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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강원도

강릉, 백두대간과 동해가 빚어낸 영동의 으뜸 고을

by 혜강(惠江) 2008. 2. 10.

 

강원 강릉


백두대간과 동해가 빚어낸 영동의 으뜸 고을

 

르포라이터 민병준

 

 

 

 

강릉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문향(文鄕)이다. ‘강릉’이라 하면 떠오르는 것들이 많다. 영동의 관문인 대관령, 관동팔경의 대표적인 누각인 경포대가 있는 아름다운 경포호, 세계문화유산에 오른 단오제. 또 있다. 가장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꼽히는 신사임당, 조선의 대학자 율곡 이이, 그리고 조선의 모순을 비판한 ‘홍길동전’의 명문장가 허균, 비록 요절했으나 중국에까지 필명을 떨쳤던 여류시인 허난설헌, 그리고 파도에 기찻길이 묻혀버릴 듯한 간이역 정동진….


이들을 만나기 위해 대관령(大關嶺·832m)을 넘는다. 얼마 전 터널이 뚫린 직선의 ‘새길’이 아니라 굽이돌던 예전의 ‘구길’이다. 영동고속도로가 확장되기 전인 2001년 이전까지만 해도 북적대던 옛 고속도로는 456번 지방도로로 ‘강등’되면서 이젠 적막감만 감돌고 있다. 한적해진 옛 고속도로를 지나다보면 이게 바로 길의 운명인가, 하는 상념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인간의 운명 또한 이와 다를 게 무엇이랴.

 

                                 

 

 

21세기 현재 풍력발전기 3대가 수문장 역할을 하고 있는 대관령은 강원도의 유서 깊은 고을인 강릉과 역사를 같이해온 백두대간의 큰 고개다.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영동과 영서를 이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고개로서 영동 지방의 관문이 된다. 고갯마루 정상에서 동쪽을 보면 동해와 강릉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옛 나그네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던, 혹은 슬프게 하던 그 광경이다.

 

강릉 토박이 노인들은 대관령을 아직도 ‘대굴령’이라 부른다. 이는 ‘너무 험해 대굴대굴 굴러 내리는 고개’라는 뜻이다. 조선시대 대관령 고갯길이라 하면 동쪽의 강릉 구산(丘山)역에서 반정(半程)을 거쳐 대관령 너머 서쪽의 횡계(橫溪)역까지를 말한다. 이중 현재까지도 비포장으로 온전히 남아있는 옛길은 제민원(濟民院)이 있던 현재의 대관령박물관에서부터 옛 영동고속도로(456번 지방도)와 만나는 신사임당 사친비 앞의 반정까지 5km 구간이다.

 

 

                       

 

 

옛길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조선시대에 강릉 구산역에서 대관령을 넘자면 ‘장승거리’와 ‘굴면이’, ‘제벵이’, ‘원울이재’, ‘반젱이’, ‘윗반젱이’를 차례로 지나게 된다. 장승거리는 구산역 서낭당에서 어흘리쪽으로 가는 길가에 장승이 서있어서 얻은 지명이요, 굴면이는 대관령 정상에서 나귀나 말등에 짐을 싣고 험한 고갯길을 내려오면서 여러 번 뒹굴었으나 이곳에 오면 길이 좋아 뒹구는 것을 면한다고 해서 붙은 지명이다. 


또 제벵이는 길손들에게 숙박 등의 편의를 제공하던 제민원(濟民院))이 있던 마을인데, 옛 제민원 자리엔 현재 개인이 운영하는 민속박물관인 대관령박물관이 터를 잡고 있다. 윗굴면을 지나 만나는 야트막한 원울이재는 옛날 강릉으로 부임하거나 떠나던 고을 원님들이 이 재를 오르내리면서 눈물을 흘리곤 했다는 곳이다. 

 

윗반젱이라고 불리던 반정은 옛 횡계역과 구산역의 중간 지점이라는 뜻인데, 옛날엔 이곳에 주막이 있어 길손들이 쉬어가기도 했다. 또 옛길 남쪽에 솟은 제왕산(帝王山·840.7m)은 고려 말 우왕(禑王·1364-1389)이 ‘공민왕의 핏줄이 아니라 신돈의 자식’이라는 이성계의 주장에 몰려 왕위에서 쫓겨나 유배왔던 곳이기도 하다. 이렇듯 대관령 고갯길엔 웅장한 성은 없으나 문경새재와 견주어도 그다지 뒤지지 않을 정도의 콘텐츠가 넘친다. 그러니 시간이 허락한다면 옛길을 따라 답사를 한번쯤 경험해보는 것도 좋으리라.

 

 

                                  

 

 

또한 강릉의 전설과 신화는 모두 대관령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대관령 사연을 듣다보면 시간이 짧다. 단오제와 얽힌 대관령의 신앙 이야기를 들어보자. 설·한식·단오·추석을 일컫는 한국의 4대 명절 중 양기(陽氣)가 가장 왕성하다는 음력 5월5일 단옷날을 전후하여 서낭신에게 지내는 제례가 바로 단오제인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역사가 오래된 단오제는 강릉에 전해온다.

 

2005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된 강릉단오제에서 모시는 주신(主神)은 대관령 국사서낭신과 대관령 국사여서낭신이다. 그리고 대관령 산신(山神)도 중요한 신격으로 모신다. 그렇다면 신의 정체는 무엇일까. 국사서낭신은 신라 말 굴산사(堀山寺)와 신복사(神福寺)를 창건한 범일국사(梵日國師·810-889)요, 국사여서낭은 강릉의 정(鄭)씨 집안 처녀요, 그리고 산신은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 장군이다.

 

                                      

 

 

범일국사 전설은 이렇다. 때는 신라 말기, 양가집 딸이 굴산(현재의 학산)에 살고 있었다. 나이가 들도록 시집을 가지 못한 처녀는 어느 날 이른 아침에 우물에서 물을 긷다가 바가지 물속에 잠겨 있는 해를 마시곤 열 달 뒤에 아기를 낳았다. 처녀의 집안에서는 지아비 없는 아기라 하여 얼음 위에다 버리니 학이 날아와 아기를 덮어 감쌌으며 산짐승들이 젖을 먹였고, 밤이 되자 하늘에서 상서로운 빛이 비쳤다. 처녀의 집안에서는 아기를 도로 거두어 길렀는데, 이 아기가 바로 범일국사다. 

 

범일은 20세에 경주에서 구족계를 받은 후 836년(흥덕왕 11)에 당나라에 가서 선종을 계승하고 847년 귀국했다. 851년 고향인 굴산사 주지로 온 후 40여 년 간 영동지역에 선불교를 퍼뜨린 범일은 신라 말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사굴산파를 창시했다. 범일은 동해의 삼화사를 세우고 양양의 낙산사를 중건했으며, 강릉 신복사도 건립하면서 영동지방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그리고 나중에 열반하자 대관령의 국사서낭신으로 모셔졌다.

 

 

 

                                      

 

 

이번엔 국사서낭신의 짝인 국사여서낭신의 전설 한 토막. 아주 오랜 옛날 강릉에 정씨가 살고 있었다. 그에겐 나이 찬 딸이 있었는데, 하루는 꿈에 대관령 서낭신이 나타나 “내가 이 집에 장가를 오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씨는 “사람이 아닌 서낭신을 사위로 삼을 수 없다”며 거절했다. 그런 어느 날 정씨의 딸이 노랑저고리에 남치마로 곱게 단장하고 마루에 앉아있는데 갑자기 호랑이가 와서 딸을 업고 달아났다. 딸을 잃은 정씨는 호랑이가 물어간 사실을 알고 국사서낭신을 찾아갔다. 그러나 딸은 벌써 죽어 혼은 없고 육신만 비석처럼 서있었다. 가족들이 육신만이라도 옮기려 했으나 몸이 떨어지지 않아 화공을 불러 딸의 화상을 그려 세우니 비로소 몸이 떨어졌다.

 

이 이야기들은 강릉단오제의 주신인 대관령 국사서낭신은 신라의 범일국사고, 국사여서낭신은 강릉에 살던 정씨의 딸이라는 유래다. 그런데, 범일국사가 대관령의 국사서낭이라는 기록은 일제시대에 처음으로 나타나니 그리 오래 전은 아닌 듯하다. 그 이전의 기록은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강릉 출신인 교산(蛟山) 허균(許筠·1569-1618)은 대관령 산신이 김유신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허균은 1603년 5월1일 대관령의 산신인 대령신(大嶺神)을 맞이하는 단오제 행사를 구경하다가 수리(首吏)에게 들은 말을 <성소부부고>에 적고 있다.

 

 

                                        

 

 

‘대령신이란 바로 신라 대장군 김공 유신입니다. 공이 젊었을 때 명주(강릉)에서 공부하였는데, 산신(山神)이 검술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명주 남쪽 선지사(禪智寺)에서 칼을 주조하였는데, 90일만에 불 속에서 꺼내니 그 빛은 햇빛을 무색하게 할 만큼 번쩍거렸답니다. 공이 이것을 차고 성을 내면 저절로 칼집에서 튀어나오곤 하였는데, 끝내 이 칼로 고구려를 쳐부수고 백제를 평정하였답니다. 그러다가 죽어서는 대령의 산신이 되었고, 지금도 신령스런 이적이 있기에 고을 사람들이 해마다 5월 초하루에 천을 길게 늘어뜨려 만든 대와 향기 나는 꽃을 갖추어 대령에서 맞아다가 명주부사(溟州府司)에 모신답니다. 그리하여 닷새 되는 날, 갖은 놀이로 신(神)을 기쁘게 해 드린답니다. 신이 기뻐하면 하루 종일 대가 쓰러지지 않아 그 해는 풍년이 들고, 신이 화를 내면 대가 쓰러져 그 해엔 반드시 바람과 가뭄의 피해가 있답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민속학자들은 국사서낭의 ‘국사’를 범일이라는 특정인물과 관련시키지 않고, 오히려 국사당 신앙과 관련짓기도 한다. 높은 산정에 있으면서 국수당, 국시당 등으로도 불리는 국사당은 천신의 강림처라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대관령이 비록 고개라 해도 강릉에서 보면 높은 산인만큼 국사당 신앙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하는 것이다. 또한 조선시대에 대성황사는 강릉 시내에 있었다.

 

그런데도 굳이 신을 모시러 대관령에 올라간 이유는 대관령의 신은 바로 천신이고, 이는 과거 동예 땅이었던 강릉에서 행했던 제천의식인 무천(舞天)의 흔적이라는 것이다. 천신은 세월이 흐르면서 주신의 성격이 변해 승(僧)과 속(俗)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결국 승은 범일 국사요, 속은 김유신이 되었으며, 호랑이로부터 신변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 호환 당한 여인을 국사여서낭으로 모시고 있다는 것이다.

 

 

 

 

강릉의 볼거리는 역시 단오제다. 단오제는 남대천 단오장에서 매년 음력 5월5일(이후 모두 음력) 단오를 전후로 하여 5일간 열린다. 옛날엔 이 단오제를 지내는 데 열흘이나 걸렸다고 한다. 이 행사엔 관속·무당·지방민 등 수백 명이 제사에 참가하였고, 영동은 물론이요, 영서에서 대관령을 넘어온 관중들이 수만 명이나 몰렸다고 한다. 길손도 어릴 적에 수백 리 밖 충청도 땅에서도 강릉단오제의 명성을 익히 들어왔다.

 

단오의 시작은 4월5일 시내 칠사당에서 신에게 바칠 술을 만드는 신주빚기로 시작한다. 4월15일엔 산신제와 대관령국사서낭제를 지내기 위해 대관령을 오른다. 국사서낭신이 정씨 처녀를 데려다가 혼인한 날이 바로 이 날이기 때문이다. 요즘엔 15일 이른 아침에 출발하지만, 옛날엔 14일 술시(오후 7시)에 출발했다고 한다. 당시 광대패들이 선두에 서서 무악(巫樂)을 울리는 가운데 고을의 하급관리 대표인 호장(戶長)이 앞서고, 부사·수노(首奴)·도사령 등 관속, 무격(巫覡) 수십 명이 말을 타고 갔으며, 그 뒤로는 수백 명의 마을 사람들이 제물을 진 채 대관령 아흔아홉 굽이를 걸어 올랐다.

 

 

 

                                         

 

 

대관령에 도착하면 맨 먼저 김유신 장군을 섬기는 산신제를 올린 다음, 대관령국사성황사 앞에서 국사서낭제를 지낸다. 국사서낭신의 신체이기도 한 신목(神木)을 베는 일은 이 날 제의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신장부가 베어낸 신목을 모셔들고 산을 내려와 대관령국사성황사 앞마당에 서면 무녀가 신이 내리는 장소를 깨끗하게 하기 위해 부정굿을 하고, 또 신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축원굿을 한다. 간단한 굿이 끝나면 무녀가 대관령국사서낭신에게 고개 아래의 대관령국사여성황사로 가자며 인도한다. 대관령을 내려갈 때면 신명나는 무악이 울린다.

 

옛날엔 대관령국사서낭신을 모시고 아흔아홉 굽이 험준한 대관령을 걸어서 내려왔는데, 소나무 횃불을 들고 윗반쟁이, 아랫반쟁이, 제민원, 굴면이를 지나 구산까지 이어진 구불구불 대관령을 걸어 내려가는 횃불의 장사진은 장관이었다고 한다. 요즘은 대관령성황사에서 자동차로 신목을 봉송하다 대관령 중간쯤에서부터 옛길로 구산 서낭당까지 내려가는 과정만 재현하고 있다. 이때 산유가(山遊歌)를 부르는데, 이를 ‘영산홍’이라고도 한다.



 꽃밭일레 꽃밭일레 / 사월 보름날 꽃 바칠래 / 어얼싸 지화자자 영산홍
 명산일레 명산일레 / 대관령이 명산일레 / 지화자자 영산홍 
 영산홍 녹음 바람 / 청들백들 배 걸렸네 / 지화자자 영산홍 
 일년에 한번밖에 / 못 만나는 우리 연분 / 지화자자 영산홍
 보고파라 가고 지고 / 어서 바삐 가자스라 / 지화자자 영산홍
 국태민안 시화연풍 / 서낭님께 비나이다 / 지화자자 영산홍
 산호원피 야도자절 / 서낭님께 비나이다 / 지화자자 영산홍

 

 

                       

 

 

대관령을 다 내려가면 국사서낭신인 범일국사의 고향인 학산 마을에 들러 탄생설화가 전해오는 석천과 학바위를 돌아본다. 학바위 근처 허름한 민가 옆엔 범일국사의 사리탑이라는 굴산사지 부도(보물 제85호)가 있다. 또 굴산사지 남쪽 언덕 벌판에 세워져 있는 당간지주(보물 제86호)는 산세에도 전혀 주눅 들지 않았고, 오히려 너무도 웅대해 절로 경외감이 든다. 돌을 다듬으면서 생긴 정 자국이 천 년의 세월을 지난 지금도 선명하다. 전문가들은 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기에 새롭게 떠오르는 힘찬 기운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평한다. 이어 학산 마을을 나온 단오제 패거리는 강릉시내 일원을 순례하고는 홍제동에 있는 여성황사로 가서 봉안제(奉安祭)를 올린다. 이때부터 위패와 신목은 본격적으로 단오굿이 시작되는 5월3일까지 여기에 모신다.

 

이윽고 5월3일 오후 6시에 영신제(迎神祭)를 올리면서 7일까지 꼬박 닷새 동안 치러지는 강릉단오제의 막이 본격적으로 오르게 된다. 단오제 5일 동안 매일 저녁 늦도록 계속되는 단오굿은 단오제의 꽃이다. 기돗발 잘 받는 세습무당이 의례를 진행하는 강릉단오굿은 부정굿과 대관령서낭굿으로 시작하는데, 단오제 기간에 펼쳐지는 단오굿은 대략 19석에 30여 거리나 된다. 이 단오굿과 함께 관노가면극, 농악, 그네뛰기, 씨름 등 각종 민속놀이가 단오장 곳곳에서 벌어진다.

 

 

 

                                  

 

 

단오굿과 더불어 단오제의 핵심으로 꼽히는 관노가면극은 관아의 노비들에 의해 행해진 우리나라 유일의 무언극이다. 내용은 단순하여 양반과 각시의 사랑, 그 사랑을 방해하는 세력과의 갈등이 내용인데, 봉산탈춤·양주별산대·고성오광대 등 다른 탈놀음과 달리 아직 굿에서 독립하지 못하고 제의의 한 부분으로 공연되고 있다. 어쨌든 단오굿이 갇혀있던 슬픈 영혼들을 위로하는 한판 살풀이라면, 관노가면극은 최하층이었던 노비들의 맺힌 설움을 풀어내는 놀이판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대관령을 넘으면서 단오제의 동선을 따르다보면 어느덧 강릉 시내 한 복판에 들어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강릉 시내에서 길은 언제나 갈림길이다. 조선시대에도 그랬고, 요즘도 마찬가지다. 강릉의 동쪽은 바다에 막혀있으니 대관령을 넘은 자는 어쨌든 남으로든 북으로든 선택을 해야 한다. 북에는 경포대와 주문진항, 그리고 소금강계곡이 있다. 남쪽엔 정동진이 있고. 어디로 먼저 갈까, 하는 갈등도 잠시, 대부분의 옛 나그네들이 그러했듯이 길손은 경포대로 향한다.

 

 

 

 

 

 경포대가 있는 경포호(鏡浦湖)는 동해에서 장엄하게 떠오르는 태양, 붉게 타오르는 석양, 달밤의 호수 풍광, 짙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한 백사장 등으로 이름 높은 호수다. 그래서 예부터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아름다움을 예찬한 곳으로서 호수가 거울처럼 맑다고 하여 경호(鏡湖) 혹은 군자호(君子湖)라고도 불리기도 했다. 옛날엔 호수 둘레가 무려 20리에 달했으나 오늘날엔 호수로 토사가 흘러들면서 면적이 줄어들어 10리(4.35km)에 지나지 않는다. 당시 잘 나갈 땐 호수 주위에 무려 12개의 정자가 있었으나 현재엔 경포대(鏡浦臺), 금란정(金蘭亭), 방해정(放海亭), 해운정(海雲亭)만 남아있다. 

 


                            

 

 

 

강릉 시내에서 경포호쪽으로 가다보면 자연스레 오죽헌~선교장~해운정~경포대를 거치게 된다. 먼저 오죽헌(烏竹軒·보물 제165호)이다. 조선 중기의 대학자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가 태어난 오죽헌은 주변으로 검은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는 데서 이름이 유래했다. 율곡이 탄생한 몽룡실(夢龍室)은 조선 초기의 건축물로 유명하다. 율곡의 어릴 적 이름은 용꿈을 꾸고 태어났다 해서 현룡(見龍)이었는데, 여기엔 재미있는 전설이 전한다.                  

 

 

 

                           

 

 

‘메밀꽃 필 무렵’ 배경지로 잘 알려진 평창의 봉평에 전하는 ‘판관대 지명전설’을 들어보자. 율곡 이이의 부친이 수운판관(水運判官)으로 재직하던 중 여가를 이용해 강릉으로 가다가 날이 저물어 주막에서 하룻밤을 쉬게 되었다. 그런데 용꿈을 꾼 주모가 잠자리를 같이할 것을 애걸복걸했으나 뿌리치고, 강릉에 도착해 역시 용꿈을 꾼 신사임당과 오랜만에 잠자리를 같이해 율곡을 잉태했다고 한다.

 

 

                                     

 

 

 

오죽헌에선 검은 대숲을 스치는 바람 소리를 듣는 운치도 좋다. 눈길 끄는 나무들도 많다. 몽룡실 앞마당의 배롱나무와 뒤꼍 왼쪽의 매화나무는 모두 수령 600년으로 추정되는 나무로서 신사임당과 율곡을 지켜봤을 것이다. 이중에서 매화나무는 3월에 꽃을 피우는 홍매(紅梅)로서 흔히 ‘율곡매’라고 불린다. 길손이 들렀던 5월 초순에는 꽃은 지고 제법 속이 들어찬 매실들이 가득 열려 있었다. 지난밤에 불었던 거센 바닷바람에 떨어졌을까. 마당에 떨어진 매실 하나 주워 깨무니 시큼한 맛에 입안에 침이 가득 고인다.  

 

신이 태어난 외갓집 덕에 율곡은 강릉과 인연이 깊었다. 그 흔적은 백두대간의 큰 산인 오대산(1,563m) 동쪽 기슭에 있는 소금강계곡에도 남아 있다. 오대산 줄기인 황병산을 주봉으로 우측은 노인봉, 좌측은 매봉이 자리한 소금강은 학이 날개를 편 듯한 형국이라 해서 청학산(靑鶴山)이라고도 불린다. 소금강이란 이름은 이곳에서 잠시 머물던 이이가 ‘청학산기’에서 빼어난 산세가 마치 금강산을 축소해 놓은 것 같다고 한 데서 유래했다. 금강사 앞 영춘대에는 율곡이 직접 썼다는 ‘小金剛’이란 글씨도 새겨져 있다고 한다.

 

 

 

 

 

오죽헌에서 멀지 않은 선교장(船橋莊·중요민속자료 제5호)은 조선 후기 영동 지역 상류층의 주거 생활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선교장은 ‘배다릿집’이라는 뜻인데, 이는 경포호의 물이 이곳까지 차 있을 때 배가 드나들던 옛 지명인 ‘배다리마을’에서 유래한 것이다. 안채, 그리고 사랑채인 열화당(悅話堂), 별채인 동별당이 있는데, 열화당은 도연명의 귀거래사 가운데 ‘친척들과 더불어 정다운 이야기를 나누며 즐긴다’는 구절에서 따왔다. 예전엔 경포호의 일부였을 듯한 선교장 연못엔 1816년 건립한 활래정(活來亭)이 있다. 활래정은 주자의 ‘관서유감’이라는 시에서 ‘맑은 물은 근원으로부터 끊임없이 흐르는 물이 있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에서 얻은 것이다. 

 

 

                         

 

 

경포호 서쪽 언덕 위에 다소곳이 자리 잡은 경포대는 조선의 문장가인 송강 정철(鄭徹)의 매우 서정적인 기행문인 관동별곡으로 알 수 있듯 관동팔경의 하나로 이름을 날리며 시인묵객들에게 크나큰 사랑을 받아온 곳이다.

 

당시 풍류객들은 달이 뜨는 밤이면 이 경포대에서 달을 보며 즐겼다. 하늘에 떠있는 달, 출렁이는 호수 물결에 춤추는 달, 파도에 반사되어 어른거리는 달, 정자에서 벗과 나누어 마시는 술잔 속의 달, 벗의 눈동자에 깃든 달…. 이렇게 모두 다섯 개나 된다. 이렇듯 예술과 문화적인 전통이 넘치는 경포호는 강릉 사람들에겐 참 보배 같은 존재다. 그들은 이른 아침 호수 주변을 걷거나 달리면서 자연스레 역사와 호흡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호수 남쪽의 쭉쭉 뻗은 아름드리 해송 숲엔 조선시대에 중국에까지 필명을 드날렸던 천재 시인 허난설헌(許蘭雪軒·1563-1589)의 생가가 남아 있다(허균이 태어난 곳은 사천진리 애일당 愛日堂 옛터다). 난설헌은 허균의 누이로서 이름은 초희(楚姬)고, 난설헌은 호다. 그녀는 8세에 상량문을 지어 신동이라는 칭송을 받고, 동생의 문장을 고쳐줄 정도로 출중한 솜씨를 지녔으나 14세에 결혼해 두 딸을 잃고 시름에 찬 세월을 보내다 27세에 요절했다. ‘감옥으로부터 사색’의 작가 신영복 선생은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 지월리에 있는 그녀의 무덤을 다녀와 이렇게 쓰고 있다. 


 

 

 

 

‘사랑했던 오라버니의 유배와 죽음, 그리고 존경했던 스승 이달(李達)의 좌절, 동시대의 불행한 여성에 대하여 키워온 그녀의 연민과 애정, 남편의 방탕과 학대, 그리고 연이은 어린 남매의 죽음. 스물일곱의 짧은 삶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육중한 것이었습니다. 사임당의 고아한 화조도(花鳥圖)에서는 단 한 점도 발견할 수 없었던 봉건적 질곡의 흔적이 난설헌의 차가운 시비(詩碑)에는 곳곳에 점철되어 있었습니다.’  

 

 

                        

 

 

 

여행객들에겐 속초의 대포항, 양양의 물치항에 견줄 수 있는 주문진(注文津) 어시장에서 오징어회 한 쌈 들고 남쪽으로 내려간다. 온 길을 되짚어 간 다음 강릉 시내를 벗어나 해안도로를 달린다. 안인진에 있는 강릉통일공원에서 우리 해군의 퇴역함정인 전북함과 1996년 9월18일 침투한 북한 무장 잠수함을 둘러보고 등명낙가사에 들러 위장병과 피부병에 좋다는 약수 한 모금 마시면 드디어 정동진.


인생은 새옹지마라 했던가. 정말 사람의 일이 앞으로 어찌될지 짐작하기란 쉽지 않다. 허나 어디 삶만 그러하겠는가. 길도 그렇고 마을도 마찬가지리라. 강릉으로 오는 길에 대관령에서 이런 상념에 잠기기도 했지만 정동진이란 바닷가 마을도 그러하다. 하지만 여긴 스산함이 아니라 화려함이다.


광화문에서 정확히 동쪽에 있다는 바닷가 작은 어촌 정동진(正東津). 여관도, 찻집도 없이 파돗소리에 묻혀있던 어촌에 있는 정동진역은 그리움이 파도처럼 무시로 밀려드는 자그마한 간이역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바다와 가장 가까이 있다는 이 역은 1962년에 처음으로 문을 열었다. 주변의 탄광에서 생산되는 석탄을 수송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석탄산업 합리화정책으로 탄광들이 폐쇄되고 주변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자 1996년 여객취급을 중지하고 역도 문을 닫고 말았다.  예전에 강릉 가는 기차를 타고 이곳을 지날 때면 새벽의 까만 어둠 속에서 하얗게 달려드는 파도가 기차 바퀴를 적실 듯 가까이서 부서지던 추억도 새롭다.


그러나 그 무렵 SBS에서 모래시계가 방영된 이후 갑자기 인기를 얻기 시작해 1997년 다시 문을 열게 된다. 당시 온 나라를 눈물바다로 몰아넣으며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드라마 모래시계에서 수배를 피해 외딴 어촌에 내려와 숨어있던 혜린(고현정)이 경찰에 쫓기며 초조하게 열차를 기다리던 기차역. 그가 뒤쫓아온 경찰관에게 체포되던 바로 그 ‘소나무 한 그루 서있는 겨울바다 기찻길’의 슬프면서 아름다운 장면이 펼쳐진 곳이 바로 정동진역이었던 것이다.


적막하던 정동진역은 이렇듯 모래시계로 ‘기차여행의 신데렐라’로 극적인 회생을 했고, 이후는 상전벽해였다. 이곳 일출을 보려 몰려드는 여행객을 위한 숙박시설과 식당들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섰고, 이정표도 변변치 않아 헤매기 일쑤이던 게 언제였나 싶게 고속도로 나들목부터 친절하게 가는 길을 안내하고 있다.

 

                                 

 

 

 

기찻길은 백사장과 바싹 붙어 있다. 여행객들이 기차를 기다릴 때 쓰는 긴 의자는 기찻길쪽이 아니라 바다쪽을 바라보고 놓여 있다. 여기에 가만히 앉아 파란 바다를 바라보는 맛은 정말 일품. 때맞춰 기차까지 지나가니 비록 초조하게 열차를 기다리는 그 여인이 없다 해도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정말 그럴 듯하다.

 

물론 바다로 내려서는 계단이 있으니 신발 벗어들고 부드러운 백사장을 거닐며 새하얀 파도를 마음껏 희롱해보자. 연인들이라면 해안을 거닐면서 사랑을 속삭이는 것은 자유지만 자신들 뒤쪽 언덕의 긴 의자엔 언제나 바다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앉아 있으니 조심하는 게 좋다. 대부분 사랑을 쌓아가는 연인들이지만, 아이들 손을 잡은 가족들뿐만 아니라 늙수그레한 노부부의 모습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정동진역 주변엔 보고 즐길 거리가 아주 많다. 그중에서 남쪽으로 500m 정도 내려가면 모래시계공원이 있다. 1999년 새로운 천년을 기념하기 위해 드라마의 제목에서 힌트를 얻어 조성한 이 모래시계공원은 중력에 의해 떨어지는 모래의 부피에 의해 시간의 경과를 재는 장치인 모래시계를 테마로 했다. 모래시계는 지름 8.06m, 폭 3.20m, 무게 40톤, 모래무게만 무려 8톤에 이른다. 이는 세계 최대의 규모라 하는데, 모래가 모두 아래로 떨어지는데 걸리는 시간은 꼭 1년. 매년 1월1일 0시에 반 바퀴 돌려 위와 아래를 바꿔 새롭게 시작한다. 그리고 그 날 새벽에 맞이하는 일출 때문일까. 어느새 훌쩍 커버린 정동진은 경포대 일출의 명성도 넘보고 있는 것이다. 

 

 

                           

 

 

강릉의 마무리는 해안도로인 헌화로 드라이브다. 도로 바로 옆에 동해의 파도가 넘실거리는 이 길은 파도 크게 칠 때면 파도가 길까지 튀어 오른다. 그렇다면 수로부인에게 절벽의 철쭉꽃을 꺾어주곤 헌화가를 불렀다는 소 몰던 노인은 어디 있는 것일까, 기웃거리는데 파도가 들이닥친다. 이젠 강릉을 떠날 시간이라 말하는 것만 같다.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또 달려드는 파도. 어쩔거나. 떠나야지. 그런데 어디로 넘어간담. 빠른 길이야 옥계 나들목에서 동해고속도로에 올라타 대관령터널을 지나는 것일 테지만, 지금은 백두대간과 동해 바닷가에 송홧가루 풀풀 날리는 봄날인데. 

 

옥계에서 백복령을 넘을까. 아니면 구산에서 닭목재나 삽당령을 넘을까. 어쨌든 백두대간 그 너머는 정선 고을이다. 그렇다면 그 산골서 애잔한 아라리 한 가락 한번 들어볼까, 고민하는 사이 다시 파도가 달려든다. 지금 강릉을 떠나지 않으면 영영 못 떠나게 될지 모른다며.

 

         

 

 

 

강릉, 어떤곳인가 

 

 

 

 

 

강원도 중앙부 동쪽에 있는 강릉시(江陵市)는 동쪽으로 동해를 끼고 있고, 서쪽으로 홍천·평창·정선군, 남쪽으로 동해시, 북쪽으로 양양군과 접한다. 백두대간 동쪽 급경사 산간지대부터 동해안까지 이르는 곳에 있어 지형은 산간·평야·해안지대로 구분된다.  

 

강릉의 서부를 백두대간의 두로봉(1,422m), 노인봉(1,338m), 석병산(1,055m) 등 1,000m가 넘는 봉우리들이 남북으로 뻗어 있다.  서고동저형 지세로 대부분의 하천들이 서쪽 백두대간에서 발원해 동해로 유입된다. 주요 하천인 남대천(南大川)과 연곡천 유역에는 충적평야(퇴적평야)를 형성해 농경지로 이용된다. 여러 하천이 운반한 화강암질 하얀 모래는 해안에서 사주·사취 등을 이루고 석호인 경포호를 형성했다. 해안선은 사빈과 암석으로 구성되며, 주문진만은 육지쪽으로 깊숙이 들어와 천연의 항구를 이룬다. 연안은 수심이 깊고 계절에 따라 한류와 난류가 흘러 어족이 풍부하다. 

 

강릉은 본래 예국(濊國)의 도읍지로 알려졌으며, 313년 고구려 때는 하서랑(河西良) 또는 아슬라(阿瑟羅)라고 했다. 진흥왕 때 신라 영토가 된 이후 북빈경(北濱京), 하서주(河西州), 명주(溟州) 등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고려 태조는 동원경(東原京)이라 했고, 940년 명주, 983년 하서부(河西府), 986년 명주도독부, 992년 명주목, 1260년 경흥도호부(慶興都護府), 1389년 강릉대도호부(江陵大都護府) 등으로 명칭과 품계가 바뀌었다. 1955년 강릉읍과 성덕면(城德面)·경포면(鏡浦面)을 통합해 강릉시로, 나머지 면을 명주군으로 개칭했고, 1995년 명주군을 합쳤다.

 

                                  

 

 

강릉단오제

단오절, 단양절, 단양놀이, 단양굿 등으로 불리는 단오제는 고대 부족국가의 제천의식과 농경의례에서 비롯된 유구한 역사의 향촌제다. 우리나라의 단오제 중에는 강릉단오제(중요무형문화재 제13호)의 규모가 최고다. 행사는 대관령 국사성황신의 성황굿에서부터 크게는 국태민안과 개인의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기원하는 굿 등이 12거리로 진행된다.


강릉단오제에 모시는 신은 김유신으로 알려져 있는 ‘대관령 산신’, 신라 말 구산선문 중 하나인 사굴산문을 창건한 범일국사인 ‘대관령 국사서낭신’, 호랑이가 아내로 삼았던 강릉정씨 처녀인 ‘대관령 국사여성황신’ 이렇게 3신이며 제의는 차례로 모신다. 강릉단오제는 2005년 유네스코 선정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에 선정되었다. 

 

 

 

                             

 

오죽헌

죽헌동의 오죽헌(烏竹軒·보물 제165호)은 조선시대 문신 최치운(1390-1440)이 지은 건물로서 신사임당(申師任堂·1504-1551)과 율곡 이이(李珥·1536-1584)가 태어난 집이다. 앞면 3칸 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 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앞면에서 보면 왼쪽 2칸은 대청마루로 사용했고, 오른쪽 1칸은 온돌방으로 만들었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부재들도 새부리 모양으로 빠져나오는 간결한 형태로 짠 익공계 양식으로 꾸몄다. 우리나라 주택 건축물 중에서 비교적 오래된 건물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전화 033-640-4457~60 

 

격몽요결

격몽요결(擊蒙要訣)은 율곡 이이가 42세 때인 1577년(선조 10)에 벼슬길에서 떠나 해주(海州)에 들어가 있을 때 학문을 시작하는 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편찬한 책으로, 입지(立志)를 비롯한 10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가 국왕의 학문을 위해 저술한 ‘성학집요(聖學輯要)’, 관학(官學) 교육을 위해 저술한 ‘학교모범(學校模範)’에 대응하는 책이다. 친필본인 이이수필격몽요결(보물 제602호)은 오죽헌·시립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격몽요결은 교육을 처음 받는 사람들의 입문서로 널리 쓰였기 때문에 목판이나 활자로 인쇄된 책이 많으나, 이 책은 율곡이 손수 행서체(行書體)로 쓴 유일한 원본으로 총 24쪽이다. 특히 이 책에는 정조가 이 책을 보고 지은 글을 이병모(李秉模)에게 명해 쓴 글이 책 앞쪽에 붙어 있다. 

 

 

                               

 

 

선교장

 

경포호 남서쪽에 있는 선교장(船橋莊·중요민속자료 제5호)은 강릉 지방의 명문인 이내번(李乃蕃)이 처음으로 살기 시작해 대대로 후손들이 거처하는 고택이다. 열화당(悅話堂)·안채·동별당(東別堂)·활래정(活來亭) 이렇게 4채가 있다.  사랑채인 열화당은 1815년(순조 15)에 이후(李后)가 건립한 것이며, 활래정은 그 이듬해 세운 대문 밖 선교장 입구에 있는 큰 연못 옆에 세운 정자로서 증손인 이근우(李根宇)가 현재의 건물로 중건했다. 연못 속에 돌기둥을 세워 주위에 난간을 돌렸으며, 팔작지붕에 겹처마의 납도리집이다.  (전화 033-648-5303) 

 

 

                          

 

 

경포대 

 

경포호 북안에 있는 경포대(鏡浦臺·도유형문화재 제6호)는 정면 6칸, 측면 5칸, 기둥 28주의 팔작지붕 겹처마기와집의 누대(樓臺)다. 1326년(충숙왕 13) 당시 강원도 안렴사 박숙정(朴淑貞)에 의해 현 방해정 뒷산 인월사(印月寺) 옛터에 처음 지어졌다. 1508년(중종 3) 강릉부사 한급(韓汲)이 현 위치로 옮긴 후 여러 차례 중수해 현재에 이른다.


녹두일출(菉荳日出)·죽도명월(竹島明月)·강문어화(江門漁火)·초당취연(草堂炊煙)·홍장야우(紅粧夜雨)·증봉낙조(甑峯落照)·환선취적(喚仙吹?)·한사모종(寒寺暮鍾)을 경포8경이라 한다. (전화 033-640-5904)

 

                                      

 

 

 

허난설헌 생가터 

경포대 남안의 허난설헌 생가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여류 시인 허난설헌(1563-1589)이 태어난 집터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사실과 건립 연대는 미상이다. 안채, 사랑채, 곳간채가 ㅁ자로 배치하고 있으며, 외부를 둘러싼 담이 있다. 


남녀 구분이 엄격해 남자들은 솟을대문으로, 여자들은 우물간과 방앗간 옆의 협문으로 출입했다. 또한 사랑마당과 구분하는 내외 담을 사랑채 옆에 쌓아서 출입 시선을 차단하고 있다. 사랑마당, 행랑마당, 뒷마당을 담으로 넓게 나누어 놓아 한국의 아름다운 조경을 볼 수 있게 했다. (문화예술과 033-640-5585)

 

 

                                       

 

 

참소리박물관  

경포대 가까이에 있는 참소리박물관은 소리(sound)가 중심이 된 참소리 축음기박물관, 그리고 에디슨 발명품 위주의 에디슨 사이언스뮤지엄 두 개의 박물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요 소장품은 뮤직박스, 축음기, 라디오, TV, 자동차, 에디슨의 발명품 등 5,000여 점에 이른다. 참소리 축음기박물관은 4개의 독립 전시관과 전용 음악감상실이 있으며, 3층에는 경포호를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에디슨 사이언스뮤지엄은 에디슨의 발명품, 유품, 생활용품 등이 3개 전시실에 있다. 개관시간 하절기 08:30~18:00, 동절기 09:00~18:00. 주말과 여름휴가에는 야간 개장을 한다. 전화 033-655-1130~2.

 

 

해운정 
경포호 서쪽에 있는 별당 건축물인 해운정(海雲亭·보물 제183호)은 1530년(중종 25) 어촌(漁村) 심언광(沈彦光)이 강원도 관찰사로 있을 때 지은 것이라 전한다. 정면 3칸, 옆면 2칸의 단층 팔작집. 3단 축대 위에 남향으로 세웠다. 여름철에는 실내를 전부 개방해 경포호를 바라보며 시원한 별당 생활을 할 수 있다. ‘해운정’이란 현판은 송시열의 글씨이며, 내부에는 권진응, 율곡 이이 등 여러 명사들의 시문과 기록이 보존되어 있다. 

 

 

정동진역
정동진역은 주변 탄광에서 생산되는 석탄을 수송하기 위해 1962년 문을 열었다. 그러나 석탄산업 합리화정책으로 주변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자 1996년 여객취급을 중지하고 한때 폐쇄되기도 했으나 SBS에서 드라마 ‘모래시계’가 방영된 이후 인기를 얻기 시작, 1997년 다시 문을 열면서 ‘기차여행의 신데렐라’로 극적으로 회생했다. 입장료 500원. 주차료 1시간 1,000원. 전화 033-644-5062 

  

 

                          

 

 

 

모래시계공원

정동진역의 모래시계공원은 중력에 의해 떨어지는 모래의 부피에 의해 시간의 경과를 재는 장치인 모래시계를 테마로 했다. 이 공원은 1999년 강릉시와 삼성전자가 새로운 천년을 기념하기 위해 총사업비 12억8천만 원을 들여 조성했다. 모래시계공원 안의 모래시계는 지름 8.06m, 폭 3.20m, 무게 40톤, 모래무게 8톤으로 세계 최대의 모래시계이며, 모래가 모두 아래로 떨어지는데 걸리는 시간은 꼭 1년이 걸린다. 그러면 다음 해 1월1일 0시에 반 바퀴 돌려 위 아래를 바꿔 새롭게 시작하게 된다. 입장료, 주차료 모두 없다. 전화 033-640-4533

 

 

 

                                      

 

정동진 타임스토리

정동진 타임스토리는 ‘인간과 시간’을 주제로 한 테마박물관이다. 제1관(시간과 과학)에서는 오차 극복을 위한 인류의 노력을, 제2관(시간과 예술)에서는 아름다움을 추구한 중세시대의 진귀한 시계들을, 제3관(시간과 열정)에서는 예술의 경지를 넘어선 현대작가들의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옥외(시간의 정원)에는 시간과 공간을 주제로 한 쉼터와 전시장이 마련되어 있다. 관람료 어린이 2,000원, 청소년 군인 3,500원, 성인 4,500원. 

 

통일공원

강릉 통일공원은 1996년 9월18일 북한 무장 잠수함이 침투한 것을 계기로 안보의식 고취를 목적으로 2001년 개관했다. 통일공원은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터에 들어선 통일안보전시관과 함정전시관으로 이루어졌다. 우리 해군의 퇴역함정(전북함)과 북한군이 타고 온 북한 잠수함이 전시되어 있다. 야외전시장에 탱크, 야포 등을 추가로 전시해 국내 최초의 3군 장비를 함께 관람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 예정이다.

 

하슬라 아트월드

하슬라 아트월드는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조성한 예술정원으로 ‘하슬라’는 명칭은 신라시대 강릉을 일컫던 이름이다. 인위적인 가공보다는 자연환경을 최대한 이용하는 방식으로 꾸몄다. 소나무 정원, 시간의 광장, 습지 정원, 논밭 정원, 바다의 정원, 놀이정원 등으로 구분된다.  (전화 033-644-9411~3) 

 

대관령박물관

대관령 옛길 입구 성산면 어흘리 하제민원 마을에 있는 대관령박물관은 고미술 수집가인 홍귀숙씨가 평생 동안 모은 유물을 기초로 1993년 설립한 사설박물관이다. 전시실·수장고 등의 시설을 갖추고 옹관·석검·토기 등의 선사유물과 신라시대의 토우토기, 목불·고려청자·청동주전자·청동정병 등 고려시대의 문화재 및 조선시대의 목기·목각인형·백자·민화에 이르기까지 2,000여 점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좌청룡 우백호로 나누어진 전시관은 백호방, 현무방, 토기방, 청룡방, 우리방, 주작방의 여섯 개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관령 자연휴양림
성산면 어흘리에 있는 대관령 자연휴양림은 1989년 개장했다. 백두대간 줄기의 대관령 동쪽 중턱 해발 200m~1,170m의 고지대에 있으며, 전국 3대 미림으로 손꼽히는 송림지대인 만큼 수령 200~300년 이상의 소나무와 참나무류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솔고개 너머에 있는 숲속수련장은 강의실과 숙박시설, 잔디광장, 체력단련시설, 숲속교실 등을 구비해 청소년 수련시설로 아주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다. 숲체험로, 야생화정원, 황토초가집, 물레방아, 숯가마터 등이 있어 자연학습과 산림문화 체험장으로 좋다. 산막 사용료 문의(033-641-9990)  

 

오대산 소금강계곡

 백두대간의 큰 산인 오대산(1,563m) 동쪽 기슭에 있는 소금강계곡은 짙은 숲속을 흐르는 맑은 계류와 불쑥불쑥 솟은 기암절벽이 아름다워 1970년에 명승지 제1호로 지정됐다. 
소금강이란 이름은 일찍이 이곳을 들렀던 조선시대 율곡 이이가 ‘청학산기’에서 빼어난 산세가 마치 금강산을 축소해 놓은 것 같다고 한 데서 유래했다. 소금강에는 여러 가닥의 등산로가 있는데, 일반적으로 소금강 답사는 관리사무소가 있는 주차장에서 시작한다. 주차장~청학대피소~식당암~만물상~노인봉~진고개를 거치는 코스는 6시간 걸린다. 매년 10월 둘째 주에 청학제가 열린다. 관리사무소 033-661-4161.


                             

 

 

주문진항  
강릉 북쪽의 항구인 주문진항은 강원도의 대표 항구다. 여객, 화물선이 처음 입항한 것은 1917년으로 부산∼원산 간을 운항하는 기선의 중간 기항지가 되면서부터. 1920년부터 축항사업이 시작됐으며, 1927년 6월에 항구로 지정됐다. 1937년부터 주문진이라 불린다. 1918년 강원도에서는 첫번째로 세워진 주문진등대의 등탑은 최대 직경 3m, 높이 10m로 외벽엔 백색의 석회 몰타르가 칠해져 있다. 한국전쟁 때 파손됐다가 1951년 복구됐다. 동해안 유수의 어업전진기지로 오징어(4~12월), 명태(10~3월), 꽁치(3~6월)를 비롯해 무연탄·경유 등이 입항하고 주로 규사가 출항한다. 주문진읍사무소 033-640-4629. 

 

 


                           

 

 

임영관지 
강릉시 용강동의 임영관지(사적 제388호)는 강릉부의 객사 건물인 임영관이 있던 자리로, 936년(고려 태조 19) 처음 세워졌다. 객사는 지방으로 출장 온 중앙의 관리가 숙소로 이용하던 곳이다. 1636년 중창 이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쳤으며, 일제시대에 강릉공립보통학교가 들어서면서 객사 문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이 헐렸다. 2000년 이후 전대청, 중대청, 동대청, 서헌 등 4개 건물이 복원됐다.

 


 
                         

 

 

 

객사문

객사문(客舍門·국보 제51호)은 객사인 임영관에 딸린 문으로 현존의 건물은 고려 말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맞배지붕이며 주심포 양식의 배흘림기둥을 세워 건물의 미적 효과를 최대한 살려 주는 점이 특징이다. 문에 걸린 현판은 1366년(공민왕 15)에 왕이 낙산사로 행차하는 도중 손수 썼다고 전한다.

 

 

                                   

 

강릉향교

강릉시 교동의 강릉향교(江陵鄕校)는 1127년(인종 5) 처음 지었으나 화재로 소실됐다고 하며, 1313년(충선왕 5)에 강원도 안무사(按撫使) 김승인(金承印)이 교동(校洞) 화부산(花浮山) 아래에 건립한 향교다. 1411년(태종 11)에 불타버린 것을 1413년 강릉 대도판관 이맹상(李孟常)이 지방의 유지 68명과 함께 발의해 중건했으며, 그 후 여러 차례에 걸쳐서 중수했다. 1909년에는 이 향교 안의 명륜당(明倫堂)에 화산학교(花山學校)를 건립했는데, 1910년에 폐교됐으며 1919년에 수선강습소(首善講習所)를 설립했다.

 

또한 1928년에 강릉농업공립학교, 그 후 강릉공립상업학교, 강릉공립여학교, 옥천(玉川)초등학교, 명륜중고등학교 등이 명륜당에서 개교했다. 향교 내의 문묘대성전(보물 제214호)은 문묘의 정전(향교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집)으로 건축됐으며, 공자를 비롯해 중국 성현들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규모나 전통에 있어서 전국 향교 중 제일이라 할 수 있다.

 


                                

 

 

굴산사지 당간지주

구정면 학산리 굴산사지 당간지주(보물 제86호)는 굴산사터에서 좀 떨어진 남쪽 언덕 벌판에 세워져 있다. 두 지주는 높이 5.4m이며, 서로 1m 사이를 두고 마주 서 있다. 거대한 석재로 만들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규모가 가장 큰 편에 속한다.
두 지주는 돌을 다듬으면서 생긴 정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을 뿐, 아무런 장식이 없어 오히려 생동감과 우뚝 선 기상을 느낄 수 있다. 지주의 정상 부근에 이르러서는 안팎 양쪽에서 차츰 둥글게 깎아 곡선을 이루고 있으며, 정상은 뾰족한 형태다. 지주의 위와 아래에는 각각 둥근 구멍을 관통시켜 깃대를 고정시키도록 했다. 이 당간지주의 웅대함과 역동감은 신라 말 고려 초에 새롭게 떠오르는 힘찬 기운을 잘 보여주고 있다.

굴산사는 통일신라 말기에 통효대사 범일(通曉大師 梵日)이 머물던 곳이다. 당시는 선종이 크게 유행했으며, 그 중 9개파가 두드러졌는데, 이곳이 굴산사파의 본산이다.

 

 


                             

 

굴산사지 부도

구정면 학산리 굴산사지 부도(보물 제85호)는 굴산사를 창건한 범일(梵日)국사의 사리탑이라 전한다. 8각원당형의 기본 양식을 갖춘 신라 말 고려 초기의 작품이다. 사자가 돋을새김된 8각의 지대석 위에 접시 모양의 받침돌을 놓고 그 위에 기단부 아래 받침돌을 놓았는데, 모두 소용돌이치는 구름무늬로 장식했다.

가운데 받침돌은 소용돌이치는 구름무늬로 8개 기둥을 표현하고, 그 사이에는 연주하는 천인(天人)과 공양상(供養像)이 입체적으로 조각됐다. 기단부 위 받침돌에는 연꽃 무늬가 조각됐다. 탑 몸체는 8각의 몸돌과 지붕돌로 되어 있다.상륜부는 귀꽃(탑 지붕돌의 추녀마루 끝에 꽃무늬를 새긴 장식)이 표현된 보개(탑 상륜의 보륜과 수연 사이의 지붕 모양의 장식)와 연꽃 무늬를 돌린 보주(탑의 상륜부에 놓인 둥근 모양의 구슬)가 남아 있다.

 

 


                               

 

한송사지 석불좌상

죽헌동 오죽헌시립박물관 내에 있는 한송사지 석불좌상(보물 제81호)은 대리석으로 만든 고려시대 전기의 작품이다. 원래 현 강릉공군비행장의 한송사에 있던 것으로서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한송사 석조보살좌상(국보 제124호)과 같은 크기와 같은 모습이어서 원래 짝을 이루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머리 부분과 오른팔이 없어졌고, 마모가 심해 상태가 좋지 않으나 남아 있는 신체부분이 당당하게 표현되어 있고, 보살상의 옷 형태도 자연스럽게 잘 드러나 있다.


이 보살상의 앉은 자세는 왼쪽 다리를 안으로 접고, 오른쪽 다리를 밖에 둔 편안한 모습인데, 발바닥이 모두 보이게 앉는 결가부좌와는 달리 우리나라 조각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자세다.

 


                          

 

 

보현사
성산면 보광리에 있는 보현사(普賢寺)는 신라시대에 낭원(朗圓)국사 보현이 창건해 지장선원(地藏禪院)으로 불리다가 보현사로 개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웅전은 조선 후기의 건축물로 정면 3칸, 측면 3칸, 겹처마 팔작지붕의 다포(多包) 집이다. 법당 내에는 토제(土製)의 3존불이 봉안되었는데 근년에 도금을 다시 했다. 경내에는 낭원대사오진탑(朗圓大師悟眞塔·보물 제191호)과 낭원대사오진탑비(보물 제192호)를 비롯해 20여 기의 부도가 있다. 종무소 033-648-9431 

 

 

대창리 당간지주
옥천동의 대창리 당간지주(보물 제82호)는 통일신라시대 하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깃대는 없어지고 지주만 남았다. 두 지주의 높이는 5.1m이며 서로 1m 사이를 두고 남북으로 마주 서 있다. 지주에는 아무 것도 새기지 않았으며, 바깥면의 양쪽 모서리를 깎아서 간결하고 소박한 솜씨를 보이고 있다.
지주 정상은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곡선으로 깎아내려 유려한 모양을 이루고 있다. 깃대를 고정시키는 구멍은 없으며, 정상 안쪽에는 ㄷ자 형 홈을 마련해 깃대를 고정시키도록 했다. 현재 기단부(基壇部)는 땅속에 묻혀서 정확한 모습은 알 수 없다. 인접한 강릉 수문리 당간지주와 같은 양식이다. 

 

 

수문리 당간지주

옥천동 수문리 당간지주(보물 제83호)는 통일신라시대 하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두 지주의 높이는 3.4m이며 서로 1m 사이를 두고 동서로 마주 서 있다. 두 지주에는 아무 것도 새기지 않았으며, 바깥면의 양쪽 모서리를 깎아서 간결하고 소박한 솜씨를 보이고 있다. 지주 정상은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곡선으로 깎아내려 유려한 모양을 이루고 있다. 깃대를 고정시키는 구멍은 없으며, 정상의 안쪽에는 ㄷ자형 홈을 마련해 깃대를 고정시키도록 했다. 현재 기단부는 땅속에 묻혀서 정확한 모습은 알 수 없다. 인접한 강릉 대창리 당간지주와 같은 양식이다. 동쪽 지주 앞면에는 넘어져 있던 것을 1817년(순조 17)에 다시 세웠다고 새겨져 있다.

 

 

신복사지 석불좌상
강릉시 내곡동의 신복사지 석불좌상(보물 제84호)은 고려 전기에 만든 것으로 탑을 향해 무릎을 꿇고 공양하는 자세로 앉아 있다. 머리 위에 원통 모양의 높은 관을 쓰고 있고, 그 위에 팔각형의 천개(天蓋)가 올려져 있다. 고려시대에는 사각형 천개가 일반적이지만, 팔각형은 드문 경우다. 원통형의 높은 관, 동글동글한 얼굴, 짧은 인중, 미소 띤 입과 같은 표현은 고려시대 전기 강원도 지역에서 유행하던 특징인데, 인근 한송사지 석불상(보물 제81호), 월정사 석조보살좌상(보물 제139호)도 같은 모습이다.

 

 

신복사지 삼층석탑
강릉시 내곡동 신복사지 삼층석탑(보물 제87호)은 이중 기단 위에 3층의 탑 몸체를 세운 형식이다. 기단부는 지대석 윗면에 연꽃 무늬를 돌렸고, 아래층 기단 면석에는 안상을 새겼다. 상륜부는 구성 요소들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높이에 비해 폭이 넓어 안정감을 준다. 탑에 연꽃무늬를 사용하고, 끼움돌이 있는 점과 지붕돌의 양식 등에서 고려 초기 탑의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다. 

 

 


                          

 

 

 

대관령 옛길
백두대간의 대관령은 영동과 영서를 잇는 가장 큰 고개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온전한 옛길은 강릉 어흘리 대관령박물관 앞에서부터 지금은 지방도가 된 옛 영동고속도로와 만나는 반젱이(半程)까지의 5km 구간. 나그네들이 여행길의 안전을 빌던 돌무덤과 목을 축이던 주막터 등 조상들이 괴나리봇짐에 짚신을 신고 걷던 분위기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내려가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 1시간50분, 올라가는 데는 2시간20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
문화관광과 033-640-4545.

 

 

길에서 만난 별미

 

 

초당순두부

 

                                     

 

 

경포호 남동쪽의 초당동은 바닷물을 간수로 쓴 ‘초당순두부’로 유명한 마을이다. 이 동네엔 순두부를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 아주 많다. 그중 강릉고등학교 정문 앞 솔밭 사이에 터를 잡은 초당할머니순두부집은 근동에서 제일 유명한 집이다. 초당두부의 제조과정은 까다로워서 시간을 제때 맞추지 못하면 제 맛을 내기 힘들다. 우선 두부의 맛을 좌우하는 콩은 강원도 산간지방에서 햇콩을 쓴다. 이 콩을 불에 불린 뒤 콩갈기→콩물 걸러내기→콩물 끓이기→간수 맞추기→두부 만들기 과정을 거치는데, 100여 분의 시간이 걸린다.


이 일련의 과정은 예전엔 할머니가 했으나 요즘엔 아들인 김영환씨가 모친의 뒤를 이어 간수를 넣고 젓는 작업 등을 손수하고 있다. 이른 아침부터 찾아오는 손님을 위해 새벽 4시부터 작업을 시작해 점심과 저녁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한다. 이처럼 언제 찾아가든 언제나 한두 시간 안에 만들어진 순두부를 맛볼 수 있기에 이 집을 찾는 단골이 많다.

순두부에 곁들여 나오는 반찬은 소박하다. 직접 담근 된장으로 끓인 된장찌개와 비지에 섞어 먹는 비지장, 막된장 속에 묵혀 둔 고추장아찌, 1년 묵힌 묵은지 등이다. 이렇게 나오는 순두부 백반은 20여 년간 한결같다. 홈페이지에서 쿠폰을 인쇄해가면 가져가면 10% 할인(1테이블 당 1매)해준다. 전화 033-652-2058.

 

 

일정별 길라잡이

강릉은 권역을 잡기가 수월한 편이다. 강릉시에서는 유명 관광지를 중심으로 5개 권역으로 나누어 홍보하고 있다.
경포권  경포호 주변은 전통적으로 강릉 여행의 중심지라 할 수 있다. 오죽헌, 선교장, 해운정, 참소리박물관, 허난설헌 생가 등 볼거리가 많다.
정동진권  드라마 ‘모래시계’의 배경지였던 정동진역 주변의 바닷가쪽으로 모래시계공원, 타임스토리, 조각공원, 하슬라 아트월드, 등명낙가사, 통일공원 등이 모여 있다.
대관령권  대관령 정상에는 단오제와 연관이 있는 국사성황사가 있고, 대관령 자연휴양림, 대관령박물관, 대관령 옛길 등이 있다. 굴산사지는 조금 떨어져 있긴 하지만 이 권역에 넣는다.
소금강권  백두대간 노인봉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소금강계곡은 명승지로 지정되어 있다. 오징어회 등을 싸게 살 수 있는 주문진항도 이 권역에 속한다.
시내권  강릉향교, 강릉미술관, 객사문, 대관령 국사여성황사, 단오문화관 등이 강릉 시가지 주변에 흩어져 있다.

 

 

일정짜기

당일  수도권에서는 접근하는 데 3시간 정도 걸리므로 그다지 큰 부담 없이 당일로 일정을 짤 수 있다. 경포대, 정동진, 소금강 등 각 권역별 명소를 둘러볼 수 있다. 강릉시청에서 추천한 여러 일정 중 대표적인 일정은 다음과 같다. 대관령→객사문→참소리박물관→중식(초당순두부)→경포대→선교장→오죽헌.
1박2일  우선 숙박지로는 경포대, 정동진이 무난하다. 대관령 산신각→구영동고속도로→굴산사지→오죽헌→선교장 민속자료전시장→경포대→참소리박물관→허난설헌생가→초당 두부마을→경포대 숙박→경포 해돋이→안인 해안도로→강릉 통일공원→모래시계공원→헌화로→옥계 나들목→귀가
2박3일  경포대와 정동진에서 각각 하룻밤씩 숙박하면 좋다. 만약 소금강 산행을 계획했다면 소금강 입구의 숙박시설을 이용한다. 

 

 

교통

접근 드라이브코스 수도권  서울→영동고속도로→강릉 나들목→456번 지방도→강릉<3시간 소요> 영남권  부산→대구-부산고속도로→중앙고속도로→영동고속도로→강릉 나들목→456번 지방도→강릉 <4시간30분 소요> 호남권  광주→호남고속도로→경부고속도로→중부고속도로→영동고속도로→강릉 나들목→456번 지방도→강릉 <5시간 소요> 충청권  대전→경부고속도로→중부고속도로→영동고속도로→강릉 나들목→456번 지방도→강릉 <3시간20분 소요>

 

고속·시외버스
서울→강릉  강남터미널에서 15~30분 간격 수시 (06:00~21:00) 운행. 3시간10분 소요. / 동서울터미널에서 30~40분 간격 매일 수시(06:30~20:30) 운행.
인천→강릉  인천→강릉 종합터미널에서 매일 13회(06:30~18:40) 운행. 4시간 소요.
부산→강릉  종합터미널에서 매일 13회(05:56~16:08) 운행. 6시간30~7시간30분 소요.
대구→강릉  동부시외버스정류장에서 매일 20~30회(05:00~15:03), 22:30(야) 운행. 5시간30분~7시간30분 소요. 
광주→강릉  종합터미널에서 매일 6회(07:00~18:00) 운행. 5시간30분 소요.
대전→강릉  고속터미널에서 매일 8회(06:30~19:40) 운행. 3시간30분 소요.
청주→강릉  여객터미널에서 매일 6회(07:00~18:40) 운행. 3시간40분 소요원.
춘천→강릉  종합정류장에서 매일 25회(06:20~20:30) 운행. 2시간30분~3시간30분 소요. 

 

 

열차

청량리역→강릉역  무궁화호 열차가 매일 7회(08:00~22:40) 운행. 6시간30분 소요.

시내버스  강릉→정동진  동부시장, 신영극장, 남대천에서 111, 112, 113번 109번(좌석) 30분 간격으로 운행. 40분 소요.
강릉→대관령  강릉→대관령 휴양림 어흘리행 503번 시내버스 매일 19회 운행. 30분 소요. 하차 도보 2km.
강릉→소금강·주문진  300, 302번 시내버스 수시 운행. 35분 소요.
강릉→경포대  202번 시내버스 수시 운행. 20분 소요.
강릉→오죽헌  200, 201, 202, 203, 204, 205, 207, 300, 302, 303번 수시 운행. 10~20분 소요.

 

숙식(지역번호 033)

 

경포권  경포호 주변의 해안가에 전망 좋은 숙박시설과 횟집이 즐비하다. 초당동엔 순두부 전문식당이 많다. 선교장 전통문화체험관(646-3270)에서 체험형 숙박 가능. 경포산장콘도미니엄(644-7123), 관광펜션 휴심(642-5075) 등이 있다.

 

정동진권  정동진역 앞에 모텔, 민박 등 숙박시설이 즐비하고, 횟집 등 식당도 아주 많다. 썬크루즈리조트(610-7000)는 바닷가 절벽 위에 서있는 유람선 호텔이다.

 

대관령권  박물관 부근의 옛길막국수(641-9791), 옛길쉼터(641-9402), 옛길만나가든(641-9979), 성산다리 앞 길목민속촌식당(641-9018) 등의 식당이 있다. 박물관에서 2km 떨어진 대관령 자연휴양림(641-9990·www.huyang.go.kr )에서 묵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소금강권  소금강과 연곡천 주변엔 월산민박(661-4104), 송천농원(661-4371), 청학산막(661-0550) 등 숙식할 수 있는 곳이 많다. 마운틴밸리(010-3304-7348·http://m-v.co.kr) 펜션도 괜찮다. 황토구이토종닭(661-4098)과 송이버섯닭전문집(661-5770)은 토종닭요리 전문점.

 

시내권  동보성(648-3508), 아야진횟집(641-1316), 한우관(641-1111), 뚱아줌마(648-4478), 유명한집(645-4560,645-4551) 등 여러 메뉴를 고를 수 있는 식당이 많다.

 

 

* 강릉시청 관광과 033-640-5420
* 강릉시 관광안내소 033-1330, 640-4414, 4531

 

 

 

<출처> 2007. 6 /월간산 45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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