시관 우측 길로 다산초당을 가기 위해서는 두충나무 우거진 숲속 자갈길을 따라 올라가서 가학재를 넘어 800여m 걸어가면 귤동마을 전통찻집. 여기서 300여m(10분 정도) 산속으로 걸어 오르는 길은 다산의 강직함을 말해 주듯 적송(赤松)과 하늘을 찌를 듯한 대나무 숲을 만나게 된다. 

 

 



  또한 다산에게 세상을 거꾸로 보기를 가르쳐 줬던 민초들의 넋이 살아있는 듯 제멋대로 뒤틀린 고목이며 거칠게 앙상한 뿌리를 드러낸 나무 숲길을 걷게 된다.

 

 

●다산유적 -다산초당

 


  마지막 92개의 돌계단을 오르면 옛 정취가 물씬 풍기는 단아한 목조건물이 보이는데 이것이 다산초당이 있다. 다산초당의 현판은 추사 김정희 선생의 친필을 집자해서 모각한 것이라 한다. 다산초당을 처음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초가가 아닌 기와집에 놀라겠지만, 1958년 강진 다산유적보존회에서 허물어진 초가를 치우고 그 위에 정면 3칸, 측면 1칸의 기와집을 만들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초당의 서쪽에 위치한 서암(西庵)은 제자들이 유숙하단 곳으로 차(茶)와 벗하며 밤늦도록 학문을 탐구하였다고 하여 일명 다성각(茶星閣)이라고도 부르는데 1975년 복원하였다. 

 

 


  초당에서 남동쪽으로 약 40여보 거리에 동암(東庵)이 자리잡고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1칸의 기와집이다. 다산동암이라 현판에 판각된 글씨는 다산 정약용의 친필을 집자해서 모각한 것이다. 모두 단아한 목조건물로 옛 정취를 담고 있다.

 

 


  동암에서 조금 올라가면 강진만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천일각이 있다. 흑산도로 유배 간 둘째형 약전을 그리며 심회를 달래던 곳으로 정면과 측면이 한 칸씩인 누각이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멀리 완도 쪽 다도해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처럼 작은 건물이 자연과 한 치의 어그러짐도 없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 다산 초당의 아름다움이다.

 

 



  초당에는 이밖에도 다산선생의 손길이 그대로 느껴지는 다산사경이 있다. 초당 서편 뒤쪽에는 해배(解配)를 앞두고 발자취를 남기는 뜻으로 선생께서 직접「丁石」이라는 글씨를 새긴 정석바위가 있다. 

 

 



  마당 앞에 있는 평평한 돌「다조(茶竈)」는 ‘차 끓이는 부뚜막’이란 뜻이며, 주위에서 자생하는 찻잎을 따다 그늘에 말린 후 솔방울을 지펴 차를 끓였던 반석이다. 또 초당 뒤편에 있는 「약천(藥泉)」은 다산 선생께서 직접 수맥을 잡아 만든 샘으로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항상 맑은 약수가 솟아나오는데 이 물로 차를 끓였다고 한다. 다산초당의 이웃 백련사의 혜장(惠藏)스님과 교유하면서 차생활을 시작한 다산에게 차는 유배생활에 없어선 안 될 소중한 것이 되었다. 다산은 국산차 예찬자로서 "동다기(東茶記)"를 썼다고 한다. 그의 차시(茶詩)는 다산을 낙원으로 여겼음을 보여준다.

    산골 물 차가운 소리 대밭에 감싸이고
    봄 기미는 뜨락의 매화가지에 감도네.
    아름다운 가락이 이 속에 있으련만 달랠 곳 없어
    여러 번 일어나 어정거리다 마네.
    산의 정자엔 도시 쌓아둔 책은 없고
    오직 이 화경과 수경뿐이라네.
    새 비가 내린 귤숲은 자못 아름답구나.
    바위 샘물을 손수 떠서 찻병을 씻네.
    약 절구질 잦아지니 번거로운 곰팡이는 없건만
    드물게 달이는 차 풍로엔 먼지만 있네.

 

 



  그리고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은 초당 옆에 있는 연못으로 1808년 봄, 다산 선생께서 이곳으로 이주하여 바닷가의 돌을 가다가 만든 것인데, 연목 가운데 조그만 산처럼 봉을 쌓아 ‘석가산’이라 하고 나무 홈통을 이용하여 산속 물을 떨어지게 만들어 ‘비류폭포’라 이름 하였다. 이 연못에는 잉어를 길렀으며 유배생활에서 풀려난 후 제자들에게 보낸 서신에도 잉어가 얼마나 자랐는지를 묻는 구절이 담겨 있어 다산의 섬세함을 가늠하게 한다. 

 

 


 

  천일각에서 백련사로 가는 오솔길 정상에 '바다위에 뜬 달'이라는 뜻의 해월루(海月樓)가 있다. 다산(茶山)과 함께 산중 오솔길을 오가며 차(茶)와 시(詩)와 주역(周易)을 논하고 심취했던 혜장(惠藏1772~1811)선사의 만남을 기리고 강진 차(茶) 문화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두 다성을 기념하기 위해 구강포 바다가 훤히 내다보이는 만덕산 오솔길 중간에서 영원히 세세토록 님들을 기다리며 서 있을 것이다. 

 

 

 

 

  천일각 뒤편 오솔길을 따라 1㎞지점에 백련사가 있다. 오솔길로 20여분 거리이므로 2백여 년 전 정약용 선생이 걸으셨던 그 길을 걸어보는 것도 시간이 허락한다면 무척 좋을 것 같다. 그러나 다산박물관을 보아야 하기 때문에 여기서 발길을 돌려야 했다.

 

 

 

●다산박물관관

 

 

다산박물관 전경<출처> 강진 문화관광 홈페이지>

 

  1999년 다산 정약용의 생애와 업적 등을 기리기 위하여 설립한 다산박물관은 다산의 영정, 다산연보, 가계도, 학통, 다산의 일생, 다산의 업적과 유물 등이 패널과 조형물로 입체감 있게 전시되어 있고,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알고 싶을 때는 컴퓨터를 활용한 터치스크린에서 검색해 볼 수 있다

  영상실은 다산의 일생과 강진을 소개하는 영상물이 약7분 동안 상영되는데 관광객이 영상실에 들어가면 자동으로 상영되므로 누구나 불편 없이 관람할 수 있으며, 전시관 앞 광장에 대형버스 15대 이상이 주차할 수 있어 학생들의 수학여행 등 단체관광에도 아무 불편이 없다.


  그러면 다산이 강진에서 그 지루한 유배생활을 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다산 정약용은 1762년(영조 38년) 6월 16일,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마재)에서 태어났다. 현재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이다. 아버지 정재원(丁載遠)은 지방수령을 역임하다가 1762년(영조38년) 임오사화로 귀향하여 그해 정약용을 낳았으며 어머니는 유명한 고산 윤선도의 후손으로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의 손녀이다.

  정약용은 1783년 22세로 소과에 합격, 1789년 28세로 대과에 합격하여 정조의 사랑을 받아 규장각 초계문신(抄啓文臣), 경기도 암행어사, 황해도 곡산부사 등을 역임하면서 경세사상을 실천하여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으나 반대파인 노론벽파(老論僻波)의 미움을 받았으나, 성호 이익(星湖 李瀷)의 학풍을 이어받아 실학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된다. 

 

 



  이승훈의 처남이기도 한 다산은 일찍이 천주교 서적을 접하면서 그 오묘한 진리에 매료되기 시작하여 1783년에는 형 약전(若銓, 1758∼1816)과 함께 이벽(李壁)과 천주교에 관해 토론을 벌이고, 1784년 수표교에 있는 이벽의 집에서 세례를 받는다.

 

  한때 박해가 거세지자 배교의 뜻을 명백히 하기도 했으나, 1801년 신유사옥(申酉邪獄)의 여파로 정약종(丁若鍾 1760∼1801), 이승훈, 황사영 등과 함께 숙청을 당하여 겨우 죽음만 모면한 채 경상도 장기에 유배되었다가 곧 강진에 옮겨져 18년 간 귀양생활 중 강진읍 동문 밖 주막에서 8년간 머물다 이곳 만덕리 귤동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이곳에서 10년을 머물면서 후진을 가르치고 저술에 전념하였다. 

  약용의 중형인 약전은 1801년(순조 1)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일어나자 아우 약용과 함께 화를 입고 흑산도(黑山島)에 유배되어 여기에서 복성재(復性齋)를 지어 섬의 청소년들을 가르치다가 그곳에서 죽었고, 약용의 셋째 형인 약종은 주문모의 입국사건으로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일어나, 이승훈·최창현(崔昌顯) 등과 함께 서울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다산 정약용이 강진에서 18년간의 유배 생활을 시작하면서 그는 자신의 당호를 여유당(與猶堂)이라고 했는데, 이는 아마도 자신의 형 약종과 매부 이승훈이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의 길을 택한 데 비해 자신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는 뜻의 '여유당'이라는 자호(自號)로써 그 부끄러움을 표현한 것이리라. 

  유배생활에서 이런 생각을 하던 약용은 500여 권에 달하는 저서를 강진에서 완성하었으며, 그중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등 세 권의 책이 매우 유명하며, 선생의 애국애민사상이 스며있는 책이다. 

  산천이 두 번 변하는 세월을 쓸쓸하게 지내고 난 뒤, 1818년 57세로 강진에서 풀려나 서울로 돌아온 다산은 외부와의 연락을 끊고 묵상과 기도로 살아갔다. 그는 이런 참회와 기도의 생활 가운데 「조선 복음 전래사」를 저술했고 박해로 순교한 동지들의 유고를 「만천 유고(蔓川遺稿)」라는 제목으로 정리하기도 했으나, 1836년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야외공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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