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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6

성묘 / 고은 성묘 - 고은 아버지,남북 통일이 되지 않았습니다. 일제 시대 소금 장수로 이 땅을 떠도신 아버지. 아무리 아버지의 두만강 압록강을 생각해도 눈 앞에 선지가 생길 따름입니다. 아버지의 젊은 시절 두만강의 회령 수양버들을 보셨지요. 그리고 아버지는 모든 남북의 마을을 다니시면서 하얀 소금을 한 되씩 팔았습니다. 때로는 서도(西道) 노래도 흥얼거리고 꽃 피는 남쪽에서는 남쪽이라 밀양 아리랑도 흥얼거리셨지요. 한마디로, 세월은 흘러서 멈추지 않는 물인지라 젊은 아버지의 추억은 이 땅에 남지 않고 아버지는 하얀 소금이 떨어져서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 남북통일이 되면 또 다시 이 땅에 태어나서 남북을 떠도는 청청한 소금 장수가 되십시오. "소금이여", "소금이여" 그 소리, 멀어져 가는 그 소리를 듣게 하십시오.. 2020. 4. 11.
머슴 대길이 / 고은 머슴 대길이 - 고은 새터 관전이네 머슴 대길이는 상머슴으로 누룩도야지 한 마리 번쩍 들어 도야지 우리에 넘겼지요. 그야말로 도야지 멱따는 소리까지도 후딱 넘겼지요. 밥 때 늦어도 투덜댈 줄 통 모르고 이른 아침 동네길 이슬도 털고 잘도 취워 훤히 가리마 났지요. 그러나 낮보다 어둠에 빛나는 먹눈이었지요. 머슴 방 등잔불 아래 나는 대길이 아저씨한테 가갸거겨 배웠지요. 그리하여 장화홍련전을 주룩주룩 비 오듯 읽었지요. 어린아이 세상에 눈 떴지요. 일제 36년 지나간 뒤 가갸거겨 아는 놈은 나밖에 없었지요. 대길이 아저씨더러는 주인도 동네 어른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지요. 살구꽃 핀 마을 뒷산에 올라가서 홑적삼 큰아기 따위에는 눈요기도 안하고 지게 작대기 뉘어 놓고 먼데 바다를 바라보았지요. 나도 따라 바라.. 2020. 4. 10.
선제리 아낙네들 / 고은 선제리 아낙네들 - 고은 먹밤중 한밤중 새터 중뜸 개들이 시끌짝하게 짖어댄다 이 개 짖으니 저 개도 짖어 들 건너 갈뫼 개까지 덩달아 짖어댄다 이런 개 짖는 소리 사이로 언뜻언뜻 까 여 다 여 따위 말끝이 들린다 밤 기러기 드높게 날며 추운 땅으로 떨어뜨리는 소리하고 남이 아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의좋은 그 소리하고 남이 아니다 콩밭 김칫거리/ 아쉬울 때 마늘 한 접 이고 가서 군산 묵은 장 가서 팔고 오는 선제리 아낙네들 팔다 못해 파장 떨이로 넘기고 오는 아낙네들 시오릿길 한밤중이니/ 십리길 더 가야지 빈 광주리야 가볍지만 빈 배 요기도 못하고 오죽이나 가벼울까 그래도 이 고생 혼자 하는 게 아니라 못난 백성/ 못난 아낙네 끼리끼리 나누는 고생이라 얼마나 의좋은 한세상이더냐 그들의 말소리에 익숙한지 .. 2020. 4. 10.
눈길 / 고은 눈길 - 고은 이제 바라보노라 지난 것이 다 덮여 있는 눈길을 온 겨울을 떠들고 와 여기 있는 낯선 지역을 바라보노라 나의 마음속에 처음으로 눈 내리는 풍경 세상은 지금 묵념의 가장자리 지나온 어느 나라에도 없었던 설레이는 평화로서 덮이노라 바라보노라 온갖 것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눈 내리는 하늘은 무엇인가 내리는 눈 사이로 귀 기울여 들리나니 대지(大地)의 고백(告白) 나는 처음으로 귀를 가졌노라 나의 마음은 밖에서는 눈길 안에서는 어둠이노라 온 겨울의 누리 떠돌다가 이제 와 위대한 적막을 지킴으로써 쌓이는 눈 더미 앞에 나의 마음은 어둠이노라 - 출처 《현대문학》(1958) ▲이해와 감상 이 시는 '눈 덮인 길'을 통해, 방황과 고통의 삶을 살아왔던 시적 화자가 눈 덮인 길을 바라보며 내면 의식이 .. 2020. 4. 10.
문의(文義)마을에 가서 / 고은 문의(文義)마을에 가서 -고은 겨울 문의(文義)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길이 적막하기를 바란다. 마른 소리로 한 번씩 귀를 닫고 길들은 저마다 추운 소백산맥 쪽으로 벋는구나. 그러나 삶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 2020. 2. 8.
군산, 사랑도 역사도 흉터투성이 아~ 검은 멍든 바다여 군산 일제 때 수탈의 통로 ‘아픔’ 사랑도 역사도 흉터투성이 아~ 검은 멍든 바다여, 많은 문인들 마음의 고향 정윤수 문화평론가 경북 예천이 고향인 시인 안도현은 대학시절을 전북 익산의 원광대에서 보냈기 때문에, 오히려 소백산 아래쪽보다 금강하구의 너른 곳들에 대하여 오랫동안 사무쳐왔다. 예컨대 안도현은 군산 앞바다에 대하여 이렇게 쓰고 있는 것이다. 군산 앞바다올 때마다 가라앉는 것 같다 군산 앞바다, 시커먼 물이 돌이킬 수 없도록 금강하구 쪽에서 오면 꾸역꾸역, 수면에 배를 깔고 수만 마리 죽은 갈매기 떼도 온다 사랑도 역사도 흉터투성이다 그것을 아등바등, 지우려고 하지 않는 바다는 늘 자기반성하는 것 같다 이 엉망진창 속에 닻을 내리고물결에 몸을 뜯어먹히는 게 즐거운 낡은 선박 몇 척, 술이 부르튼.. 2008. 5.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