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철원
통일조국 대동방국의 수도를 꿈꾸는 땅
“일목대왕의 호령소리 들어보았는가”
르포라이터 민병준
▲ 철원의 대표 명소로 꼽히는 고석정 전경. 한탄강 강변에 솟은 고석암과 어우러진 풍광이 아름답다.
강원도 철원(鐵原) 고을은 1,100여 년 전 삼한통일을 꿈꾸던 궁예가 도읍으로 삼았던 벌판이다. 또한 50여 년 전에는 남북으로 갈린 배달겨레가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지금은 그 상흔인 휴전선으로 갈려 있는 변경 고을이다.
하지만 화산암이 분출되어 이루어진 용암대지 철원평야, 그리고 그 사이를 깊이 파고든 한탄강(漢灘江)을 온몸으로 껴안고 있는 아름다운 고을이기도 하다. 그래서 철원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희비의 쌍곡선이 교차한다.
철원의 위치부터 살펴보자. 한반도 전체를 놓고 보면 대략 중간쯤에 위치하는 철원은 강원도 땅에선 북서쪽 끄트머리에 있다. 동쪽으로는 강원도 화천군, 서쪽으로 경기도 연천·포천군과 붙어있고, 남쪽에는 역시 포천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북쪽으로는 휴전선을 경계로 북한 강원도의 철원·평강·김화군과 접한다.
예전엔 무심코 지나쳤지만, 이번에 철원을 돌아보면서 이 고을의 행정구역이 조금 복잡하게 형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백과사전 등 자료를 뒤져보면 철원의 행정구역은 철원·김화·갈말·동송읍과 서·근남·근북면 이렇게 4읍 3면으로 이루어졌다고 적혀있다. 하지만 철원 관내도를 보니 이보다 많은 4읍 7면이었다. 철원 동부의 근동·원남·원동·임남면 이렇게 4개 면을 빠뜨렸던 것이다.
헌데 가장 정확해야할 철원군 홈페이지 ‘연혁’에서는 4읍 3면, 그 아래쪽 ‘일반 현황’에서는 4읍 7면이라고 더 헷갈리게 설명하고 있다. 행정구역이 최근에 변경된 것도 아닌데,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이는 아마도 동부의 4면이 대부분 민통선 안에 속해 있어 이런 웃지 못할 상황이 생긴 게 아닌가 싶다.
이런 복잡한 과거(?) 때문에 철원은 여느 고을과 달리 조금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다. 지금의 철원 내부를 들여다보면 철원은 대체적으로 구철원·신철원·김화 이렇게 3개의 시가지를 중심으로 발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옛 철원의 중심지인 철원읍과 동송읍 이평리 주변을 구철원이라 하고, 철원군청 등 관공서가 자리한 갈말읍 신철원리 주변을 신철원이라 한다. 동부의 김화쪽은 읍사무소가 있는 와수리를 중심으로 발달하고 있다.
세 군데 모두 시외버스터미널이 있는 게 특이한데, 이는 군대가 주둔하고 있기 때문에 휴가 나온 군인들과 면회 온 가족들의 교통 편리를 위해서다. 서울 수유역에서 철원쪽으로 가는 대중교통이 편리한 까닭이기도 하다. 여기서 잠깐, 요즘 흔히 ‘철원’이라 하면 철원읍이 아니라 갈말읍의 신철원리를 지칭하고, 철원읍 일대는 ‘구철원’이라 하여 따로 구분하여 부른다는 사실도 새겨두자.
철원은 지금은 비록 휴전선으로 막혀 있는 변경 고을이지만, 6·25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교통의 요지였다. 한반도 중앙에 위치하여 관북지방과 기호지방, 관서지방과 관동지방을 잇는 중간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라땅 경치 좋은 곳을 찾아다니며 그림을 그렸던 진경산수의 선구자인 겸재 정선도 금강산 가던 길에 철원 삼부연폭포를 화폭에 담기도 했는데, 이는 당시에도 한성에서 금강산으로 가는 큰 길이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임을 짐작할 수 있다.
- ▲ 한탄강 물줄기 중에서 경치 좋기로 소문난 순담계곡. 요즘은 래프팅을 체험하려는 사람들로 매우 붐빈다.
20세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 서울에서 평북 초산으로 이어지는 3번 국도, 경기 의정부에서 강원 고성에 이르는 43번 국도가 이곳을 지난다. 그리고 1924년엔 서울~원산을 잇는 경원선 철도가 이곳으로 뚫렸는데, 철원역은 강원도에서는 최초로 세워진 열차역이었다. 뿐만 아니라 금강산전철도 여기에서 분기했으니 한때 철원은 그야말로 교통도시라는 말이 적합했을 것이다.
교통이 편리해서일까? 아니면 강원도임에도 널따란 평원이 펼쳐진 때문일까? 철원은 강원도 땅임에도 웬일인지 경기도 같은 느낌이 든다. 생활권도 같은 강원도로서 도청 소재지가 있는 춘천이라 아니라 경기도 연천이나 포천, 서울 등에 기대는 경향이 크다. 실제로 수피령을 경계로 철원과 춘천을 잇는 56번 국도는 아직 구불구불 도는 왕복 2차선이지만, 의정부~포천~철원을 잇는 43번 국도는 철원 지나 김화까지 왕복 4차선으로 뻥 뚫려 있다.
▲ 직탕폭포 아래에서 낚시를 하는 사람들. 이곳은 철원 주민들의 대표적인 천렵 장소이기도 하다.
그 43번 국도를 시원하게 달려서 들어선 철원. 여름철 주말의 철원은 생동감이 넘친다. 고석정을 찾는 사람들, 안보관광지 견학을 하는 사람들, 또 한탄강에서 래프팅을 타려는 청춘들이 서로 얼키설키 뒤얽혀 녹색으로 물든 넉넉한 들판마저 살짝 들뜨게 한다.
신철원에서 삼부연폭포·순담계곡을 둘러보고, 구철원과 신철원을 연결하는 463번 지방도를 타고 한탄강을 건넌다. 여기엔 튼튼한 철제 다리 하나와 낡은 콘크리트 다리 하나가 나란히 사이좋게 있다. 한탄대교와 승일교다. 요즘엔 모든 차량이 2002년 건립된 한탄대교를 건너지만, 그 이전만 해도 승일교를 건너다녔다. 승일교-. 여느 지방이라면 새 다리를 지으면서 부셔버렸거나 그냥 한쪽에서 보조다리 역할로 전락했을 테지만, 이 다리는 난간에 화분까지 갖다놓고 단장한 것을 보면 제법 사연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 한탄강은 화산활동에 의해 생성된 현무암 평원을 굽이도는 거대한 협곡이다.
그렇다. 승일교는 남북 합작(?)으로 이루어진 다리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남북이 사이좋게 힘을 합친 게 아니라 서로 갈등하는 중에 지어졌다. 원래 다리가 있는 이 지점은 한탄강의 남부와 북부를 연결하는 아주 중요한 나루였다. 예전엔 얕은 여울에 돌다리를 놓아 사용했고, 수위가 높아지면 나룻배를 이용해 건넜다 한다. 대동여지도를 보면 한탄강을 두고 지금의 신철원과 구철원 사이에 길이 나 있는데, 아마 이곳인 듯하다.
여기에 현대식 다리를 착공한 것은 남북이 3·8선으로 갈려 있던 1948년 8월. 북한땅이었던 당시 철원·김화 주민들은 5일 교대제로 운영되던 노력공작대라는 이름으로 총동원되어 이 다리를 건설하기 시작했는데, 6·25전쟁 초까지 다리 기초공사와 2개의 교각을 세워 북쪽 부분은 거의 완성되고 남쪽 부분만 남게 되었다. 그러다 전쟁이 끝난 뒤 휴전선으로 나뉘면서 남한에 속하게 되자 국군에 의해 나무로 임시 다리가 놓였다가 1958년 12월에 완공되었다.
- ▲ [좌]한탄강에서 올려다 본 승일교. 이승만의 ‘승’자와 김일성의 ‘일’자를 합해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우]왼쪽의 콘크리트 구조물이 승일교, 오른쪽의 철골 구조물이 한탄대교다.
이 다리의 원래 이름은 한탄교였으나 완공 뒤에는 승일교가 되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승일교가 되었나 하는 데에는 여러 이야기가 있다. 우선 김일성 시절에 만들기 시작해 이승만 시절에 완공되었다 하여 이승만의 ‘승’ 자와 김일성의 ‘일’ 자를 합해 이름을 붙였다는 게 정설이다. 1990년대 중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로 전국에 문화유산 답사 열풍을 일으킨 유홍준 교수(현 문화재청장)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2>에서 다리 초소 근무자의 말을 빌어 ‘김일성을 이기자는 뜻’도 있음을 부연하고 있다. 이어서 저자는 당시 건설 책임자였던 공병대장이 자기 이름을 따서 다리 이름으로 붙였다고 비판했는데, 길손은 나중에 공병대장 이야기는 우연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여튼 지금도 다리 입구에 존재하는 콘크리트 초소에서 보듯이 한때는 이 다리를 군인이 지키는 바람에 사진도 함부로 찍을 수 없었으나 지금은 철원 여행객들의 기념사진 촬영장소로 애용됨은 물론이요, 다리 위로는 시끄러운 사륜오토바이가 질주하고, 다리 아래로는 래프팅 고무보트가 떠내려가고 있으니 정말로 격세지감이다. 하기야 승일교보다 훨씬 북쪽에 있어 민간인 출입이 더욱 까다로웠던 노동당사, 도피안사, 백마고지 위령비 등을 이젠 아무 때나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게 되었으니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 ▲ [좌]널찍하게 펼쳐진 철원평야. 강원도 쌀 총생산량의 25%가 이곳에서 생산된다. [우]철의 삼각지 전망대에서 바라본 ‘피의 능선’. 남북이 휴전을 앞두고 한 치의 땅이라도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쟁탈전을 벌였던 곳이다.
승일교를 거닌 뒤 되돌아와 승용차로 한탄대교를 건너면 이내 고석정이다. 북녘땅인 평강군의 한북정맥 장암산(1,052m)에서 발원하여 철원~갈말~연천을 지나 임진강으로 합류하는 한탄강은 화산활동에 의해 생성된 현무암 평원을 굽이도는 거대한 협곡이다. 철원 평야에서 20~30m 아래로 깊게 패어 들어간 계곡 양쪽으론 깎아지른 듯한 기암절벽이 병풍처럼 웅장하게 둘러섰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탄강을 ‘한국의 그랜드캐년’이라 부르기도 한다.
- ▲ 오랜 세월 강물의 침식작용으로 빚어진 고석암. 조선시대 임꺽정이 은신처로 삼아 활동하기도 했다는 전설이 전한다.
한탄강엔 명성에 어울리는 절경지가 많다. 그중 강 가운데 홀로 우뚝 서있는 10m 높이의 거대한 기암인 고석암(孤石岩)이 으뜸이다. 지표면으로 솟구친 용암이 굳어 현무암이 될 때는 기둥 모양의 주상절리가 발달하는데, 오랜 세월 강물의 침식작용으로 절리를 따라 암반이 떨어져 나가면서 고석암 같은 기암이 만들어진 것이다. 역사적으론 신라 진평왕이 이 암봉 주변의 풍치를 즐기기 위해 정자를 짓고 고석정(孤石亭)이라 부른 후부터 이곳 지명으로 굳었다. 또 조선 명종 때는 의적으로 이름 날린 임꺽정이 고석정을 은신처로 삼아 활동하기도 했다는 전설도 전한다.
- ▲ [좌]백마고지 조망대. 가운데 있는 노인들 머리 위로 솟은 나지막한 언덕이 백마고지다. [우]백마고지 위령비 입구에 전시된 장갑차에서 노는 사람들.
- 고석정 감상의 가장 일반적 코스는 입구에 있는 철의 삼각 전적관을 둘러본 뒤 현무암 돌계단을 밟고 강변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한때 철원의 유일한 관광지로 각광 받던 고석정. 그러나 새로 지은 정자는 고석암의 운치에 많이 떨어지는 편이라 아쉽다. 고석암을 올려다본 뒤 그 바위 아래에 형성된 모래톱을 밟고 흐르는 강 물결을 바라보면 고석정 감상은 끝이다. 요즘엔 래프팅을 즐기며 고석정을 구경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많은 시인묵객들의 발길이 머물다 갔다는 유명한 고석정과 그랜드캐년을 닮은 협곡을 고무보트를 타고 감상하면 한탄강이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 ▲ 낡은 승일교를 대체하기 위해 2002년 새로 세운 한탄대교.
길손은 배를 타고 보는 고석정 풍광이 너무 궁금해 몇 년 전 한탄강에서 래프팅을 한 적이 있다. 다른 강과 비교하자면 검붉은 석회암 뼝대 드리워진 오지의 동강, 물살이 급해 스릴이 있지만 강변도로 탓에 호젓함이 떨어지는 내린천에 비해 한탄강은 땅속으로 푹 꺼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특히 고석정부터 순담계곡까지는 그야말로 직벽의 협곡이었다. 소리치면 곧 메아리가 울렸고, 현무암 협곡답게 까만 벼랑에서 곧바로 쏟아지는 수많은 폭포들…. 색다른 경험이었다.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 있다 고석정을 떠나기 전, 강물을 들여다보다 빠른 화살 같이 바위 밑으로 헤엄치는 꺽지 한 마리 보이거든 임꺽정의 넋이라고 여겨도 좋으리라. 비록 관군에게 붙잡혀 목숨을 잃었어도 그 혼은 꺽지가 되어 한탄강을 오르내리고 있다는 임꺽정 전설을 믿지 않더라도 말이다.
- ▲ 철원의 대표적인 절집인 도피안사. 예전엔 출입이 까다로웠으나 요즘엔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다.
고석정에서 2km쯤 상류에 있는 직탕폭포도 한탄강의 명소다. 이 폭포의 높이는 2~3m쯤 되고, 폭은 강 너비와 같은 80m에 이른다. 길손은 맨 처음 직탕폭포를 봤을 때, 일(一) 자처럼 생긴 긴 암벽에서 강물 전체가 쏟아지는 모습을 보곤 참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철원군청에선 이 폭포를 ‘한국의 나이아가라’라고 홍보하고 있는데, 직탕폭포를 본 사람들 중 십중팔구는 ‘한국의 나이아가라’라는 대목에서 피식 웃는다. 한탄강을 그랜드캐년 같다는 것은 그런대로 봐줄 수 있다는 사람이 많지만, 직탕폭포를 한국의 나이아가라라고 하면 이는 좀 과장이 심하지 않냐고 생각하는 것이다.
▲ 도피안사 철조비로사나불좌상.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하던 새로운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길손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직탕폭포는 철원을 찾을 때마다 한번쯤 들렀다가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다. 이곳 주민들은 여름이 되면 폭포수 아래에서 낚싯대 드리우고 팔팔 살아 숨 쉬는 물고기를 낚고, 폭포수 위쪽에선 다슬기를 잡는다. 그리고 쏟아지는 폭포수 소리를 들으며 맛보는 매운탕 때문에 이곳을 찾는 사람들도 많다. 아마 이런 여러 정경이 좋아서일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연기 잘하고 예쁜 미국의 여배우 조디 포스터는 조디 포스터대로, 곰살궂은 산골의 갑순이는 갑순이대로 다 매력이 있는 법이다. 평범한 산골 아낙인 갑순이에게 ‘한국의 조디포스터’라 하면 그건 어쩌면 욕이 될지도 모른다. 그냥 그녀는 늘 가까이에 있는 우리의 사랑스런 연인이기 때문이다.
이제 민통선 비무장 지대로 들어가 보자. 고석정 입구에 있는 전적지 관리사무소에서 전적지견학 신청서를 작성해 제출하고 선도 차량을 따라 나선다. 가로질러 가는 철원평야는 진짜 너르다. 철원평야 일대는 현무암임에도 점토질이라 물이 잘 빠지지 않으니 논농사가 가능하다. 거기에 휴전선과 가까워 오염원이 전혀 없는 청정지역인데다 등숙(登熟) 기간의 일교차가 평균 8~11˚C로 벼농사 짓기에 이상적인 기온이라 한다. 철원 사람들이 전국 제일이라 자랑하는 ‘철원 오대쌀’이 여기서 생산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생산량은 강원도 총 생산량의 1/5이라니 철원은 정말 복 받은 땅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상념도 잠시, 평야를 둘러싸고 있는 나지막한 산에는 모두 초소가 있다는 사실에서 휴전선이 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요즘의 화해 분위기를 반영하듯 대남방송은 들리지 않는다. 한때 시도 때도 없이 울려 퍼지는 대남방송에 외지인은 넋을 잃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런데 소음이 사라지니 평화로워 보이는 평범한 들판일 뿐이다. 철책과 총부리는 언제쯤 거두게 될까.
철의 삼각 전망대에선 북녘 땅을 바라보는 시간이 짧다. 안내인의 지휘봉 끝으로 백마고지, 피의 능선, 그리고 고남산으로 불리는 김일성고지, 낙타고지가 차례로 걸려든다. 그리고 바로 앞쪽 가까이에 있는 들판은, 울창한 나무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지만, 그 옛날 궁예(弓裔·?-918)가 세웠던 태봉국 도성(궁예도성)이 있던 자리라 한다.
- ▲ 명성산 북쪽 기슭에 있는 삼부연폭포. 높이 20m에 3단으로 된 폭포로 철원팔경의 하나로 꼽힌다.
1,100여 년 전 후삼국 중 후고구려의 맹주로서 삼한을 호령했던 일목대왕(一目大王) 궁예. 흔히 그는 신라의 몰락한 진골 귀족의 후예로서 신라 제47대 헌안왕이나 제48대 경문왕의 아들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가 꿈을 펼 무렵 천년왕국 신라는 아주 어지러워 언제 망할지 모를 처지에 있었다.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져 유리걸식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민란도 끊이지 않았다. 결국 지방 곳곳에서는 양길, 아자개, 김순식 등의 호족들이 들고 일어섰다.
궁예는 처음에는 기훤 아래에 있었으나 기훤의 사람됨이 틀렸다 생각하여 892년 북원(원주)의 양길의 수하가 된다. 그리곤 양길의 지원으로 강원·경기·황해 일대를 공략하여 많은 군사를 모으는 데 성공하자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한반도 중부 지방에서 크게 위력을 떨치게 된다. 궁예는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과 고락을 함께 하며 일을 공명정대하게 처리해 신라에 등을 돌린 백성들의 마음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다. 그는 세상이 끝나는 날 현신해 세상을 구원한다는 미륵불이었고, 백성들은 그런 궁예를 자신들을 구원해줄 대상으로 삼았다.
궁예는 해상무역으로 크게 일어선 왕건 집안의 협조로 군사력과 경제력을 얻으면서 896년 철원(구철원)으로 도읍을 옮겨 강성한 나라를 건설한다. 898년 철원에서 송악으로 다시 도읍을 옮기고, 899년 북원의 양길을 비뇌성 전투에서 참패시켰다. 이어 900년엔 광주·충주·청주 등 3개 주와 당성(화성군 남양)·괴양(괴산) 일대를 정벌하고, 901년 후고구려를 건국하고 왕이 된다. 그리곤 903년 금성(나주)을 점령하면서 위력을 떨친다.
당초 궁예가 현재의 구철원에서 송악으로 도읍을 옮긴 이유는 왕건 세력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다. 북원을 중심으로 영향력을 떨친 양길을 제압하려면 송악 호족들과 제휴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궁예는 뜻을 이루자 905년 다시 철원(구철원 북쪽 30리에 있는 풍천원)으로 복귀했다. 그러면서 청주 지역의 1천 가구를 철원땅으로 이주시킨다. 이것은 궁예가 송악 세력 외에 새로운 지지세력을 확보하려는 뜻이었다. 궁예로서는 왕건을 비롯한 송악 세력만으로는 천하를 경영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궁예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국호로 풀어보자. 904년의 국호 마진(摩震)은 ‘마하진단(摩訶震檀)’의 줄임말이다. ‘마하’는 범어로 ‘크다’는 뜻이고 ‘진단’은 동방을 뜻한다. 이는 곧 한반도뿐만이 아니라 만주와 연해주까지 아우르는 대동방국을 말한다.
911년의 국호는 태봉(泰封). 주역에서 ‘태(泰)’는 ‘천지가 어울려 만물을 낳고 상하가 어울려 그 뜻이 같아진다’는 뜻이라 하고, 봉(封)은 봉토, 곧 땅이다. 결국 궁예는 철원을 기반으로 ‘영원한 평화가 깃든 평등 세계’, 곧 미륵세상인 대동방국의 기치를 높이 든 것이다.
철원읍 홍원리 비무장지대 안에 있는 태봉국 도성은 궁예가 송악에서 철원으로 도성을 옮기기 위해 903-904년경 세운 성곽이다. 외성과 내성으로 이중 축조된 이 도성은 왕궁성 둘레 1.8km, 내성 7.7km, 외성 12.5km에 이르는 성이다. 이는 이전 백제의 풍납토성(3.5km), 신라 월성(1.8km), 고구려 국내성(2.7km)보다 훨씬 규모가 크고, 400~500년 뒤에 쌓은 서울 성곽(18km)에도 버금가는 규모임을 알 수 있다.
궁예는 이후에도 수년간은 후백제의 견훤과 싸워 이기면서 서해안까지 장악해나갔다. 그러나 911년 견훤의 사위인 지훤에게 무진주에서 패하면서 암운이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913년 아지태 사건은 궁예 몰락의 신호탄이었다. 관심법(觀心法)을 내세워 신하들을 죽이기 일쑤였고, 915년엔 궁예, 부인 강씨와 왕자 2명까지 죽였다. 게다가 무리한 천도로 백성의 부역과 세금이 부담되어 지지를 상실하였고, 때마침 흉년이 들자 민심이 돌아섰다.
미륵이라던 개혁 군주가 어느덧 폭군으로 전락한 것이다. 기득권 세력이었던 송악의 보수 호족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결국 918년 부하인 신숭겸·홍유·복지겸·배현경 등이 왕건을 추대하자 궁예는 도망가다 평강(平康)에서 백성들에게 피살되었다. 그리고 왕건은 이듬해 1월 철원을 떠나 송악으로 천도한다.
정사에서 궁예에 대한 평가는 아주 냉혹하다. 삼국사기, 고려사 등에는 태봉국을 세운 건국주로서의 궁예는 온데 간데 없고, 백성들을 못살게 군 도적으로만 평가절하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누가 뭐래도 고려의 건국을 정당화하기 위한 과장이요, 포장임을 알 수 있다. 궁예는 원대한 포부를 지닌 개혁가였으나 자기 관리 실패로 기득권 세력인 송악의 호족과 세 대결에서 끝내 패하고만 것이다.
정사는 궁예를 혹평하지만 야사는 비교적 부드럽다. 상주·문경에서 견훤 흉을 보면 낭패를 당하듯이 철원서 궁예를 힐난하면 분위기가 어색해진다. 호칭도 ‘궁예왕’으로 높이는 게 자연스럽다. 철원을 비롯한 포천 등 이 지역에서 채록된 설화를 보면 왕건은 권모술수에 능한 인물이고, 궁예는 용의주도한 의도로 접근한 왕건의 쿠데타로 희생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정사엔 궁예가 성을 도망쳐 보리를 훔쳐 먹다 백성들에게 붙잡혀 맞아죽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야사는 다르다. 철원·포천 지역의 구비설화나 지명 전설을 보면 궁예는 추종 세력과 함께 철원 명성산성, 포천 보개산성·운악산성 등에서 치열한 항전을 벌인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래서 향토사학자들은 궁예가 쫓겨난 뒤 바로 죽은 게 아니라 왕건과 10~15년을 더 항전했다고 보고 있다.
- ▲ 1946년 초 북한정권 아래에서 지은 철원 조선노동당 당사. 6·25전쟁 때 생긴 포탄, 총탄 자국이 촘촘하다.
철원을 기반으로 대동방국을 꿈꾸던 궁예가 왕건에게 쫓겨나 삼방협(평강에서 안변 사이의 협곡)에 잠든 지 어언 1,100여 년. 그가 혼신의 힘으로 세웠던 태봉국 도성은 이 땅에서 일어났던 6·25전쟁과 분단이 빚어낸 비극의 상징이 되었다. 전쟁 중에는 이곳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포탄을 퍼부으며 파괴를 거듭했고, 휴전선은 도성을 남북으로 반반씩 가르고 있다. 또 3번 국도와 경원선은 도성을 동서로 갈라놓았다. 거기에 휴전선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2km씩 물러나 있는 비무장지대 잡초밭에 묻혀 있는 것도 서러운데, 도대체 몇 개인지도 모를 지뢰가 전체를 뒤덮고 있으니 세상에 이토록 팔자 센 도성이 있을까. 그래서 전문가들은 물론 많은 이들이 태봉국 도성에 대한 남북공동조사는 분단 극복과 민족 통일의 상징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곳을 통일 조국의 수도로 삼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고.
- ▲ 1.고석정 입구의 임꺽정 조형물. 의적 임꺽정이 고석정을 근거로 활동하였다는 전설에 바탕을 두고 제작한 것이다. 2.안보견학을 하려면 차량 앞 유리창에 붙여야 하는 출입증. 3.통일을 꿈꾸는 땅 철원은 아직도 지뢰와 전쟁 중이다.
아쉬운 마음으로 전망대를 내려와 월정역에서 철마를 본다. 얼마 전엔 분단 반세기만에 경의선과 동해선을 시험 운행하는 역사적인 사건도 있었다. 한국 국민들에게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문장은 분단의 아픔과 상처, 평화 통일의 염원을 모두 담고 있는 애틋한 표현이다. 역사적인 남북 열차 시험운행을 계기로 철마는 이제 평화와 통일의 상징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어찌 경의선뿐이겠는가. 서울과 원산을 잇는 경원선 월정역 한쪽에 녹슨 채 멈춰 있는 이 철마도 달리고 싶다. 통일이란 종착역을 향하여.
- ▲ 남방한계선에 가장 근접한 지점에 있는 월정리역은 경원선의 간이역이었다.
- 선도 차량은 월정역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경원선의 중심역이며 금강산전철의 시발점이던 철원 역사가 먼발치로 보인다. 이 외에도 얼음창고, 농산물검사소 등 당시의 건물들 잔해가 눈길을 끈다. 내려서 둘러보고 싶었으나 선도 차량을 놓쳤다가는 무슨 경을 칠지 알 수 없는 일. 잠시 서행하면서 사진을 찍는 것으로 만족하는 수밖에. 기왕에 견학하려면 이런 문화유산도 함께 둘러볼 수 있게 하면 좋으련만.
- ▲ 제2땅굴, 월정리역 등을 둘러보려면 고석정 입구의 철의삼각지전적관에서 출입허가서를 작성해야 한다.
제출했던 신분증을 받아들고 백마고지 위령비가 서있는 언덕에서 백마고지를 바라본 후, 되돌아나와 보수공사 중인 철원 노동당사 들렀다가 도피안사(到彼岸寺)로 향한다. 이곳 역시 한때는 군인의 검문을 받아야만 출입이 가능했지만 이젠 후방의 여느 절집처럼 그냥 자유롭게 출입이 가능하다. 그 사이 삭막하기만 하던 절집 분위기도 많이 누그러져 호젓한 산사 분위기까지 느껴지니 세월 참 좋아졌다.
▲ 월정리역엔 열차의 잔해 일부분이 녹슨 채 남아 있다.
도피안사는 865년(경문왕 5) 도선국사가 철조비로사나불좌상(국보 제63호)을 만들어 철원의 안양사(安養寺)로 옮기던 중 사라진 불상이 있던 자리에 세운 절집이다. 역사 속 수많은 세력이 철원 지역에서 부닥치면서 절집은 여러 차례 화재를 입었으나 이 철불만은 훼손되지 않고 남아있으니 거의 기적이라 할 수 있다.
남한과 북한을 가로막고 있는 휴전선은 국경이 아니다. 우리 한반도는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로서 통일을 꿈꾸는 땅이다. 그 대표가 바로 철원이다. 휴전선 155마일 중 무려 28%인 43.6마일을 끌어안고 있는 땅, 그래서 더욱 더 통일을 열망하게 되는 땅 철원. 이 철원 여행은 언제나 미완이었다. 이번 여정도 마찬가지다. 래프팅 고무보트가 한탄강을 가득 메우고, 민통선 안에 있어 통제되던 몇몇 곳이 풀리긴 했어도 여전히 철원 여행은 미완이다. 마치 못 이룬 궁예의 꿈처럼.
1,100여 년 전 삼한통일을 꿈꾸던 궁예도, 왕건도 모두 경배했을 철불에 삼배를 올리고 나서는 길. 이 미완의 철원 이야기가 빠른 시일 안에 완성될 수 있기를 간절히 빌어본다.
철원, 어떤곳인가
강원도 북서부에 있는 철원군(鐵原郡)은 동쪽으로 화천군, 서쪽으로 경기도 연천·포천군, 남쪽으로 포천군, 북쪽으로 휴전선을 경계로 북한 강원도의 철원·평강·김화군과 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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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원군의 중앙을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흐르는 한탄강을 중심으로 북서부 평야지역과 남동부 산악지대로 크게 양분된다. 평야지대는 대체로 해발고도 200∼500m의 평탄한 대지로서, 신생대 제4기 홍적세에 약선(弱線)인 구조선을 따라 열하분출한 현무암이 기존 하곡 위를 흘러내려 형성된 철원·평강 용암대지의 일부다.
한탄강 기슭에는 주상절리(柱狀節理)와 수직단애(垂直斷崖)가 발달되어 곳곳에 절경을 이룬다. 남동부의 산악지대는 주로 화강편마암으로 해발고도 1,000m 내외의 한북정맥 산줄기가 지난다.
고구려 때 철원(鐵圓), 모을동비군(毛乙冬非郡)이었고, 통일신라 경덕왕 때 철성군(鐵城郡)으로 고쳤다. 궁예가 태봉국(泰封國)을 세울 때 도읍으로 삼았고, 고려 태조가 송악(松岳·개성)으로 옮기면서 동주(東州)로 고쳤다. 995년(성종 14)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가 1005년(목종 8) 이를 없앴고, 1018년(현종 9) 동주지사(東州知事)를 두었다. 고종 때 현령(縣令)을 두고, 그 뒤 승격하여 목(牧)이 됐으며, 1310년(충선왕 2) 철원부(鐵原府)가 됐다.
옛날부터 철원평야 일대는 강원도 제1의 쌀 생산지였으며, 지금도 강원도 생산량의 5분의 1 정도를 생산한다. 쌀은 동송읍, 콩은 갈말·동송읍, 잡곡은 김화·갈말읍·근남면에서 많이 재배한다. 채소류는 김화·갈말읍에서, 사과는 갈말읍에서 많이 생산한다. 풍부한 초지를 이용해 군내 전역에서 한우를 많이 사육한다. 갈말읍은 한우뿐만 아니라 젖소·돼지·닭 사육의 중심지다. 양봉은 근남면에서 활발하다.
- 고석정
동송읍 장흥리 한탄강 중류에 위치한 고석정(孤石亭)은 강 중앙에 10m 높이의 거대한 기암 옆에 세운 정자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기록에 따르면 신라 진평왕(재위 579-632)과 고려 충숙왕(재위 1294-1339)이 여기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그 외에도 고려 승려 무외(無畏)의 고석정기와 김량경의 시 등이 있다. 현재의 2층 정자는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져 1971년에 콘크리트로 새로 지은 것이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조선 명종 때 임꺽정이 대적당을 조직하고 강 건너편에 석성을 쌓고 함경도로부터 조정에 상납되는 공물을 탈취해 백성들에게 나눠주며 의적활동을 했던 곳이라 전한다. 고석암에는 임꺽정이 은신했었다는 자연 석실이 남아있다. 이 바위에는 성지와 도력이 새겨져 있고, 구멍 안 벽면에는 유명대, 본읍금만이라 새겨 있다. 입장료 어른 1,500원, 학생 1,200원, 어린이 800원. 주차료 2,000원. 전화 033-455-3129.
직탕폭포
동송읍 장흥리 한탄강 상류에 있는 직탕폭포는 폭 80m, 높이 3m에 이르는 一자형 기암으로 이루어진 폭포다. 한탄강 양안에 보(洑)처럼 일직선으로 가로놓인 거대한 암반을 넘어 물이 수직으로 쏟아져내려 직탄(直灘)폭포라고도 한다.
폭포 아래쪽에는 낚시를 즐기는 포인트가 있고, 위쪽에서는 다슬기를 잡을 수 있어 천렵꾼과 행락객들이 많이 찾는다. 철원팔경의 하나로서 철원군에서는 ‘한국의 나이아가라’라고 홍보하고 있다.
순담계곡
고석정에서 하류로 2km 정도 떨어진 갈말읍 군탄리의 순담계곡은 한탄강 물줄기 중 가장 아름다운 구간으로 꼽힌다. 조선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유척기(1691-1767)가 요양하던 곳인데, 순조 때 우의정을 지낸 김관주(1743-1806)가 20평 정도의 연못을 파고 물풀인 순채를 옮겨다 심고서 ‘순담’이라 불렀다고 한다. 기묘한 현무암 바위와 깎아내린 듯한 벼랑, 깊은 소 등이 많으며, 물가엔 하얀 모래톱이 형성되어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든다. 한탄강 래프팅업체가 많이 자리하고 있다.
삼부연폭포
갈말읍 신철원리 명성산 북쪽 기슭에 있는 삼부연폭포는 높이 20m에 3층으로 된 폭포로 철원팔경 중 하나다. 폭포의 물 떨어지는 곳이 세 군데 있는데, 그 모양이 가마솥 같다하여 삼부연이라고 부른다. 예부터 가뭄이 들면 폭포 밑에 단을 차려놓고 기우제를 지냈다. 이곳에서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이 있어 동네 이름을 용화동이라고 부른다.
매월대폭포
근남면 잠곡리 복계산 기슭 해발 595m에 위치한 기슭의 매월대는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 김시습과 8의사가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비분한 나머지 관직을 버리고 이 일대 산촌으로 은거하던 40m 높이의 층암절벽으로, 일명 선암이라 한다.
전설에 따르면 아홉 선비는 이 암반에 바둑판을 새겨놓고 바둑을 두며 단종의 복위를 도모했던 곳이라 전해온다. 매월대 정상에서 동쪽으로 1km 정도에는 매월대폭포가 있다.
도피안사
동송읍 관우리 화개산(花開山)에 있는 도피안사(到彼岸寺)는 865년(경문왕 5)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했다. 기록에 의하면 도선국사가 철조비로자나불을 만들어 철원의 안양사(安養寺)에 모시려고 했으나 운반 도중에 불상이 없어져서 찾아보니 도피안사 자리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 절을 세우고 불상을 모셨다고 한다. 당시 철조불상이 영원한 안식처인 피안에 이르렀다 하여 절이름이 도피안사로 명명됐다.
1898년(광무 2) 화재를 입어 재건했고, 1914년에 다시 개수했다. 6·25전쟁 때 완전 폐허가 된 것을 1959년 당시 육군 제15사단에서 재건했다. 경내에는 철조비로사나불좌상(국보 제63호)과 3층석탑(보물 제223호)이 보존되어 있다. 전에는 민간인출입통제구역으로 출입이 제한됐으나 현재는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다. 전화 033-455-2471.
도피안사 철조비로사나불좌상
도피안사 대적광전에 모셔진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63호)은 철불이 유행했던 나말여초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불상을 받치고 있는 대좌까지도 철로 만든 보기 드문 작품이다.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하던 철조비로자나불상의 새로운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능숙한 조형수법과 알맞은 신체 비례를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이다. 불상 뒷면에 865년(신라 경문왕 5)에 철원의 거사, 신도 등 1,500여 명의 열렬한 신앙심에서 만들었다는 내용의 글이 남아 있어서 조성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도피안사 삼층석탑
도피안사 3층석탑(보물 제223호)은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높이 4.1m의 삼층석탑이다. 기단은 보통 4각의 돌을 이용하는데, 여기에서는 특이하게도 8각 모양의 돌로 높게 2단을 쌓았다. 아래층 기단의 8면에는 안상(眼象)이 조각되어 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에 각각 하나의 돌을 사용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1층은 4단, 2·3층은 3단인데, 조각이 얕아서 다소 무거워 보이긴 하나, 네 귀퉁이가 한껏 위로 들려 있어 아름다운 모습이다. 기단의 꾸밈새에서 보이는 특이한 양식, 지붕돌 받침이 4단, 3단으로 일정치 않은 점 등이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모습임을 보여준다. 탑을 만든 시기는 865년(통일신라 경문왕 5) 절을 건립할 당시 불상과 함께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제2땅굴
철원 북쪽 13km 지점인 군사분계선 남방 900m 지점에서 1975년 3월19일 발견된 제2땅굴은 너비 2.1m, 높이 2m, 깊이 지하 50~160m, 길이 약 3.5km에 달하는 암석층 굴진 아치형 구조물로서 군사분계선 남쪽으로 1.1km까지 파내려왔다.
한국군 초병이 경계근무 중 땅속에서 울리는 폭음을 청취함으로써 현대장비를 통한 시추작업으로 땅굴 소재를 확인한 후 수십 일간의 굴착작업 끝에 찾아냈다. 1시간에 중무장한 병력 3만 명과 야포 등의 전술 능력으로 대규모 침투가 가능하다.
철의 삼각 전망대
월정역 맞은편에 위치한 철의 삼각 전망대는 1988년 건립한 철근콘크리트 건물이다. 이곳에서는 휴전선 비무장지대를 비롯해 부근의 평강고원과 북한 선전마을을 전망할 수 있으며, 초정밀 망원경 시설과 함께 최첨단 기술로 제작된 지형축소 모형판이 있어 민족분단의 현실을 생생하게 보고 들을 수 있는 곳이다.
월정역
남방한계선에 가장 근접한 지점에 있는 월정역은 경원선의 간이역으로서 철원 안보답사의 대표적인 경유지다. 현재 잔해 일부분만 남아 있는 객차는 민족의 한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현재의 월정역사는 철원 안보관광개발사업의 일환으로 1988년 복원했다.
철원역사
철원읍 외촌리 철원평야 한가운데 위치했던 철원역은 경원선의 중심역이며 금강산전철의 시발점이다. 경원선은 한일합방 이후 일제가 주민들의 강제 동원과 10월 혁명 이후 추방된 러시아인들을 고용하여 부설하고, 1924년 원산에서 전 노선 개통식을 가졌다. 총연장 221.4km 중 철원역에서 서울 용산역까지 97.3km(2시간), 원산역까지는 124.1km(3시간)였다. 철원역에서 내금강까지 운행된 금강산전철은 116.6km로 4시간30분이 소요됐다. 1930년 무렵에는 역장을 포함해 80여 명의 역무원이 근무했다고 한다.
백마고지 위령비
백마고지 전투는 6·25전쟁 중인 1952년 10월6일 저녁부터 10월15일 오전까지 10일간 철원 서북방 395고지(백마고지)에서 보병 제9사단(사단장 김종오)과 중공군이 벌인 대규모 전투를 말한다. 당시 아군(3,146명)과 중공군(14,389명) 등 총 17,535명이 희생됐다. 백마고지 위령비는 백마고지 전투에서 희생된 영혼을 달래기 위해 건립한 것인데, 당초 1985년 백마고지 후방에 세운 3.6m 높이의 현무암 비석은 오랜 풍상으로 훼손되고 대규모 위령제를 봉행하는 데 어려움이 따르자 1990년 철원군에서 위령비 일대를 대대적으로 정비, 새롭게 단장했다.
미수복지구 망배단
철원군 철원읍 외촌리에 있는 합동망배단은 실향의 설움과 아픔을 함께하는 강원도 미수복 군민들이 힘을 모아 조국통일의 의지를 다지고 애틋한 향수를 달래고자 1989년에 세운 것이다. 강원도 미수복 군민회(통천, 회양, 이천, 김화, 평강)에서는 매년 6월 이곳에서 합동제례를 지내고 통일을 기원하고 있다.
궁예도성
철원읍 홍원리 비무장지대 안에 있는 궁예도성은 궁예가 송악에서 철원으로 도성을 옮기기 위해 903-904년경 세운 성곽으로, 904년 국호를 마진으로 고치고 905년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다.
외성과 내성으로 이중 축조된 이 도성은 왕궁성 둘레 1.8km, 내성 7.7km, 외성 12.5km에 이르는 대규모 성이다. 내성에는 석등을 비롯해 여러 유적이 남아 있으나 출입통제구역이라 확인하기 어렵다. 철원군청 현관엔 궁예도성을 400분의 1로 축소시킨 가로 6.4m, 세로 5.2m 규모의 태봉국 도성 모형도가 설치되어 있다.
철원 노동당사
철원읍 관전리의 노동당사는 1946년 초에 북한정권 하에서 착공해 지상 3층에 연건평 580평 규모의 건축물로 신축됐다. 조적식 기둥과 벽체로 수직재를 이루고 있으며, 보와 슬라브는 철근콘크리트 수평재로 수직재와 결구되는 구조로 되어있다. 천장은 목조 삼각형 지붕틀을 사용한 흔적이 있으며, 입구의 1층에 원기둥 두 개를 세워 현관을 두었으며, 그 위에는 아치로 장식하여 정면성을 부각하고 있다. 최근에는 통일기원예술제, 열린음악회 등 평화기원행사가 열리고 있다.
철의 삼각지 견학
제2땅굴, 철의 삼각 전망대, 월정역 등은 출입허가를 받아야만 둘러볼 수 있다. 출입 희망자는 고석정 철의 삼각 전적지 관리사무소에서 당일 신청한 뒤 자신의 승용차를 타고 군 관계자가 이끄는 선도 차량을 따라 가면 된다. 백마고지 위령탑, 노동당사와 도피안사 등은 허가를 받지 않고도 출입이 가능하다. 출발은 하절기 4회(09:30, 10:30, 13:00, 14:30), 동절기 4회(09:30, 10:30, 13:00, 14:00)다. 소요시간은 2시간30분 정도. 입장권 어른 1,500원, 청소년 1,200원, 어린이 800원. 주차료 승용차 기준 2,000원. 매주 화요일, 어린이날, 명절은 쉰다.
승리전망대 출입은 하절기 6회(09:30, 10:30, 11:30, 13:30, 14:30, 15:30, 16:30), 동절기 5회(09:30, 10:30, 11:30, 13:30, 14:30, 15:30)다. 출입 희망자는 승리전망대에서 당일 신청하면 된다. 철의 삼각지 입장권으로 승리전망대 입장이 가능하다. 주차료 2,000원. 철의 삼각 전적지 관리사무소 033-450-5558, 5046.
철원 천통리 철새도래지
철원역과 월정역 사이의 중간지점인 철원읍 내포리 구릉지대에 있는 샘통은 0.5ha 정도의 연못이다. 이곳은 현무암 지반을 뚫고 솟아나오는 15℃ 가량의 미지근한 샘물이 겨울에도 얼지 않고 심한 가뭄에도 줄지 않기 때문에 300여 년 전부터 백로·두루미·왜가리 등 철새들의 도래지로 유명한 곳이다. 샘통을 중심으로 반경 2km 이내를 천연기념물 제245호로 지정해서 철새도래지로 관리하고 있다.
한탄강
철원의 주요 젖줄인 한탄강(漢灘江)은 강원 평강군에서 발원해 김화·철원·포천 일부, 연천을 지나 임진강(臨津江)으로 흘러드는 강으로, 길이 136km에 이른다. 산악지대를 관류하므로 대체로 협곡이며, 남대천(南大川)·영평천(永平川)·차탄천(車灘川) 등의 지류가 있다. 옛 이름은 체천, 양천이었다.
강 유역은 현무암지대로서 침식지가 마치 파상지형으로 섬돌 모양의 절벽을 이루고 있어 체천이라 했다. 평원분지 한가운데를 깊이 20~30m의 협곡을 이루면서 흐르기 때문에 그 모양이 마치 미국의 그랜드캐년을 연상케 하고 웬만한 홍수에도 범람하는 일이 없다. 굽이쳐 흐르는 굽이마다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칠만암·직탕폭포·고석정·순담계곡 등의 명승지를 빚어놓았다. 철원평야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젖줄이기도 하다.
승일교
동송읍 장흥리와 갈말읍 문혜리 경계인 한탄강에 걸린 승일교는 소련식 유럽공법의 철근콘크리트라멘조 아치교다. 길이 136m, 폭 7.5m, 주각 상부에서 도로까지의 높이는 21m에 이른다. 철원농업전문학교 토목과 과장 김명여 교사가 설계한 것으로 1948년에 착공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원래 한탄교라는 이름으로 공사가 시작됐는데, 북한이 절반 가량 완성했다가 나중에 남측이 나머지 부분을 완공해 이승만의 ‘승’ 자와 김일성의 ‘일’ 자를 합해 이름을 붙였다 한다.
태봉대교
고석정 상류 2km 지점의 한탄강에 놓인 태봉대교는 갈말읍 상사리와 동송읍 장흥리를 잇는 철제 다리로 2002년에 건립됐다. 한탄강 계곡과 조화되어 유려하고 웅장한 느낌을 준다. 이 다리에는 높이 50m의 번지 점프장이 설치되어 있어 강줄기를 바라보며 스릴을 만끽할 수 있다. 한탄강으로 뛰어내리는 맛이 색다르다. 번지점프장 전화 033-452-8294.
한탄대교
기존의 승일교가 노후해 차량통행시 붕괴 위험이 있자 그 옆에 1999년 새롭게 놓은 철교다. 교량 연장 166.8m, 폭 9.5m의 규모에 붉은 색으로 도장된 아치교로서, 철원평야의 수평적 요소와 한탄계곡의 수직적 요소가 동시에 시공성과 경제성을 확보하고, 구조적으로 조형미도 고려된 최적의 강 아치형식으로 설계했다.
한탄강 래프팅
한탄강은 우리나라 래프팅의 산실로 80년대 초부터 래프팅이 이루어졌다. 평소 2급 정도를 유지하지만, 수량이 많을 때는 3~4급을 넘어서는 폭발적인 위력을 보이기도 한다. 임꺽정의 은거지로 더 유명한 고석정을 고무보트를 타고 가면서 감상하는 눈맛이 좋다.
래프팅업체는 한솔레포츠(011-9030-5042), 문암레저(011-275-1668), 철원래프팅리조트(011-764-6010), 화랑레저(011-9799-4112) 등 수십 군데가 있다. 래프팅 코스는 직탕폭포에서 군탄교에 이르는 17km의 구간 곳곳에 급류가 잘 배합되어 있다. 모두 4개 코스가 있다. 제1코스(직탕폭포~승일교) 6km(2시간 30분 소요), 제2코스(승일교~순담계곡) 3km(2시간), 제3코스(순담계곡~군탄교) 7km(2시간30분 소요), 모든 코스를 연결한 제4코스는 6시간이 넘게 걸린다.
대교천 협곡
한탄강 연안에는 현무암 평원이 발달하고 있으며, 현무암 평원을 관류하는 한탄강 유역에는 경관이 특이한 현무암 협곡이 형성되어 있다. 한탄강의 지류인 대교천 협곡(천연기념물 제436호)은 이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서 제4기의 지질과 지형 발달을 이해하는 데 학술적으로도 매우 중요하다. 방사성동위원소를 이용한 연대측정법에 의하면 약 27만 년 전에 용암이 최소한 3회 분출하면서 형성됐다.
협곡 암벽에는 곳곳에 현무암 주상절리가 분포한다. 주상절리는 지표로 분출한 용암이 냉각될 때 용암이 수축되면서 형성된 육각기둥이다. 이 현무암 협곡의 총 길이는 약 1.5km이고, 협곡의 깊이는 20∼30m에 이른다.
철원 지석묘군
갈말읍 토성리의 지석묘군은 북방식으로 개석(蓋石) 아래에 원래 4매의 판석(板石)으로 된 지석이 석실(石室)을 이루고 있었으나 현재는 판석 1개가 없어졌다. 한탄강의 지류인 남대천 강변을 따라 덕령산 협곡의 소분지 등에 같은 형, 같은 방향, 일정한 간격으로 일직선상에 구축돼 있다. 현재 7기 중 2기만 남아 있으며, 유적지 부근에서 마제석기류와 무문토기류가 출토됐다.
요동백 김응하장군 묘비
조선 중기의 무신인 김응하(金應河·1580-1619) 장군은 1618년 건주위(建州衛)를 치려고 명나라에서 원병을 요청하자 이듬해 도원수 강홍립을 따라 좌영장(左營將)이 되어 참전했다. 명나라 유정(劉綎)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부차령에서 패해 자결하자, 3천 명의 군사로 수만 명의 후금군을 맞아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패해 전사했다. 철원읍 화지리의 요동백 김응하 장군 묘정비는 김 장군의 무훈과 충절을 기리기 위해 1683년(숙종 9)에 세운 기념비다.
충열사
충열사는 1636년(조선 인조 14) 병자호란 당시 김화 지역 전투에서 공을 세운 충열공 홍명구(洪命耉)와 충장공 유림(柳琳)을 모신 사당이다. 효종 때인 1650년 김화읍 읍내리 천동(泉洞)에 충열사 현판을 사액 받아 사당을 건립했으나 6·25전쟁으로 사당이 소실되자 1975년 지방 유지들이 근남면 육단2리에 임시로 건립했다가 2000년에 현 위치로 이전 복원했다.
철원 오대쌀
맑은 물, 청량한 공기, 기름진 황토흙 등 청정 환경에서 생산되어 안정성이 매우 우수하다고 자랑한다. 미질과 밥맛을 결정짓는 천혜의 기후여건에서 생산된다. 병해충 발생이 적어 농약 살포횟수가 적은 저농약 쌀이다. 전국 최초의 품질 인증 쌀로서 1992년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식미 검정결과 전국 제일의 밥맛으로 평가된 쌀이다. 2004년 고품질 쌀 생산평가 대통령상, 2005년 전국 쌀축제 평가 최우수 대통령상을 받았다. 철원군청 농업정책과 033-450-5378.
현무암 공예품
현무암은 남한에서 제주도와 철원에서만 출토되고 있는데, 철원 현무암은 석질이 단단하고 미세해 건축자재용 등으로 활용이 가능하다. 동송읍 장흥3리 부흥석재(대표 백성기)는 1979년부터 현무암을 이용해 멧돌 절구공이 등 전통 생활용품에서부터 건축타일 경계석 바닥재 등 건축자재에 이르기까지 60여 가지 상품을 개발·판매하고 있다.
천연 현무암으로 만든 수동식 맷돌(지름 25~30cm) 13만~15만원, 돌절구(19cm) 60,000원, 자동식 맷돌(30cm) 40만원이다. 전화 033-455-1888,
길에서 만난 별미
한탄강 매운탕
철원의 별미는 청청지역에서 자란 한우, 부대찌개 등 여럿이 있으나 민물고기 매운탕 맛을 한번 보는 것도 괜찮다. 한탄강에는 피라미·꺽지·마자·메기·빠가사리 등 30여 종의 물고기가 서식하고 있는데, 워낙 청정지역이라 오염 걱정을 할 필요가 전혀 없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강에서 천렵해서 손수 매운탕을 끓여 먹어도 좋으리라.
철원 최고 관광지인 고석정 주변을 비롯해 순담계곡 등엔 매운탕을 맛볼 수 있는 식당이 많다. 하지만 직탕폭포 바로 옆 강 언덕에서 시원한 폭포수 소리를 들으며 먹는 매운탕은 맛에다가 시원함과 운치까지 더해져 일품이다. 직탕폭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강 언덕엔 직탕가든(033-455-0944), 폭포가든(033-455-3546) 등 매운탕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 몇 집이 있다.
<일정별 길라잡이>
철원은 크게 안보관광지권과 한탄강의 고석정 주변 권역으로 나뉜다. 철원 동부도 따로 권역을 잡을 수는 있으나 유명 관광지가 많지는 않다.
●안보관광지권 철원 북서쪽의 구철원 지역이 중심이다. 제2땅굴, 철의 삼각 전망대, 월정역 등은 군부대의 출입허가를 받고 인솔자를 따라서 둘러볼 수 있다. 백마고지 위령탑, 노동당사와 도피안사도 이 권역에 속하는데, 이곳은 허가를 받지 않고 개별 출입이 가능하다.
●고석정권 철원 최고의 명소인 고석정을 중심으로 순담계곡, 직탕폭포, 대교천 협곡 등이 2~4km 반경 안에 펼쳐져 있다. 갈말의 삼부연폭포도 이 권역에 넣을 수 있다.
●동부권 김화읍과 서면, 근남면이 중심으로서 매월대폭포, 남대천유원지 등이 자리하고 있으나 볼거리가 많지 않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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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짜기>
●당일 수도권에서는 접근하는 데 2시간 정도 걸리므로 큰 부담 없이 당일로도 일정을 짤 수 있다. 오전에는 안보관광지를 방문하고, 오후에 래프팅을 즐기는 것으로 일정을 맞추면 된다. 래프팅 대신에 번지점프나 직탕폭포, 승일교 등을 차분히 돌아볼 수 있는 일정도 괜찮다. 제2땅굴~철의 삼각 전망대~백마고지 위령비~노동당사~한탄강 래프팅~귀가.
●1박2일 첫날 아침 일찍 출발한다면 철원의 웬만한 명소는 대부분 둘러볼 수 있는 일정이다. 첫날은 안보관광지 위주로 둘러보고, 이튿날은 래프팅, 번지점프 등 한탄강 주변을 즐기는 일정이 괜찮다. 숙박지로는 고석정·순담계곡·직탕폭포 주변이 무난하다. 갈말읍(신철원리), 동송읍(이평리), 김화읍(와수리) 시가지에도 숙박시설이 많다.
●2박3일 1박2일의 일정에다가 한탄강 낚시나 피서까지 여유롭게 할 수 있다. 명성산, 복주산, 금학산 등을 산행할 수도 있다.
- ▲ 철원명소 위치도
- <교통>
●접근 드라이브코스
수도권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의정부→43번 국도→포천→영중→영북→신철원 <2시간 소요>
●고속·시외버스
서울→철원 동서울터미널에서 신철원·와수리(김화), 이평리(동송)행이 각각 매일 수시(06:00~20:35) 운행. 신철원 2시간20분 소요. 와수리 2시간30분 소요. 이평리 2시간25분 소요. 수유리 4호선 전철역 4번 출구 앞에서 신철원·와수리(김화), 이평리(동송)행이 각각 매일 30분 간격(05:40~09:15) 운행. - ●시내버스
신철원→고석정 매일 20분 간격 운행하는 이평리행 버스 이용. 15~20분 소요
*제일여객 033-355-2217
숙식(지역번호 043)
●안보관광지권 이곳은 대부분 민간인통제구역이라 숙식할 곳이 많지 않다. 다만 동송읍 소재지인 이평리에 면회 온 군인가족들을 위해 들어선 숙박시설이 많다. 백송가든(455-0505)은 철원산 돼지삼겹살·돼지갈비, 우렁각시쌈밥(455-9151)은 우렁각시 정식·불고기쌈밥, 운정가든(455-8533)은 한우생고기·생갈비·양념돼지갈비 등을 차린다. -
●고석정권 철원 최고의 명소를 끼고 있는 권역답게 숙식할 곳이 많다. 고석정 조망이 좋은 철원온천호텔(455-1234)은 국내 유일의 화산온천으로서 80개 객실을 보유하고 있다. 고석정이 보이는 노천탕이 인기 있다. 고석정 입구의 임꺽정식당(455-8779), 승일회관(455-8787), 꺽정가든(455-3128) 등은 매운탕·산채비빔밥·우렁무침 등을 차린다. -
래프팅 출발지인 순담계곡이 있는 군탄리에 한탄강민박(452-2006), 1캠프(452-7578), 2캠프(452-1711), 순담민박(452-5353) 등이 있다. 래프팅업체는 대부분 숙식도 가능하다. 대가(452-4375)의 영양탕·추어탕, 진미옥(452-7315)은 우거지해장국·설렁탕을 차린다.
직탕폭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강 언덕엔 민물매운탕·장어구이를 맛볼 수 있는 직탕가든(455-0944), 폭포가든(455-3546) 등이 있다. 식당엔 펜션형 숙박시설이 딸려 있다. 한탄강 주변의 갈말읍 내대리엔 마이그린펜션(452-6294), 승일펜션(452-1949), 석등(452-8603) 등의 펜션이 있다. -
갈말읍 소재지인 신철원리에는 대원장(452-2525), 한양파크(452-5077), 청송파크(452-7727), 삼부연타운(452-5884) 등의 숙박시설이 있다. -
●동부권 매월대폭포가 있는 근남면 잠곡리 주변에 청석골산장(458-3007), 누에골민박(458-1372) 등 민박집이 있다. 서면 소재지인 와수리에 강원장(452-2275), 현대여관(458-2165), 김화여관(458-6062), 수궁장(458-2130) 등이 있다. 남대천변의 김화읍 청양리엔 솔나리펜션(458-5667)이 있다.
*철원군청 대표전화 033-450-5151, 5114
- <출처>2007.08 / 월간산 [45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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