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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6

빌려줄 몸 한 채 / 김선우 빌려줄 몸 한 채 ― 김선우 속이 꽉 찬 배추가 본디 속부터 단단하게 옹이 지며 자라는 줄 알았는데 겉잎 속잎이랄 것 없이 저 벌어지고 싶은 마음대로 벌어져 자라다가 그중 땅에 가까운 잎 몇 장이 스스로 겉잎 되어 나비에게도 몸을 주고 벌레에게도 몸을 주고 즐거이 자기 몸을 빌려주는 사이 결구(結球)가 생기기 시작하는 거라 알불을 달듯 속이 차오는 거라 마음이 이미 길 떠나 있어 몸도 곧 길 위에 있게 될 늦은 계절에 채마밭 조금 빌려 무심코 배추 모종 심어 본 후에 알게 된 것이다 빌려줄 몸 없이는 저녁이 없다는 걸 내 몸으로 짓는 공양간 없이는 등불 하나 오지 않는다는 걸 처음 자리에 길은 없는 거였다 - 시집 《도화 아래 잠들다》(2003) ◎시어 풀이 *결구(結球) : 야채의 잎이 여러 겹으로 겹.. 2020. 4. 26.
감자 먹는 사람들 / 김선우 감자 먹는 사람들 - 김선우 ​ 어느 집 담장을 넘어 달겨드는* 이것은, 치명적인* 냄새 ​ 식은 감자알 갉작거리며* 평상에 엎드려 산수 숙제를 하던, 엄마 내 친구들은 내가 감자가 좋아서 감자밥 도시락만 먹는 줄 알아. 열한 식구 때꺼리*를 감자 없이 무슨 수로 밥을 해대냐고, 귀밝은 .. 2020. 4. 26.
단단한 고요 / 김선우 단단한 고요 - 김선우 마른 잎사귀 도토리 알 얼굴 부비는 소리 후두둑 뛰어내려 저마다 멍드는 소리 멍석 위에 나란히 잠든 반들거리는 몸 위로 살짝살짝 늦가을 햇볕 발 디디는 소리 먼 길 날아온 늙은 잠자리 채머리* 떠는 소리 맷돌 속에서 껍질 타지며* 가슴 동당거리는* 소리 사그락사그락 고운 뼛가루 저희끼리 소근대며 어루만져주는 소리 보드랍고 찰진* 것들 물 속에 가라앉으며 안녕 안녕 가벼운 것들에게 이별 인사 하는 소리 아궁이 불 위에서 가슴이 확 열리며 저희끼리 다시 엉기는* 소리 식어가며 단단해지며 서로 핥아주는 소리 도마 위에 다갈빛 도토리묵 한 모 모든 소리들이 흘러 들어간 뒤에 비로소 생겨난 저 고요 저토록 시끄러운, 저토록 단단한, - 시집 《도화 아래 잠들다》(2003) 수록 ◎시어 풀이.. 2020. 4. 25.
낙화, 첫사랑 / 김선우 낙화, 첫사랑 김선우 1. 그대가 아찔한 절벽 끝에서 바람의 얼굴로 서성인다면 그대를 부르지 않겠습니다 옷깃 부둥키며* 수선스럽지* 않겠습니다 그대에게 무슨 연유가 있겠거니 내 사랑의 몫으로 그대의 뒷모습을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보겠습니다 손 내밀지 않고 그대를 다 가지겠습니.. 2020. 4. 25.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 김선우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 김선우 그대가 밀어 올린 꽃줄기 끝에서 그대가 피는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 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 꽃벌 한 마리 날아든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 왜 내 몸이 이리도 뜨거운지 그대가 꽃피는 것이 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 ▲.. 2020. 2. 8.
사랑시[49] : 낙화, 첫사랑 - 김선우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詩)] [49] 낙화, 첫사랑 - 김선우 * 일러스트=클로이 1 그대가 아찔한 절벽 끝에서 바람의 얼굴로 서성인다면 그대를 부르지 않겠습니다 옷깃 부둥키며 수선스럽지 않겠습니다 그대에게 무슨 연유가 있겠거니 내 사랑의 몫으로 그대의 뒷모습을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보겠습니.. 2008. 11.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