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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경북. 울산

간절곶, 새천년의 해가 가장 먼저 뜨는 곳

by 혜강(惠江) 2007. 2. 21.

 울산 울주 간절곶

천년의 해가 가장 먼저 뜨는 곳 

 

글·사진 남상학

 

 

 

  새해아침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뜨는 울산시 울주군 서생면 대송리에 위치한 간절곶(동경 129도 21분 46초, 북위 35도 21분 22초) 이곳은 매년 새해 해맞이 행사가 열리는 곳이다. 

 

  울산시 울주군 서생면 대송리에 위치한 간절곶은 간절곶 등대가 잇는 근방의 넓은 지역이 바다에 불쑥 튀어 나온 일대를 범위(486.636㎡=약 147,000평)로 하고 있다. 자세히 말하면 등대가 있는 서남의 넓은 땅과 평리 등이 이에 속하고 동북으로는 송정과 솔개마을까지도 곶의 범위에 들어간다.

  간절이란 이름은 먼 바다를 항해하는 어부들이 동북이나 서남에서 이 곶을 바라보면 긴 간짓대(긴 대로 만든 장대)처럼 보인다고 해서 ‘간절끝’ ‘간절갑’이라고 불렀던 것인데 간절(艮絶)로 표기해 온 것이다.

 

 

 

  ‘갑’이라 함은 ‘곶’으로 ‘곶(串)’이란 육지가 뾰족하게 바다 속으로 돌출한 부분을 가리키는 순수 우리말로 예전 신라 때부터 ‘고차’ 또는 ‘곶’이라고 써 왔다.  또한 이곳에는 '새우덤'이라는 육지에서 가장 많이 튀어 나왔던 바위가 있었으나, 해상의 안전을 위해 폭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간절곶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탁 트인 바다를 보게 된다. 그리고 등대공원. 공원은 그리 화려하지는 않지만 간절곶의 바다 풍경은 그야말로 일품이다. 그 하나만으로도 간절곶의 가치는 충분하다.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구운 해야 솟아라.  산 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애띤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중략)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어고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 자리에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모여 한 자리에 앉아, 애띠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

 

  - 박두진의 시 '해'에서

 

 

 

  박두진의 '해'는 순수와 광명과 평화에의 의욕을 나타낸 작품이다.  이상적 우주 구현을 노래하는 마음은 시인의 마음만이 아닐 것이다. 우리 모두의 염원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반도에서 해가 제일 먼저 뜨는 곳이라는 것 또한 간절곶을 유명 관광지로 만든 것에 큰 몫을 차지했다. 간절곶의 풍경은 등대, 바다, 장승 그리고 기다림으로 요약된다. 

  공원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황금돼지상 조형물’이다. 또  '간절곶 소망의 우체통'이다. 금년이 바로 돼지의 해라 새로운 이벤트를 마련한 듯했다.  ‘희망의 우체통’에 들어가는 사람들, 황금돼지 앞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다. 새천년에 거는 소망이 간절함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관광객들의 무분별한 행위로 황금돼지상의 일부가 파손되어 흉물스런 모습으로 일그러져 있는 것이 눈에 거슬린다. 자료를 보니 힘이 없는 스치로폼을 사용한 것이었다. 황금돼지상을 만든 착상은 좋았는데 너무 부실한 것이 흠이다. 해마다 바꾼다곤 하지만 너무 볼품없는 1회용이었다.

 

 

 

  지난 12월 2일에 세워졌다는 '희망의 우체통'은 높이 5m에 가로*세로 각각 2.4m에 이르는 세계 최대 규모의 우체통이다. 간절곶 해돋이 관광객들이 새해의 간절한 소망을 편지에 담아 우체통에 넣을 수 있도록 마려한 것으로 상반기까지 운영한다고 한다. 큰 우체통 안으로 들어가면 편지를 넣을 수 있는 우체통이 있는데 그 옆에 준비되어 있는 우편엽서에 사연을 적어 넣으면 주소지까지 무료로 배달된다는 것이다. 


  이곳에는 간절곶등대와 장승들, 소년상, 새천년 비상비, 박제상(朴堤上)을 기다리는 망부석이 있다.  간절곶등대는 동해남부 연안을 지나는 선박이 안전하게 항해하기 위한 바다의 길잡이로서 1920년 3월에 건립되어 운영되어 왔으며, 새천년의 해가 제일 먼저 뜬 해맞이 등대를 영원히 기념하고 시민들에게 열린 친수문화공간으로 개방하고자 2001년 5월 현재의 모습으로 재정비되었다.

 

  철근콘크리트로 건축된 백색팔각형으로 높이 17m, 10각 기와지붕으로 되어 있다. 매년 1월1일 동북아 대륙에서 가장 먼저 해맞이를 할 수 있는 곳에 한옥 전통 지붕양식을 도입한 조형미가 뛰어나다. 


  망부석은 신라 내물왕 때부터 눌지왕 때까지 활동한 신라의 충신 박제상의 이야기와 관계가 있다. 망부석(望夫石)의 대표적인 설화는 신라시대 박제상(朴堤上)의 아내가 치술령(審述嶺)에서 죽어 망부석(望夫石)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는 백제를 견제하기 위하여 402년(실성왕 1) 일본에 내물왕의 셋째아들 미사흔(未斯欣)을, 412년 둘째아들 복호(卜好)를 고구려에 파견하여 군사원조를 요청하였으나 두 왕자는 인질이 되어 돌아오지 않았다. 내물왕의 큰아들 눌지왕은 즉위한 뒤 두 동생을 구출하기 위해 당시 양산(梁山)지방의 토호세력으로서 삽량주간의 직책을 맡고 있던 박제상을 고구려와 일본에 보냈다. 

 

  두 왕자를 구출시킨 박제상은 일본에서 잡혀 충절을 지키다 참형을 당하여 죽었다. 이를 안 눌지왕은 그를 대아찬으로 추증하고, 부인을 국대부인(國大夫人)으로 책봉하였으며, 둘째딸을 미사흔의 아내로 삼게 하였다. 이 망부석은 신라 충신 박제상의 부인과 두 딸이 치술령에 올라 애절하게 남편을 그리워하던 마음을 담은 것이다. 이 시는 김종직(金宗直 ; 1431~1492)이 신라의 박제상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여 지은  시다.


    
치술령 고갯마루 일본을 바라보니
    하늘에 맞닿은 푸른 바다 가이 없네 
    우리 님 떠나실 제 손을 흔드시더니 
    살았는가. 죽었는가. 소식도 끊겨
    소식이 끊기고 길이 헤어졌으나 
    죽든 살든 언젠가는 서로 볼 날 있으리라.
    하늘 향해 울부짖다 망부석이 되었으니
    매운 기운 천년토록 허공 위에 푸르리라.

    

    審述嶺頭望日本(심술령두망일본)

    粘天鯨海無涯岸(점천경해무애안)

    良人去時但搖手(량인거시단요수)

    生歟死歟音耗斷(생여사여음모단)

    口音耗斷長別離(구음모단장별리)

    死生寧有相見時(사생녕유상견시)

    呼天便化武昌石(호천편화무창석)

    烈氣千年干空碧( 열기천년간공벽)
   

    - 김종직(金宗直 ; 1431~1492)의 ‘치술령 망부석(審述嶺望夫石)’

 

 

 

  그런데 이 망부석은 출어한 어부의 무사귀환을 비는 가족의 간절한 소망도 함께 담았다. 더불어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새천년의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는 울주군민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 한다.  

 

 

 

 

 

   간절곶 주변에는 유채꽃과 진달래 꽃 등 계절별로 꽃을 심어 주변 환경과 어우러져 수려한 자연경관을 자랑해서 신혼부부들이 자주 찾는 명소이기도 하다. 더욱이 주위에 울창한 송림, 기암괴석 뿐 아니라 여름이면 울산에서 가장 많은 인파가 모여드는 진하해수욕장이 바로 옆에 있으며, 서생포 왜성과 이길봉수대와 온양옹기마을 등의 관광명소가 즐비하다.

  

 

- 진하해수욕장과 명선도 -

 

 

   간절곶에서 5분 거리인 진하해수욕장은 백사장길이 2km, 사장면적 96,000m²로 5만여 명을 수용할 수 있다. 맑은 물, 고운 모래, 푸른 송림이 잘 어우러져 있을 뿐만 아니라 바로 해수욕장 앞에 그림 같은 섬 명선도가 있어 운치를 더해주는 해양관광지다. 


   백사장이 넓고 접근성이 용이하여 울산시민 뿐만 아니라 인근 부산지역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동해남부 최고의 해수욕장이다. 시즌에는 명선도에 조명을 밝혀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또 인근에 있는 서생포왜성은 임진왜란 초인 1592년(선조 25년) 7월부터 1593년(선조 26년)에 걸쳐 일본장수 가토오 기요마사가 지휘하여 돌로 쌓은 16세기 말의 전형적인 일본식 석성이다. 해발 200m 산꼭대기에 본성을 두고, 아래로 내려오면서 중간 둘레에 제2성, 가장 아래에 제3성을 두었다. 성벽의 높이는 6m, 기울기는 15도로 성의 전체 모습은 직사각형이며, 본성에는 장군 처소인 천수각과 우물인 장군수가 있었다.

 

 

- 서생포 왜성 -

 

 

  1594년(선조 27년) 사명대사가 4차례에 걸쳐 이곳에 와 평화교섭을 했으나 실패했다. 1598년(선조31년) 명나라 마귀 장군의 도움으로 성을 다시 빼앗았고, 표당을 세웠으나 일제시대에 파괴되어 지금은 흔적도 없다. ‘서생포진성도:1872년에 작성됨’을 보면 이 성의 일부가 우리의 진성으로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새천년의 해가 제일 먼저 뜬다는 간절곶에서 새해 소원을 다시 빌어보고 우리가 탄 차는 이제 북으로 이동, 감포와 구룡포를 거쳐 호미곶으로 향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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