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양양
백두대간과 동해가 빚어낸 해오름의 고을
“한계령을 넘을까요? 구룡령을 지날까요?”
르포라이터 민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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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제에서 양양으로 넘어가는 관문인 한계령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갯길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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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는 그리 너르지 않지만 삼면이 바다인 축복 받은 땅덩어리다. 덕분에 우리는 바다에 익숙하다. 서해와 남해에겐 조금 미안한 말이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은 ‘바다’라고 하면 반사적으로 동해를 떠올린다. 눈길 닿는 데까지 끝없이 뻗어나간 아련한 수평선, 깊이가 가늠되지 않는 검푸른 바다, 쉬지 않고 달려와 포말로 새하얗게 부서지는 거센 파도, 그리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장엄한 일출…. 게다가 동해는 서해나 남해와 달리 백두대간이란 높다란 산줄기를 넘어서야 다다를 수 있다는 극적인 긴장감도 있다.
당연히 양양으로 가는 길엔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대관령을 지나 강릉을 경유하거나, 44번 국도를 타고 한계령을 넘거나, 56번 국도로 구룡령을 넘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다. 국도로 연결되는 한계령과 구룡령은 인제와 홍천에서 각각 양양으로 직접 들어서는 2대 관문이다. 둘 중 어느 고개로 넘어도 좋으리라.
짙은 녹음 드리운 한계령(寒溪嶺)-.
백두대간을 넘는 수많은 고개 가운데 역사성에선 하늘재와 새재를 못 따르고, 통행량으론 추풍령과 대관령을 따라잡을 수 없지만, 미모만큼은 으뜸인 고개다. 조물주가 온갖 기묘한 바위들로 빚어낸 한계령의 미학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고갯길을 굽이돌 때마다 펼쳐지는 절경에 누가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러나 한계령은 미모는 빼어나되 성깔 있는 여인을 닮아 제법 험하다. 그래도 고갯길은 제법 오래 전부터 뚫려 있었던 듯하다. 한계령을 통해 한양을 넘나들던 조선시대 전기엔 양양쪽에 오색역(五色驛)이 있었고, 당시엔 고개 이름도 오색령(五色嶺)이었다. 그래서인지 양양 주민들은 한계령을 아직도 오색령이라 부르길 고집한다.
오색령은 조선 중기인 1530년(중종 25) 새로 증보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지금은 없어졌다’는 간략한 기록으로만 남았다. 그래도 1751년(영조 27)에 이중환이 저술한 택리지엔 오색령이란 지명이 여전히 등장한다. 조선 후기인 1861년(철종 12)에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를 보면 오색령 넘는 길은 선으로 그려져 있으나, 10리마다 하는 거리 표시인 방표(傍標)가 보이지 않는다. 이는 거리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충분치 않거나 주민들만 이용하는 ‘작은 길’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한계령은 이미 조선 중기 이전에 한양 가는 길의 기능을 잃고, 단지 인제군 북면 주민들만 양양에서 소금이나 해산물 등을 구해 넘나들 때 이용했을 것으로 짐작해본다.
설악산(1,708m)은 남한 최고의 골산(骨山)이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이 부근을 일컬어 ‘산과 바다 사이에 기이하고 훌륭한 경치가 많다’고 찬탄했다. 지명을 살펴보면 산경표에는 설악산을 ‘雪岳’이라 적고, ‘일명 한계산(寒溪山)이라 한다’고 덧붙이고 있다. 대동여지도나 택리지 등을 들춰보면 현재의 외설악을 설악산이라 하고, 내설악을 한계산으로 구분해서 표기하고 있다. 즉 한계산은 설악산의 다른 이름이 아니라 내설악을 일컫던 명칭인 것이다. 지금의 한계령이라는 명칭은 바로 한계산에서 유래했다.▲ 하조대 무인 등대에서 바라본 바다. 오른쪽으로 하조대가 보인다.
한계령 고갯길은 늑장 부릴수록 좋다.
길손도 그랬다. 흘림골로 들어가선 여심폭포도 슬쩍 훔쳐보았고, 등선대에선 만물상을 감상하며 신선의 기분이 되었다가, 주전골에선 일확천금을 위해 몰래 숨어들어 엽전 만들던 도적놈처럼 긴장감을 놓지 못했다. 또 하늘나라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하였다는 선녀탕의 투명한 물빛을 보곤 두근거리는 심장이 부끄러워 괜히 오색약수를 벌컥벌컥 마시기도 했다. 바로 여기서만 누릴 수 있는 행복이요,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하늘나라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을 즐겼다는 주전골의 선녀탕.
날카로운 암봉들 빼곡히 들어찬 설악의 속살에서 오색약수(五色藥水)를 마신다. 톡 쏘는 맛이 강하면서 철분 맛도 진한 오색약수는 일찍이 위장병이나 신경쇠약은 물론이요, 피부병이나 신경통 같은 데에 좋다고 소문이 났다.
오색약수터엔 모두 세 개의 약수공(藥水孔)이 있다.
아래쪽 물가에 두 개가 가까이 붙어 있고, 거기서 상류로 10m 정도 떨어진 지점에 나머지 하나가 있다. 어떤 이들은 아래쪽은 남성들이 마시는 양(陽)약수요, 위쪽은 여성들이 마시는 음(陰)약수라 구분하기도 한다. 예전엔 양약수의 물맛이 더 강했으나 요즘엔 음약수 물맛이 더 진해졌다는 말은 변한 세태를 넌지시 암시하는 듯하다.
오색약수는 조선시대인 1500년 무렵에 오색석사(五色石寺)의 승려가 처음 발견한 이후 많은 사람들의 목젖을 적셔주었다. 원래 약수란 민감한 생물과 같아 명성이 높아져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오염되기 쉽다. 그러나 오색약수는 청정한 자연의 상징인 설악의 지하암반에서 갈라진 바위틈을 따라 솟아오르기 때문에 수객(水客)이 많아도 오염될 위험성이 거의 없었다.
안타까운 일은 오색약수의 용출량이 눈에 띄게 줄었다는 사실이다. 길손이 처음 오색약수를 마셨던 1980년대 초반만 해도 수량은 아주 넉넉했다. 70년대 중반의 조사 기록에 따르면 당시 3개의 약수구멍에서 하루에 나오는 용출량이 무려 4,852ℓ로 거의 5,000ℓ나 되었다.
이 정도면 오색의 식당 주인들이 약수를 길어다 푸르스름한 밥을 짓거나 졸깃졸깃한 닭고기 맛이 일품인 약수백숙을 삶아 관광객들에게 제공하기에 충분한 양이었다. 일반인들도 오래 기다리지 않고도 한 통은 거뜬히 받을 수 있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삼척동자도 오색약수를 모르면 간첩이라 할 정도로 오색약수는 탄산수의 대표로 인정을 받았다. 오색약수의 전성기였다.
1990년대 중반에 위기가 찾아왔다.
이전엔 20ℓ 들이 물통에 약수를 받는 데 20~30분이면 충분했으나 그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결국 최근엔 약수 길어다 밥이나 백숙을 하기는커녕, 약수 한 모금을 마시기 위해선 30분 이상을 서서 기다려야하는 지경이 되었다. 그럼에도 “적게 나오니 약수지, 많으면 그게 어디 약수야!” 하면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걸 보면 오색약수의 명성이 여전함을 알 수 있다.▲ 슬픈 사랑에 얽힌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하조대 해당화.
오색 주민들은 용출량의 급감 원인을 1994년 오색온천지구에 새로 들어선 그린야드호텔측에서 개발한 탄산온천 탓이라 보고 있다. 오색온천은 전통적으로 알칼리온천인데, 나중에 입주한 호텔측에서 온천을 개발할 때 탄산약수가 지나는 수맥에 온천공을 뚫었기 때문이란 것이다. 이 일로 탄산온천을 개발한 호텔은 ‘대박’을 맞았지만, 주민들은 ‘쪽박’을 찰 수도 있는 상황. 이에 ‘수맥을 원상복구하라’는 주민들과 ‘책임이 없다’는 호텔측이 서로 법정 공방까지 벌였으나 얼마 전 대법원은 호텔측 손을 들어주는 판결을 내리고 말았다. 약수 용출량이 줄어든 책임이 호텔측에 있다는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오색약수의 대안으로 등장한 게 바로 주전골에 있는 제2오색약수다. ‘원조’ 약수라 할 수 있는 제1오색약수터에서 계류를 따라 상류로 1km 정도 거슬러 오르면 제2오색약수의 물맛을 볼 수 있다. 깊고 험한 주전골은 기묘한 암봉과 폭포가 연이어 나타나는 별천지다. 계류 또한 맑고 깨끗해 계곡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행복감에 젖어들게 된다. 그래서 꼭 약수 때문만이 아니라도 기왕에 오색에 들렀다면 제2오색약수까지 그냥 걷는 일만으로도 참 행복하다. 물맛은 물론 오색약수보다 약하지만, 설악의 속살을 거닐며 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의 오감(五感)으로 즐거움을 누릴 수 있으니, 이게 바로 오색약수가 지니고 있는 다섯 가지 덕이 아니겠는가.
도중에 만나는 성국사는 옛날 오색석사터에 새로 지은 절집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 절집의 후원에 다섯 가지 색의 꽃이 피는 나무가 있어 오색사라 하였다고 한다. 현실적으로 한 나무에서 다섯 가지 색깔의 꽃을 피우는 나무는 없다. 따라서 이는 불교에서 청·황·적·백·흑색을 5정색(正色)으로 삼고 있는 데서 절 이름이 유래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경내엔 통일신라시대에 쌓은 두 개의 탑이 있었으나 동탑은 허물어져 파편들만 남아있고, 오색리 삼층석탑이라 불리는 서탑은 1968년 복원되어 보물 제497호로 지정되었다.
양양의 관문 역할을 하는 오색을 벗어나면 비로소 양양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지명은 한자로는 양양(襄陽)이라 쓰고, 이를 ‘해가 뜨는 고을’ 정도로 해석한다. 발음은 약간 다르다. 토박이 노인들은 ‘야양’이라고 하는데, 앞 글자에서 이응 받침을 탈락시킨 이 발음은 제법 정겹게 들린다. 물론 토박이라 해도 젊은 사람들은 입에 잔뜩 힘을 주고 강하게 양양이라고 발음하기 때문에 이젠 점점 ‘야양’이란 말을 듣기가 쉽지 않은 게 아쉽지만-.
양양에서 가장 큰 젖줄은 남대천(南大川)이다.
대동여지도에 남강(南江)이라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제법 ‘강’으로까지 대우를 받았던 남대천은 동해로 흐르는 길고 짧은 물줄기 중에 그나마 생태적으로 잘 가꿔진 편이라 바다에서 찾아오는 물고기가 많다. 이른 봄의 황어, 초여름의 은어, 늦가을의 연어가 계절마다 남대천을 들르는 대표적인 손님이다.
때는 바야흐로 가던 길 멈추고 놀림낚시로 큼직한 은어 몇 마리 잡아 그 자리에서 회를 떠서 소주 한 잔 곁들이고 싶은 초여름. 그러나 계절을 잠시 가을로 돌려보자.
오색의 단풍이 온 산하를 울긋불긋 물들일 무렵이면 동해로 반가운 손님이 찾아온다. 저 멀리 알래스카의 베링해까지 떠났던 연어가 귀향의 꿈을 간직한 채 기나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것이다. 양양 남대천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연어들이 찾아오는 물줄기다. 국내 하천으로 회귀하는 연어의 70% 정도가 양양 남대천으로 돌아온다. 한 해에 10만 마리가 넘는다.
▲ 점봉산 등선대에서 바라본 만물상. 하늘을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신선만이 볼 수 있을 것 같이 빼어난 경관이다. |
남대천이 이렇듯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연어 모천이 된 데는 양양 내수면연구소 직원들의 노력이 있었다. 원래 연어는 남대천을 거슬러올라가 산란하였지만, 물줄기 중간중간에 수중보 같은 장애물이 많고, 천적으로부터 알을 보호하기도 어려워 부화율이 턱없이 낮았다. 그래서 연구소에선 1984년부터 매년 연어를 강 하류에서 포획해 인공수정한 후 치어를 방류하는 방류재포양식(放流再捕養殖)을 반복했다. 그 결과 1990년대 초부터 회귀하는 연어의 마릿수가 눈에 띄게 늘어난 것이다.
남대천 연어는 양양 주민들의 중요한 수입원이 되었다. 통계에 따르면 연어 축제를 전후해 남대천을 찾는 관광객이 2만~3만 명 가까이 되고, 이들로부터 30억 원이 넘는 소득을 올린다고 한다. 산에서 채취한 송이버섯과 강에서 잡아 올린 연어가 양양 주민들의 쏠쏠한 수입원이 되고 있는 셈이다.
양양 장터는 한산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장날(4·9일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부터 양양장은 영동지방의 으뜸이요, 강원도를 통틀어서도 횡성장과 함께 쌍벽을 이룰 정도의 큰 규모를 자랑했다. 백두대간 산자락에서 수확한 임산물과 동해 너른 바다에서 거둬들인 해산물이 철마다 나오면서 장터엔 사계절 내내 해안지역과 산간지역의 특산품으로 가득 메워졌다.
또 영동에서 영서로 넘나드는 고갯길이 한계령과 오색령 말고도 조침령이나 단목령 등이 있고, 같은 영동에서도 북부와 남부로 통하는 해안도로가 있어 전국의 장을 찾아다니며 물건을 팔던 ‘선질꾼’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특히 영서에서 온 선질꾼들이 양양장에서 구해 가는 가장 귀한 품목은 소금이었다. 인제나 홍천 주민들도 소금을 구하려 이틀씩 걸어 백두대간을 넘기도 했다. 강원도 지방의 여러 장의 특성을 재미있게 엮은 ‘장타령’을 한번 들어보자.
‘춘천이라 샘밧장 신발이 젖어 못보고 / 홍천이라 구만리장 길이 멀어 못보고 / 이귀저귀 양귀장 당귀 많아 못보고 / 한자두자 삼척장 베가 많아 못보고 / 횡설수설 횡성장 에누리 많아 못보고…(중략)…양식 팔어라 양양장 쌀이 많아 못보고 / 즉금 왔다 인제장 일 바빠서 못보고 / 울퉁불퉁 울진장 울화 나서 못보고 / 안창곱창 평창장 술국 좋아 못보고’(김소운의 <조선구전민요집> 중에서)
양양장을 찾던 선질꾼들이 걷던 해안길,
이제는 왕복 4차로의 큰길로 바뀐 7번 국도를 타고 북으로 간다. 이내 반기는 낙산사(洛山寺)는 우리나라에서 바다와 접한 절집 중 가장 전망이 좋다. 범어의 보타락가(Potalaka)산에서 유래해 낙가산(洛迦山)이라고도 불리는 오봉산(五蜂山)은 동네 뒷산처럼 아담하지만, 그 품에 안긴 절집 낙산사는 바다처럼 크고 너르다. 신라 의상이 관음을 친견했다는 이 절집은 우리나라 관음신앙의 진원지다. 그러나 당시의 유물과 역사 깊은 당우들은 여러 차례의 전란 속에서 대부분 화를 면치 못했다. 6·25 전쟁 후에 중창한 건물들도 2005년 4월5일 양양 지역에 발생한 큰 산불로 대부분 화를 입었다.
불에 탄 낙산사는 처참했다. 일주문과 홍예문, 스님들이 머물던 요사채가 전소됐고, 원통보전도 허무하게 내려앉았다. 원통보전을 에워싸고 있는 원장(垣墻)도 허물어졌다. 건물 15채 중 11채가 소실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조각장식이 매우 사실적이고 아름다운 데다가 웅대한 기품이 넘쳐 조선시대 종 가운데 걸작으로 꼽히던 보물 ‘낙산사 동종’도 녹아버렸다.
다행이라면,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지불인 건칠관세음보살좌상(보물 제1362호)을 비롯한 신중탱화, 후불탱화 등 문화재는 지하 창고로 옮겨져 화마를 피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또 사천왕문 앞의 아름드리 벚나무들도 싱싱하게 푸른 이파리를 피워낸 것도 다행이지만, 의상대 소나무들이 신장(神將) 역할을 한 덕인지 홍련암이 불길로부터 안전한 것은 참으로 놀랍다. 용기를 잃지 말라는 메시지일까? 지난달 공중사리탑을 보수하던 중 부처님 몸에서 나온 진신사리를 찾아냈다는 소식은 불행 중에 찾아온 복음이었다. 절집은 불에 탔으나 관음사상은 하나도 손상되지 않았고, 오히려 더 강인하게 발전시키려는 분위기에서 1,300년 이상 이어온 낙산사의 저력을 느낄 수 있었다.
관동팔경의 하나인 낙산사에서
바라보는 동해 해돋이는 나라 제일의 경관을 자랑한다. 그래서 예로부터 많은 시인묵객이 이곳에서 해돋이를 보며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려왔다. 조선 산수화의 새로운 지평을 연 겸재 정선이 붉은 해가 떠오르는 동해를 배경으로 낙산사를 화폭에 담은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고난을 딛고 한참 불사 중인 절집에서 일출 구경을 한다는 게 그리 내키지는 않았으나, 화마도 진정 어쩔 수 없었을 그 일출을 만나기 위해 며칠 동안이나 고대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번 여행길에선 아침마다 뒤덮은 짙은 해무 탓에 일출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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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산사 사천왕문. 지난해 식목일에 있었던 큰 산불에도 벚나무는 불길을 무사히 벗어난 듯 풀다. |
낙산 일출의 조망 포인트인 의상대에서 북쪽 해안을 바라보면 홍련암이 보인다. 홍련암은 그 옛날 의상의 기도가 끝날 때쯤 갑자기 굴에서 붉은 연꽃이 떠오르면서 관음보살이 나타났다는 데서 이름이 유래한 암자다. 관음굴은 거센 파도가 끊임없이 부닥친 뒤 거친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빠져나가는 해식동굴. 후인들은 그 석굴 위에 홍련암을 세워 의상을 기리고 있다. 홍련암 마루 바닥엔 가로 세로 10cm 정도의 구멍을 뚫어놓아 관음굴을 내려다볼 수 있도록 했다. 의상이 관음 친견을 그토록 갈구했던 바다에선 오늘도 해조음(海潮音)이 끊임없이 들려온다.
낙산사를 들렀으니 진전사지(陳田寺址)로 가보자.
설악의 맏형인 대청봉(1,708m)을 병풍 삼아 자리 잡았던 진전사는 우리나라 불교 혁명의 발상지다.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 스님이 이곳에서 출가한 인연도 있으나 언제 어떻게 역사에서 사라졌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여러 기록으로 미루어 16세기 이전에 이미 폐사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물치항으로 가다가 강현면 소재지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은 뒤 대청봉을 바라보며 들어서면 된다. 의외로 널찍한 농토가 펼쳐진 둔전골을 오르다보면 길 오른쪽 언덕에 석탑 한 기가 우뚝하다. 신라 석탑의 전형을 보이며 빼어난 조각 솜씨를 자랑하는 진전사지 3층석탑(국보 제122호)이다. 설악의 최고봉 대청의 기세에 눌리지 않을 정도로 탄탄하고 주변 풍광과도 아주 잘 어우러지는 명품이다.
여기서 상류로 700m 정도 오르면 소나무 들어찬 언덕에 단정히 자리 잡은 부도탑(보물 제439호)을 만나게 된다. 이 부도는 8각형의 탑신을 하고 있으면서도 다른 부도와는 다르게 기단은 석탑처럼 2단의 4각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것이라 한다. 부도의 주인공은 우리나라 선종의 뿌리가 된 도의(道儀·?-?) 선사로 알려져 있다. 도의의 일대기는 따로 전해지지 않지만, 전문가들은 중국 당나라 때 편찬된 조당집(祖堂集), 최치원이 지은 문경 봉암사의 지증대사비문, 그리고 장흥 보림사의 보조선사비문 등에서 그의 삶과 사상을 어느 정도 복원해냈다.
도의는 784년(선덕왕 5)에 당나라에 유학해 서당 지장(西堂 智藏)에게 깨침을 받은 선사로, 821년에 귀국하여 선종을 본격적으로 전파했다. 이심전심(以心傳心)과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종지(宗旨)로 삼는 선종은 경전을 해석하고 염불을 외우는 일보다 본연의 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도의가 귀국할 당시의 신라는 교종의 시대였다. 기존의 승려와 귀족들은 허황한 소리라면서 배척했다. 이는 단순히 새로운 사상이 아니라 왕즉불(王卽佛)의 체계로 이루어진 왕권 불교의 질서도 송두리째 흔들어놓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배척이 심해지자 도의는 아직 때가 이름을 알고 산중에 은둔하기 위해 서라벌을 뒤로 했다. 그리고 이곳 설악산 기슭에 진전사를 짓고 40여 년간 은둔하다 세상을 떠났다. 도의의 사상은 염거(廉居)를 거쳐 체징(體澄)으로 전해졌다. 이 체징 선사가 전남 장흥의 가지산에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으뜸 사찰인 보림사(寶林寺)를 개창하면서 도의의 사상은 비로소 꽃을 피우게 된다.
양양의 최북단이요, 속초와의 경계에 있는 물치항.
시끌벅적한 횟집에서 쓴 소주에 싱싱한 활어회 한 쌈을 들고 이튿날 남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낙산사 한번 돌아보고 남대천 건너면 오산항이란 자그마한 항구에 닿는다. 그냥 스치듯 지나가면 그다지 볼 게 없지만, 남한에서 가장 오래된 선사시대 유적지가 이 부근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길가의 돌멩이 하나도 허투루 보이지 않는다.
오산리 선사유적지(사적 제394호)는 약 8,000년 전 신석기시대 전기에 사람이 살았던 집터다. 1977년 오산항에서 육지쪽으로 500m 정도 떨어진 쌍호를 메우기 위해 모래를 채취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 서울대 조사단이 발굴한 결과 원형 점토 움막 주거지와 점토제 얼굴상, 돌낚시, 돌칼, 돌톱을 비롯한 빗살무늬토기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특히 흑요석제 석기의 성분을 분석한 결과 백두산 지역에서 채취된 것임이 밝혀져 고고학계를 흥분시키기도 했다. 이는 우리나라 신석기 문화와 동아시아 문화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쌍호(雙湖)는 해안에 모래언덕이 발달해 생기는 자연 호수인 석호(潟湖)로서, 그 이름대로 원래 두 개였다. 대동여지도에도 두 개의 호수를 동그랗게 그려 넣고 쌍호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호수의 규모가 지금보다 컸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바닷물이 수시로 드나들면서 다양한 생태계를 자랑해 하던 쌍호는 그러나 현재 북쪽 호수가 사라지고 나머지 호수도 그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양양군은 2007년 이곳에 선사유적박물관을 세운다는 계획으로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올 여름엔 우선 유물전시관을 열 예정이라 한다. 그러나 기왕에 돈을 들이는 거라면 신석기인들의 생활터전이었던 쌍호의 생태 복원도 함께 고려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조대(河趙臺)는 언제 들러도 좋다.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란 바다와 기묘한 모양의 갯바위를 훌쩍 뛰어넘는 거센 파도와 고운 모래사장이 절경을 이룬다. 하조대 꼭대기엔 정자가 독수리처럼 앉아있다. 정자에서 바다를 바라보면 백년송 자라는 바위 너머로 파란 물결 일렁이는 동해가 펼쳐진다.
하조대에 얽힌 유래 한 토막 들어보자. 역사적 대변혁기인 고려 말엽, 하륜(河崙·1347-1416)과 조준(趙浚·1346-1405)은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풍광이 좋다는 이곳으로 내려왔다. 두 사람은 여기서 새 왕조 건립의 뜻을 세웠고, 결국 태조 이성계가 등극하자 벼슬길에 오르기 위해 이곳을 떠났다. 이후 사람들은 두 사람의 성을 따서 하조대라 했다고 한다.
▲ 갯바위와 어우러진 바다 풍광이 아름다운 하조대. |
갯바위에 피어난 붉은 해당화에 서린 전설은 슬픈 사랑 이야기다. 옛날 인근 바닷가 마을에 용모가 출중한 하(河)씨 성의 젊은이가 살고 있었다. 이웃마을 조(趙)씨 집안엔 혼기가 찬 두 자매가 있었는데, 자매는 둘 다 하씨 젊은이에게 애정을 품게 되었다. 셋의 사랑은 갈수록 깊어졌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관습이란 바다를 넘지 못하고 이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지고 말았다. 그 후 사람들은 이곳을 하조대라 불렀다. 매년 여름, 다른 데보다 유난히 붉은 빛깔로 피어나는 하조대 해당화는 이들의 슬픈 넋이라고 한다.
출세를 위한 은둔보다도 슬픈 사랑 때문에 몸을 던졌다는 전설이 더 가슴에 와닿는 건 하조대 건너편 바위에 자리 잡은 새하얀 등대 때문인지도 모른다. 푸른 바다와 잘 어울려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화를 보는 듯한 하조대 등대는 밤이면 저절로 불이 켜져 동이 틀 때까지 바닷길을 밝혀주는 무인 등대다. 파돗소리 지척인 하얀 등대에 기대서서 하조대를 건너다보는 맛도 괜찮다.
하조대에서 418번 지방도를 타고 백두대간 품의 어성전(魚成田, 또는 漁城田)으로 들어간다. 양양의 가장 큰 젖줄인 남대천의 상류를 이루는 어성전은 굴피집 짓고 살던 화전민과 동해서 거슬러 올라온 물고기의 고향이다. 어성전은 ‘물이 깊어 고기가 많고 주위의 산은 성처럼 둘러싸고 있으며 밭이 기름진 이상향’이라는 데서 붙은 지명. 법수치로 이어지는 상류 계곡은 넓고 깊으면서도 ‘어성십경’(漁城十景)이라 불리는 절경을 거느릴 만큼 수려해 예전엔 양양 사람들만 조용히 찾아들던 피서지였다.
▲ 바다에서 희생당한 어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해난어민위령탑. |
양양에서 설악산 권역을 제외하고, 어성전과 쌍벽을 이루는 계곡은 바로 미천골. 백두대간의 약수산(1,306m)과 응복산(1,360m) 사이에서 발원해 남대천으로 합류하는 후천의 최상류 계곡이다. 기암괴석 아래엔 오랜 세월 거센 물살에 다듬어진 암반이 즐비하고, 그 사이를 흐르는 계류는 웬만한 가뭄에도 물이 줄지 않을 정도로 수량이 많고 그냥 먹어도 될 정도로 깨끗하다.
미천골로 들어서면 맨 먼저 수도승들이 머물던 선림원지(禪林院址)가 길손을 맞는다. 이곳은 앞서 들렀던 진전사, 그리고 강릉 굴산사와 더불어 신라 선종의 법맥을 이끌어가던 영동지역의 대표적인 가람이었다. 전성기엔 공양을 짓기 위해 씻은 쌀뜨물이 계곡에 하얗게 흐를 정도로 수도승들이 많았다 한다. 그래서 계곡의 이름도 ‘미천(米川)골’이다.
통일신라 말기인 804년에 창건된 후 전성기를 구가하며 선종의 대표적인 절집으로 자리 잡고 있던 선림원은 10세기를 전후한 어느 해 산사태에 휩쓸리면서 갑자기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천 년의 세월이 흐른 뒤인 1985년 동국대학 발굴조사단에 의해 비로소 그 베일이 벗겨진 것이다. 현재 선림원지 삼층석탑(보물 제444호), 석등(보물 제445호), 홍각선사탑비 귀부 및 이수(보물 제446호), 부도(보물 제447호) 등이 선림원의 옛 영화를 증거하고 있다.
한편, 1948년 이곳에서 발견된 신라 범종은 상원사 동종, 봉덕사 에밀레종과 더불어 신라 3대 범종의 하나로 공인 받았는데, 월정사로 옮겼다가 6·25전쟁 때 절집과 함께 타버렸다. 선림원지 범종 잔해는 지난해 형체도 없이 불 타버린 낙산사 동종 잔해와 함께 국립중앙박물관 지하 수장고에 보존되어 있다.
미천골 계류를 거슬러 오르며 굽이 돌다보면 왼쪽 너덜지대에 빼곡히 들어앉은 토종 벌통들을 만나게 된다. 한겨울을 제외하곤 꿀을 물고 온 벌들의 날갯짓으로 생동감이 넘치는 특이한 공간이다. 식생 상태가 좋은 산악 지역답게 벌통 둘레엔 피나무, 엄나무, 층층나무 등 벌들이 좋아하는 꽃을 피우는 나무들이 가득하다. 오염원이 전혀 없는 순수 자연에서 얻은 토종꿀이니 얼마나 달짝지근할까.
미천골의 마지막 보물은 역시 불바라기약수. 이름만 들어도 목젖을 타고 내려가는 뜨거운 기운을 느낄 수 있는 이 약수는 감히 접근하기 어려운 골짜기 깊은 곳에 숨어있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맛볼 수 있는 탄산약수 중 가장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을 것이다.
발 아래로 펼쳐지는 계곡 풍경을 내려다보며 임도를 걷다가 마지막 팻말이 있는 곳에서 계곡의 작은 길로 들어가 300m쯤 오르면 물보라 흩날리는 두 개의 폭포가 반긴다. 청룡폭포와 황룡폭포다. 약수는 왼쪽의 청룡폭포 바위벽에서 흘러나온다. 위장병과 피부병에 특효가 있다는 믿음 때문에 오래 전엔 이곳에 천막을 치고 약수를 받아먹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 구룡령 고갯마루에서 만난 운해. |
약수로 목젖을 적시고 미천골을 벗어난다. 길은 홍천 내면으로 넘어가는 구룡령(九龍嶺)으로 이어진다. 아홉 마리의 용이 뒤엉켜 있는 것 같은 고갯길. 그 아흔아홉 굽잇길을 돌고 돌아 고갯마루에 선다. 여기선 누구나 차를 세우고 지나온 양양쪽을 돌아본다. 그리곤 백두대간에서 동해로 건강하게 뻗어 내린 산줄기들을 두 눈과 가슴에 담는다. 그 옛날 양양장에서 소금이며 생선 따위를 지게에 지고 백두대간을 넘어가던 선질꾼처럼….
양양 어떤 곳인가
강원도 동부 중앙에 있는 양양군(襄陽郡)은 북쪽으로 속초시, 서쪽으로 인제군, 남쪽으로 강릉시·홍천군에 접하고, 동쪽으로 동해에 면한다. 양양군 서쪽은 백두대간 분수령이 설악산(雪嶽山·1,708m)·응복산(應伏山·1,360m)·오대산(五臺山·1,563m) 등으로 이어져 높고 험준하다. 동해안쪽은 산지가 급경사를 이루며 해안에 약간의 평지가 있어 농경지로 이용된다.
모든 하천은 동해로 흐르는데 대개 길이가 짧고 급류를 이루며 수량은 적은 편이다. 이 중 가장 큰 하천은 오대산 기슭에서 발원해 양양 읍내를 적시고 동해로 흘러드는 남대천(南大川)으로 도중에 서면 북평리에서 서림천(西林川)과 오색천(五色川)을 합류한다.
40.3km에 이르는 해안선 곳곳엔 사빈(砂濱)·사취(砂嘴)와 매호(梅湖)·쌍호(雙湖) 등 석호(潟湖)가 발달해 있다. 암석해안은 해식애를 이루며 부근의 사빈 해안과 조화를 이루어 휴양관광지로 이용되고 있다. 평지는 해안을 따라 2~4km 너비로 길게 발달되어 있다. 물치·인구·남애 등지에 바다가 육지로 깊숙이 들어와 있어 어항으로 쓰이고 있다. 연안의 조석간만의 차는 20cm에 불과하고, 바다는 해안에서 500m 정도의 거리에서 수심 수백m의 심해가 된다.
백두대간이 차가운 북서계절풍을 막아줘 푄현상이 일어나 기온은 같은 위도상의 서해안에 비해 연평균 2.5℃, 1월 평균 3℃나 높다. 또 가을에 강수량이 비교적 많은 것도 특색이다. 연평균기온 12.3℃, 1월 평균 -2.2℃, 8월 평균기온 24.3℃이며, 연평균 강수량은 1,131m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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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군은 고구려에서는 익현현(翼峴縣)이나 이문현(伊文縣)이라 불렀고, 신라에서는 익령현(翼嶺縣)이라 했다. 고려 때엔 양주(襄州)라 했고, 조선시대엔 1397년(태조 6)에 태조의 외향(外鄕)이라는 이유로 부(府)로 승격시켰고, 1413년(태종 13)에 도호부(都護府)가 됐으며, 1416년(태종 16) 양양(襄陽)으로 개명했다. 1895년(고종 32) 군으로 하면서 강릉부(江陵府)에 속했다. 이듬해(건양 원년) 13도제 실시로 강원도 양양군이 됐다.
1939년 속초면(束草面)이 읍으로 승격되고, 1945년 8·15광복과 더불어 국토가 분단되자 현남면(縣南面)·현북면(縣北面) 및 서면(西面)의 일부가 강릉군에 편입됐다. 1963년 1월 속초읍이 시(市)로 승격되면서 독립하자, 토성면·죽왕면은 고성군(高城郡)에 이관되고, 현남면이 명주군으로 됐다. 2006년 현재 양양읍과 서면(西面)·손양면·현북면·현남면·강현면의 1읍 5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면적은 628.68㎢, 인구는 29,136명(2005년)이다.
양양군은 서쪽에 백두대간이 남북으로 뻗어 있어 해안을 따라 도로가 발달했다. 고성~속초~양양~강릉 간 7번 국도가 지나고, 인제~양양 구간은 한계령(寒溪嶺)을 넘는 44번 국도가, 홍천 내면~양양 구간은 구룡령(九龍嶺)을 잇는 56번 국도가 지난다.
|오색약수|
남설악이라고도 불리는 점봉산(點鳳山)에서 발원하는 오색천 개울가의 너럭바위 암반에서 오색약수(五色藥水)가 솟는다. 조선시대인 1500년 무렵에 오색석사(五色石寺)의 승려가 처음 발견했다고 전하는 오색약수는 3개 구멍에서 솟는데, 위쪽 약수는 철분이 많고 아래쪽 2개 구멍은 탄산질이 많다. 아래쪽은 남성들이 마시는 양(陽)약수, 위쪽은 여성들이 마시는 음(陰)약수라 한다.
1970년대 중반의 조사 기록에 따르면 당시 용출량이 3개 약수 구멍에서 하루에 나오는 양이 무려 4,852ℓ로 거의 5,000ℓ나 됐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이후 수량이 급격히 줄어들어 현재는 한 모금 마시기 위해서 줄을 한참동안 서있어야 한다. 오색약수터에서 주전골을 향해 상류로 1km 정도 거슬러 오르면 온정골과 주전골이 합류하는 지점의 암반에서 솟아나는 제2오색약수가 있다. 물맛은 원조 오색약수보다 약한 편이다.
|불바라기약수|
미천골 최상류 약수산 기슭에 있는 불바라기약수는 국내에서 가장 깊은 오지에 숨은 탄산 약수다. 미천골 깊은 계곡의 청룡폭과 황룡폭이 쏟아지는 암벽 벼랑에서 흘러나오며, 물맛이 무척 강해 뜨겁게 느껴질 정도여서 ‘불바라기’라 불렸다고 한다. 위장병과 피부병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이 약수를 맛보려면 미천골 자연휴양림 가장 상류의 멍에정 앞에 주차하고 4.8km를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 길은 마지막 300m 정도를 빼놓고 대부분 임도라서 어린이도 안전하게 걸을 수 있다. 왕복 3시간쯤 걸린다.
|갈천약수|
서면 갈천리에 있는 갈천약수(葛川藥水)는 구룡령 고갯길 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갈천’이라는 이름은 옛날 먹을 것이 없어 굶기를 밥 먹듯이 하던 시절 칡뿌리로 허기를 달랠 때 냇가에 칡물이 떠날 날이 없다는 데서 유래했다. 설악산 오색약수의 명성에 눌려 늦게 알려졌지만, 톡 쏘는 강한 맛은 오색약수에 뒤지지 않는다. 예부터 내려온 갈천의 4가지 보물(葛川四寶) 가운데서도 으뜸으로 친다.
약수가 솟는 너럭바위 주변은 온통 붉게 물들어 있다. 성분은 철분, 나트륨 ,칼슘, 마그네슘, 칼륨, 망간 등으로 빈혈과 충치예방에 효과가 있고, 특히 위장병과 피부병에 좋다고 한다. 갈천 마을에서 호젓한 산길을 1.5km쯤 걸으면 약수터가 보인다.
|오색온천|
오색온천은 원래 설악산 남쪽 계곡의 600m 고지에서 분출되던 자연온천이다. 먼 옛날엔 주민들이 잡은 멧돼지를 튀길 정도로 뜨거운 온천수가 샘솟았다고 한다. 42℃의 오색온천은 나트륨과 황산염이 주성분인 알칼리천으로서 고혈압, 당뇨병 같은 성인병이나 신경계통 질환 및 위장병 등에 특효가 있다고 한다. 피부미용에도 큰 효과가 있어 ‘미인온천’으로도 불린다.
전통적인 오색온천은 알칼리온천인데, 온천지구 내에는 대규모의 오색그린야드호텔(033-672-8500)은 오색약수와 성분이 같은 탄산온천이다.
|하조대 해수욕장|
현북면 하광정리에 있는 하조대 해수욕장은 백사장 길이 1.5km, 너비 100m, 면적 7,562.5㎡, 수심 0.5~1.5m에 이른다. 백사장의 규모가 크고, 모래가 부드러우며, 바닥의 경사가 완만해 수심이 깊지 않아 아이를 동반한 가족 단위 피서지로 적합하다. 매년 7월10일부터 8월20일까지 해수욕장으로 운영된다. 대규모 위락시설이 많지 않아 주변의 다른 해수욕장에 비해 조용하다. 남쪽에 낚시하기에 좋은 갯바위가 있다. 언덕 너머엔 조선 개국공신이었던 하륜(河崙)과 조준(趙浚)의 전설이 서린 하조대가 있다. 야영장이 갖춰져 있다.
|남애 해수욕장|
현남면 남애리에 있는 남애 해수욕장은 백사장 길이 2km, 폭 100m, 평균 수심 1~2m에 이른다 .경사가 완만하고 수심이 얕으며 모래질이 좋아 가족 피서지로 적합하다. 민물 석호인 매호가 인근에 있어 붕어와 잉어 낚시도 즐길 수 있다. 보통 7월14일부터 8월23일까지 개장한다.
|물치항|
조선시대 우암 송시열 선생이 함경도 덕원에서 거제도로 유배되어 동해안을 따라 이곳을 지나다가 날이 저물어 머무르게 됐는데, 폭우로 물이 불어 며칠 머물다 떠나면서 ‘물에 잠긴 마을’이라 하여 물치라 불렸다고 한다. 한자로는 물치(沕淄)라 쓴다.
아담한 물치항엔 양양 특산물인 송이버섯을 형상화 한 송이 모양 등대가 설치돼 항구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해양수산부로부터 ‘꼭 한번 가보 고 싶고, 다시 찾고 싶은 관광명소’로 선정됐다. 싼 횟집이 많다.
|남애항|
현남면 남애리에 있는 남애항(南涯港)은 1종 어항으로 양양에서 가장 크다. 아담한 항구를 붉게 물들이며 타오르는 해돋이가 장관이라 하여 ‘강원도 3대 미항’ 가운데 하나로 꼽기도 한다. 영화 ‘고래사냥’의 마지막 장면을 촬영한 장소로도 잘 알려져 있다. 바로 인근에 남애 해수욕장과 광진 해수욕장 등이 있다. 주요 해산물로는 전복·미역·가리비·멸치·넙치 등이 나온다. 오는 2010년까지 총 250억 원 이상을 투입해 3대 미항이란 명성에 걸맞게 육성할 예정이다.
|공수전계곡|
서면 공수전리의 공수전계곡은 구룡령에서 발원한 후천이 공수전 마을을 지나는 주변을 일컫는다. 여울과 소(沼)가 많아 야영하며 계류 물놀이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이 서려 있는 용소, 물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끓는 물소리처럼 들린다는 탕소 등도 한여름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한다. 공수전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 때 출장을 떠나는 관리들에게 출장비를 지급하는 ‘공수전’이라는 기관이 있었던 곳이라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서림계곡|
서면 서림리는 미천골 자연휴양림과 가까운 곳에 있고 넓은 시냇물과 울창한 숲이 어우러져 있는 산자수려한 곳이다. 미천골 자연휴양림보다 덜 알려진 곳이라 조용히 피서를 즐길 수 있다. 서림 마을엔 위장병과 숙취해소 등에 특효가 있다는 인진쑥을 파는 집이 많다.
|둔전계곡|
대청봉 동쪽 자락에서 발원해 동해로 흘러 들어가는 강현면 둔전계곡은 맑은 계류와 솔밭이 어우러져 있어 여름 휴양지로도 좋다. 계곡과 저수지엔 산천어 등 물고기가 서식하고 있다. 계곡 건너편 야영장에서는 야영도 할 수 있다. 둔전저수지 바로 아래의 진전사지엔 국보급 문화재인 진전사지 삼층석탑(국보 제122호)과 진전사지 부도(보물 제439호) 등의 유적이 있다.
|주전골|
설악산 남쪽에 있는 오색약수터에서 선녀탕을 거쳐 점봉산(1,424m) 서쪽 비탈에 이르는 계곡이다. 고래바위·상투바위·새눈바위·여심바위·부부바위·오색석사·선녀탕·십이폭포·용소폭포 등 기암괴석과 폭포가 이어진 계곡미가 수려하다. 골이 깊어 한여름에도 한기를 느낄 정도고, 가을 단풍으로도 유명하다.
주전골이란 이름은 옛날 이 계곡에서 승려를 가장한 도둑 무리들이 위조 엽전을 만들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용소폭포 입구에 있는 시루떡바위가 마치 엽전을 쌓아 놓은 것처럼 보여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양양 곤충생태관|
강현면 낙산 해수욕장 입구의 양양 곤충생태관은 규모는 크지 않지만 양양 일대의 곤충에 대해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다. 이 곤충생태관에는 물방개 사슴벌레 등 수십여 종의 살아있는 희귀 곤충과 유충 표본 등 1,500여 종이 곤충의 일대기와 생활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설명과 함께 전시돼 있다. 개관시간은 09:00~18:00, 매주 화요일 휴관. 입장료는 어른 1,000,원, 학생 700원. 033-672-0916.
|낙산사|
강현면 전진리 오봉산(五峯山)에 있는 낙산사(洛山寺)는 671년(신라 문무왕 11) 의상대사가 처음 세웠다. 홍련암은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의 진신을 친견한 장소이며 낙산사의 모태가 된다. 의상이 좌선 수행했다는 의상대에서 바라보는 동해 일출은 유명하다. 858년(헌안왕 2) 범일의 중건을 비롯해 몇 차례 중건을 거듭했으나 6·25전쟁으로 소실됐으며, 1953년에 다시 중건했으나 2005년 4월에 일어나 큰 화재로 대부분 불에 탔다. 이때 보물 제479호 낙산사 동종(7월7일 보물 지정 해제)을 영원히 잃었고, 홍예문은 누각이 소실됐다. 또 원통보전(대웅전), 고향당, 무설전, 요사채, 종무소, 범종각 2동, 조계문, 홍련암, 요사채 등 건물 14동이 전소됐다. 현재 중창 불사 중이다.
|선림원지|
서면 황이리 미천골 하류에 있는 선림원지(禪林院址)는 통일신라시대의 옛 절터다. 동국대 발굴조사단이 1985년 7월부터 1년 이상에 걸쳐 조사한 결과 순응법사(順應法師) 등이 창건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발굴 당시 출토된 기와로 보아 적어도 9세기 초에 창건된 것으로 보이나 이후 대량 출토된 기와나 삼층석탑, 석등, 비석귀부 등 오늘날 남아 있는 대부분의 유물들이 9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여 이 무렵 대대적인 중창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너른 터엔 삼층석탑(보물 제444호), 석등(보물 제445호), 홍각선사탑비 귀부 및 이수(보물 제446호), 부도(보물 제447호)와 주춧돌 등이 남아 있다.
|진전사지 3층석탑|
강현면 둔전리에 있는 진전사지 3층석탑(국보 제122호)은 화강암으로 세운 통일신라시대의 3층석탑으로 높이 5m에 이른다. 2단의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려놓은 통일신라의 일반적인 형태다. 아래층 기단에는 날아갈 듯한 옷을 입은 천인상(天人像)이 있으며, 위층 기단에는 구름 위에 앉아 무기를 들고 있는 웅건한 모습의 8부신중(八部神衆)이 있다.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졌는데, 1층 몸돌에는 각기 다양한 모습의 불상 조각들이 있다. 지붕돌은 처마의 네 귀퉁이가 살짝 치켜 올려져 있어 경쾌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며, 밑면에는 5단씩의 받침을 두었다. 3층 지붕돌 꼭대기에는 받침돌만 남아있을 뿐 머리장식은 모두 없어졌다.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잡혀 있으면서 지붕돌 네 귀퉁이의 치켜올림이 경쾌한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기단에 새겨진 아름다운 조각과 1층 몸돌의 세련된 불상 조각은 진전사의 화려했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진전사지 부도|
강현면 둔전리 진전사지 3층석탑에서 계곡을 따라 700m 상류쪽의 작은 언덕인 불두정이란 곳에 위치하고 있는 진전사지부도(보물 제439호)는 선종의 종조로서 진전사를 창건한 도의선사의 부도탑으로 추정된다. 일반적인 다른 부도와는 달리 8각형 탑신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 아래 부분이 석탑에서와 같은 2단의 4각 기단을 하고 있다. 석탑을 보고 있는 듯한 기단의 구조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다.
도의선사의 묘탑이라 할 때 이 부도는 우리나라 석조부도의 첫 출발점이 되며, 9세기 중반쯤에 세워진 것으로 보고 있다. 전체적으로 단단하고 치밀하게 돌을 다듬은 데서 오는 단정함이 느껴지며, 장식을 자제하면서 간결하게 새긴 조각들은 명쾌하다.
|오산리 선사유적지|
손양면 오산리의 선사유적지(사적 제394호)는 약 8,000년 전(기원전 6,000년경)의 신석기시대 전기에 사람이 살던 집터로서 남한에서 가장 연대가 오래된 신석기시대 유적이다. 1977년 동해안에서 육지쪽으로 200m 정도 떨어진 쌍호를 메우기 위해 토사를 채취하는 과정에서 발견됐다.
발굴조사 결과 신석기시대 집터 11기, 불을 피웠던 자리 5기, 도구를 만들던 곳으로 보이는 돌무지 유구 2기 등이 확인됐다. 또한 많은 양의 토기 조각과 석기가 출토됐는데, 특히 흑요석제 석기의 성분분석 결과 백두산 지역에서 채취된 것임이 밝혀졌다. 양양군은 오는 7월 오산리 선사유적전시관을 개관할 예정이다.
지하 1층, 지상 1층 규모로 건립된 유적전시관은 선사인들의 어로·주거·채집생활을 엿볼 수 있는 ‘오산리 선사이야기’ 등 6개 구역으로 구성돼 있다. 전시관엔 국내 최초의 실물 크기 선사유적 모형을 비롯해 양양군 오산리와 지경리 포월리 및 고성군 문암리 등에서 출토된 토기 20여 점과 토기편 30여 점, 결합식 어구와 어망 등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된다.
|성국사|
오색약수터 근처에 있는 성국사(城國寺)는 옛 오색석사터에 새로 지은 절집이다. 오색석사는 신라 41대 헌강왕 때 도의선사가 지은 절이라고 하며 그 후 염거선사와 보조선사가 이 절에서 수도했다고 전한다. 전설에 의하면 이 절집의 후원에 다섯 가지 색의 꽃이 피는 나무가 있어 오색사라 했다고 한다. 경내엔 원래 대웅전 동서에 통일신라 양식으로 쌓은 두 개의 탑이 있었으나 동탑은 허물어져 파편들만 남아있다. 오색리 삼층석탑이라 불리는 서탑은 1968년 복원되어 보물 제497호로 지정돼 있다.
|동해신묘|
강현면 조산리의 동해신묘(도기념물 제73호)는 나라에서 풍농풍어와 안녕을 기원하며 동해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고려시대인 1370년(공민왕 19)에 강릉에 건립됐다가 조선시대인 1490년(성종 21) 수군만호영이 대포성으로 이전하면서 함께 이전됐다고 전해진다. 조선 정조 때엔 어사 권준이 상주하고 관찰사가 직접 중수했던 것으로 미뤄볼 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하조대|
현북면 바닷가에 있는 하조대(河趙臺)는 기암절벽이 우뚝 솟고 노송이 그에 어울려서 경승을 이루고 있다. 높다란 갯바위엔 하조대 백년송이라 불리는 노송이 어울려 눈길을 끈다. 절벽 위엔 1955년 건립한 작은 육각정이 있다. 조선의 개국공신인 하륜(河崙)과 조준(趙浚)이 여기서 만년을 보내며 청유(淸遊)했던 데서 그런 명칭이 붙었다고 한다. 또 마을에 전하는 전설에 의하면 이루지 못한 사랑을 하던 하(河)씨 총각과 조(趙)씨 자매의 슬픈 사랑에 얽힌 전설도 전한다.
|어성전|
현북면 법수치리 어성전(魚成田, 또는 漁城田)은 양양의 가장 큰 젖줄인 남대천의 상류를 이루는 맑고 수려한 오지 마을이다. 오대산에서 발원한 계류는 강릉 부연동과 양양 법수치리를 지난 다음 어성전으로 모인다.
어성전은 ‘물이 깊어 고기가 많고, 주위의 산은 성처럼 둘러싸고 있으며, 밭이 기름진 이상향’이라는 데서 붙은 지명. 용이 승천했다는 용소, 매월당 김시습 흔적이 남은 운문암(雲門庵), 양양 제일의 장사인 탁장사와 강릉의 권장사가 힘내기를 했다는 바듸재 등 전설이 서린 지명들이 어성전리 곳곳에 흩어져 있다. ‘어성십경’(漁城十景)이라 불리는 절경을 거느릴 만큼 계곡이 수려해 여름철이면 피서객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적당한 계곡에서 텐트를 치고 야영할 수 있는 곳이 많다. 마을관리 휴양지는 매년 청소비와 주차료 등을 받고 있다.
|송천 떡마을|
구룡령을 넘는 56번 국도변의 서면 송천리 양지뜸에 들어 앉아 있는 송천 마을은 전통 떡으로 유명하다. 30호 가구 중에서 떡 만드는 일을 하는 집은 15가구 정도 된다. 원래 이 마을은 떡마을로 이름나기 전에는 쌀농사 약간과 감자나 옥수수를 심어 가꾸던 산간 마을이었다. 이곳 주민들은 봄엔 산나물을 채취해서 팔고, 여름이면 과일, 가을엔 송이버섯을 따서 팔고, 겨울엔 속초 등지로 나가 명태 가공공장 등에서 일했다.
그러다가 한두 사람이 오색약수터나 신흥사 등지로 떡장사를 다니게 됐는데, 기계로 만든 떡이 아니라 쌀을 시루에 얹어 장작불로 찌고 떡메를 치고 손으로 빚어내는 떡이라 맛이 좋았다. 점차 소문이 나기 시작해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떡 만드는 일을 시작했고, 어느새 전국의 유명한 떡집이 됐다. 인절미에 계피떡(바람떡), 송편, 백설기, 호박고지, 경단, 찹쌀떡, 가래떡, 이바지떡 등 떡의 종류도 다양하다. 소문난떡집(033-673-1316), 민속떡집(033-673-8989) 등이 있다. 마을 입구 56번 국도변에 민속떡 판매장이 있다. 한 팩에 2,000원.
|미천골 자연휴양림|
서면의 미천골 자연휴양림은 백두대간의 약수산(1,306m)과 응복산(1,360m) 사이를 흐르는 미천골에 자리 잡은 휴양 시설이다. 숲도 짙고 기암괴석 사이를 흐르는 계류도 맑고 깨끗해 인기가 있다. 휴얌림 안에는 네 점의 보물이 흩어져 있는 선림원지, 제법 규모가 큰 토종벌 단지, 신비한 불바라기약수가 있어 역사 공부와 휴식을 겸하기에 적당하다.
휴양림 시설로는 산림문화휴양관, 야외교실, 다목적광장, 숲속의 집, 야영장, 정자, 약수터, 체력단련장, 등산로, 산책로, 어린이놀이터, 물놀이터와 대운동장, 족구장 등이 갖추어져 있다. 대부분의 시설물은 긴 계곡을 따라 드문드문 떨어져있다.
숲속의 집 6평형(4동) 50,000원/비수기 및 주중 30,000원, 10평형(3동) 70,000원/40,000원, 16평형(2동)·17평형(1동) 98,000원/60,000원, 산림문화휴양관은 9평형(9실) 70,000원/40,000원. 야영장(2개소) 2,000원, 야영데크(44개소) 4,000원, 오토캠프장(1개소) 8,000원. 입장료는 성인 1,000원, 청소년 600원, 어린이 300원. 주차료 3,000원. 전화 033-673-1806, 홈페이지
길에서 만난 별미
|뚜거리탕|
뚜거리는 동해로 흐르는 맑은 하천에 사는 망둥어과의 민물고기로 정식 명칭은 ‘꾹저구’다. 지역에 따라 부르는 이름도 달라 양양에선 뚜거리, 강릉에선 꾹저구, 고성에선 뚝저구, 삼척에선 뿌구리(꾸부리)로 불린다. 몸길이 6~14㎝의 작은 몸집으로 바위나 돌 틈새에 붙어 서식하면서 곤충이나 벌레를 잡아먹는데, 먹성이 매우 좋아 예전엔 낚시바늘에 아무 미끼나 끼워 던지면 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
주로 바닷물과 민물이 섞이는 기수역에서 살면서 철따라 하천을 오르내리는 회귀성 어종인데, 때로는 하천의 중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또 5월이면 나타나기 시작해 7~8월에 절정을 이루고, 가을이 찾아와 기온이 내려가기 시작하면 바다로 내려가 자취를 감춘다.
양양의 여름 별미인 뚜거리탕은 남대천에서 잡아온 뚜거리를 맑은 물에 담가 모래를 완전히 토해내게 한 다음 푹 삶는다. 그리고 체에 곱게 갈아서 막장을 풀고 우거지, 파, 마늘, 고추 등을 넣고 다시 한번 걸쭉하게 끓여낸다. 양양 사람들은 체에 갈지 않고 통째로 조리해 먹는 것을 즐긴다. 마치 미꾸라지로 요리한 내륙의 추어탕처럼 해장용이나 한여름 보양식으로 인기가 있다. 7월부터 9월까지 3개월 동안이 가장 맛이 좋다. 양양 읍내에서 59번 지방도를 타고 남대천에 걸린 구 양양교를 건너 우회전하면 뚜거리탕을 차리는 식당들이 나타난다. 천선식당(033-672-5566)이 가장 유명하고 손님도 많다. 한 그릇에 5,000원.
|활어회|
바다를 접한 고을 나들이에서 싱싱한 활어회를 맛보지 않을 수 없다. 양양은 최북단 해안의 물치항, 최남단 해안의 남애항 등에 이르기까지 횟집이 많다. 이중에 비교적 값도 싸고 정겨운 흥정까지 하면서 회를 뜨기엔 물치항이 훨씬 낫다. 또 회를 사들고 송이버섯 모양의 등대가 있는 방파제에서 파돗소리 들으며 회를 한 쌈 드는 맛도 좋다.
물치가 설악산 들머리에 있는 까닭에 물치항 어민들은 일찍부터 관광객들을 상대로 회를 팔았다. 예전엔 난전으로 시작했는데, 몇 년 전 번듯한 건물을 짓고 손님을 맞고 있다. 건물 안엔 수십 개의 횟집이 있다. 특이하게도 매년 추첨으로 가게 자리를 바꾼다.
횟값은 계절마다 차이가 있지만, 보통 30,000원 정도면 성인 3~4명이 서운치 않게 맛볼 수 있는 양이다. 2층의 준호네횟집(033-671-0494) 등은 직접 배를 갖고 운영하기 때문에 푸짐하고 맛있다.
일정별 길라잡이
양양은 크게 백두대간을 끼고 있는 산악권, 동해에 접한 해안권 이렇게 두 개 권역으로 나눌 수 있다. 넓은 산악권을 다시 오색·구룡령·어성전 권역으로 나누게 되면, 모두 4개 권역으로 구분이 가능하다.
● 오색권
한계령을 중심으로 설악의 많은 명소들이 산재해 있다. 용출량은 줄었어도 여전히 명성을 날리고 있는 오색약수, 그리고 오색온천, 주전골은 모두 한 코스로 엮인다. 몇 년 전 개방한 흘림골 코스로 올라 등선대~십이폭포~주전골~오색약수로 엮으면 여유 있는 하루 여정이 된다. 오색 코스는 대청봉을 오르는 최단 코스(5시간 소요)로 사랑 받고 있다.
● 구룡령권
홍천의 내면과 양양을 넘나드는 56번 국도가 지나는 구룡령 고갯길 주변에도 명소가 많다. 양양에서 56번 국도를 타고 고갯길을 올라가다 보면 송천 떡마을, 공수전계곡, 서림계곡, 그리고 선림원지와 불바라기약수가 있는 미천골 자연휴양림, 그리고 갈천약수 등을 차례로 지나게 된다.
● 어성전권
남대천 상류인 어성전은 산도 높고 물도 맑은 깊은 계곡이다. 워낙 오지라 역사적으로 유명한 유적은 없으나 화전민들이 자리 잡고 살던 삶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 좋다.
● 해안권
7번 국도가 해안선을 따라 남북으로 나있어 여정이 수월하다. 북쪽부터 설악산 입구인 물치항에서 최근에 화재를 입은 낙산사로 이어진다. 국보와 보물을 각각 한 점씩 품고 있는 설악산 둔전골의 진전사지도 이 권역에 넣을 수 있다. 읍내의 남대천을 건너면 한창 마무리공사 중인 오산리 선사유적지, 박물관을 지나 하조대, 남애항까지 이어진다.
● 당일 양양까지 접근하는 데 3~4시간 정도 걸리는 수도권과 중부지방에서는 가능한 일정이다. 그러나 낙산사, 하조대, 오색약수 등 접근이 용이한 명소만 들를 수 있다.
● 1박2일 양양을 둘러볼 수 있는 일반적인 일정. 첫날 정오 무렵에 한계령을 넘어서 도착한 후 이튿날 구룡령으로 벗어날 때의 추천 일정은 다음과 같다. 한계령~오색약수~양양장~낙산사~진전사지~물치항(1박)~낙산 일출~하조대~어성전~미천골 자연휴양림~구룡령.
● 2박3일 1박2일의 일정에 흘림골~등선대~오색약수 산행, 미천골 산책, 어성전 물놀이, 해수욕 등을 하루쯤 곁들일 수 있다. 숙박지는 오색약수, 낙산사, 하조대, 미천골, 어성전 주변에서 구하면 된다.
● 접근드라이브코스
* 수도권 △서울→6번 국도→양평→홍천→44번 국도→인제→한계령→양양 △영동고속도로→강릉 분기점(주문진 방면)→현남 나들목→7번 국도(양양 방면)→남애항→하조대→양양 <서울서 3시간30분~4시간 소요>
* 영남권 △중앙고속도로→영동고속도로→강릉 분기점(주문진 방면)→현남 나들목→7번 국도(양양 방면)→양양 <부산서 5시간, 대구서 4시간 소요>
* 호남권 △광주→호남고속도로→경부고속도로→중부고속도로→영동고속도로→강릉 분기점(주문진 방면)→현남 나들목→7번 국도(양양 방면)→양양 <광주서 5시간30분, 전주서 4시간30분 소요>
* 충청권 △대전→경부고속도로→중부고속도로→영동고속도로→강릉 분기점(주문진 방면)→현남 나들목→7번 국도(양양 방면)→양양 <대전서 4시간, 청주서 3시간 소요>
● 고속·시외버스
* 서울→양양 강남고속터미널에서 매일 30분 간격 수시(06:30~23:30), 동서울터미널에서 매일 13회(06:30~18:40), 상봉터미널에서 매일 7회(06:25~18:00) 운행. 4시간~4시간30분 소요* 부산→양양 동부종합터미널에서 매일 주간 1회(12:49), 심야 3회(21:10, 22:40, 23:40) 운행. 주간 8~9시간 소요
* 대전→양양 동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 매일 2회(09:20, 16:00) 운행. 5시간40분 소요* 춘천→양양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매일 10회(06:15~19:05) 운행. 3시간40분 소요
● 오색권
오색시설지구에 숙식할 곳이 많다. 오색 그린야드호텔(672-8500), 오색온천장(672-4088), 설악온천장(672-2645), 약수온천장(672-2645) 등은 온천욕을 겸한 숙소다. 이외에도 한계령오색펜션(672-3700), 남설악펜션(672-8998), 설악허브빌펜션(672-2588)과 소망민박(672-0144), 오시오민박(672-0354), 오색민박(672-0179) 등이 있다.
● 구룡령권
서림계곡, 공수전계곡, 갈천계곡 등에 숙식할 곳이 있으나 미천골 자연휴양림(673-1806) 주변에서 해결하는 게 낫다. 휴양림 구역 안에 자리한 불바라기산장(673-4589)도 인기 있다. 카페에서 간단한 식사와 따끈한 차를 차린다. 미천골 들머리에도 민박집이 여럿 있다. 갈천약수 주변에 갈촌약수상회(671-8463), 약수가든(672-8411), 갈촌가든(672-0896) 등이 있다. 서림리의 산울림펜션(914-5300)도 깨끗하다.
● 어성전권
어성전 사거리에 사거리식당(673-1529), 어성전식당(673-1595), 주안식당(672-1513) 법수치리의 응복산방(673-4335), 법수산장(673-1343)에서 숙식이 가능하다. 상류의 법수치계곡으로 이어지는 물가에 반딧불이야기(672-0760), 자연과우리(673-1637), 캐디스(673-3439), 흐르는강물처럼(673-0941), 연어의꿈(673-0108,) 등 펜션이 많이 들어서 있다. 단체라면 양양국유림관리소(672-1030)에서 운영하는 숲속수련장(672-1558)을 이용하는 것도 괜찮다.
● 해안권
유명 해수욕장과 관광지 주변으로 숙식할 곳이 많다. 물치항엔 그랜드모텔(671-8192), 해돋이모텔(671-0991), 물치모텔(671-3252), 낙산사 입구엔 덕양파크(672-7722), 비치빌(672-8091), 씨싸이드모텔(672-2111), 양양낙산콘도민박(672-1023), 워커힐모텔(671-7644), 하조대 해수욕장엔 하우스여관(033-672-2285), 굿모닝하조대(033-672-0089) 등의 숙박시설이 있다. 남애항엔 고래사냥(671-3355), 소라의꿈(671-7504), 모비딕모텔(671-1165), 현대횟집(671-2405) 등 숙식할 곳이 여럿 있다.
*양양군청 문화관광과 670-2721~2
<출처> 월간산 4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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