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관광
1시간 거리 오는데 55년이 걸렸습니다
멀고도 가까운 그 곳 개성관광 ‘활짝’
문화일보 박경일기자
▲ 황진이가 머리카락에 먹을 적셔 쓴 글이 있다는 용바위에 오른 관광객들이 박연폭포를 바라보고 있다. 겨울철이라 폭포의 물줄기는 다른 계절만 못하지만, 잔설이 남아있는 못으로 내리꽂히는 물소리가 제법 웅장하다
북녘의 개성 땅이 이렇듯 가까울 줄은 몰랐습니다. 서울에서 북쪽으로 80㎞. 남쪽과 북쪽의 출입국 수속시간을 제외한다면, 잘 포장된 도로를 타고 1시간 안쪽에 내처 달려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짧은 물리적인 거리’와 ‘끝이 보이지 않는 이념의 거리’와의 차이 탓에 혼돈스럽습니다. 서울과 개성을 잇는 도로 위에서 이렇듯 쉽게 가닿을 수 있는 곳을 55년동안 문을 닫아걸고 있었다는 사실이 허탈해지기까지 합니다.
개성관광은 고향을 북쪽에 두고온 실향민뿐만 아니라, 분단의 현실 속에서 살아온 관광객들에게도 참으로 각별합니다. 이미 10년 전인 1998년 시작된 금강산 관광과도 느낌이 사뭇 다릅니다. 금강산 관광이 빼어난 자연 풍광을 만나러 가는 여정이라면, 개성관광은 북녘의 도시 한복판에서 북한 주민들의 사는 모습을 지척에서 만날 수 있는 여행입니다. 개성의 이름난 유적지를 돌아보는 일정도 좋지만, 그보다 북녘 도시 한복판에서 그들의 사는 형편과 송악산 자락에 안온하게 들어선 도시 풍경에 더 눈길이 갑니다.
천마산 자락의 웅장한 박연폭포며, 고즈넉한 관음사 그리고 고려의 충신 정몽주가 목숨을 잃었다는 선죽교와 거목들이 늘어선 고려 성균관…. 475년동안 고려의 도읍지였던 개성에는 수많은 유적지들이 옛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 유적지에서 이가 빠진 역사의 톱니를 끼워맞추면서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차장밖으로 스치는 북녘사람들의 모습에 더 마음이 갔습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차창에 끼는 성에를 옷 소매로 닦아가면서 창밖으로 스쳐지나는 풍경을 마음으로 담았습니다.
남새상점 앞에서, 또 봉동리발관 앞에서, 콤퓨터봉사점 앞에서 따스한 환대의 손을 흔들어대던 남루하지만, 표정은 밝은 북한 주민들의 모습에서는 누가 더 부유하건, 혹은 누가 더 나은 삶을 살던 구별할 일은 아니지 싶었습니다. 체육학교의 농구 골대에 매달려서 관광 차량이 안 보일 때까지 손을 흔들며 웃어대던 까까머리 아이들의 천진한 모습에서는 북녘주민들의 ‘좀 나아진 형편’을 본 듯해서 안도감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고개를 빼고 이쪽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 북한 주민들과 이쪽에서 내다보는 호기심 어린 남쪽 관광객들의 시선에서 서로에 대한 호감과 정이 느껴져서일까요. 민가나 주민들쪽으로는 카메라도 들이대지 못하게 하고, 식당 앞에서는 차도로 한 발자국도 못 내려서게 하던 북한보안원의 삼엄한 경계의 눈초리쯤은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서슬퍼렇던 보안원도 “내가 저기서 나고 자랐다”며 차도로 내려서 기와집이 늘어서 있는 쪽을 향해 발돋움을 하던 한 실향민의 이탈을 슬쩍 눈감아줄 줄도 알았습니다.
짧은 당일치기 개성관광을 마치고, 군사분계선을 넘어 되돌아오는 버스 안은 조용했습니다. 차안의 관광객들은 아마도 ‘반세기가 넘도록 길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들’과 ‘아직 여전히 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들’을 짚어보지 싶었습니다.
박연폭포·선죽교·관음사·대흥산성 너머의 북녘 사람들 사는 모습이 더 반갑습니다
분단벽에 막혀 그리움 더했던 개성門 ‘활짝’
# 군사분계선을 넘어서 북으로 향하다
지도에는 또렷하게 그려져 있지만, 실제로 남한 땅과 북한 땅을 가르는 군사분계선은 볼 수 없었다. 남한 땅을 달리던 버스는 어느 틈엔가, 불쑥 북쪽 땅으로 들어섰다. 이렇듯 아무렇지도 않게 남과 북을 오갈 수 있다니….
북측 출입관리소에서 입국증에 도장을 찍어주던 북한군의 모습처럼, 남측이나 북측이나 똑같은 풍경처럼, 비현실적인 느낌이 먼저 다가왔다.
버스가 남에서 북으로, 또는 북에서 남으로 넘어서는 순간은, 다만 가로등 기둥을 장식하는 고리 모양의 색깔로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남한 땅의 가로등에는 노란색 고리가, 북한 땅의 가로등에는 파란색 고리가 씌워져 있다. 만일 이런 사소한 차이마저 없었다면 달리는 버스가 지금 어느 곳에 서있는지조차 모를 뻔했다.
남측과 북측의 까다로운 출입국 심사과정을 거쳐 버스는 눈에 보이지 않는 군사분계선을 통과했다. 버스는 무서리가 하얗게 내린 겨울의 들판과 구릉을 지나 달렸다. 자꾸 성에가 끼는 창문을 소매로 문질러 닦아내면서 행여나 풍경 한조각을 놓칠세라 밖을 내다봤다. 이제 막 동이 터오는 황량한 겨울 벌판 위를 V자 편대를 이룬 기러기떼가 날아갔다.
훈훈한 버스 안에서는 북측 안내원의 건조한 주의사항이 전달됐다. 민간인들의 거주구역이나 민간인들의 사진 촬영이 엄격하게 금지된다는 것과 신문, 잡지 등을 북측으로 가져갈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뱀술 등 야생동물로 만든 음식이나 물건은 북측에서 구입할 수 있으나, 남한으로 가지고 들어올 수 없다는 등의 주의사항이 열거됐다.
개성으로 향하는 왕복 4차선 도로 오른쪽으로 철로가 따라왔다. 서울~개성을 잇는 철길이다. 버스는 군사분계선을 넘어 다리를 건넜다. 다리 아래로 제법 힘찬 물길이 흘렀다. 북녘 땅 어디를 굽이굽이 돌아온 것일까. 멀리 북한 국기와 송전탑이 우뚝하다. 건물의 입간판에는 ‘영광스런 조선 로동당 만세’… 등의 갖가지 구호들이 난무하고 있다. 아, 이곳은 50여년의 세월 동안 너무 멀었던 땅, 북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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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충신 정몽주의 집터에 세워진 숭양서원의 사당으로 오르는 길. 사당에는 정몽주의 전신 초상화와 함께 정몽주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러줬다는 우현보의 위패도 모셔져 있다.
▲정몽주가 격살당한 선죽교. 선죽교 바닥돌에 불그스름한 색이 감돌았는데, 북측 안내원이 “누군가 붉은 기운이 도는 돌을 가져다 끼워놓은 것”이라고 말했다.
누추하지만, 아름다운 도시…개성
개성 관광은 금강산 관광과는 다르다. 금강산 관광이 수려한 풍광을 앞세운 ‘자연 관광’이라면, 개성 관광은 북녘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가감없이 볼 수 있는 ‘인문 관광’이라 해도 좋겠다. 개성 관광도 박연폭포니 선죽교니 하는 명소들을 돌지만, 그보다 눈앞에서 만나는 북한 사람들의 사는 모습이 더 반갑고 눈길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서울에서 개성, 다시 개성에서 평양을 잇는 고속도로에서 빠져나온 버스가 ‘야다리’라 이름 붙은 자그마한 다리를 건넜다. 버스에 오른 북한의 명승지종합개발지도부 소속 안내원이 다리 이름의 유래를 구수하게 설명했다. 왕건은 고려 개국후, 줄곧 발해를 멸망시켰던 거란과의 관계를 경계해왔는데, 어느날 거란이 관계 회복을 원한다며 낙타(약대) 50마리와 사신을 보내왔다. 그러나 왕건은 이를 내치고 낙타는 굶겨 죽이고, 사신들은 종살이를 보냈다는 것이다. 바로 그 낙타가 죽은 곳이 이 다리 인근이었고, 그래서 다리는 ‘약대다리’라고 불렸으며 이것이 후에 ‘야다리’로 변했다는 것이다. 역사의 도시답게 개성 시내에는 이처럼 옛이야기와 전설이 얽힌 지명들이 산재했다. 야다리를 건너 들어선 개성시내는 누추했다. 도시 초입의 15층 안팎 아파트들은 낡을 대로 낡았고, 집들도 하나같이 옛 기와집이었다. 인근 야산의 나무들은 거의 다 벌목돼 황량했고, 도로는 죄다 비포장이었으며 아이들의 입성은 초라했다. 거리를 오가는 차량은 한두 대뿐이었다.
그러나 송악산의 품에 안겨 있는 개성은 참 아름다웠다. 야트막한 구릉을 따라 조선 말기에 지어졌을 법한 한옥들이 운치있게 들어서 있고, 아파트 등의 건물들도 우악스럽지 않은 느낌이었다. 흑색 기와와 동기와, 그리고 청석을 마치 너와처럼 얹은 청석기와도 눈에 띄었다. 오래 전에 잊고 있었던 고향의 풍경. 그것은 누추함이라기보다는 따스함으로 해석해야 옳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저들은 그 아름다움보다 누추함 쪽이 마음에 걸리는지, 민가나 주민을 향해 카메라를 돌리지 말라고 누누이 강조했고, 내내 감시했다.
# 개성의 박연폭포, 겨울에도 이름값을 하다
개성 관광의 첫 목적지는 개성시내에서 27㎞ 가량 떨어진 박연폭포다. 서화담과 황진이와 함께 송도 삼절로 일컬어지는 개성의 명소 중의 명소다. 이 폭포는 또 설악산의 대승폭포, 금강산의 구룡폭포와 함께 3대 폭포로 꼽히기도 하는데, 대승폭포가 신이 사는 ‘신폭(神瀑)’이라면, 구룡폭포는 성인이 사는 ‘성폭(聖瀑)’이고, 박연폭포는 선인이 산다고 해서 ‘선폭(仙瀑)’이라고도 불렸다.
천마산과 성거산 아랫자락을 굽이굽이 돌면서 버스는 물길을 따라 간다. 개성시내에서 박연폭포까지 가는 길에는 논은 없고, 온통 밭뿐이다. “기온이 낮아 논농사가 안되는 곳”이라는 게 안내원의 설명이다. 성거산 자락에는 산 중턱의 가파른 경사면까지 밭이 만들어져 있었다. 안내원은 남측 관광객들에게 스스럼없이 “1995년부터 시작된 ‘고난의 행군’ 시기를 아느냐”고 묻고는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북한 주민들이 한톨의 곡식이나 한줌의 식량을 더 거두기 위해 닥치는 대로 땅을 개간한 흔적”이라고 했다.
금강산 관광길이 처음 열릴 당시 북측 안내원들은 기를 쓰고 자신들의 체제가 우월하다는 증거를 보이려 애썼고, 북한 주민의 누추한 삶에 대한 질문에는 입을 닫았다. 그러나 개성의 관광안내원들은 달랐다. 아마도 개성공단에서 남한의 경제 발전 실상을 접한 탓인 듯했다. 이런 스스럼없는 대화는 북측 주민들과의 심리적인 거리를 한층 가깝게 했다.
천마산과 성거산의 물줄기가 만나 이룬 박연폭포는 높이가 38m에 폭이 7~8m에 달할 정도로 웅장한 모습이었다. 겨울철이라 위용은 덜했지만, 그래도 제법 물소리가 청아했다. 폭포 위 아래에는 못이 형성돼 있는데, 아래쪽은 ‘고모담(故母潭)’이라고 부르고, 위쪽의 것을 바가지처럼 생겼다고 해서 ‘박연(朴淵)’이라고 했다.
폭포 아래 고모담에는 용바위가 있는데, 이곳에 황진이가 머리채에 먹을 적셔 초서체로 썼다는 글귀가 남아있다. ‘비류직하삼천척(飛流直下三千尺), 의시은하락구천(疑是銀河落九天)’. 글씨는 폭포수처럼 크고 또 유려하다. 이백의 시 ‘여산폭포를 바라보며’ 의 두 구절로, 내용을 풀어보자면 ‘하늘을 나는 듯 흘러내려 3000척을 떨어지니, 하늘에서 은하수가 쏟아져 내리는 듯하구나’란 뜻이다.
# 대흥산성과 아담한 절집 관음사로 오르다
박연폭포 옆으로 난 산길에는 갈색의 참나무 낙엽이 수북하다.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밟으며 산길을 오르면 폭포를 굽어보는 정자 범사정을 지나 대흥산성의 북문에 닿는다. 대흥산성은 고려때 천마산과 성거산, 청량봉, 인달봉 등 인근의 산악지형을 이용해 쌓은 둘레 10㎞의 돌성이다. 고색창연한 돌성과 아치형의 문루가 눈길을 붙잡는다. 문루를 지나 10분 정도 아름다운 숲길을 산책하듯 오르면 아담하고 운치있는 절집 관음사를 만난다. 관음사는 용마루가 짧아 처마가 길어 보이는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절집은 마당의 7층석탑과 어우러져 고즈넉하면서도 운치가 넘친다. 관음사의 주지 청맥 스님은 “절집이 누추하지만 옛것 그대로 두고 있다”며 “누구나 늙으면 머리가 희끗해지는 법인데, 억지로 검은 머리가 되려 해서 되겠느냐”고 했다. 활달한 청맥 스님은남측 관광객들과도 스스럼없이 기념사진을 찍고, 우스갯소리도 했다.
관음사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대웅전 뒤편의 아름다운 문살이다. 아름다운 꽃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진 문에는 슬픈 전설이 전해내려온다. 나무를 깎는 재주가 있던 15세 소년 운나가 관음사 건축에 동원되는데, 어머니가 병을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집에 다녀오겠다고 청했지만 거절당했다. 며칠 뒤 어머니의 사망소식이 전해지자 운나는 ‘재주가 원수’라며 자신의 팔을 자르고 절에서 뛰쳐나오게 된다. 이런 연유로 운나가 갖가지 문양을 새겨넣던 문짝은 미완성으로 남았고, 아직까지 완성되지 않은 모습으로 달려 있다는 것이다.
절집을 돌아보던 관광객들 사이에서 누가 시작했는지, 노래 ‘우리의 소원’이 합창으로 울렸다. 36세때 고향 개성을 떠나왔다는 김홍규(88)씨의 눈가가 붉어졌다.
# 숭양서원과 선죽교, 그리고 역사의 현장들
점심식사와 숭양서원, 선죽교, 고려박물관 등을 돌아보는 오후 일정은 개성시내 한복판을 오가며 이뤄졌다. 개성 중심가를 오가는 코스라 북한 주민들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만큼 관광객에 대한 통제도 심했다. 관광지 이외의 모습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됐고, 통일관 앞에서 차도로 내려서는 것조차도 막아섰다.
통일관에서 내온 점심식사는 놋그릇에 담긴 11첩 반상. 그러나 개성 음식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켜주기에는 다소 모자란 듯했다. 더덕구이는 부드럽고 향긋했지만 기름을 많이 써서 입에 맞지 않고, 닭국이며 돼지고기조림, 감자부침 등 다른 음식들도 그다지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재료의 맛을 살리는 게 개성 음식의 특징이라지만, 전반적으로 간이 약하고 밋밋했다.
점심 이후에는 고려말 충신 정몽주의 집터에 세워진 숭양서원에 들렀다. 서원에서는 개와 말과 범이 새겨진 마상대가 눈길을 끌었다. 마상대란 말에서 내려서는데 편하도록 돌로 만든 계단이다. 돋을새김한 개와 범, 말이 금세 튀어나올 듯 생생하다.
서원 인근에는 선죽교가 있다. 정몽주가 이방원의 군사에게 살해된 곳이다. 정몽주의 후손이 다리에 난간을 설치해 통행을 막고 옆에 새 돌다리를 놓았다. 선죽교 바닥에는 붉은 기운이 도는 돌이 있는데, 정몽주의 피라는 전설이 있지만, 정작 안내원은 “후대에 붉은 기운이 도는 돌을 가져다가 맞춰놓은 것”이라고 귀띔했다. 관광객들은 선죽교보다 조선 영조와 고종때 세웠다는 표충비 앞에서 감탄사를 연발했다. 어필이 새겨진 비석을 받치고 선 귀부의 조각이 마치 살아있는 듯 정교하고 생생했다.
마지막 일정은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 고려 성균관. 고려 성종 11년(992년)에 국자감으로 시작해 충렬왕때 성균감으로 되었다가, 10년 뒤 성균관이란 이름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균관에는 높이 31m의 1000년 된 느티나무와 거목 은행나무들이 압도할 듯한 크기로 서있다. 정면에는 소박하지만 기품이 느껴지는 명륜당 건물이, 그 뒤로는 팔각지붕의 대성전이 자리잡고 있다. 대성전 앞에는 망월대와 수창궁에서 출토됐다는 용머리 조각을 배치해놓았다.
<개성 가는 길>
계동·광화문·잠실 등서 셔틀버스… 당일 관광비용 18만원
개성은 서울에서 북쪽으로 80㎞, 판문점에서 불과 12㎞의 거리에 있다. 자유로를 거쳐 임진강 통일대교를 건넌 뒤 남측 출입사무소와 군사분계선, 북측 사무소를 거쳐 개성공단을 지나 시내로 들어간다.
남측의 신문이나 잡지 등은 반입이 금지되고, 카메라도 160㎜ 이상의 망원렌즈를 가져갈 수 없다. 이동 중 촬영은 물론 주민들의 모습이나 민가 등을 촬영하는 것도 금지된다. 관광지에 도착해서도 촬영방향에 제약을 받기도 한다. 당일 개성관광 비용은 18만원(예약 02-3669-3000). 예약은 최소 출발일 10일전까지 마쳐야 한다. 10일은 평일만 계산한 것으로 실제로는 12일전까지 예약해야 한다. 주말의 경우는 신청객들이 몰려 일찌감치 서둘러야 한다. 임진각역까지는 승용차를 가져갈 수 있는데, 서울시내에서 셔틀버스를 이용할 경우 5000원이 추가된다.
서울 강북지역에서는 계동(안국역)과 광화문(광화문역)·마포구청역에서 셔틀버스(대화관광 02-764-2255)가 출발하고, 강남지역에서는 잠실(종합운동장역)·압구정동(압구정역)에서 셔틀버스(대원관광 02-458-4514)가 출발한다.
<출처> 2008. 1. 2 /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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