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내여행기 및 정보/- 강원도

태백,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에 안겨 있는 ‘하늘 아래 첫 고을’

by 혜강(惠江) 2008. 2. 10.

강원 태백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에 안겨 있는 ‘하늘 아래 첫 고을’ 

 

“낙동강과 한강이 여기서 발원한다”

 

 

르포라이터 민병준

 

 
 

▲ 들꽃 화사하게 피어난 태백 금대봉 전경. 

 

 

1968년에서 69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에 길손은 태백에 있었다. 당시 군인이셨던 아버님의 전근지를 따라 간 것이었는데, 아마도 울진·삼척 무장공비침투사건 때문이었던 것 같다. 주소는 삼척군 장성읍 통리였다. 지금의 태백시 황연동이다. 

 

통리초등학교도 다니면서 한 2년쯤 살았는데, 길손의 기억에 확연히 남아 있는 것은 지붕을 뒤덮을 정도로 내렸던 엄청난 양의 눈, 그리고 온 동네를 까맣게 뒤덮었던 연탄가루다. 탄광지대인 까닭인지 마을엔 손수 연탄을 찍어서 쓰는 집이 적잖게 있어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구경하느라 심심하지 않았다. 또 당시엔 판잣집인 줄 알았던 너와집, 굴참나무 껍질로 지붕을 얹은 굴피집도 신기했던 기억으로 아슴아슴 떠오른다. 그리고 낙동강 발원지인지도 모르고 가끔 놀러가던 황지 연못, 마냥 신기하기만 하던 미인폭포, 석탄을 가득 실은 기차가 무시로 드나들던 까만 기찻길…. 길손에게 남아 있는 태백의 이미지들이다. 

 

역맛살 탓에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뒤 태백에 드나들면서 세 분을 만났다. 태백을 포함한 강원 지역의 산과 오지를 답사하면서 이를 글과 사진으로 기록하시는 김부래 선생, 태백의 자연과 민속 등의 풍광을 아름다운 사진으로 남기는 사진작가 이석필 선생, 평생 태백의 민속·지명·전설 등을 채록하여 태백을 민속학의 보고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하신 태백문화원의 김강산 원장이 그 분들이다.


태백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탄광도시에서 관광도시로 방향을 바꾸면서 그나마 지금만큼의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데는 이전부터 꾸준히 콘텐츠를 개발하거나 열성적으로 홍보해온 이 분들의 공이 크다는 게 길손의 생각이다. 아마 우리나라 모든 고을마다 이런 분들이 존재한다면 지방 문화는 좀 더 풍요로워질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또한 답사를 다닐 때마다 스스로 늘 부족함을 느끼는 이 길손은 이 분들을 기꺼이 ‘필드의 스승’으로 여기고 있다.


자 이제 태백으로 들어가 보자. 태백은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이 빚은 고을이다. 태백산~화방재~함백산~은대봉~금대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마루금은 해발 1,400~1,500m를 넘나드는 봉우리가 줄을 이었는데, 이 백두대간 분수령은 태백의 피재 근처에서 낙동정맥을 가지 친다. 그 두 산줄기 사이에 태백 시내가 있다. 이렇듯 백두대간과 낙동정맥 두 산줄기의 160리 품에 안겨 있는 태백은 ‘하늘 아래 첫 고을’이요, 대한민국 으뜸 산국(山國)이기도 하다.


이웃 고을로 넘어가는 고갯길도 높다. 영월로 통하는 화방재, 정선의 임계로 가는 피재, 삼척 방향의 유치(유령재, 느릅령), 원덕을 잇는 토산령 등의 고개들은 모두 해발 900m를 넘나든다. 함백산 만항재(1,313m)와 정선의 사북·고한으로 가는 두문동재(싸리재·1,268m) 고갯마루는 그보다 훨씬 높다. 이 정도면 가히 우리나라 최고의 산국이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는 고을이 아닌가.
 
아주 오랜 옛날 산국의 주민들이 세상과 대화하는 유일한 채널은 태백산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태백에서 태백산 이야기를 빼놓으면 그야말로 수박 겉핥기나 다름없다. ‘크고 밝은 뫼’ 태백산(太白山·1,566.7m)은 우리 민족의 영산이다. 신라 때 태백산(북악)은 토함산(동악), 계룡산(서악), 지리산(남악), 팔공산(중악)과 함께 신라 오악(五嶽)에 속했다. 태백산엔 하늘에 제사 지내는 천제단(天祭壇)이 있다. 제단은 위쪽은 원형이고 아래쪽이 사각형인데,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동양사상 때문이다. 강화 마니산의 참성단(塹城壇·사적 제136호)도 역시 천원지방이다.



                       
      
▲ 구문소 수면에 비친 자개문(오른쪽). 전설 속의 이상향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신비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왼쪽은 일제 강점기 때 인공으로 뚫은 터널이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단군의 후손으로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곳 태백산 천제단에서 환인천제·환웅천왕·단군왕검의 삼신일체인 한배검을 향해 제사를 올렸다. 옛 기록인 환단고기에 의하면 ‘5세 단군 구을 임술 원년에 태백산에 천제단을 축조하라 명하고 사자를 보내 제사를 지내게 했다’는 기록이 있고, 삼국사기와 동국여지승람에도 태백산을 신성스럽게 여겨 천제를 올렸다는 기록이 나온다. 적어도 2,000년의 역사를 지닌 제단인 것이다.

그런가 하면 태백산은 무속신앙의 으뜸 성지로도 꼽힌다. 천제단 바로 아래엔 죽어 태백산신이 되고 싶다던 단종의 유언을 받아들여 태백산의 주산신(主山神)으로 모셔놓은 단종의 비각이 있고, 망경사 용정(龍井)엔 동해의 용왕신이 거주하며, 문수봉(1,517m) 자락엔 수많은 신장(神將)들이 머물고 있다.

태백산엔 삼한 때 천제를 지내던 장소로 신성불가침 지역이었던 소도(蘇塗)가 있다. 태백산 기슭엔 아직 그 지명이 남아있어 태백산의 옛 모습을 증거하고 있는데, 태백문화원 원장 김강산 선생은 <영산태백>이라는 저서에서 ‘당초의 소도는 지금처럼 태백산 밑의 좁은 지역에 국한되었던 것이 아니라, 소도동을 비롯해 황지동·장성동·동점동 등 구문소(求門沼) 안쪽의 땅 전체가 소도지역이었으며, 그 중심지는 황지 지역이었다’고 태백산 소도의 영역을 밝히고 있다.
 

 

  ▲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는 주목과 어우러진 태백산 설경이 한 폭의 그
    림처럼 아름답다.

 


 
  그렇다면 이 태백으로 드나드는 길은 과연 어디였을까. 잠시 태백의 옛길을 살펴보자. 텍스트는 대동여지도다. 이 지도를 보면 태백 경계 안에 있는 지명은 태백산과 황지를 비롯해 고석령(孤石嶺), 창옥봉(蒼玉峰), 대박산(大朴山), 건의령(巾衣嶺), 유현(楡峴), 천천(穿川) 등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다.
그런데 태백 동쪽의 유현 근처를 중심으로 4개의 길이 지나가지만 어쩐 일인지 10리마다 하는 거리 표시인 방표(傍標)가 보이지 않는다. 다만 태백을 지나는 고갯길 가운데 건의령만이 그것도 일부 구간에만 방표가 두 개만 그려져 있을 뿐이다. 이는 거리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충분치 않았거나 그다지 쓰이지 않는 작은 길이라는 뜻이다. 이렇듯 태백 지역은 큰 길 하나 지나지 않는 오지였던 것이다.
어쨌든 대동여지도의 지명을 위치로 유추해보면 대박산은 대덕산이요, 창옥봉은 함백산인 듯하다. 이 외에 건의령·유현 등은 지금의 지명과 크게 다르지 않다. 태백과 영월·영춘·춘양을 잇던 고석령은 지금의 화방재(花房峙) 주변인데, 좀더 자세한 검토가 필요하겠지만, 화방재에서 남쪽으로 500m 정도 떨어진 사길령이 고석령 옛길인 듯하다. 충청도 단양의 영춘, 경상도 봉화의 춘양에서 태백 지역으로 넘나들던 사길령의 원래 이름은 새길령. 고려시대에 새로 개척한 길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니 역사도 제법 오래 됐다.
 

 

▲ [좌]매년 5월 말이 되면 태백산 정상 부근은 붉은 철쭉꽃으로 뒤덮인다. [우]매년 8~9월엔 태백고원자생식물원에선 해바라기축제가 열린다.<사진제공=태백 시청>

 


  사길령 한쪽엔 이 고개를 넘어 다니던 보부상들이 호랑이와 도적으로부터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 제를 올리던 산령각(山靈閣)이 있다. 현재 태백산사길령산령각계회에 보관중이라는 ‘천금록’은 200여 년 전부터 보부상들이 이곳 산령각에서 제사를 지낸 기록이다. 지금도 매년 음력 4월15일 태백산신령에게 제사를 올리고 있다고 한다. 이를 미뤄 춘양~고직령~새길령~황지~유현~삼척으로 이어지는 옛길은 태백 지역을 지나는 가장 큰 길로서 영남 북부와 강원 남부 산악지대를 잇는 상권의 통로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산국인 태백은 ‘강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태백 시내 한가운데 있는 황지는 영남 땅을 적시며 흐르는 낙동강의 발원지고, 대덕산 금대봉의 검룡소는 한반도의 큰 젖줄인 한강의 발원지다. 또 동해로 흐르는 오십천도 삼수령에서 발원하니 어찌 태백을 ‘강들의 고향’이라고 부르는 데 주저하겠는가. 대덕산 금대봉 정상엔 ‘양강 발원봉(兩江 發源峰)’ 푯말이 세워져 있는데, 이는 대덕산이 한강의 발원지인 검룡소와 낙동강 발원샘인 너덜샘(은대샘)을 품고 있다는 뜻이다.
 

 

 

 

                                
                            ▲ 2,0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태백산 천제단.          

 

         
 
           이 샘들 중에서 조상 대대로 명성을 떨쳐온 황지부터 먼저 살펴보자. 낙동강 1,300리 
         의 발원지인 황지의 옛 이름은 ‘하늘 못’이란 뜻의 천황(天潢). 세월이 지나면서 황지(潢池)

 

         라 부르다 나중에 삼수변이 떨어져나가면서 지금의 황지(黃池)가 되었다. 원래 황지 부근은

 

         수만 평의 땅이 질퍽한 늪지대를 이뤄 버드나무와 물푸레나무 등이 우거진 천혜의 늪지대

 

         였다. 지금은 도시의 콘크리트 건물들 한 가운데 있는 ‘인공연못’처럼 보이지만, 매일 3천~5

 

         천 톤의 물이 솟아나니 그저 신기할 뿐이다.

 

1486년에 발간된 동국여지승람 삼척도호부편에 ‘황지는 서쪽 110리에 있다. 그 물이 남쪽으로 30여 리를 흘러 작은 산을 뚫고 남쪽으로 나가는데 천천(穿川)이라 한다. 곧 경상도 낙동강의 원류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외에도 척주지, 대동지지 등에서도 황지가 낙동강의 근원지라고 밝혀 놓고 있다. 대동여지도에도 큼직한 원으로 황지를 표시하고 있다. 이만큼 황지는 오랜 옛날부터 낙동강의 발원지로 인정을 받아왔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황지는 낙동강의 발원지가 아니다. 황지보다 상류에 있는 은대봉의 너덜샘에서 낙동강의 첫 물방울이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문가나 향토사학자들은 너덜샘은 낙동강의 발원샘, 황지는 낙동강의 발원지로 구분해서 부르고 있다. 황지의 상징성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 태백산 당골의 단군성전. 태백산 지역엔 삼한 때 천제를 지내던 장소로 신성불가침 지역인 소도가 있었다.

 

 

이번엔 남한강의 발원지인 금대봉(1,418m) 기슭의 검룡소(儉龍沼)를 살펴보자. 이 검룡소는 예전엔 남한강의 발원지로 인정을 받지 못했고, 전통적으로는 평창 오대산 염불암에 있는 우통수(牛筒水)가 남한강의 발원지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정밀측정 결과 검룡소에서 흐르는 하천의 길이가 32km나 더 길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검룡소가 남한강의 발원지로 새롭게 등극하게 된 것이다. 

 

여느 강 발원지는 감히 따라오지 못할 웅장한 힘이 서려있는 검룡소는 겨울날은 물론이요 어느 계절에 가도 신령스러운 분위기가 철철 넘친다. 금대봉 위쪽에 있는 고목나무샘·물구녕석간수·제당굼샘 등에서 각각 지하로 1~2km쯤 흘러내려와 검룡소로 나오는데, 웬만한 샘은 엄두도 못낼 하루 2천~3천 톤이나 되는 양의 샘물이 솟구쳐 514km 흐르는 한강의 원천이 된다.
 
길손은 한강의 새로운 발원지로 등극한 검룡소를 1990년대 초반에 처음 찾아갔다. 주변 숲은 건강했고 용이 숨어있을 듯한 검푸른 못에선 제법 많은 양의 물이 솟아올랐다. 세월 따라 깊게 파인 석회암 바위를 흘러내리는 와폭도 신비스러운 게 과연 한강의 발원지다웠다. 

 

안내판엔 “황해에 살던 이무기가 용이 되기 위해 한강을 거슬러 오르다 이곳에 이르러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음을 알고 머물렀다는 전설이 전한다”고 적혀 있었다. 이후 검룡소에서 용이 되는 수업을 쌓던 이무기가 물을 마시러 오는 소를 잡아먹자 화가 난 마을 사람들이 검룡소를 메워버렸고, 이무기는 결국 용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해피엔딩은 아니었으나 정말 흡족했다. 검룡소가 한강의 발원지다운 신령스런 이름에다가 건강한 숲과 분위기, 그리고 사연 깊은 전설까지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조선 최고의 샘물로 꼽히던 우통수의 명성을 이어받으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 [좌]망경사는 산꼭대기에 있으면서도 산신각 대신 용왕각이 있는 게 특이하다. 동해의 용왕신이 머문다는 용정(龍井) 때문이다. [우]태백산 입구 당골에 있는 국조 단군상.

 

 
  2000년대 초반, 당시 태백문화원 사무국장으로 계시던 김강산 선생을 만났다. 문화원에서 그분과 대화를 나누던 도중 화제는 자연스레 검룡소로 옮겨갔다. 평소 검룡소의 좀더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던 차였다. 그 분의 대답은 청천벽력이었다. “검룡소 전설은 우리가 만든 것입니다.” 국립지리원에서 그곳을 한강 발원지로 공식 인정하자, 산판작업 때문에 묻혀있던 못을 복원하고 검룡소라는 이름과 전설을 지었다는 것이다. 길손은 검룡소 전설이 최소 수백 년 이상 주민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것이려니 지레 짐작하고 있던 터라 충격이 컸다. 당시 김강산 선생은 ‘검룡소 전설이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기록으로 옮겨도 괜찮다고 허락했음을 이 자리에서 밝혀둔다.


 

▲ 태백산 단종 비각. 영월 청령포로 유배 왔다 죽임을 당한 단종은 죽어서 태백산 산신령이 되었다.

 

 

  어쨌든 금세기에 지어진 전설이라는 게 너무도 아쉬웠지만, 그나마 검룡소의 작명과 전설이 정말 그럴 듯하다는 데 위안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기야 따지고 보면 한 고을의 자연전설이란 게 결국은 어느 시기에 누군가가 지어낸 허구가 아니던가. 길손은 요즘도 태백에 관한 글을 쓸 기회가 있으면 검룡소 전설을 이렇게 적어 내려간다. ‘옛날 옛적에 황해에 살던 이무기가…’

 

 

▲ 장엄하게 떠오르는 태백산 일출.

 

 

오십천 관련 이야기도 하나 듣고 가자. 오십천은 태백의 삼수령에서 발원하지만, 이내 삼척 땅으로 흘러드니 삼척 소유인 셈이다. 최상류인 통리협곡의 미인(美人)폭포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폭포는 주소를 삼척시 도계읍 심포리에 두고 있으면서도 태백 시민들에게 훨씬 친숙하다. 길손도 통리초등학교에 다닐 때 수업 빼먹고 동무들과 험한 산길 돌고 돌아 미인폭포까지 자주 놀러갔던 기억이 새롭다.

 

▲ 매년 1월마다 열리는 태백눈축제 행사장 전경.<사진제공=태백 시청>

 

 

  어릴 적 기억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오십천 상류 깊숙한 곳에 숨어있는 미인폭포를 만나면 언제나 가슴이 설렌다. 30m 정도의 희디흰 물줄기가 붉은 협곡 사이로 쏟아지는 미인폭포의 모습은 화장 곱게 한 미인의 자태를 연상케 한다. 또 장대하게 번져나가는 물보라는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기에도 전혀 부족함이 없다. 예전에 미인폭포는 태백 광부들의 으뜸가는 데이트 장소였고, 요즘도 그 명성은 여전하다. 풍경소리 들려오는 혜성사 대웅전 작은 뜰에서 나뭇가지 사이로 폭포를 가만히 내려다보는 맛도 정말 괜찮다. 

 


                        

                      

         ▲ 붉은 협곡 사이로 쏟아지는 미인폭포의 모습은 화장 곱게 한            미인의 자태를 연상케 한다.

 

 


  미인이란 이름처럼 폭포에 얽힌 전설 역시 아름다운 여인과 관계가 있다. 옛날 폭포 서쪽 마을 황지에 사는 잘 생긴 미남과 동쪽 마을 구사리의 예쁜 미인이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가 먼 길을 떠난 후 오랜 동안 소식이 없자 그리움에 지친 여인은 결국 이 폭포 위에서 몸을 던지고 말았다. 그 후 사람들은 이 폭포를 미인폭포라 불렀다 한다.

또 다른 전설도 역시 미모의 여인이 주인공이다. 폭포 부근 높은 터에서 한 여인이 살았는데, 100년만에 한번 태어난다는 절세미인이었다. 그런데, 남편이 병으로 죽자 그 여인은 삼년상을 치른 후 그리움에 사무친 나머지 결국 이 폭포에서 뛰어내리고 말았다. 이외에도 폭포 옆에 살던 예쁜 처녀가 약혼만 하면 신랑감이 까닭 없이 죽어나가자 이를 비관해 결국 폭포에서 자살했다는 전설도 전한다.

미인폭포에 얽힌 전설이 이렇게 여러 가지로 변주(變奏)되어 전해지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미인폭포가 지닌 아름다움을 짐작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미인폭포는 태생부터도 여느 폭포들과 다르다. 갈짓자로 이어지는 급경사 내리막을 5분쯤 내려서면 폭포수 쏟아지는 소리가 점차 가까워지다가 문득 눈앞에 붉은 바위벽이 나타나는데, 이게 바로 폭포수가 만든 통리협곡이다. 물길을 따라 길이 10km, 높이 270m에 이르는 깊은 골이 패여 있는데, 지층의 구분이 선명히 나있는 이곳의 절경은 미국의 그랜드캐년을 연상케 한다. 전문가들은 통리협곡의 생성과정도 그랜드캐년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이렇게 황지와 검룡소, 거기에 미인폭포까지 다 들렀다 해도 황지에서 14km쯤 하류에 있는 동점동의 천천(穿川), 즉 ‘뚜루내’를 보지 않으면 태백을 제대로 알 수 없다. 천년병화 불입지지(千年兵禍 不入之地)라는 이상향, 태백 160리 분지로 들어서는 관문이기 때문이다.
 

 

▲ 금대봉에서 가을 야생화를 사진에 담고 있는 태백의 김부래 선생.

 

 

  이 지방에 전해오는 비결문(秘訣文)에 의하면 ‘낙동강 최상류로 올라가면 더 이상 길이 막혀 갈 수 없는 곳에 거대한 석벽이 가로막고 있는데, 석벽 밑에 커다란 석문이 있다. 그 석문은 자시(子時)에 열리고 축시(丑時)에 닫힌다. 자시에 열릴 때 그 속으로 들어가면 사시사철 꽃이 피고 흉년이 없으며 병화가 침범치 못하고 삼재가 들지 않는 오복동(五福洞)이라는 이상향이 나온다’고 하였다. 

 

오복동은 바로 우리나라 이상향의 상징인 우복동(牛腹洞)인 것이다. 자개문(子開門)이란 이름은 자시에 열린다는 자시개(子時開)에서 유래했다. 결국 구문소에 있는 큰 바위구멍이 이상향이자 무릉도원인 태백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자개문인 셈이다. 사실 태백의 신비로운 분위기를 제대로 느끼려면 백두대간의 화방재나 두문동재를 넘는 것도 좋지만,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 전설의 자개문을 보아야 제격이다. 

 

구문소 바로 옆엔 자동차와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인위적으로 뚫은 석굴이 있다. 사람들은 차를 타고 이 석굴을 통과하면서 이것을 자개문이라 착각한다. 하지만 이 석굴은 일제강점기 때 장성에 석탄광산이 개발되자 일본인들이 석탄 운반을 위해 1937년에 뚫은 것이다. 아주 오랜 옛날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자개문과 달리 이 석굴은 70년밖에 되지 않았다 해도 차량으로 접근할 때 영남에서 태백으로 들어서는 관문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으므로 충분히 빼어난 관광자원이 될 수 있다. 이미 동점터널이란 이름이 있으나 멋스러움이 좀 떨어지는 이 이름보다는 저 무주의 나제통문에서 힌트를 얻어 ‘태백통문’이라 개명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 금대봉의 야생화들. 1)각시취. 2)그늘돌쩌귀. 3)단풍취. 4)노랑물봉선. 5)자주꽃방망이. 6)산솜방망이. 7)눈괴불주머니. 8)곤들레(고령엉겅퀴).

 

 

  이렇듯 태백은 사방을 에워싼 산세와 물길을 가로막은 석벽 때문에 천년 동안 난리 한 번 겪을까 말까 한다는 땅으로 여겨졌다. 오죽하면 태백과 삼척의 하장을 넘나드는 고개 이름이 피재이겠는가. 이 이름엔 삼척 사람들이 황지 지역을 이상향으로 여겨 ‘난리를 피해 넘던 고개’라는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거짓 명성이 아니라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이 땅을 유린했던 거란·여진·몽고·왜군 등의 창칼로부터도 태백 지역은 안전했다. 따라서 대대로 이곳에 살아온 사람들은 아라리 부르며 머루·다래 따먹고, 산비탈에 불을 놓아 수수·기장을 심어먹고, 하늘 보이는 너와집에서 별을 바라보며 살다가 가을이면 모여 태백산에서 천제를 지내는 태평세월을 보냈던 것이다. 

 

하지만 산악지대 사람들을 무던히도 괴롭히는 게 있었으니 바로 호랑이였다. 한때 ‘호랑이의 나라’로 불릴 정도로 호랑이가 많던 우리나라. 그러나 이제 대다수의 사람들은 남한 땅에선 호랑이가 멸종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럼에도 태백에 사는 사람들은 호랑이가 둘레 산기슭 어딘가에 살고 있다고 믿으며, 요즘도 간혹 그 산군자(山君子)를 목격했다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태백엔 호랑이에 관련된 전설들도 철철 넘쳐난다. 화전동 장축엔 맨손으로 범을 때려잡았다는 범 잡은 할아버지 5대 후손이 지금도 살고 있다고 한다. 유령재(느릅재) 산신당도 호환을 피하려는 염원으로 지은 것이다. 

 

하지만 호랑이와 관련된 현실은 훨씬 처절했다. 호식총(虎食塚)이 바로 그 증거다. 호랑이는 사람을 잡아먹으면 머리와 굵은 뼈만 남기는데, 호식총은 그 자리서 시신을 화장해 돌을 덮고 시루를 엎은 다음 시루 구멍에 물레에 쓰는 쇠가락을 꽂아놓은 무덤을 말한다. 태백 토박이로서 향토사학자이기도 한 김강산 선생은 오래 전에 태백·삼척·정선 등지에 흩어져 있는 호식총을 조사하고 독특한 장례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 ‘호식장(虎食葬)’이란 책을 펴내기도 했다.

 

 

▲ 싸리재라고도 불리는 두문동재 고갯마루. 정선에서 태백으로 넘어오는 관문이다.

 

 

  태백산을 중심으로 백두대간과 낙동정맥 기슭에는 예로부터 화전민이 많이 살았는데, ‘호식장’에 따르면 태백산 기슭에 들어선 마을들은 대부분 호랑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철암동 버들골 설통바우 밑 화장터 등 태백에 50여 군데, 삼척에 70여 군데, 정선에 80여 군데, 영월에 5군데 등 일대 산간마을에 이르기까지 파악된 곳만 무려 250여 군데에 이른다.



                              

 

                                 ▲ 태백산 입구 소도동엔 태백산신을 지키는 역할을  하는 태백산 석장승이 있다.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사람의 영혼을 창귀라 한다. 이는 호랑이의 노예로서 사돈에 팔촌까지 유인해 호랑이에게 잡아먹히게 하는 악질이다. 그래야 자기가 호랑이에게서 빠져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호식을 당했을 때 화장을 하는 까닭은 창귀로부터 오는 모든 화근을 소멸시키려는 데 있다. 결국 호환 당한 사람의 모든 것을 불태움으로써 창귀를 완전히 없애는 것이다.

돌무덤은 성황당처럼 신성한 곳으로서 창귀를 꼼짝 못하게 가두어 놓는 금역(禁域)을 뜻한다. 시루는 모든 것을 쪄내는 무서운 도구인 철옹성으로서 하늘을 뜻하기도 한다. 가락은 무기나 벼락의 의미로서 창귀를 꼼짝하지 못하게 하고, 가락의 용도처럼 맴돌기만 하고 빠져나오지 못하게 한다는 뜻이 있다.

결국 호식총은 끈질기고 무섭다는 창귀를 꼼짝 못하게 함으로써 호환으로부터 보호받으려는 처절한 의지의 산물인 것이다.

 

▲ 태백산 천제단에서 매년 개천절 환인천제.환웅천왕.단군왕검의 삼신일체인 '한배검'을 향해 제사를 올린다.

 

 
  태백의 수많은 호식총 가운데 철암동 버들골 깊은 산중의 설통바우 아래에 있는 호식총이 비교적 접근하기 수월한 편이다. 길손은 몇 년 전 김강산 선생과 이곳을 답사한 적이 있다. 그런데, 왜 태백산 주변 사람들은 그 무서운 호랑이 피해를 입으면서도 이 산골을 벗어나지 못했을까 의아했다. 김 선생은 산골 노인들의 말을 빌어 “착취와 핍박을 피해 산골로 들어온 사람들이 비록 호환을 당하더라도 이를 운명으로 알고 화전 일구며 묵묵히 살아갔던 것”이라며 운명론으로 해석했다. 그 날 버들골을 내려오면서 숲속 어디선가 호랑이 한 마리가 두 눈에 불을 켠 채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잰걸음으로 버들골을 빠져나왔지만, 웬일인지 그 무서운 호랑이가 이내 그리워졌으니 마음이란 게 얼마나 이율배반적인가.

 

▲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열차역인 추전역의 겨울. 눈꽃열차가 운행되면서 인기를 끌고 있다.

 

 

태백 기행은 아무래도 석탄으로 마무리하는 게 좋겠다. 20세기 태백의 역사에서 ‘검은 황금’, ‘검은 노다지’로 불리던 석탄을 빼놓고는 태백에 대해 아무런 이야기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석탄은 1920년경 장해룡이란 사람이 금천골 먹돌배기의 개울가에서 처음 발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곳은 석탄이 발견되기 전에도 땅이 검었고, 비가 오면 계곡물도 검은 색으로 변하여 예부터 ‘거무내’라 했다는 곳이다. 그가 석탄 덩어리를 주워 면장 책상 위에 놓아둔 것이 일본인 기사 눈에 띄어 태백에 탄광이 들어서게 되었다. 태백이 탄광도시로 탈바꿈하게 된 계기였던 것이다.



 

▲ [좌]태백석탄박물관의 광부 조형물. 태백 지역은 석탄 덕분에 1960~70년대 ‘개도 입에 만 원짜리를 물고 다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우]금대봉의 양강 발원지 푯말. 한강과 낙동강의 발원지를 모두 품고 있다는 뜻이다.

 

 

  광복이 되고 이 나라가 산업사회로 본격 진입하면서 석탄 개발이 활성화되자 전라·경상·충청도 할 것 없이 돈을 좇는 수많은 사람들이 높고 험한 고개를 넘어왔다. 자개문을 스쳤고, 화방재와 싸리재를 넘었다. 그리하여 호랑이 무서워하던 화전민들만 산기슭 여기저기 흩어져 살던 이곳에 무려 12만 명이 넘는 인구가 흘러들어 왔고, 이들은 함백·태백·연화·백병산 등의 산자락을 파헤치면서 ‘불을 일으키는 검은 돌’을 캐내 이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몸을 따뜻하게 녹여주었다. 

 

그리하여 태백은 1960~70년대는 ‘지나는 개도 입에 만 원짜리를 물고 다녔다’는 말이 과장이 아닐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태백에 시가지가 형성되고 1981년 장성·황지읍이 삼척군에서 갈라져나와 태백시로 승격된 것은 오로지 탄광 덕분이었다. 따라서 태백의 사회경제사는 광산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이면엔 슬픈 현실이 도사리고 있었으니, 시내 중심부의 연화산 자락에 세워진 산업전사위령탑이 그것이다. 그곳엔 광산에서 일하다가 죽어간 수많은 광산노동자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 남한강의 발원지인 금대봉 검룡소. 신비롭고도 웅혼한 힘이 서려있다.

 

 

 


 수십 년의 호황기가 지난 뒤 1990년대 들어서자 정부의 석탄합리화정책으로 대부분의 탄광이 문을 닫게 되었다. 더불어 많은 광부들은 태백을 떠나갔다. 요즘 강파른 언덕배기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사택들은 거의 빈집이다. 지금 태백에서 그나마 이름을 유지하며 채탄작업을 하고 있는 탄광은 한보탄광·대덕탄광 등 한 손으로도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다.

어쨌든 지난 세기와 금세기의 태백을 이야기하는 데 결코 석탄을 빠뜨릴 수 없지만, 이 지역의 오랜 전설은 벌써 이를 예견하고 있었다고 한다. 바로 황지비결문에 전하는 피가도읍지(皮哥都邑地) 전설이 그것이다.

‘철마가 느릅령을 넘어오면 피가(皮哥)가 도읍할 시기이고, 동점 구문소가 있는 연화봉에 구멍이 셋 뚫리며 흑면장군(黑面將軍)이 수천 수만 명 나타나면 이곳은 피가도읍이 된다. 피가는 얼굴이 검고 온몸이 검은 털복숭이고, 눈이 하나다.’

 

▲ 태백산 천제단을 오르다보면 반드시 만나게 되어 있는 단종 비각.

 

 

 

 

  태백 사람들은 기차가 통리의 느릅령을 넘어 태백으로 들어왔으니 예언은 이루어졌다고 본다. 또 광부들이 검은 석탄을 캘 때 얼굴이 검으니 흑면장군이고, 온몸에 검은 석탄가루를 뒤집어 쓴 채 굴속에서 머리에 외줄기 랜턴 불빛을 비추고 작업하는 광부를 보면 ‘눈이 하나인 검은 털북숭이’인 전설의 피가와 너무 흡사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석탄산업이 사양길에 접어들면서 아쉽게도 외눈박이 검은 털복숭이 나라의 세력도 눈에 띄게 줄어들고 말았다. 예언은 이 이후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 피가도읍지란 혹시 우리나라 최고의 휴양관광도시로 등극하게 될 태백을 이야기하는 게 아닐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여하튼 태백은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의 험한 산줄기로 둘러싸여 있어 접근이 쉽지 않는데다 신비로운 자개문이 있고, 1970년대까지만 해도 낙동강을 거슬러온 은어떼가 여울을 튀어오르는 장관을 이루었다고 하니 이상향으로서 전혀 부족함이 없는 격을 갖추고 있는 셈이었다. 그야말로 무릉도원의 다름이 아니었을 것이다. 만약에 일제강점기 때 태백에서 석탄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어찌되었을까. 아마도 태백 지역은 아직도 삼척의 작은 산골 마을로 남은 채 21세기의 무릉도원으로 각광을 받고 있을 것이다. 물론 지금이 부족하다는 뜻은 아니지만 말이다.

 

 

 

태백, 어떤곳인가

 

 

 강원도 남부 내륙에 있는 태백시(太白市)는 북쪽과 동쪽으로 삼척시, 남쪽으로 경상북도 봉화군, 서쪽으로 영월군·정선군에 접한다. 남쪽은 태백산(太白山·1,567m)·연화봉(蓮花峰·1,053m), 동쪽은 삼방산(三芳山·1,175m)·백병산(白屛山·1,259m), 북쪽은 대덕산(大德山·1,307m), 서쪽은 함백산(咸白山·1,573m) 등 백두대간과 낙동정맥 연봉들로 둘러싸여 있는 고원성 산지로 전 지역이 높고 험준하다. 

 

하천은 시의 중북부에 있는 금대봉을 중심으로 북류하는 남한강의 상류인 골지천(骨只川)과 남류하는 낙동강의 상류인 황지천(黃池川)·철암천(鐵岩川)이 있고, 동해로 동류하는 오십천(五十川)과 가곡천(柯谷川)이 있다. 평야는 거의 없으나 비교적 완만한 고위평탄면은 고랭지 채소밭으로 이용된다. 내륙의 고원지역으로 고도가 높아 기온이 낮으며, 특히 겨울이 길고 봄·가을이 짧다. 연강수량은 1,000mm 미만으로 비교적 비가 적은 편이다. 

 

신라 때인 505년(지증왕 6) 실직주, 658년(태종무열왕 5) 북진이 설치됐다. 삼국 통일 이후 685년(신문왕 5)에 하서주에 속했고, 757년(경덕왕 16) 하서주가 명주로 바뀌면서 삼척군에 속했다. 조선시대에 장성면(長省面) 또는 장생면(長生面)이라 하다가 1738년(영조 14)에 상장성면(上長省面), 1842년(헌종 8) 상장면(上長面)이 됐다. 1961년 상장면이 장성읍으로 승격됐고, 1973년 황지읍(黃池)으로 승격됐다. 1981년 장성읍과 황지읍이 통합되어 태백시로 되면서 삼척군에서 독립했다. 현재 행정구역은 황지·황연·상장·장성·구문소·삼수·문곡소도·철암동의 8개 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태백의 주요 농산물은 감자·옥수수와 고랭지채소 등인데, 특히 무·배추·양배추의 생산량이 많아 수도권으로 출하한다. 또한, 주변 산지 사면에는 초지가 많아 목축에 적합한데, 한우·젖소·돼지·칠면조 사육이 성하고, 양봉도 활발하다. 

 

침엽수의 비중이 비교적 높으며, 임목축적량도 비교적 많은 편이다. 광산 주변의 벌목과 폐석(廢石)으로 인한 삼림의 파괴가 심각하다. 주요 임산물로는 목재와 산나물·버섯이 많이 생산된다. 목재는 과거에는 대부분 광산용 갱목으로 사용됐으나, 탄광이 폐광되면서 제재소의 수가 점차 감소하고 있다.  

 


태백시는 정선·도계탄전과 더불어 태백탄전지역의 중심지인 동시에 남한 최대의 탄전지대다. 이 일대에 넓게 분포하는 고생대 평안누층군(平安累層群)에는 질이 좋은 무연탄이 매장되어 있어 일찍부터 개발이 시작됐다. 1936년 삼척개발주식회사가 설립되면서 개발에 착수했으며, 6·25전쟁 후 대한석탄공사가 발족되면서 국영화했다. 주요 광물의 생산량은 석탄·고령토·납석·철 등이며, 이런 지하자원은 태백선과 영동선을 통해 전국으로 수송된다.

 

 

태백산 

 

태백시의 상징인 태백산(1,567m)은 봄이면 진달래와 산철쭉, 여름엔 울창한 수목과 계곡 사이를 흐르는 맑은 계류가 좋다. 또 가을 단풍도 좋고, 추운 겨울이 되면 눈 많은 지방답게 흰 눈으로 뒤덮여 사계절 내내 등산인들이 많이 찾는 산이다. 무엇보다 삼국시대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천제단(天祭壇·중요민속자료 제288호)이 있어 ‘민족의 영산’이라 일컫는 태백산은 해발 1,500m가 넘는 높이에 비해 산세도 그다지 험하지 않아 초등학교 상급생 정도면 산행하는 데 부담이 없다. 



태백산의 여러 코스 중 당골~반재~망경사~천제단 코스로 천제단에 오른 뒤 다시 당골로 되짚어 내려가는 회귀코스가 가장 일반적이다. 장군봉 부근의 주목 군락지를 다녀오려면 30분 정도 더 잡아야 한다. 총 4~5시간 소요. 태백산 입장료 어른 2,000원, 어린이 700원. 주차료 2,000원. 전화 033-553-5647.

 

 

태백산 천제단


태백산 천제단(天祭壇·중요민속자료 제228호)은 제작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는 동안 고을 수령과 백성들이 천제를 지냈던 곳이다. 삼국사기를 비롯한 옛 기록에 ‘신라에서는 태백산을 3산 5악 중 하나인 북악(北岳)이라 하고 제사를 받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천제단은 천왕단(天王檀)을 중심으로 북쪽에 장군단(將軍檀), 남쪽에는 그보다 작은 하단의 3기로 구성되어 있다. 흔히 천제단이라 불리는 천왕단은 자연석으로 쌓은 둘레 27.5m, 높이 2.4m, 좌우폭 7.36m, 앞뒤폭 8.26m의 타원형이다. 위쪽은 원형이고 아래쪽은 사각형인데, 이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사상 때문이다.

 

 

망경사


태백산(1,567m) 천제단 부근에 있는 망경사(望鏡寺)는 천제단으로 가는 사람들의 쉼터 역할도 하는 절집이다. 신라 때인 652년에 자장이 창건했는데, 자장은 인근 정암사에서 말년을 보내던 중 이곳에 문수보살 석상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암자를 지어 그 석상을 모셨다고 한다. 이후의 연혁은 전하지 않고, 다만 한국전쟁 때 거의 불 타 없어진 것을 복원하여 지금에 이른다. 그래서인지 천년고찰의 흔적을 짚을 만한 유물 유적 등은 없는 편이다. 산꼭대기에 있으면서도 산신각 대신 용왕각이 있는 게 특이하다. 물줄기가 동해와 통해 있어 용왕신이 머문다는 용정(龍井) 때문이다. 이 샘물은 신라시대부터 매년 시월 천제단에서 제사를 올릴 때 천수로 사용하고 있는데, 물맛이 좋아 ‘한국의 명수 100선’에 선정되기도 했다.

 

단종비각


태백산 망경사에서 천제단쪽으로 100m 정도 가다 보면 만나게 되는 단종 비각(端宗碑閣) 안에는 영월로 유배와 1457년 죽임을 당한 단종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 있다. 비석에는 ‘조선국 태백산 단종대왕지비(朝鮮國 太白山 端宗大王之碑)’라고 쓰여 있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조선 제6대 임금인 단종이 영월에 유배되자 고을 추익한(전 한성부윤)이 태백산의 머루 다래를 따서 자주 진상했는데, 어느 날 꿈에 산과를 진상차 영월로 가는 도중 곤룡포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태백산으로 오는 단종을 만나게 됐다. 추익한이 이상히 여겨 영월땅에 도착해 보니 단종이 그 날 세상을 떠난 것이다. 단종은 세상을 떠난 뒤 태백산 산신령이 됐다고 전해진다. 그후 주민들은 단종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산신령으로 모시고 500여 년 동안 매년 음력 9월3일 제를 지내고 있다.

 

태백산 석장승
태백산 입구인 소도동에 있는 태백산 석장승(도민속자료 제4호)은 태백산신을 지키는 한 쌍의 수호신상이다. 길을 사이에 두고 왼쪽은 천하대장군이고, 오른쪽은 지하여장군인데, 천하대장군은 키 170cm, 가슴폭 45cm이고, 지하여장군은 키 158cm, 가슴폭 46cm의 크기로서 재질은 화강암이다. 두 장승의 제작시기는 알 수 없으나 처음 이 돌장승은 당골 입구 장승둔지(미루단지)에 약 10m의 간격을 두고 마주 서 있었는데, 태백산 망경사 경내로 옮겨졌다가 1987년 현 위치에 복원했다.

 

 

검룡소


백두대간 금대봉 자락의 검룡소(儉龍沼)는 남한강의 발원지다. 고목나무샘, 물구녕석간수, 제당굼샘에서 각각 지하로 1~2km쯤 흘러내려와 이곳 검룡소에서 솟구치는데, 용이 솟아오르듯 용출한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검룡소 아래로는 오랜 세월 흘러내린 물줄기 때문에 깊이 1~1.5m, 넓이 1~2m의 암반이 푹 파였는데, 곧바로 20m쯤의 와폭이 신비한 용틀임을 한다. 수온은 사계절 항상 9℃로 일정하고, 하루 2천~3천 톤의 물이 솟구쳐 514km를 흐르는 한강의 원천이 된다. 매년 8월이면 이곳 검룡소에서 한강대제를 지내는데, 관광객을 대상으로 검룡수 먹기대회도 갖는다.

 

 

황지


태백의 번화가인 황지동에 있는 황지(黃池)는 옛 기록인 동국여지승람, 척주지, 대동지지 등에 낙동강의 근원지라고 기록되어 있다. 백두대간 너덜샘(은대샘)에서 발원한 낙동강 물줄기는 황지에서 모인 뒤 낙동강 1,300리를 흐른다. 옛 이름은 ‘하늘 못’이란 뜻의 천황(天潢)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황지(潢池)라 부르다, 나중에 삼수변이 떨어져나가면서 지금의 황지(黃池)가 됐다.

황지에는 시주를 청하는 스님에게 쇠똥을 퍼주었다가 집터가 꺼지면서 큰 연못으로 변하는 화를 당한 노랭이 황부자 전설이 전해져온다. 마당늪, 방깐(방앗간)늪, 통시(변소)늪의 세 연못과 굴뚝소가 전설의 흔적이다. 입장료와 주차료 등은 없다. 연못 둘레가 100m인 상지·중지·하지로 구분되며, 1일 5천 톤의 물이 용출하고 있다.

 

 

삼수령


태백에서 북쪽으로 6km쯤 떨어진 곳에 있는 피재는 남한강·낙동강·오십천 물길이 갈리는 분수령으로 삼수령(三水嶺)이라고도 한다. 이 고개에서 동쪽으로 떨어진 빗방울은 오십천으로 흘러 동해로 가고, 북서쪽으로 떨어지면 남한강으로 흘러 서해로 들고, 남쪽으로 떨어지면 낙동강으로 흘러 남해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정상에는 조형물과 정자각이 있다.
고갯마루에서 바로 올라갈 수 있는 매봉산 고랭지채소밭의 이색적인 풍경도 볼 만하다. 피재는 삼척 사람들이 황지 지역을 이상향이라 하여 난리를 피해 이곳으로 넘어왔기에 피해오는 고개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태백석탄박물관


태백산 입구의 당골광장에 위치한 태백석탄박물관은 우리나라 산업화에 큰 역할을 했던 석탄에 관련된 온갖 자료를 모아 전시한 곳이다. 실내 전시실 7개와 지하전시실 1개, 옥외·야외전시실 각 2개 등을 갖춘 연면적 3,669.3㎡에 이르는 규모를 자랑한다. 관람객의 흥미를 위한 영상장비와 특수효과 등이 자랑거리. 탄광지지목이 부러지고 바닥이 흔들리며 붕괴되는 장치는 현실감을 더해준다.
산업역군의 주역이던 광부들이 막장에서 맛봐야만 했던 삶의 애환도 엿볼 수 있다. 제대로 둘러보려면 2시간쯤 걸린다. 태백산 입장권(2,000원)으로 관람할 수 있다.
전화 033-550-2743

www.coalmuseum.or.kr

 

 

태백체험공원


태백시 소도동의 태백체험공원은 함태탄광 폐광지를 되살려 조성한 체험 관광지다. 함태탄광은 890여 명의 종업원이 연간 약 378만 톤을 생산하던 비교적 규모가 큰 탄광이었으나 1993년 폐광됐다. 태백시에서는 2006년 태백지역 탄광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개조해 개장했다.
열악한 작업환경 속에서도 석탄생산에 종사한 광부들의 일상과 그 속에서 피어났던 그들의 꿈과 희망을 볼 수 있는 현장학습관, 배급소·빨래터·상점 등 광부들의 집단거주지였던 사택을 재현한 탄광사택촌 등을 재현했다. 또 갱도의 벽과 레일, 침목 등은 사용하던 시설 그대로 보존했고, 인차와 광차를 재현한 체험갱도 등의 시설로 구성되어 있어 생생한 탄광체험을 할 수 있다.
이용시간 09:00~18:00. 관람종료 1시간 전까지 입장 가능. 연중무휴. 관람 소요시간 40분. 요금은 어른 1,000원, 청소년 700원, 어린이 500원. 현장학습관 033-550-2718, 554-0266, 탄광사택촌 033-550-2783.

 

 

태백고원자생식물원
 
황연동의 태백고원자생식물원(원장 김남표)은 해발 850m 높이의 분지 397,000m2에 사라져 가는 우리 꽃 300여 종이 자라고 있는 고원 식물원이다. 식물원이 자리한 구와우(九臥牛) 마을은 소 아홉 마리가 배불리 먹고 누워 있는 형상이라는 길지(吉地)라고 한다. 그 널따란 식물원 가운데 무려 165,000m2이 해바라기 꽃밭이다. 이외에도 배초향, 홑왕원추리, 꽃창포, 참취 등의 들꽃이 반긴다. 해바라기 꽃밭 관람(탐방로 3.5km)을 비롯해 야생화 꽃밭을 둘러보는 데 약 1시간30분 정도 걸린다.

 

 

태백 해바라기축제
올해로 세 번째를 맞이하는 해바라기 축제는 ‘석탄과 해바라기’라는 주제로 8월25일(토)부터 9월30일(일)까지 열린다. 석탄사진전시회, 그림전, 조각작품전, 도예작품전, 관객과 함께하는 조형물 작업전, 꽃 양귀비 전시, 야생화 분경 전시 등의 행사가 준비되어 있다. 이와 함께 해바라기 기름짜기, 밤하늘 별보기, 소달구지 타기 등 가족단위 관광객들에게 안성맞춤인 체험행사도 풍성하다.  033-553-9707 김남표 대표 010-9542-0005.


대덕산-금대봉 자연생태계 보전지역


태백시 삼수동 금대봉(1,418.1m)과 대덕산(1,307.1m) 일대의 4.2㎢는 환경부가 강원도 생태계 보전지역으로 지정한 곳이다. 1993년 전문학자들이 조사할 때 한국특산식물 15종, 희귀식물 16종과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조류인 참매·새매·검독수리 등이 발견됐다. 또 두문동 계곡에서는 도마뱀, 한소리 계곡에서는 도롱뇽, 창죽계곡에서 꼬리치레도롱뇽의 집단서식지가 발견됐다. 이외에도 곤충류 중 국내 미기록종 13종이 발견됐다.
검룡소 자연생태계보존지역 감시초소~검룡소 갈림목~분주령골~분주령~대덕산 정상~초원 능선~분주령골~감시초소 회귀산행은 3시간30분 소요. 대덕산 야생화 탐방은 태백의 숲해설가 김부래씨(011-9919-3267)에게 문의.

 

 

용연동굴


화전동에 있는 용연동굴(도지방기념물 제39호)은 1억천만 년 전에서 3억 년 사이에 형성된 석회동굴로 주굴의 길이 약 600m, 총 길이 약 1,000m에 이른다. 동굴은 해발 980m에 위치해 현재까지 남한에서 알려진 동굴 중 최고위 지대에 있다. 동굴 깊은 곳에는 임진왜란 때 피난했다는 내력의 붓글씨가 있다고 한다. 또 의병 본부 역할을 했으며 국가 변란시 피난처였다고 한다.

용연동굴은 규모가 크고 구조가 복잡한 입체적인 노년기 동굴이다. 곳곳에 종유석·석회화폭(石灰華瀑)이 발달해 있으며, 습도와 유기질이 풍부하여 특징적인 동굴 동물이 많이 발견된다. 동굴 속 대형 광장엔 음악에 맞춰 춤추는 리듬분수대 1개, 일반분수대 2개, 화산모형분수대 1개가 설치되어 있다. 노약자나 어린이를 위해 주차장에서 동굴 입구까지 1.1km 구간에 무궤도열차인 용연열차를 운행하고 있다. 이용시간은 09:00∼18:00.  전화 033-553-8584, 550-2727.

 

월둔동굴
원동에 있는 월둔동굴(시도기념물 제58호)은 지금으로부터 약 5억 년 전에 만들어진 석회동굴이다. 세로로 땅속 깊이 뻗은 원통 모양을 하고 있으며, 크고 작은 7개의 빈 웅덩이와 넓은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굴 안에는 고드름처럼 생긴 종유석과 동굴 바닥에서 돌출되어 올라온 석순들이 열을 지어 만든 석순책(石筍柵)이 펼쳐져 있으며, 동굴벽에는 산호 모양을 한 생성물들과 폭포 모양의 종유석이 있다. 맨 마지막 공간에는 깊이 4m 정도의 물웅덩이가 있고, 가운데에는 높이 8m의 대형 석순이 있다.

 

 

구문소
 
동점동의 구문소(求門沼·천연기념물 제417호)는 석회동굴이 땅위에 드러난 구멍으로 낙동강 상류인 황지천 물길이 흘러지나간다. 구문(求問)은 ‘구멍·굴’이란 뜻이니 구문소란 곧 ‘굴이 있는 늪’을 뜻한다. 구문소는 세종실록지리지에 천천(穿川·구멍 뚫린 하천)이라는 기록으로 남아 있다. 구문소 바로 옆 도로에 있는 석굴은 일제 강점기 때 인공으로 뚫은 것이다. 구문소 절벽 위에 자개루가 있다.

구문소 부근의 석회암에는 건열·물결자국·소금흔적·새눈구조 등의 퇴적구조와 삼엽충·완족류·두족류 등의 다양한 생물화석이 나오고 있어 하부 고생대의 퇴적환경과 생물상을 동시에 볼 수 있다. 구문소의 고환경과 침식지형은 퇴적구조와 침식지형 등 다양한 지형지질 특성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부 고생대의 고환경 연구에 중요해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화석수목전시관은 인근에서 출토되는 화석류 18종 180개와 서식하는 수목류 16종 76개소, 생활용품 등을 전시하여 산 학습의 장이 되고 있다.

 

통리협곡과 미인폭포


오십천 상류 깊숙한 곳에 숨어있는 미인(美人)폭포는 행정구역으로는 삼척시 도계읍 심포리에 속하지만 태백 사람들에게 더 익숙하다. 높이 50m의 희디흰 물줄기가 붉은 협곡 사이로 쏟아지는 모습은 화장 곱게 한 미인을 연상케 한다. 폭포 주변의 마을에 절세미인이 살았는데, 남편이 병들어 죽자 폭포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미인폭포 아래는 길이 10km, 높이 270m에 이르는 깊은 골이 패여 있는 통리협곡이다. 전문가들은 통리협곡의 생성과정이 미국의 그랜드캐년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폭포로 가는 길목에는 혜성사(惠聲寺)라는 작은 사찰이 있다.

 

 

장명사 목불좌상


장명사 목불좌상(도유형문화재 제144호)은 금강산의 한 사찰에서 모시다가 해방 이후 장성동의 장명사 대웅전에 모시게 된 석가모니불상이다. 조선 후기 목조불좌상 가운데 그다지 크지 않지만 단정한 형태와 상호(相好)가 원만하게 표현된 수작이다. 보존 상태도 비교적 좋은 편으로서 양감 넘친 조각이 돋보이며, 의습은 전형적인 조선 17세기경에 제작된 불상과 양식상 유사한 점을 볼 수 있다. 조각적으로도 매우 뛰어난 기량을 지닌 작품으로,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본적사지 3층석탑


황지동 절골의 본적사지 3층석탑(도문화재자료 제126호)은 본적사지에 있는 석탑이다. 본적사(本寂寺)의 창건연대는 기록으로 전해오지 않으나 산사에서 발견된 와편으로 볼 때 신라 말기에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이 석탑은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시대 초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부재는 완전하지는 않으나 원형복원이 가능하고, 태백 지역의 불교문화 양상을 살펴보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다.

 

 

추전역


화전동에 있는 추전역(855m)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열차역이다. 1973년 태백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문을 열었는데, 1998년 철도청에 의해 추전역을 지나는 환상선 눈꽃순환열차 상품이 나오면서 관광명소가 됐다. 역사에는 태백시 관광자원과 태백선의 역사를 소개하는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추전역은 한여름에도 밤이면 난로를 피워야 할 정도고, 겨울에는 적설량도 많다. 북서쪽으로 500m 떨어진 지점에는 길이가 4,505m에 달하는 정암터널이 있다. 1973년에 개통된 이 터널은 공사가 어렵기로 손꼽힌 태백선 중에서도 가장 힘든 공사로 꼽힌다.
전화 033-553-8550

 

 

철암역 두선탄시설


철암동 철암역 두선탄시설은 탄광에서 채굴된 원탄을 수요자에게 맞게 선별하고 가공·처리하는 선탄시설로서 1960~70년대 국가 에너지 산업에 중추적인 역할을 해온 우리나라 근대산업사의 상징적인 시설이다. 1935년 일제 강점기에 최초로 시작한 남한 최대의 무연탄광인 삼척탄광이 그 전신으로, 현재는 대한석탄공사 산하 장성광업소에서 설치하여 현재까지 가동 중이다. 이곳에는 원탄저장과 운반(벨트 콘베어), 경석선별과 파쇄운반, 1, 2. 3차 무연탄 선탄, 이물질 분리(침전), 각종 기계공급과 수선창 등 5분야에 걸쳐 20개 주요 시설물이 있다.

 

 

산업전사 위령탑
황지동 바람부리 산중턱에 위치한 산업전사위령탑은 태백지역 광산에서 석탄 생산을 하던 중 사고로 순직한 광산 근로자들의 영령을 봉안하여 위로하는 곳이다. 탑의 광차 모양 기단 전면에는 갱내에서 석탄을 캐는 광부들의 모습이 동판에 조각되어 있다. 탑신 상부의 표장은 갱내 작업용 램프를 나타낸다. 위패 안치소에는 3,000여 명에 이르는 순직자들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최초 석탄발견지 탑
금천동 먹돌배기 근처에 있는 최초 석탄발견지 탑은 1926년 상장면(태백시의 옛 행정단위)의 소사로 일하던 장해룡이라는 사람이 이곳 먹돌배기 근처에서 노두에 나와있는 석탄덩어리를 주워다 면장 책상 위에 놓아둔 것이 일본인 기사의 눈에 띄어 태백이 일약 탄광도시로 탈바꿈하게 된 계기가 됐다. 화강암으로 만든 탑은 수갱을 의미하는 탑신과 동발광차, 광원 등을 상징하는 4부분으로 이루어졌다.

 

 

태백고원 자연휴양림


철암동 낙동정맥의 면산과 토산령 사이의 금광골에 자리 잡은 태백고원 자연휴양림은 태백의 대표적인 휴양시설이다. 해발 700~800m 중심부에 버들골·탑상골·늦은목골 등의 계곡이 뻗어 있어 수량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계류는 맑고 깨끗하다. 산간분지로 고랭지 기후를 나타내고 있어 한여름에도 열대야 현상이 없어 지내기 좋은 곳이다. 실제로 대도시는 열대야로 찌는 한여름에도 아침 저녁으로 난방을 해야 할 정도로 수은주가 떨어진다. 산림문화휴양관, 숲속의 집, 매점, 족구장, 배드민턴장, 물놀이장 등의 시설이 있다. 태백시에서 직영하고 있다.
시설 이용료는 성수기(7월1일~8월31일)와 비수기(9월1일~6월30일) 주말·공휴일, 비수기 평일로 구분하고 있다. 전화 033-550-2849, 033-582-7238

 

 

길에서 만난 별미

태백 한우
태백은 산악지역의 향토색이 드러나는 별미는 없지만, 산악지역답지 않게 한우 고기를 차리는 식당이 많다. 이는 태백이 1980년대 중반까지 탄광도시로서 명성을 날리며 지역 경제가 잘 돌아갈 때의 흔적인데, 1990년대 이후 태백이 관광도시로 변화를 꾀하면서 한우는 어느덧 태백을 대표하는 별미로 자리 잡았다.

태백 한우는 육질이 좋기로 소문이 나있다. 소들이 공기 좋고 물 맑은 해발 700m가 넘는 청정 고지대에서 자라기 때문이다. 또 태백이란 곳이 한여름에도 밤에는 난방을 해야 할 정도로 날씨가 서늘해 소들이 모기·파리 등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덜 받기 때문이라는 게 태백 한우업자들의 자랑이다. 하지만 태백 한우의 자급률이 25%밖에 안 되기 때문에 서울 등 대도시에서는 쉽게 맛볼 수 없다.
이렇듯 태백 한우는 맛이 뛰어나면서도 가격도 저렴하고 양도 많은 편이다. 탄광 경기가 좋던 시절에 손님에게 내놓는 한우의 육질이 떨어지면 곧 망해나갔기 때문에 요즘 식당들도 좋은 고기를 내놓기 위해 애쓴다. 태백 시내엔 태백 한우를 전문으로 상을 차리는 식당이 많다. 그중 정원(033-553-6444)과 태성실비(033-552-5287)는 잘 알려진 한우 생고기 전문점이다. 동영식당(033-581-4570)과 한우마을(033-552-5349)도 괜찮다. 1인분 21,000원.

 

 

일정별 길라잡이


강원도 태백은 면적이 그다지 너르진 않지만 산악지대라 지역별로 권역이 뚜렷한 편이다. 남서부의 태백산권, 중·북부의 황지권, 남동부의 구문소권으로 나눠 보았다.
●태백산권  태백시 남서부에 솟은 태백산은 석탄과 함께 태백이란 도시를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산이다. 천제단, 단종비각, 망경사 등을 보려면 산행을 해야만 한다. 주 등산로 입구인 당골엔 태백석탄박물관, 단군성전, 석장승 등이 있다. 태백체험공원도 이 권역에 속한다.
●황지권  낙동강 발원지인 태백 시내의 황지가 중심이 된다. 또 남한강의 발원지인 검룡소, 용연동굴, 추전역 등이 모두 이 권역에 속한다. 매년 늦여름에 해바라기 축제가 펼쳐지는 구와우 마을의 자생식물원도 여기에 속한다.
●구문소권  태백의 남동부 지역으로서 구문소가 중심이다. 주변으로 철암역 두선탄장, 철암 단풍군락지, 태백고원 자연휴양림 등이 있다.


일정짜기


●당일  태백은 너르진 않지만 산악지대라 걸어야 하는 곳이 많아 둘러보는 데에는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또 수도권에서 접근하는 데 4시간 정도 걸리므로 당일 일정은 조금 빠듯하다. 태백에 머무는 시간이 5시간 내외라 한다면 4시간~4시간30분 정도 걸리는 태백산 산행은 가능하다. 당일여행 추천일정은 다음과 같다. 검룡소~삼수령~매봉산 고랭지채소 재배단지~풍력발전단지~황지~태백석탄박물관.
●1박2일  첫날 점심 무렵에 도착한다면 나름대로 적당히 둘러볼 수 있다. 숙박은 태백산 입구의 민박집이나 철암동의 태백산 자연휴양림에서 하는 게 좋다. 추천 일정은 다음과 같다. 검룡소~삼수령~매봉산 고랭지재배단지·풍력발전단지~황지~태백산 민박촌(숙박)~태백산 당골 산책~태백석탄박물관~태백체험공원~구문소~철암역. 8월25일부터 자생식물원에서 펼쳐지는 해바라기 축제에 참가할 수도 있다.
●2박3일  1박2일의 일정에 태백산·대덕산·함백산 가운데 하나를 골라 산행을 곁들일 수 있다. 이외에 석탄 최초발견지 탑, 버들골 호식총 등을 여유롭게 답사할 수 있다. 

 

교통
●접근 드라이브코스
* 수도권  수도권 중앙고속도로→제천 나들목→38번 국도→제천→영월→석항리 삼거리(직
진)→사북→고한→태백 <서울에서 4시간 소요>
* 영남권  부산→중앙고속도로→경부고속도로→금호 분기점→중앙고속도로→영주 나들목
→36번 국도→봉화→현동→31번 국도→태백 <부산에서 4시간30분, 대구에서 3시간30분  소요
●고속·시외버스
* 서울→태백  동서울종합터미널(ARS 02-446-8000)에서 매일 26회(06:10~18:59) 운행. 
직통 4시간, 직행 5시간30분 소요. 
* 인천→태백  종합터미널(032-430-7114)에서 매일 3회(07:30, 10:00, 16:30) 운행. 4시간
  25분 소요.
* 성남→태백  종합터미널(ARS 031-781-8668)에서 매일 3회(06:30~16:10) 운행. 5시간10
분 소요.
* 대전→태백  동부시외버스터미널(ARS 042-624-4451)에서 매일 3회(07:10, 10:38, 
13:43) 운행. 6시간 소요.
* 대구→태백  북부시외버스정류장(053-357-1851)에서 매일 7회(07:00~19:25) 운행. 5시
간 소요원.
* 안동→태백  시외버스터미널(ARS 857-8298)에서 매일 3회(07:20~20:50) 운행, 3시간 
 소요.
*태백 버스터미널 033-552-3100 
●철도
청량리역→태백역  강릉행 무궁화호 열차가 매일 6회(08:00, 10:00, 12:00, 14:00, 17:00, 22:40) 출발. 4시간10분 소요.
*전화 1544-7788 태백역 033-553-7788
●현지 교통
태백→당골(태백산 입구)  매일 23회(07:38~22:25) 운행, 20분 소요.
태백→검룡소  하루 2회 조탄행(06:10, 19:50), 하루 3회 하장·임계행(08:00~14:45) 이용해 창죽동에서 하차. 20~30분 소요. 검룡소까지 도보로 1시간 소요.
태백→구문소  하루 65회(06:10~22:50) 운행하는 통리ㆍ장성행 이용해 구문소 앞에서 하차. 30분 소요.


숙식(지역번호 033)


●태백산권  태백산 입구에 태백산민박촌(033-553-7460, minbak.taebaek.go.kr)이 있다. 콘도식으로 개인형 원룸 2인실 35,000원, 가족형(15평형 복층·5명 기준) 55,000원, 18평형(5인 기준) 60,000원, 32평형(12명 기준) 95,000원. 식기를 비롯한 조리기구 지참 필수. 근처에 여러 민박집과 스카이호텔(552-9977), 우진모텔(553-6448) 등이 있다.
산채비빔밥, 황기백숙 등을 차리는 식당이 많다. 당골 광장과 주차장 부근의 태백산공원휴게소(552-4940), 식당가 부근의 하나로실비식당민박(554-1567), 산골식당민박(554-0888)도 추천할 만하다. 당골 집단시설지구 내의 고려뚝배기(552-2440), 공원산채식당(552-1215)은 각종 찌개류(5,000원), 산채정식(7,000원), 산채비빔밥(6,000원), 토종닭백숙(30,000원) 등을 차린다.


●황지권  호텔 메르디앙(553-1266), 이화모텔(552-2116) 등 숙박시설이 많다. 태백역 부근 청진동해장국(033-553-1433)은 아침 식사 가능. 선지해장국·쇠고기국밥 각 5000원. 정원(553-6444), 태성실비(552-5287), 동영식당(581-4570) 등은 한우 생고기 전문점. 너와집(553-4669)은 너와지붕의 전통 가옥에서 전통음식을 맛볼 수 있는 식당. 너와정식 15,000원 이상. 쌈밥정식 8,000원, 갈비찜정식 20,000원. 모두 2인분 이상 주문 가능.


●구문소권  구문소 근처에 대추나무식당(581-6689), 연화식당(581-8897) 등이 있고, 장성시장의 태백장성실비(581-6692), 서울닭갈비(581-8999), 초록마을(581-7136)과 태백모텔(581-6181), 현대여관(581-7455) 등에서 숙식 가능. 철암동의 태백고원 자연휴양림(582-7440).

 

 

*관광문화과 홍보담당 550-2083, 2085
 

 

<출처> 2007. 9 / 월간산 455호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