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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경북. 울산

호젓한 비구니 도량 김천 청암사의 들꽃

by 혜강(惠江) 2007. 5. 22.

경북 김천 청암사

호젓한 비구니 도량 김천 청암사의 들꽃

 

·사진 남상학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 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이 시는 백석이 쓴 ‘여승(女僧)’의 한 구절로 ‘여승에 대한 슬픈 인상’을 형상화한 것이다. 비구니 도량을 찾아가는 길에 머릿속에 떠올려 본 대목이다.

 

  경북 김천과 경남 거창의 경계에 우뚝 솟은 수도산(불령산·1317m) 깊은 자락에 자리 잡은 청암사(靑岩寺). 아름드리 나무들이 즐비하고 청류가 흘러내리는 계곡을 걸어 올랐다.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서인지 파란 이끼를 가득 머금은 바위들, 깨끗하다 못해 존재의 유무를 인간의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투명한 계곡물, 파란 하늘을 모두 가려버린 잣나무와 소나무들이 낯선 이방인을 반겼다. 

 

 


  청암사는 가야산 단지봉에서 덕유산으로 이어지는 불령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경북 김천시 증산면 평촌리. ‘산속의 울릉도’라 부르는 외진 곳인데 절집은 오래된 그리움처럼 정갈하다. 맑은 시냇물 소리에 귀를 씻고 산문에 들면 아름드리 청솔이 늘어선 자리에 소슬하게 일주문이 서 있다.

 

 

 

  우리 산사에 이렇게 아름다운 길이 남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청암사는 빛이 난다. 청정하게 누워 있는 그 길은 이끼 낀 푸른 바위처럼 신령한 자취를 지니고 있어 불령동천(佛靈洞天)이라 부른다. 

   청암사 계곡은 조촐하다. 아직은 발길이 뜸해 본래 제 모습을 잃지 않은 게 그렇고 , 10여분이면 절 안에 들어설 수 있는 길이가 그렇고, 들어찬 나뭇잎 사이로 비쳐드는 햇빛이 그렇고, 곱게 이끼가 앉은 돌들이 바닥을 메우며 일주문을 지나도록 이어지는 모습이 그렇다. 거기에 여승의 손끝 보살핌을 받고 피어나는 들꽃이 있어 더욱 정갈하다. 

 

 

 

  청암사는 신라 헌안왕 3년(859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한 고찰이다. 그런데 청암사는 어지간히 불이 잦았다. 조선 인조 25년(1647년)때 큰 화재로 절이 완전히 불타버린 것을 다시 재건했다. 그러나 이로부터 130여년 뒤인 정조 6년(1782년) 다시 불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때도 바로 다시 세웠다.  의룡(義龍)·허정(虛靜)·환우(喚愚) 스님이 중창했다.

   그 뒤 점차 쇠락해 가던 청암사가 새로워지는 것은 광무1년(1897년). 대운(大雲)스님이 8년에 걸쳐 청암사를 모두 보수하고 극락전을 새로 지으며 청암사는 제2의 중흥기를 맞았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보수를 끝낸 지 6년만인 1911년 9월 다시 원인 모를 화재로 또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대운스님은 1912년 봄에 청암사를 다시 세웠다. 그때의 모습이 지금 청암사다. 

   조선 영조 때 대강백(불교계의 대학자이자 원로를 일컫는 말)인 회암 정혜 스님 이후 우리나라 불교의 정신적인 가르침이 가득한 도량으로 우리나라 교학 불교의 전당으로 자리 잡았고, 근세에는 박한영 스님뿐 아니라 많은 학승들이 거쳐 간 사찰이다. 고봉스님이 머무르던 1970년대까지만 해도 전통강원으로서의 맥을 이어왔으나 그 뒤로 쇠퇴하였다. 


   지금은 1987년 비구니 승가대학이 만들어지면서 130여명의 비구니들이 속세와 인연을 끊고 오직 불심을 위해 수련하는 소박하고 정갈한 사찰이다.  소박하다 못해 초라한 듯한 일주문에 들어섰다. 일주문의 글씨는 근세의 명필 성당 김돈희 (惺堂 金敦熙  1871 ~ 1936)의 것이라고 한다.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에 들어서면 고색 짙은 사적비와 고승들의 비가 줄지어 서 있다.

 

 

 

  왼쪽이 회당비각, 오른쪽이 대운당 비각이다. 화엄학에 정통한 강백(講伯, 불교용어로 강사의 존칭)으로 이곳에서 입적한 회암 정혜(晦庵 定慧, 1685 ~ 1741) 스님이 회당비각의 주인공이다. 소진했던 청암의 맥을 일으켜 세웠던 중창주와 이름 높았던 강백들의 자취이다.  수많은 각자가 새겨진 바위벽 옆에는 '우비천'이란 작은 샘물이 있다.

  천왕문을 지나면 이런저런 이름들이 들어찬 바위 사이로 멋없이 좁기만 한 다리가 놓였다. 그래도 이 다리에서 밑으로 흐르는 물과 그 물이 쏟아져 나오는 커다란 바위를 바라보는 맛은 상쾌하다. 바위에 새겨진 많은 이름들 가운데 최송설당은 청암사와 관련이 깊다. 대운스님이 청암사를 두 차례에 걸쳐 중수하고 중창할 때의 대시주가 바로 이 사람이었다.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어제 내린 비로 더욱 짙푸른 숲으로 거짓말처럼 햇살을 쏟아낸다. 옛 대갓집 마당처럼 정갈하게 빗질된 절 마당에서 청암사의 정갈함이 느껴진다. 한 비구니가 마당을 지나치다 합장을 한다. 그 모습이 미망 속에 묻혀 사는 속인들에게는 새벽 강을 건너온 바람처럼 신선하다.


  번뇌의 끝을 향해 초연히 걸어가는 구도자의 자세가 담겨 있기 때문일까. 한지에 먹물이 번져나가듯 뜻 모를 애틋함이 가슴을 적신다. 파르라니 깎은 머리, 두 볼에 흐르는 고운 선에서 느껴지는 구도자의 기품에 이내 고개가 숙여진다. 

 

 

 

   청암사는 계곡을 사이에 두고 두 구역으로 나뉜다. 계곡 북쪽의 낮은 곳에 남향으로 자리잡은 대웅전과 그 남쪽 언덕 위의 보광전이다. 크지 않은 대웅전이 뒷산에 기대어 섰고, 크기는 다르지만 새 을(乙)자로 모양이 같은 두 건물, 육화로와 진영각이 좌우에서, 그리고 이층 누각 정법루가 정면에서 이 대웅전을 감싸고 있다.


  그 밖의 부속건물은 육화로와 진영각 옆으로 앉았다. 자칫 허전하고 속까지 드러나는 건물배치에서 정법루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 보인다.  안팎을 적절히 차단해줄 뿐 아니라 각 건물의 앉음새를 한결 짜임새 있게 해주는 구실을 하는 것이다.

 

 


   대웅전에서 보광전으로 가는 길은 마치 잘 가꾸어진 정원을 걷는 기분이다. 홍매화가 예쁜 얼굴로 반기는 오솔길, 길섶에 핀 이름 모를 야생화, 이끼 가득한 돌로 정성스레 쌓은 돌담, 무엇인가 생명을 느끼게 하는 텃밭 등 어느 사대부가의 고택을 연상케 한다. 자연이 곧 절이고 절이 곧 자연인 듯했다. 

   무엇인가 커다랗고 웅장함으로 인간을 짓누르는 건물이 하나도 없다. 고만고만하며 단청을 입히지 않아 나무의 결이 그대로 들여다보이는 건물이 대부분이다. 어쩌면 이렇게 자연과 함께 숨 쉬며 살 수 있을까.  

   사실 우리는 파헤치고 잘라내고 다시 거창하게 만드는 일에 익숙해 있다. 허지만 편안하진 못했다. 있는 그대로, 자연 그대로를 지키고 살아가는 것이 제일이라는 교훈을 여기서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청암사는 절이라기보다는 편안한 마음의 안식처 그 자체였다. 

 


  예정에 없이 김천에 와서 찾아든 청암사, 그 동안 산천을 주유하면서 여러 사찰을 다녀보았지만 이곳 청암사의 느낌은 정말 남다르다는 생각을 해 본다.  첫째는 사찰로 들어가는 길이 울창한 계곡을 끼고 있다는 것과 둘째는 야생화로 단장된 사찰 경내의 우아한 멋이었다.

 

  훼손되지 않는 자연경관 속에 천년고찰의 신비로움을 간직한 곳에서 잠시라도 자연과 함께 숨 쉰다는 것이 이토록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은 나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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