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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광주. 전남

해남 울돌목 우수영국민광광지와 벽파진

by 혜강(惠江) 2006. 11. 15.

 

 해남 울돌목 우수영국민관광지와 벽파진

이곳에 서면 성지다운 엄숙함이 감돈다. 

 

글 : 남상학

 

 

 

 


  해남의 서쪽 끝자락, 지도에서 목포를 찾은 다음 바닷길을 따라 남쪽을 쳐다보면 진도대교가 조그맣게 나타난다.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큰 섬인 진도와 육지를 연결하는 통로가 되는 곳이다. 
육지의 남단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 그러나 이곳은 진도대교라는 이름보다도 대교 아래의 작은 해협이 더 유명한데 이곳이 바로 울돌목이다. 

  좁은 해협 울돌목은 물살이 거세고, 조수 때면 우레와 같은 바다 울음소리를 내어 ‘울도’ 또는 ‘울돌목’ 혹은 '명량(鳴梁)'이라고 불러 왔다. 폭이 294m, 하루 두 번씩 물 흐름의 방향이 바뀌는데, 그 흐름이 동양 최대의 유속인 11노트의 조수가 흘러 바다라기보다는 홍수가 난 큰 강물줄기처럼 보인다.

   물길이 소용돌이 쳤다가 솟아오르면서 세차게 흘러내어 그 소리가 해협을 뒤흔들어 잠시만 들여다보아도 현기증이 날 정도이다. 매월 음력 초하루와 보름 때의 물살이 가장 세차서 고요한 밤이면 10리 밖에서도 그 물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이 유명해진 것은 이충무공의 3대 해전중의 하나인 명량대첩지로 12척의 조선수군이 133척의 일본수군을 무찌른 역사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울돌목의 폭은 한강 너비 정도의 294m 내외. 물길은 동양 최대의 시속을 지닌 11노트의 조수가 흐른다.


  여기에 바닥이 평탄치 않아 물이 용솟음쳐 오르기까지 해 배가 쉽사리 오르내리기 힘든 곳이다. 또한 울돌목은 하루 두 번 조수간만에 따라 물이 역류하는 신비한 곳으로도 이름나 있다.

 

 

 


  이러한 지형적 특성을 이용해 이순신 장군이 역사상 유래 없는 대승을 거두고 임진왜란의 기세를 완전히 바꾸어 놓을 수 있었다. 당시 감옥에서 풀려나와 다시 삼도수군절도사가 된 이순신은 원균이 버려 둔 패선 12척을 거두어 1597년(선조30년) 8월 29일 일찍이 군수(郡守)로 임명된 바 있는 진도 땅 벽파진에 도착하였다가 일본 수군의 대선단이 접근하고 있다는 정보에 접하자 진(陳)을 벽파진에서 울돌목으로 옮기고 적의 내습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1597년 9월 16일 새벽 적의 대함대가 어란포를 떠나 명량으로 공격해 오고 있었다. 이순신 장군은 먼저 마로해에서 적선과 부딪혀 대항하는 척하다가 패주하는 양 울돌목 쪽으로 퇴선 유인작전을 펼쳤다.


  한편 그는 위장전술로 독굴산에 마람을 이어 노적봉을 만들고 백토를 씻어 쌀 뜨물인양 울돌목에 흘려보내며, 망금산 산정에서는 수백 명의 아녀자들이 손과 손을 마주 잡고 승전고를 울리며 강강술래를 하도록 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이순신 장군의 총공격 명령이 떨어졌다.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必生則死)!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살 것이요, 살기를 작정하고 싸우면 반드시 죽을 것이니라!”  

 

 

 

  동시에 울돌목 양쪽에 설치한 쇠사슬감기틀을 감아 당기고, 풀숲에 숨었던 병졸들은 일제히 화살을 퍼부었다. 사방의 전세를 살핀 왜적들은 자기들이 전략에 빠져들었구나 생각하고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바로 이때 조류가 바뀌면서 도망가는 일본어선은 울돌목에 쳐둔 철책에 걸려 침몰되고 불화살에 맞아 물속으로 뒤집히는가 하면 조류에 밀려 넘어지기도 하였다. 이렇듯 아비규환 속에 어선 12척으로 울돌목의 지형을 이용한 작전을 펴 왜선 133척을 일시에 수장시킴으로서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것이다.


    "만일 호남이 없었더라면 어찌 나라와 겨레를 보존하였으리오.(若無湖南是無國家)"

 

 


 

   이 충무공의 유명한 말은 이 명량대첩의 승리를 두고 한 말이다. 따라서 울돌목은 호국의 얼이 살아 숨 쉬는 민족의 성지가 되었고, 진도대교와 그 아래로 흐르는 물살로 인하여 더욱 성지다운 엄숙한 분위기마저 느끼게 한다.


  해남군에서는 임진왜란의 최후의 교두보이자 최대 격전지였던 울돌목을 성역화하고, 충무공의 구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1986년에 이곳을 국민관광지로 지정했다.  그 후 1990년에 명량대첩 기념공원으로 조성하면서 명량대첩탑, 명량대첩의의비, 어록비, 사당, 전시관, 각종 조형기념물 등을 세웠다.

 

 

 

 


  충무공 유물전시관에는 거북선모형, 거북선 절개모형, 판옥선모형, 각종 무기
류, 명량대첩비 탑본, 강강술래 배경화, 천자총통, 지자총동 등이 전시되어 있고 당시 활약상을 담은 슬라이드도 상영한다.

 

 

 

 

 

  우수영 국민관광지 내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명량해협의 경관과 진도대교의 위용은 정말 장관이다. 진도대교는 이곳 문내면 학동리에서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 사이의 울돌목 위에 세워진 우람한 다리로, 1984년 10월 18일 우리나라 최초의 사장교(길이 484m, 폭 11.7m)로 준공되었다.

 

  높이 59m나 되는 두 개의 탑을 다리 양쪽 끝부분에 세우고 각각 44개의 철선을 늘어뜨려 무게 중심을 잡은 것으로, 이렇듯 교각이 없는 독특한 모양의 다리를 가설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최고 초당 6m이상의 빠른 속도로 흐르는 울돌목의 유속(流速) 때문이다.

 

  한편 2001년 12월 제2진도대교(너비 12.5m, 길이 484m, 2차로의 사장교)가 착공되어 기존 진도대교와 나란히 쌍둥이로 건설되면서 중량 32.4톤 이상의 차량이 다닐 수 없는 기존 진도대교의 문제점을 보완하면서 해남~진도를 잇는 국도 18호선의 병목 현상도 해소할 수 있게 되었다.

 

 



  진도대교 북쪽 끝단에 휴게소와 대교관리소가 있다. 이곳으로 들어가면 울돌목의 물 흐름을 제대로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뜰채로 고기를 들어 올리는 이색적인 고기잡이를 구경할 수 있다.


  성역화 된 우수영국민관광지는 400여년 전에 벌어진 명량해전을 생생하게 돌아 볼 수 있고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충효정신을 아로새길 수 있는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손색이 없다. 관광지 입장료는 어른 400원 학생은 250원이다. 주차장은 소형차 50대가 주차 가능하며 휴관일은 없다. 우수영 국민관광지관리사무소(전화  061-532-4088 


 

이충무공전첩비가 있는 벽파진(碧波津)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을 생각하며 울돌목을 가로지른 진도대교를 넘어와서, 진도의 우측 고군면 해안에 벽파진이 있는데, 이곳 남방 산기슭에 높이 6.6m, 너비 1.2m, 두께 0.6m의 우리나라 최대의 이충무공 전첩비(戰捷碑)가 세워져 있다.


  감옥에서 나온 이순신 장군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 직을 맡아 경상우수사 배설이 이끄는 12척의 판옥선을 인수하고(함대를 이순신에게 인계한 배설은 며칠 아프다고 하다가 탈영), 남해, 하동, 구례, 보성, 순천, 낙안, 장흥을 거쳐 회령포까지 장장 천 리가 넘는 길을 걸으며 1,000여명의 군사를 모았다.

 

  조정에서는 이순신에게 삼도수군통제사를 다시 맡기면서 힘들면 수군을 포기하고 육군에서 도우라고 했다. 이순신의 대답은 간단했다.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있사옵니다.” 그러나 가장 시급한 문제는 수군의 사기 양양이었다.

  이순신은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고 잃어버린 자신감을 되찾게 하고 싶었다. 1597년 8월 28일, 적선 8척이 어란포로 접근해 오자 이순신은 적과 맞서 싸우기로 했다. 이미 칠천량의 승리로 사기가 오를 대로 오른 일본군은 정면 승부를 걸어왔다. 이순신 역시 정면 승부를 선택했다.

   1597년 8월 30일, 또다시 일본군이 벽파진 앞에 나타났다. 이번에도 일본군은 조선 수군에 쫓겨 갔다. 이번에는 멀리 추격하지 말도록 했다. 그날은 8월 그믐이었다. 일본군이 한밤에 기습해 올 것에 대비, 적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려 일제히 불화살과 신기전을 쏘았다. 일본군은 그야말로 혼비백산했고, 변변한 공격조차 못 해본 채 퇴각했다.  이 전투에서 8척의 적선을 격침시키면서 사기를 높이는데 성공했다.

  이순신은 1597년(선조30년) 8월 29일, 일찍이 군수(郡守)로 임명된 바 있는 진도 땅 벽파진에 도착하여 진을 치고 대비했다. 벽파진은 진도군 고군면(古郡面) 지역에 있던 나루터로서 진도군에 속하는 섬들 중에서 본도인 진도의 동부 해안가에 있어 진도로 들어가는 관문의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벽파진에는 왜적과 싸울 때 수군영을 배치하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일본 수군의 대선단이 접근하고 있다는 정보에 접하자 진(陳)을 울돌목으로 옮길 때까지 주둔지가 되었다.

  이충무공 벽파전전첩비는 1956년 군민들의 성금으로 세워진 것으로 전공 기록이 새겨져 있고, 노산 이은상 선생이 비문을 지었으며, 진도 출신 서예가 소전 손재형 선생이 글씨를 썼다.  

 

 

 

 

◎여행정보

 

*주소

우수영국민관광지 : 전남 해남굼 문내면 학동리 산 36

벽파진 : 전남 진도군 고군면 벽파리 682-4 (061-540-3427)

 

* 찾아가는 길 

서울 주변에서 간다면 서해안고속도로를 타는 게 가장 빠르다. 서해안고속도로 종점인 목포톨게이트를 벗어나면 곧바로 오른쪽으로 영암/해남 이정표가 나온다. 이 길을 따라 목포외곽을 지나면 곧바로 2번 국도를 타고 영산강 하구언 제방도로를 넘어 진행하면 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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