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앙코르톰
큰 바위 얼굴 ‘바이욘’의 미소
- 세상 시름도 한순간에 말끔
글·사진=고광노
*거대한 바이욘의 사면상. 오랜 시간 동안 돌이 바랜 정도가 각기 달라 멀리서 보면 화상을 입은 듯 얼룩덜룩해 보인다.
앙코르와트(Angkor Wat)로 대표되는 캄보디아의 앙코르 유적은 인류가 가진 수많은 문화유산 중에서 “최고!”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들 만하다. 비록 그 위대한 문명의 주인 크메르 왕국은 전설처럼 사라졌고, 그로부터 먼 후세인 지난해 세계 신(新) 7대 불가사의에 선정되지는 못했지만, 앙코르 유적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 훌륭함에 손들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앙코르 유적의 거대한 사원도시 앙코르와트는 캄보디아 국기 한가운데에도 그려져 있다. 그만큼 대접받는 이 나라의 국보 1호이고, 앙코르 유적에서도 최대 규모의 사원인 까닭에 유적을 찾는 수많은 관광객들은 대부분 앙코르와트를 먼저 찾아간다. 그런데 규모는 앙코르와트보다 훨씬 작지만 그에 못지않은 감동을 주는 사원이 있다. 바로 크메르 왕국의 수도 앙코르톰에 자리한 바이욘 사원이다.
12세기, 이웃나라 참파(베트남 중부의 왕국)에 침략당한 앙코르(수도)를 되찾아 왕위에 오른 자야바르만 7세는 피폐해진 왕국의 성도 앙코르톰을 재건하고 불교를 국교(國敎)로 정하면서 불교사원인 바이욘 사원을 짓는다. 신심이 깊었던 자야바르만 7세는 곳곳에 불교사원을 짓는 한편, 도로와 휴양소를 건설하는 데도 열중했다. 그리고 자신이 문둥병 환자였던 까닭인지 곳곳에 병원을 지어 국민의 질병 치료에도 힘을 기울였다.
바이욘과 앙코르톰 북문 사이에는 커다란 광장을 안고 있는 왕의 사열대 ‘코끼리테라스’가 있다. 이에 인접한 ‘문둥왕의 테라스’에서는 왕의 석상이 광장을 바라보며 테라스에 서 있는데, 이 ‘문둥왕’은 자야바르만 7세로 추정된다. 현재 앙코르 유적의 관문도시인 씨엠립에는 자야바르만 7세 아동병원이 설립돼 있다.
바이욘 사원은 앙코르톰의 중앙에 자리한 피라미드형 사원이다. 왕실 신앙의 중심이자 자야바르만 7세 자신의 무덤으로 지은 대승불교식 사원으로, 자야바르만 7세의 부모에게 헌정된 것이라고 한다(앙코르에 있는 사원 대부분은 왕들이 힌두신, 혹은 자신의 부모나 조상에게 헌정한 것들이다). 사원의 위치에는 애초 힌두사원이 자리하고 있었다는데 앙코르톰을 재건하면서 그 위에 불교사원을 지은 것이다. 하나 이것은 추측일 뿐, 사원의 연원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하게 밝혀진 사실이 없다고 한다.
이미 앙코르와트를 보고 왔다면 바이욘의 규모에 실망할 수 있다. 사원 내부에 들어설 때까지도 그 신비한 매력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검고 우중충한 탑들이 우후죽순으로 하늘을 향해 솟아 있는 모습은 어쩌면 지저분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바이욘을 상징하는 큰 바위 얼굴 ‘바이욘의 미소’는 사원 밖 먼발치에서 보면 구분이 쉽지 않아 숨은 그림 찾기 하듯 눈을 크게 뜨고 찾아야 한다.
어렴풋한 사람의 얼굴 형상을 바라보면서 사원 안으로 들어서면, 앙코르와트와 마찬가지로 사면에 회랑(갤러리)이 펼쳐져 있다. 바이욘의 회랑에 새겨진 부조들은 참파와의 전승(戰勝)을 기리거나 국민의 생활상을 묘사한 것들이다. 주변 민족인 참족과의 전투, 앙코르의 젖줄 톤레사프 호수, 시장풍경, 축제 등 당시 앙코르 제국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사원들과 마찬가지로 바이욘 역시 가장자리마다 세월과 내전의 상흔으로 떨어져나간 많은 조각이 쌓여 있다.
앙코르와트 비해 규모 작지만 ‘신들의 세계’같은 매력 듬뿍
* 연꽃인 듯한 식물 위에서 춤추는 바이욘의 압사라(천사)들.
실은 나 역시 바이욘의 회랑에서는 그다지 큰 인상을 받지 못했다. 그것은 이미 앙코르와트의 커다란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부조에서 앙코르 사원의 회랑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감흥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입구 기둥에 새겨진 압사라(천사)들은 유독 기억에 남는다. 두세 명씩 짝지어 연꽃인 듯한 식물 위에서 춤추고 있는 압사라들의 모습은 앙코르와트의 압사라들과는 많이 달라 보였다. 역동적인 춤사위가 익살맞기도 하고 표정 또한 재미있다.
숨바꼭질하듯 2층의 회랑을 돌고 나서 3층에 올랐다. 그동안 말로만 듣던 바이욘의 사면상은 상상 이상의 감동이었다. 조각조각 입체퍼즐과도 같은 ‘큰 바위 얼굴’은 어른 한 사람의 키보다 더 크다. 흔히 ‘바이욘의 미소’로 불리는 이 얼굴은 사원을 세운 자야바르만 7세의 모습이라고 한다. 또는 그의 현신인 관세음보살로 추정되기도 한다. 왕이든 관세음보살이든 또 어느 신의 모습이든, 석상 입가에 도는 오묘한 웃음은 보는 이의 마음에 묘한 감동을 준다.
바이욘의 사면상은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기도 하고 마주 보기도 한다. 사방을 바라보고 있는 거대한 얼굴 사이를 걷노라면 마치 거인국에 표류한 걸리버의 느낌, 또는 어떤 신비한 경로로 신들의 세계에 몰래 발을 들여놓은 인간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자비로운 신들은 인간들이 자신의 턱밑을 스쳐 지나가도 아무 기척이 없다. 그저 온화한 미소로 사람들을 지켜보는 듯하다.
사면상이 조각된 탑은 모두 54개가 건설되었지만 현재는 36개의 탑만이 남아 있다. 즉 원래는 200개가 넘는 신들의 두상이 이 자리에 존재했던 것이다. 200여 개의 거대한 두상에 휩싸여 있다고 상상해보라. 아마도 이곳이 인간 세계임을 망각하고 말 것이다. 개중에는 전쟁의 상흔으로 머리가 깨져나간 두상도 있었지만, 바이욘의 미소는 그 같은 인간들의 만행마저도 용서한다는 듯했다.
애초 바이욘에 대해서는 기대감이 별로 없었다. 일단 바이욘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고, 붉은 사암 조각이 아름다운 반테이 쓰레이와 웅장한 앙코르와트에 취해 차라리 이곳들을 다시 한 번 둘러보고픈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바이욘에 들어선 순간, 신들의 아득한 세계에 빠져 들어가 반테이 쓰레이나 앙코르와트에 대한 기억마저 잊어버리고 말았다. 기대감이 없는 상태에서 마주친 감동은 더 컸다. 하늘의 신들이 잠시 내려와 휴식을 취하고 있는 듯한 바이욘 사원. 아직도 바이욘만 생각하면 얼떨떨한 기분이다. 내가 만약 캄보디아에 다시 간다면 아마 바이욘 때문일 것이다.
여행 TIP
많은 앙코르의 사원에는 회랑(갤러리)이 있다. 회랑은 사면 벽에 새겨진 부조로 힌두신화, 앙코르 제국의 전승기록, 국민들의 생활상 등이 그려져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사전정보가 없다면 그저 스쳐 지나가기 십상이다. 전날 밤 숙소에서 각 벽면에 그려진 부조의 내용에 대해 한 번씩이라도 알아보고 가자. 앙코르 문명에 대한 책자가 없다면 사원 입구에서 열심히 따라다니는 아이들에게서 영문판 책자를 구입할 수도 있다.
앙코르 문명은 힌두교와 불교가 혼재된 문명이다. 힌두교의 신들인 비슈누, 가루다, 메루산 그리고 힌두의 창세신화인 유해교반 등 단편적인 내용만이라도 알고 간다면 회랑을 감상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출전> 주간동아 63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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