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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목사 고을’ 나주(羅州)의 문화유산 둘러보기

by 혜강(惠江) 2007. 4. 2.

 

 ‘천년목사 고을’

나주(羅州)의 문화유산 둘러보기

- 남고문, 정수루, 목사 내아와 금성관, 나주향교, 고분 - 

 

 

·사진 남상학

 

 

 

 

  나주는 강진, 해남, 완도로 가는 길목으로 여기고 여러 차례 지나친 적은 있지만 관광의 목적지로 정한 적이 없었다. 그러던 차 모처럼 기회를 얻어 나주의 속살을 얼핏이나마 둘러볼 기회를 얻게 된 것은 큰 행운이었다. 왜냐 하면 나주는 거의 천년 동안  교통ㆍ군사ㆍ행정의 중심지로서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어 당 시대의 문화유산을 많이 지니고 있었기에 말이다. 비록 짧은 시간 주마간산격으로 둘러본 나주의 모습이지만 예사롭지가 않았다.


‘천년목사 고을’ 나주

 


    영산강 삼백 리 어머니 같은 젖줄이 있어 
    선사인들은 이 유역에 등을 붙일 자리를 잡았겄다. 
    돌창과 돌도끼, 석검, 돌화살촉 하나하나에서 무문토기 전각 하나까지 
    그분들의 빛나는 예지를 읽는다. 
    이곳은 마한(馬韓) 땅 불미지국(不彌支國)

    -  허연의 ‘나주찬가’ 중에서  -


   노령산맥이 서남쪽으로 뻗어 내려와 나주에 이르러 진산(鎭山)인 금성산(錦城山)을 이루고 그 줄기가 신걸산, 백룡산이 되고 또 한 가닥이 동남쪽 다도ㆍ봉황쪽으로 흘러 덕룡산의 줄기가 되어 남평의 월현대산이 되고, 한줄기는 영산포로 뻗어 가야산을 형성하고 또 한줄기는 반남의 자미산, 동강의 백련산을 이룬다. 그리고 그 안에 나주평야가 자리하고 노령의 골짜기마다에서 흘러내린 열두 고랑의 맑은 물이 영산강을 이룬다. 

 

 

금정산



   나주는 진산인 금성산(錦城山)의 정기를 한껏 호흡하여 영산강가에 광활하고 비옥한 나주평야를 뽑아내어 예로부터 곡창 호남의 상징으로 자리를 굳혔다. 또 영산강을 통해 서해로의 뱃길이 열려있어 오래 전부터 독자적인 세력이 자리를 잡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런 까닭으로 나주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약 천년 동안 전남지역의 대부분을 관할하면서 교통ㆍ군사ㆍ행정의 중심지였기에 나주는 어느 곳에 비할 바 없이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현재 나주에서 발견되는 고분들이 이를 충분히 증명하고 있다. 그 만큼 나주는 그 역사를 반영하는 많은 문화유산이 남아 있어 당시대의 모습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다.

   이곳 나주의 길가에서 볼 수 있는 안내판 중 하나가 '천년 목사 고을 나주'라는 것이다. 나주는 고려 성종 때부터 조선 말기까지 2군 8현을 거느린 커다란 고을이었다. 나주가 큰 고을이 된 것은 고려 왕건이 나라를 세울 때 이곳 사람들의 덕을 보기도 했거니와 영산강 덕도 간과할 수 없다. 영산강이 나주평야를 풍요롭게 적셔준 데다 목포에서부터 뱃길이 이곳까지 이어졌기 때문이다.  

 

 


나주읍성과 사대문 복원 

  나주읍성은 조선 초기에 축성된 호남의 대표적인 읍성으로, 나주시 남내, 성북, 금남, 향교동 일대 평지에 타원형으로 돌로 쌓은 성이다. 조선 초기 김계희 목사가 부임하던 때인 1457~1459년 사이에 축성한 것이다. 

  서울의 도성과 같이 동서남북 4대문과 객사 동헌 등 각종 시설을 갖춘 석성의 둘레는 3.7㎞, 면적은 294,753평에 이르렀고, 동·서·남·북 네 개의 성문을 설치하고 성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원래는 성 밖에 나무로 만든 목책이 있어 이중으로 방어하였으나 남아 있지 않다. 나주읍성 사대문 명칭은 동점문(동, 東漸門), 서성문(서, 西城門), 남고문(남, 南顧門), 북망문(북, 北望門)이다. 일제강점기에 철거되었던 남고문은 1993년에, 동점문은 2006년에 복원되었으며, 발굴 조사를 통해 거의 완벽한 상태의 유구가 확인됨으로써 조선시대 읍성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나주시는 ‘역사도시 나주시 만들기’ 사업으로 남은 나주읍성 사대문 복원을 완료하였다. 사적 제337호로 지정  

 

 



정수루 (正綏樓) 


  정수루는 나주의 관아를 통행했던 관문(官門)으로서 선조 36년(1603년) 목사 우봉룡이 건립했다고 하는 기록과 1754년에 재직한 목사 민백남이 건립했다는 두 가지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구조나 양식 등으로 보아 19세기에 크게 중수된 건물로 여겨진다. 이곳에는 북이 걸려 있어서 시간을 알려주기도 했다고 하며, 최근까지 정수루 아래로 사람과 차량이 왕래하였으나 문화재 보호를 위하여 보호망을 설치하고 우회시키고 있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으로 1층의 양 측면만 벽체로 구성되고 있고 나머지는 모두 개방되어 있다.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낮은 원형 주춧돌(전면열에는 장초석을 놓음)위에 원형기둥을 세우고 2층 바닥에는 장마루를 깔았다. 2층 기둥 위로는 주두를 놓고 창방을 걸었으며 그 위로는 기둥 사이마다 1구씩의 꽃받침을 배치하였다.

   이곳을 지나면 나주목 관아인 동헌으로 들어가며 외동헌과 내동헌이 위치하고 있었다. 현재는 내동헌인 목사내아만 남아 있다. 정수루 주변으로는 목사를 보좌하던 향리들의 집무처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으며, 동쪽으로는 나주목의 궁실인 나주객사 금성관과 금성관의 정문인 망화루 등의 건물이 있었다. 문화재자료 제86호.

 

 




목사 내아 (牧使 內衙) 

 

  조선시대 때 목사가 정무를 보던 동헌(東軒)의 근처에 있던 살림집이다. 즉 관사로 읍 역내에 있었던 많은 관아 건축 중에서 객사인 금성관과 관문인 정수루 등과 함께 현재 남아있는 건물이다. 내아의 건립연대에 대하여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고 다만 문간채가 고종 29년(1892)에 건립된 것으로 보아 19세기 현재의 모습으로 건축된 것으로 여겨진다. 

  건물의 위치는 고을의 수령이 집무를 보던 옛 동헌의 정문이었던 정수루에서 서쪽으로 약 65cm되는 지점에 정남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건물의 구조는 살림채이기 때문에 주로 상류주택의 안채와 같은 평면을 이루고 있다. 현재 본채와 문간채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문간채는 본채와 20cm의 거리를 두고 전면에 위치하고 있다.  

  1872년(고종 9)에 그려진 나주의 고지도를 보면, 다른 관아 건물은 모두 그려져 있으나 내아가 그려져 있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나중에 내아가 만들어졌다는 것을 나타낸다. 문간채가 1892년에 건립된 것으로 보아 그 무렵에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 이후 군수 관사로 사용하면서 고쳐서 원래의 형태를 많이 잃어버렸다. 그러나 객사와 아문루, 내아가 함께 아직 남아 있어 관아 건축의 원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문화재자료 제132호.

 


 

금성관(錦城館) 


   금성관은 나주목의 객사 건물이다. 객사란 고려~조선시대 때 지방 궁실로써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와 궐패(闕牌)를 모셔두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고을의 관리와 선비들이 모여 망궐례(望闕禮)를 올리며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리들을 양쪽의 익사(翼舍)에서 유숙하게 하던 곳이다. 

   지방의 도읍지에 관아건물이 들어서면 일반적인 경우는 중심축선상에 동헌과 정문, 루문 등이 자리하고 주변에 육방관속의 건물과 내아들이 위치한다. 나주읍성 내에는 나주목사내아(內衙), 관문(官門)인 정수루(正綵樓), 나주향교 등이 인근에 있다. 금성관 정문은 망화루(望華樓)였는데 일제시대에 없어졌으나 최근 복원되었다. 


   금성관은 조선 성종 6~10년(1475~1479)사이에 목사 이유인(李有仁)이 건립했다 한다. 이후 선조 36년(1603)에 크게 중수를 하고, 고종 21년(1884) 박규동 목사가 3창을 했다. 최근에 와서는 1963년 9월에 보수하였고, 다시 1976년에 완전 해체하여 거의 원형에 가깝도록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창호ㆍ마루 등 내부를 개조하여 나주군청 청사로 사용되면서 유리창 문을 달아 쓰기도 했으나 현재는 본래의 모습을 찾았다. 

   금성관은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단층 팔작지붕이다. 그러나 칸 넓이나 높이가 다른 건물보다 크게 되어 정청으로서의 위엄을 더한다. 금성관의 공포형식은 익공형을 하고 있다. 원래 익공집은 궁궐이나 정전 등의 부속건물과 누각, 정자 등에 많이 사용되었다. 지방유형문화재 제2호.


    금성관을 둘러보기 위하여 입구에서 머뭇거리는데 나주 시민인 나만주(羅萬住, 59세)씨를 만났다. 타고 가던 자전거를 멈춰세우고, 자원해서 나주의 내력과 역사적인 유물, 유적, 특산물 등에 대하여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의 열정적인 해설을 들으며 무척 나주를 사랑하는 시민임을 느낄 수 있었다.

 

 



나주 향교(羅州鄕校) 

 

  공자를 중심으로 한 27위의 위패를 모신 공간이다. 국내 현존하는 대성전 건물 가운데 규모나 격식 면에서 제일의 것으로 유교건축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대성전 벽흙은 공자님의 고향에서 가져온 것이라 전하며, 서울의 성균관을 임진왜란 이후 다시 지을 때 나주향교 대성전을 참조하여 지었다는 말이 전해온다.

 

  공포(拱包)를 기둥 위에만 배치한 주심포집 계통의 건축이다. 그러나 쇠서의 형태는 이미 익공(翼工) 비슷하게 변했으며 기둥과 기둥사이의 창방위에는 익공집에서 보는 바와 같이 화반들이 배치되었다. 전면은 한칸통을 개방하여 퇴칸으로 하고 그 안쪽에 높은 기둥을 세워 중앙과 좌우 양단간에 각각 문비(門扉)를 달았으나 출입문이 없는 기둥칸에는 큼직한 살창을 만들었다. 

   초석은 상면에 연판(蓮辦)을 새긴 장식을 보였다. 내부는 마루를 깔았고 후면에 고주(高柱) 4개를 한 줄로 세웠으며 천장은 연등천장이다. 지붕 가구는 앞 뒤 고주에 대량(大樑)을 걸치고 그 위에 동자주형(童子柱形)의 대공을 세워 종량을 받쳤다. 이 동자주형 대공은 상부에 접시받침과 첨차와 양봉형을 갖춘 형식이다.


  종량(宗樑)위에 배치한 대공은 파련대공(波蓮臺工) 비슷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공포와 옥개 가구재의 세부에 나타난 특징으로 미루어 보아 조선중기의 건축으로 짐작된다. 또한 나주객사인 금성관의 공포구조와 비슷한 점이 많다. 유형문화재 제128호

 

 



반남고분군


   나주는 삼한시대 이후의 대형 무덤이 여럿 발굴되어 반남면 대안리·신촌리·덕산리와 다시면 복암리, 영동리 고분군 등이 사적으로 지정되어 영산강 유역이 고대문화의 보고임을 입증하고 있다.

   반남고분군은 신촌리, 덕산리, 흥덕리, 대안리에 걸쳐 있는 고분군을 아울러 일컫는 것으로서, 백제의 영산강 유역 진출 이전에 자리 잡고 있던 토착 마한세력자의 무덤으로 축조 연대는 3~6세기로 추정되며, 반남면 일대 무덤 39기에서는 그동안 국보 제295호 금동관을 비롯해 금동신발, 환두대도 등 모두 1만 2573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사적 제 76, 78호로 지정되었다. 이 외에도 사적 제404호로 지정된 복암리 고분은 복암리 서쪽 낮은 구릉에 분포되어 있는 4기의 삼국시대 고분을 일컫는다.

 

 

 

  나주는 이 외에도 조선 중종15년(1520) 귀래정 임봉이 건립한 정자 영모정(기념물 112호)이 있고, 거유(巨儒)  허목(1595~1682)의 도학정신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미천서원(기념물 29호), 세종 때 호조참판을 지낸 조주(趙注)의 별서 옛터인 벽류정 등이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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