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내여행기 및 정보/- 인천. 경기

경기도 광주 - 르포라이터 민병준의 향토기행l

by 혜강(惠江) 2007. 12. 9.

경기도 광주 남항산성

한강을 터전 삼아 겨레를 지탱해온 영욕의 고을

글·사진 민병준

 

 

                

▲ 병자호란 때 인조는 남한산성에 피신했다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을 했다. 

 

 

  최근 서점에 나온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면서 경기도 광주(廣州)의 남한산성은 또 다시 관심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험한 세상 살아가는 사람치고 사연 없는 사람 없듯이 이 땅에 사연 없는 유적도 드물다. 하지만 남한산성처럼 기구한 운명을 지닌 유적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 역사를 짚어보자. 

 

조선시대에 한양을 지키는 4대 요새는 동쪽의 광주, 서쪽의 강화, 남쪽의 수원, 북쪽의 개성이다. 이중 동쪽의 광주에 있는 남한산성은 한남정맥에서 갈라져 나온 ‘검단지맥’의 검단산 둘레에 쌓은 성벽이다. 산성 둘레는 약 8km, 면적은 528,459.47㎡에 이른다.
 
남한산성 주변엔 백제 전기의 유적이 많이 있어 이곳은 예부터 백제 온조왕 때의 성으로도 알려져 왔다. ‘백제 온조왕 13년에 산성을 쌓고 남한산성이라 부른 것이 처음’이라는 기사가 고려사와 세종실록 지리지 등에 나온다. 전문가들은 673년(신라 문무왕 13) 한산주에 쌓았다는 주장성(晝長城·일명 일장성)도 지금의 남한산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와 선조와 광해군 때 몇 차례 고쳐 쌓았으나 남한산성이 지금처럼 천험의 요새로서 틀이 잡힌 것은 인조 때 들어서다. 

 

인조 때 남한산성을 대대적으로 쌓은 까닭은 당시 국제적으로는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는 상황이었고, 국내적으로는 1624년(인조 2) 2월에 이괄의 난을 겪은 인조가 한성을 빼앗기고 충남 공주의 공산성으로 피하는 수모를 겪었기 때문이다. 

 

남한산성은 1624년부터 축성공사가 시작되어 2년만인 1626년(인조 4)에 완공되었다. 당시 옹성 3개, 성문 4개, 암문 16개를 만들었고, 성안에 우물 80개, 샘 45개를 조성했다. 또 유사시 임금이 거처할 행궁이 73칸, 하궐(下闕)이 154칸이나 되었다. 이 정도면 제법 모양새를 갖췄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축성한 지 10년만인 1636년(인조 14)엔 유사시를 대비해 수어사(守禦使) 이시백이 처음으로 12,700명을 동원하여 기동훈련을 실시하기도 했다. 

기동훈련이 있던 바로 그해 봄, 청나라 사신 용골대(龍骨大)는 청의 수도인 선양(瀋陽)에서 홍타이지(皇太極)가 황제로 즉위한다는 소식을 알리기 위해 조선을 찾았다. 조선 조정에서는 논쟁이 벌어졌다. 척화파(斥和派)는 오랑캐 추장에게 황제 칭호는 가당치도 않다며 정묘년(1627년)에 맺은 맹약을 파기하고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국서를 가져온 청나라 사신 용골대의 목을 치라고 요구했다. 반면 주화파(主和派)는 청의 세력이 강해진 현실을 인정하여 그들의 요구에 적당히 타협하자고 맞섰다. 인조는 두 의견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척화를 선택한다. 

 

 곧이어 조정은 ‘청과 맺은 맹약을 파기하니 청의 침략에 대비하라’는 내용의 극비문서를 평안감사에게 보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했다. 이 극비문서를 가져가던 금군(禁軍)이 청으로 돌아가던 용골대 일행에게 극비문서를 빼앗긴 것이다. 조선의 영토 안에서 외국 사신에게 국왕의 극비문서를 빼앗기다니. 이렇듯 척화파와 주화파의 주장은 무성했으나 정작 중앙과 지방을 이어주는 정보 전달 체계는 무척 허술했던 것이다. 이런 조직적인 부실은 결국 나중에 큰 환란을 부르게 된다. 그해 12월6일, 청군은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질풍같이 한양을 향해 내달렸다. 선봉장은 사신으로 왔던 용골대였다. 

 

 

 
▲ [위]남한산성은 광주 시민은 물론 서울을 비롯한 
하남·성남 시민들에게 인기 있는 산책 코스다. 
[아래]남한산성 4개의 장대 중 하나인 수어장대.

 

조선의 전략전술은 이번에도 최악이었다. 조선군은 청군의 침입 사실을 제때에 알지 못했다. 조선은 모든 병력을 대로(大路) 외곽에 위치한 산성으로 집결시켰으나 청군은 조선군과의 접전을 피해 곧장 서울로 진격하는 속전속결 전략을 취했기 때문이다. 당시 임진강 이북의 방어를 책임진 도원수 김자점은 청군이 침입했다는 최초의 보고를 묵살하고 조정에 제때에 알리지도 않았다. 뿐만 아니라 적이 다가오자 전투를 회피하여 적의 급속한 남진을 방관하였다.

 

청군의 기마부대는 눈보라를 일으키며 개성을 지났다. 12월14일, 청군이 양철평(良鐵坪·지금의 은평구 녹번동)에 이르러서야 조정에선 청군이 개성을 지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했다. 원래 강화도로 건너가려 했으나 청군이 이미 김포에서 강화로 이어지는 길을 차단해 버린 뒤라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미처 아무런 준비도 못하고 들어왔던 남한산성의 상황은 처참했다. 인조의 행렬을 뒤따른 청군은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 남한산성을 포위했고, 삼남으로 이어지는 모든 도로도 차단해버렸다. 그해 겨울 혹독한 추위 속에서 많지 않은 군량이 점점 바닥을 드러냈다. 군사들은 모진 추위와 배고픔에 점점 사기를 잃어갔다. 청군은 이따금 서양식 최신 대포인 홍이포(紅夷砲)를 쏘아대면서 시위했다. 조선 조정이 목이 빠져라 고대하던 지원군은 청군에게 막혀 접근조차 못했다. 기대하던 명군도 날씨를 핑계로 출전을 지연했다. 

 

1월22일, 강화도가 함락되었다. 강화도 함락 역시 경계 소홀이 부른 패전이었다. 청군은 바다에 익숙하지 못하여 수전(水戰)에 약하다며 수비를 소홀히 하는 틈에 육지 문수산성에서 호시탐탐 노리던 청군이 조선에서 노획한 선박에 홍이포까지 싣고 강화도 상륙작전을 벌였던 것이다. 조선군은 저항도 제대로 못한 채 강화도를 내주고 말았다. 세자와 중신들은 모두 포로가 되었다. 

 

결국 인조는 남한산성에 들어온 지 45일만인 1월30일, 서문을 열고나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남한산성은 막대한 비용과 노력을 들여서 쌓은 성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정작 필요할 때 제구실을 못했덩 것이다.

올해는 병자호란이 끝난 지 370년이 되는 해다. 전문가들은 병자호란이 완벽한 준비 없이 선택한 전쟁이었음을 지적한다. 무엇보다 병자호란 패전의 가장 큰 원인은 국제 정세를 제대로 짚어내지 못한 데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17세기 초 명·청 교체기의 격랑 속에 조선 위정자들이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소설 남한산성에서도 읽히듯 단지 말만 난무할 뿐이었다. 위정자들의 말을 위한 말이 결국은 위기를 불러들인 것이다.


이런 상황은 어쩌면 지금도 현재진행형일지도 모른다. 남북을 둘러싼 미국·중국·러시아·일본 등과의 숨 가쁜 외교전에서 우리가 취할 바를 위정자들은 제대로 알고나 있는 것일까. 혹시 370년 전처럼 말로만 정치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두려움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어쨌든 병자호란이 끝난 후 영조를 거쳐 순조 때에 이르기까지 성내의 시설 확장은 계속되었으나 1907년 일본군은 성내에 화약과 무기가 많다는 이유로 폐허를 만들었다. 현재는 왕의 임시 숙소로 쓰이던 행궁, 지휘관이 올라서서 군대를 지휘하던 수어장대, 백제의 시조 온조왕을 모시는 숭렬전, 남한산성을 쌓을 때 공을 세운 이회를 기리는 청량당, 남한산성을 지키는 군사들이 무술을 연마하던 연무관 등이 복원되어 있다. 또 병자호란 때 끝까지 항전을 주장하다 청나라에 끌려가 목숨을 잃은 윤집·홍익한·오달제 3학사, 그리고 역시 항전을 주장하던 김상헌, 정온을 함께 모신 현절사도 남아 있다.

 

 

 
▲ 남한산성 국청사. 성을 쌓고 지키는 데는 승군의 힘이 필요했는데, 남한산성

 

  경내에는 모두 9개의 사찰이 있었다고 한다. 남한산성을 거닐면서 어찌 병자호란 당시 일을 생각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돌멩이 하나에도 이 성벽을 지키기 위해 애쓰던 군사와 성안에 갇혀 전쟁이 끝나기만 바라던 힘없는 백성들을 생각한다. 하지만 이율배반적이게도 남한산성을 걷는 일은 슬픔과 함께 즐거움도 동반한다.
 
성밖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이 성벽길을 거닐며 건강을 챙긴다. 성 안팎의 숲이 짙으니 공기는 맑다. 성벽에서의 조망도 빼어나다. 특히 연주봉 옹성에서 바라보면 서울 송파나루 너머로 북한산, 도봉산, 수락산, 불암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먼 병자년 겨울, 청군은 저 들판에 진을 치고서 이 산성에 들어있던 조선군이 서서히 얼어붙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저런 상념에, 비록 산성막걸리가 아니더라도, 남한산성에서 머무는 시간은 예상보다 언제나 더 걸린다. 

 

          

▲ [위]남한산성은 천험의 요새답게 조망이 좋아서 산책객들이  많이 찾는다. [아래]남한산성 연주봉 옹성. 옹성은 성을 지키기 위하여 원형이나 방형으로 쌓은 성을 말한다. 

 

 

남한산성을 벗어나 장승을 만나러 간다. 툭 불거진 퉁방울눈, 주먹코, 삐져나온 송곳니와 앞니…. 시골 마을 어귀에 서있는 장승은 험상궂은 듯하지만 우습고, 성난 듯하지만 웃고 있으며, 위엄을 갖추려 하지만 친근한 모습으로 오가는 사람들에게 길도 일러주고 소원도 들어주던 민간신앙의 상징물이다. 얼굴은 귀신·도깨비를 닮았거나 혹은 노인·장군·선비·미륵·부처 등 천태만상이다. 거기엔 힘든 노동과 착취에도 숭늉처럼 소박한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온 우리 백성들의 심성이 잘 드러나 있다. 가식이나 형식을 배제하고 자연의 신성(神性)을 최대한 살려 만든 게 바로 장승인 것이다.


유래에 대해서는 학설이 많지만 요즘처럼 사람 형상의 장승이 나타난 것은 ‘장승의 르네상스’라 불리는 17~18세기 이후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장승과 곧잘 짝을 이루는 신목(神木)인 솟대는 청동기인들이 신성시했던 공간인 소도(蘇塗)에서 비롯되었으니 수천 년은 되었다. 장승과 솟대의 조화는 세월을 뛰어넘어 조형적으로 완벽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하지만 오늘날 장승과 솟대를 본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1960~70년대 근대화작업을 거치면서 ‘살(殺)전통’의 광풍으로 장승과 솟대가 대부분 부러지거나 뽑혀나갔기 때문이다. 요즘도 점점 사라지고 있어 아마 몇 년이 지나면 장승, 특히 나무로 만든 목장승을 직접 대하기란 쉽지 않을지 모른다. 솟대도 그렇고.


수도권엔 김포·광주·시흥·강화 등 수십 곳에 장승이 남아 있다. 그중에서도 광주 남한산성 주변의 검복리·엄미리·무갑리 등 9개 마을 11곳엔 아직도 온전한 형태의 장승이 남아있다. 그래서 광주는 ‘장승의 보물창고’로 불리기도 한다.


남한산성 답사와 더불어 장승을 테마로 다리품을 파는 일은 재미가 쏠쏠하다. 그 장승 코스는 엄미리 장승~검복리 장승~하번천리 양짓말 장승~서하리 안골·사마루 장승~무갑리 장승으로 이어진다. 이 코스를 따르면서 오랜 세월 대를 이어가며 버티고 있는 장승과 대화를 나누다보면 민초들의 무한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남한산성 동쪽 마을인 엄미리 장승은 분위기로 보나 전통으로 보나 광주에 흩어져 있는 여러 장승 중 최고다. 유래는 병자호란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청군의 눈을 피해 조정과 선을 대는 임무를 맡은 이들이 암문으로 산성을 벗어나던 중 엄씨 성을 가진 선비가 마을 이름을 자신의 성에서 따와 엄미리라 짓고 나라의 임금을 지켜달라는 원으로 장승을 세웠다는 이야기도 있고, 병자호란 후 전염병이 창궐하자 마을 주민들이 마을의 안녕을 빌기 위해 장승을 세우고 치성을 드렸다고도 한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이런 유래담에서 병자호란이 남한산성 백성들에게 끼친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현재 엄미리 장승제는 2년에 한 번씩 지낸다. 370년 가까운 세월을 옛 전통 그대로 지내고 있다 하니 정말 대단하다. 무속이나 민속학을 연구하는 이들이 장승제를 구경하러 오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광주에 장승이 여러 곳이 있으나 장승제가 지금까지 전해오는 곳은 이곳 엄미리와 초월읍 무갑리밖에 없다고 한다.


남한산성으로 가는 도중의 마을 길가에 있는 천하대장군은 사모관대를 하고 퉁방울눈 꼬리를 치켜세운 채 길손을 안내하고 있다. 지하여장군은 개울 건너 기슭에 터를 잡고 있다. 하번천리 양짓말 장승은 잡풀에 뒤덮여 그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인 듯싶고, 서하리 안골 장승은 너무 큰 길가에 있어 주변 환경에 치이는 감이 있다.


그나마 무갑리 장승이 체면치레를 한다. 무갑리 장승은 장승제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장승으로 유명하다. 매우 영험이 있어 지금도 마을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고 있다. 이태마다 음력 2월 초에 길일을 받아 지내는 장승제 날이 잡히면 마을 사람들은 몸을 깨끗이 하는데, 이 기간에 아이를 때린다거나 욕하고 싸움을 하면 장승할아버지가 벌을 내려 몸이 굳어지거나 변고가 생긴다고 주민들은 믿고 있다.


장승 이름은 특이한 남방적제장군(南方赤帝將軍)과 북방흑제장군(北方黑帝將軍). 마을 사람들을 지켜주는 수문장답게 덩치가 크고 얼굴도 우락부락해 보기만 해도 든든하다. 광주에 퍼져 있는 장승 중 가장 기골이 장대하나 주변 공장 건물이나 비닐하우스에 치여 그 매력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다.


광주의 장승을 둘러보면서 나날이 제 자리를 잃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공장 건물, 비닐하우스, 전봇대, 넓은 도로 등에 치이는 장승은 길눈이 밝은 사람들도 겨우 찾을 수 있을 정도였는데, 막상 찾았다 해도 장승의 상태 등은 한숨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엄미리 장승 외에는 대부분 억지춘향처럼 마지못해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면 너무 과장일까? 광주가 진정 옛 명성을 되찾기 위해선 남한산성 하나에만 목을 맬 게 아니라 이런 소박한 유산도 눈길을 주어야 할 것이다. 

 

  

   ▲ 1)산성마을에 있는 지수당. 조선 후기에 처음 지어진 건물이다. 2)남한산   성 성벽을 따라 가을꽃들이 활짝 피었다. 3)남한산성 서문의 가을 풍경. 

 

여기서 잠시 광주의 발음을 짚어보자. 현재 우리는 모국어를 발음할 때 단어의 길고 짧음을 구별하지 않고 쓰는 경향이 강하다. 이는 노인들보다 젊은이들이 심하고, 시골 사람보다 도시 사람이 더 그렇다. 하지만 국어사전엔 각 단어마다 엄연히 발음에 길고 짧음이 있음을 명확히 표기하고 있다. 예를 들어 ‘말’을 발음할 때 길게 하는 말[말ː]은 언어를 뜻하고, 짧게 발음하는 말[말]은 가축인 말(馬)이다. 

 

그렇다면 광주는 어떻게 될까. ‘바른말 고운 말’(대교출판)이란 책에선 우리말의 발음을 ‘광주 생원 첫 서울’이란 속담으로 설명하고 있다. 마침 이 달 답사처가 광주 아닌가. 속담 설명을 들어보자.


‘이는 [광ː주]에 사는 한 생원이 4대문 안의 서울을 처음 들어와 보곤 으리으리한 대궐과 육의전에 몰려든 많은 사람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는 뜻이다. 이처럼 ‘[광ː주] 생원 첫 서울’이란 속담은 처음 대하는 일이라 신기하고 정신이 얼떨떨해 어리둥절해 있음을 이르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광주란 대체 어디를 말하는 걸까. 호남의 광주직할시? 아니면 경기도의 광주시? 광주가 우리나라에 하나만 있다면 별 문제가 없었겠지만 남한엔 두 곳의 광주가 있다. 게다가 몇 년 전 경기도 광주군이 시로 승격되면서 한글 표기로는 구별하기 어려워 혼란은 더욱 커졌다. 다행히 두 고을은 한자가 다르고, 발음도 장단으로 구별된다. 즉 광주광역시는 ‘빛 광(光)’을 쓰고 짧게 발음하며, 경기도 광주시는 ‘넓을 광(廣)’을 쓰고 길게 발음한다. 그러니 이번 향토기행에 찾은 경기도 광주[광ː주]는 ‘과앙주’라고 발음해야 맞는 것이다.


이곳 ‘과앙주’는 경기도임에도 왕릉은 없으나 맹사성·최항·신립·허난설헌 등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인물들의 묘소는 많다. 그중 신립과 허난설헌 두 분의 묘소를 둘러봤다. 먼저 곤지암이란 지명 유래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신립 장군의 묘소를 찾았다. 동자석·망주석·문인석이 장군의 위엄을 지켜주고 있었고, 초월읍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조망도 좋았으나 찾는 이는 별로 많지 않은 듯 한산했다.


그런데 동자상은 누군가 머리를 부러뜨려 시멘트로 붙여 놓았는데, 신립 장군 묘소의 동자상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 아래에 있는 두 묘의 동자상도 모두 목을 부러뜨려 시멘트로 붙였는가 하면, 어떤 동자상은 머리가 없어진 것도 있었다. 이는 일제 때 일본인들의 만행이라 한다.
허난설헌의 묘소는 풍수까진 몰라도 조망은 그럴 듯했다. 하지만 중부고속도로 바로 곁에 있어 질주하는 차량들 소음은 그야말로 고문 수준이었다. 무덤가에 조용히 앉아 요절한 시인의 애절한 시 구절을 되짚어보기란 애당초 어려웠다. 그런데 장승을 찾으러 다닐 때도 그랬지만, 몇몇 유명 관광지를 제외한 광주의 이정표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두 분의 묘소도 이정표가 부실했다. 드물게 있긴 했으나 동네 주민이 아니면 쉽게 찾지 못할 정도로 이정표의 위치는 어설펐다.

 

쫓기듯 허난설헌의 묘를 벗어나 경안천 물줄기를 따라 내려간다. 곳곳에 공사하느라 복잡하긴 했으나 경안천 물줄기는 예전에 비해 많이 깨끗해져 있었다. 고도성장기에 공장과 가축 축사 등이 무질서하게 들어서면서 한때 팔당호 오염의 주범으로 꼽힐 정도로 수질이 나빴던 경안천. 이젠 물고기 뛰어오르면서 생긴 파문이 번지고 물새 날아다니는 물가에서 예전의 냄새 고약하던 죽음의 하천을 기억하긴 어려웠다. 

 

이렇게 경안천을 따라 내려가다 만나는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이곳은 잊혀가는 일본의 전쟁 범죄행위를 고발하고 피해자 할머니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후손들에게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세운 공간이다. 그 옆의 ‘나눔의 집’은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에 의해 성적 희생을 강요당했던 생존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돌아와 모여 살고 있는 삶의 터전. 현재 전국엔 120여 명의 할머니들이 생존해 계시고 나눔의 집엔 10명의 할머니들이 살고 계신다. 임진왜란, 병자호란의 전란에 이어 한일병합으로 다시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운명.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고통을 받았을까.


여기서 다시 먼 병자년 겨울을 떠올린다. 당시 청군이 진을 치고 있던 주변 지역은 쑥대밭이 되었는데, 반상 가릴 것 없이 젊은 여인들은 청군에게 희생당했다. 청군은 여인을 끌고 갈 때 그녀가 안고 있던 아기를 한강에 버렸는데, 이렇게 버려진 아이들의 시체가 한강에 즐비했다고 한다.


인조가 삼전도 수항단에서 항복한 후 청나라에 끌려간 포로의 수는 10만 명을 웃돌았다. 거기엔 여인들도 많았다. 나중에 청나라는 일부 여인 포로들을 나이와 신분에 맞게 값을 매겨 돌려주었는데, 값을 치르고 돌아오는 것을 속환이라 했고, 속환되어 돌아온 여인을 ‘환향녀’라 했다. 하지만 이들의 삶은 귀국해서도 평탄치 않았다. 사회적 편견에 의해 자살이나 이혼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던 것.


역사는 반복이라 하지만 이런 반복은 이젠 끝내야만 한다. 주전파든 주화파든, 보수든 진보든, 위정자들은 국력 신장에 힘쓰고 현실 파악을 정확히 해서 이 나라를 또다시 도탄에 빠뜨리는 일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뼈아픈 역사를 반성하며 천진암(天眞庵) 성지를 찾아 앵자봉(667m) 기슭으로 들어간다. 우리나라의 천주교는 특이하게 발생했다. 아시아 대부분의 나라가 다른 나라 선교사들의 전도로 시작되었으나, 우리나라 천주교는 자발적인 진리탐구의 목적으로 자생한 토종이다. 게다가 부처를 모시는 사찰이나 암자에서 시작된 또 하나의 독특한 사연도 지니고 있다. 그 역사적인 장소가 바로 천진암터다.



 

 ▲ 1)분원백자관 앞에 있는 사옹원 관리 선정비 2)옛 분원초등학교 건물  자리에 세운 분원백자관. 조선 백자의 산실이었던 분원의 내력을 자세히  살필 수 있는 공간이다. 3) 분원마을에서 본 팔당호.  1970년대에 팔당호가 생기면서 분원 도요지는 대부분 물에 잠겼다.

 

    지금부터 228년 전인 1779년 겨울. 앵자봉 자락의 퇴락해가는 천진암엔 10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호롱불을 밝히고 있었다. 바로 당대의 석학 권철신이 주재하는 강학회에 참가한 사람들이었다. 여기엔 권철신의 동생인 일신, 정약용과 그의 형들인 약전·약종, 그리고 이승훈, 이벽 등이 참여하고 있었다. 당시 권철신을 중심으로 한 남인 계열의 소장학자들은 이익의 서학열을 이어받아 독특한 학풍을 유지하며 경기도의 여주와 광주 등지의 사찰에서 강학을 하였다. 처음엔 유교 경전에 대한 연구를 주로 하였으나 당시 전래된 서학도 집중적으로 검토되다가 결국 천주신앙으로 전개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은 1785년, 1791년, 1795년 박해에 이어 1801년 신유박해 때 대부분 순교하게 된다. 

 

한국 천주교회의 발상지인 천진암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곳이었지만 오랜 동안 잊혀있었다. 그러다 200년 가까이 지난 1960년대에 와서야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고, 천주교측에서 1975년 여러 문헌과 마을 노인들의 증언으로 폐사가 된 천진암터를 찾아내기에 이른 것이다. 천진암이 ‘한국 천주교 발생지’라는 타이틀은 이렇게 붙게 되었다.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맞이하는 1979년부터 천진암 성역화사업이 속속 이루어졌다.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 기념 비석’도 세워졌으며, 한국 천주교 창립 선조들인 이벽·권철신·권일신·이승훈·정약종의 묘를 이장해 모셨다. 또 자그마한 암봉을 수평으로 깎아 조성한 넓은 땅에 ‘천진암 대성당’을 짓기로 하였는데, 이는 공사기간이 무려 100년이나 되는 대역사로서 한국 천주교 창립 300주년이 되는 2079년에 완공될 예정이라 한다. 대단히 장하고 축하할 일이다. 

 

그런데 천진암이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가 아니라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평생 다산 정약용 연구에 몸 바친 다산연구소의 박석무 이사장은 <다산기행>(한길사)이란 책의 ‘다산과 천주교 문제’라는 글에서 천진암은 천주교 발상지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천주교측이 천진암을 천주교 발상지로 삼은 근거인 다산의 글엔 그런 사실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박석무 소장은 녹암 권철신 묘지명의 ‘옛날 기해년(1779년) 겨울 천진암과 주어사(朱魚寺)에서 강학하자 눈 속에 이벽(李檗)이 밤에 와서 촛불을 켜놓고 경학을 담론하였다’

라는 대목에서 ‘경학을 담론하였다’의 ‘담경(談經)’은 경학, 즉 사서오경에 대한 담론이지 성경에 대한 담론이 아니라 말한다. 왜냐하면 이승훈이 북경에서 돌아온 1784년 봄(4월15일)에야 다산 형제들도 천주교에 대한 책을 처음 읽었고, 당시 다산이나 그의 셋째형 약종은 그 강학회에 참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약종은 1786년 형 약전으로부터 천주교에 대하여 듣고 글을 읽기 시작했다고 신유년 옥사의 국청에서 밝혔다 한다. 이외에도 다산이 쓴 ‘선중씨 정약전 묘지명’의 1779년 겨울 주어사에서 임시로 거처하면서 강학할 때 외우게 했다는 숙야잠(夙夜箴)·경재잠(敬齋箴)·사물잠(四勿箴)·서명(西銘)은 송나라 이후 정통유학의 높은 사상을 표현한 유학이론일 뿐, 이 글의 어디에도 천주교의 성경을 연구했다는 내용을 찾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박석무 이사장은 글에서 같은 ‘기록에 의하면 천진암보다는 주어사에서 강학회를 더 많이 열었는데, 하필이면 천진암이 천주교 발상지라고 확정한 이유도 알 길이 없다’며 ‘다른 기록을 찾아서 그곳이 발상지라고 말하는 것은 모르지만, 다산의 기록으로 천진암이 천주교의 발상지라고 말하는 것은 분명히 역사의 왜곡’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앞으로 좀더 치밀한 사료 조사가 필요하겠지만, 만약 박석무 이사장의 지적이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면 지금 천주교측에서 천진암에서 대대적으로 벌이는 ‘한국 천주교 창립 300주년’ 대공사는 어찌 되는 것일까.

 

 

한강을 터전 삼아 겨레를 지탱해온 영욕의 고을  

 

광주 여정의 마지막은 조선 최후의 관요가 있던 분원이다. 도요지는 그릇이나 자기를 만들어 굽던 가마터를 말한다. 기록에 따르면 광주의 남종·중부·퇴촌면 일대에 흩어진 광주 조선 백자 도요지(사적 제314호)는 285개소나 된다. 광주시 일대에선 도자기를 굽는 데 필요한 질 좋은 흙이 나오고 나무와 물이 풍부했고, 또 광주는 육로든 뱃길이든 제품 수요지인 한양까지 넉넉히 하루면 도달할 수 있을 정도로 교통이 편리했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으로 해서 광주 일대는 그야말로 도요지로 넘쳐났다. 그러나 문제는 땔감이었다. 10년 정도면 도요지 주변의 땔감은 바닥이 났기 때문에 이리저리 옮길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는 땔감을 조달해 썼는데, 한강변에서 땔감을 도요지까지 옮기는 데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다 1752년(영조 28) 땔감을 조달하기 쉬운 한강변 소내섬 근처 나루에 분원이 영구 정착했던 것이다. 


이후 사옹원의 분원을 비롯해 관요가 밀집되어 있는 광주 일대의 가마터는 조선 백자 생산의 핵심지가 되었다. 이곳에선 왕실은 물론 문인사대부의 아취와 문기(文氣)를 잘 표현한 문방구(文房具)가 많이 제작되었다. 또 세계에서 가장 비싼 도자기로서 지난 1996년 뉴욕 크리스티에서 842만 달러에 낙찰되어 세계를 놀라게 한 철화백자용문호(鐵畵白磁龍紋壺)의 고향이 바로 이곳이다.


하지만 옛 분원마을은 팔당호가 생기면서 대부분 물에 잠겼다. 지금의 분원초등학교 자리가 조선의 마지막 관요가 있던 곳이다. 1752년 분원이 설치되었다가 1884년에 민영화된 이후 조선 전통 백자 가마는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까지 버티다가 밀려드는 일본 제품에 결국 문을 닫고 말았는데, 일제는 1921년 조선의 마지막 관요 자리에 분원소학교를 지었다. 다분히 의도적인 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위]광주 조선백자 도요지. 광주 일대엔 무려 285개소의 
도요지가 산재해 있다. [아래]광주 관요박물관 야외엔 도기를 굽는 가마도 있다.
 

  1973년 팔당댐이 준공되자 분원 도총(陶塚)은 거의 물속에 잠겼다. 그나마 논밭에 뒹굴던 사금파리 조각들이 헐값으로 일본에 팔려가선 고가 장식품으로 전락해 버렸다. 잠기지 않는 가마터 구덩이는 쓰레기장으로 변해 사금파리 조각과 온갖 쓰레기가 뒤섞여 방치되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이 분원마을을 찾아도 초등학교 앞에 있는 사옹원 선정비 외엔 별다른 흔적도 만날 수 없었다. 당연히 도공의 혼백도 도자기의 추억도 잊히는 듯했다.


그러던 차에 2001년 이화여대 박물관
에서 이곳 조사를 벌여 대형 가마터 3곳과 공방터, 25개 층의 사금파리 퇴적층을 찾아내는 성과를 올렸다. 이어 2003년엔 옛 분원소학교 건물에 분원백자관이 들어서 겨우 체면치레를 했다. 이 전시관은 거창하지도 않고 자료도 넘치지 않지만 아기자기하다. 또 전시실 곳곳에 있는, 선택되지 못하고 도공의 손에 깨어진 도자기 파편은 분원의 유장한 역사와 안타까운 현실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붉은 저녁노을 번지는 호숫가. 옛 도공들이 바라봤을 소내섬은 말없이 떠있다. 옛 분원의 도요지는 대부분 저 호수 아래 잠겨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 강물은 이름 없는 도공의 땀방울이 모여 이루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눈물일까? 그렇다면 저 노을은 도공들의 열정? 이윽고 어두워진 밤하늘엔 사금파리 조각 같은 초승달이 떠올라 달무리를 두르고 있다. 마치 둥근 달항아리 도자기를 닮았다. 내일은 아마도 비가 오리라. 분원의 가을밤이 깊어간다.

 

 

<출처>  2007. 11 / 월간산 457호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