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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조6

정념(情念)의 기(旗) / 김남조 정념(情念)의 기(旗) - 김남조 내 마음은 한 폭의 기(旗) 보는 이 없는 시공(時空)에 없는 것 모양 걸려 왔더니라. 스스로의 혼란과 열기를 이기지 못해 눈 오는 네거리에 나서면, 눈길 위에 연기처럼 덮여오는 편안한 그늘이여, 마음의 기는 눈의 음악이나 듣고 있는가. 나에게 원(願)이 있다면 뉘우침 없는 일몰(日沒)이 고요히 꽃잎인 양 쌓여가는 그것이란다. 황제의 항서(降書)와도 같은 무거운 비애(悲哀)가 맑게 가라앉은 하얀 모랫벌 같은 마음씨의 벗은 없을까. 내 마음은 한 폭의 기(旗) 보는 이 없는 시공에서 때로 울고 때로 기도 드린다. - 《정념의 기》(1960) 정념(情念):온갖 감정에 따라 일어나는 억누르기 어려운 생각 항서(降書):항복을 선언하고 항복에 대한 여러 조건 따위를 정한 문서 ▲.. 2020. 3. 9.
설일(雪日) / 김남조 설일(雪日) - 김남조 겨울나무와 바람머리채 긴 바람들은 투명한 빨래처럼 진종일 가지 끝에 걸려 나무도 바람도 혼자가 아닌 게 된다. 혼자는 아니다. 누구도 혼자는 아니다. 나도 아니다. 실상 하늘 아래 외톨이로 서 보는 날도 하늘만은 함께 있어 주지 않던가. 삶은 언제나 은총(恩寵)의 돌층계의 어디쯤이다. 사랑도 매양 섭리(攝理)의 자갈밭의 어디쯤이다. 이적진 말로써 풀던 마음 말없이 삭이고 얼마 더 너그러워져서 이 생명을 살자. 황송한 축연(祝宴)이라 알고 한 세상을 누리자. 새해의 눈시울이 순수의 얼음꽃 승천한 눈물들이 다시 땅위에 떨구이는 백설을 담고 온다. - 《김남조 시집》(1967) ▲시어 풀이 축연(祝宴) : 축하연, 축하하는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베푸는 잔치. ▲이해와 감상 ‘설일(雪日).. 2020. 3. 9.
그림엽서 / 김남조 그림엽서 - 김남조 여행지 상점가에서 그림엽서 몇 장 고를 때면 별달리 이름 환한 사람 하나 있어야겠다고 각별히 절감한다. 이국의 우표 붙여 편지부터 띄우고 그를 위해 선물을 마련할 것을 이 지방 순모 실로 짠 쉐타 하나, 목도리 하나, 수려한 강산이 순식간에 다가설 망원경 하나, 유년의 감격 하모니카 하나, 일 년 동안 품 안에 지닐 새해 수첩 하나, 특별한 꽃의 꽃씨, 잔디씨, 여수 서린 해풍 한 주름도 넣어 소포를 꾸릴 텐데 여행지에서 그림엽서 몇 장 고를 때면 불 켠 듯 환한 이름 하나의 축복이 모든 이 그 삶에 있어야 함을 천둥 울려 깨닫는다. - 《희망 학습》(1998) 별달리 : 다른 것과 특별히 다르게. 각별히 : 어떤 일에 대하여 유달리 특별한 마음가짐이나 자세로. 수려한 : 빼어나게 아.. 2020. 3. 8.
겨울 바다 / 김남조 겨울 바다 - 김남조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未知)의 새, 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海風)에 그 진실마저 눈물져 얼어 버리고 허무의 불 물이랑 위에 불붙어 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는 그런 영혼을 갖게 하소서.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인고(忍苦)의 물이 수십(水深)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 《겨울 바다》(1967) 물이랑 : 배 따위가 지나는 길에 물결이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일어나는 물결. 인고(忍苦) : 괴로움을 참음.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소멸과 생성의 공간인 ‘겨울 바다’의 이중적인 이미지와 물과 불의 대립적 이미지를 바탕으로 극.. 2020. 3. 8.
겨울 바다 / 김남조 겨울 바다 - 김남조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未知)의 새 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에 그 진실마저 눈물져 얼어버리고 허무의 불 물이랑 위에 불붙어 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 2020. 2. 8.
사랑시[9] : 그대 있음에 - 김남조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9] 그대 있음에 - 김남조 ▲ 일러스트=클로이 그대의 근심 있는 곳에 나를 불러 손잡게 하라 큰 기쁨과 조용한 갈망이 그대 있음에 내 마음에 자라거늘 오, 그리움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손잡게 해 그대의 사랑 문을 열 때 내가 있어 그 빛에 살게 해 사는 것.. 2008. 10.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