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 백령도
아직은 긴장과 평화가 공존하는 섬
무공해 청정해역, 관광의 명소
남상학
백령도는 우리 땅의 서쪽 끝이자 북쪽 끝이다. 중국 산둥반도와 190여 km, 북한의 황해도 장연군과는 10km 거리다. 백령도와 인천을 오가는 뱃길이 220km 남짓이니 서울보다 북한이나 중국과 더 가까운 셈이다. 이런 지리적 상황은 백령도를 군사적으로나 문화·경제적으로 주목받게 만들었다.
그래서 백령도를 가리켜 흔히 서해 최북단에 위치한 섬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백령도에는 '서해최북단백령도'라고 새긴 돌비가 서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런 표현에 동의하고 싶지 않다. 이렇게 일컫는 것은 국토의 분단을 고착화한 사고에서 비롯된 말일 테니까. 비록 지금은 분단의 아픔을 안고 긴장 속에 있지만 언제까지 백령도를 가리켜 서해 최북단의 섬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마음대로 갈 수도, 올 수도 없었던 섬
내가 처음 백령도를 방문한 것은 1996년이었다. 서울시내 중고등학교 교장으로 구성된 백령도 방문단은 한국해양소년단 주선으로 해병대의 도움을 받아 2박 3일간의 일정으로 이루어졌다. 긴장된 분단조국의 실상을 통해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안보 차원의 견학이었지만 백령도의 독특한 자연 풍광에 몰입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당시 이곳 섬사람들은 백령도를 "맘대로 올 수 없고 맘대로 나갈 수도 없는 섬"이라고 불렀다. 먼 바다 백령도를 오가는 여객선은 3천 톤급에 이르지만 해무가 끼고 파랑주의보가 잦은 탓에 뱃길은 늘 빗장을 열어두고 있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백령도는 기상변화도 그러거니와 안보상 선박운행이 통제되는 이른바 해상교통 취약지역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북위 37°52′에 걸쳐 있는 백령도는 2㎞앞이 38선이며, 북쪽 황해도 장산곶에서는 불과 17㎞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어서 늘 긴장과 평화가 공존하는 섬이다.
그래서 백령도는 한동안 군사상의 이유로 섬 관광이 상당히 제한되어 있었고, 따라서 배편도 불편하여 오랫동안 관광객의 발길이 뜸한 채 '신비의 섬'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1996년부터 쾌속선이 추가로 취항함으로써 '외로운 섬'의 이미지를 벗고 서해안에서 가장 경쟁력이 높은 관광지로 떠오르게 되었다.
관광객들은 인천에서 북녘으로 먼 거리 228km(직선거리 174km) 해상에 떠있는 백령도를 4시간(지금은 쾌속선으로 2시간 남짓)이나 걸리는 뱃길을 달려 호기심을 안고 찾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백령도는 안보교육을 겸한 자연의 풍광을 즐기는 두 가지 측면에서 우리 앞으로 성큼 다가온 것이다.
인천 연안부두에서 출발한 배는 장봉도, 연평 앞바다 그리고 선미도를 휘어 돌아 소청도 대청도를 걸친 긴 항해를 거쳐야 한다. 아주 빠른 쾌속선이지만 직선거리가 아닌 공해상 남쪽 한계선을 타고 가는 곡선의 뱃길이다.
백령도 공해상은 남북한뿐만 아니라 중국까지 얽혀 서로 생존과 경쟁을 위한 대치국면이 반복되는 해상이다. 해마다 꽃게 철이면 이 삼국의 어선들이 어획량을 올리기 위하여 각축을 벌인다. 그런가 하면 남북간 군사적인 충돌이 예측되는 곳이기도 하다.
보이지 않는 긴장 속에 설레는 마음으로 도착하는 곳은 용기포항. 용기포 선착장에는 육지로부터 오는 대부분의 배와 섬 내의 많은 어선들이 입항한다. 따라서 용기포 부두는 생기가 넘치고, 항구의 멋과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일반인과 군인들이 분리된 출입구를 이용한다. 백령도의 관문인 용기포 광장에는 돌을 쌓아 원추형으로 만든 두 개의 탑이 백령도의 상징물처럼 서 있는데 이것이 통일기원기념탑이다.
무공해 청정해역 백령도
백령도(白翎島)의 원래 이름은 곡도였다. '곡(鵠)'은 '따오기 곡'자를 쓰는데 섬 모양이 따오기 흰 날개가 날아가는 모습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도 백령도는 철새들의 낙원이다. 들판의 곡식과 청정 해역에서 물고기 먹이를 얻기 쉬웠기 때문에 이곳으로 몰려든 것이라고 한다. 특히 청명한 날에는 섬 전체가 비상하는 철새로 장관을 이룬다. 푸른 바다와 하늘이 배경이 되어 영락없이 한 폭의 수채화이다. 그런데 백령도는 지도를 놓고 보더라도 흰 새가 날아가는 모양새이다.
섬 이름이 백령도로 부른 것은 고려 태조 때부터인데, 그 유래는 전설에 따른 것이다. 가난한 선비와 사또의 딸이 사랑했는데 사또가 이를 못마땅해 선비를 먼 섬으로 내쫓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하얀 학 한 마리가 종이를 물어다 선비 앞에 떨어뜨리고 갔다. 그것은 사또의 딸이 보낸 편지였고 선비는 답장을 학에게 물려주었다. 사또의 딸은 그 편지를 받고 선비의 섬으로 도망쳤다. 그 섬이 하도 희고('흰백百') 날개를 펼치는('날개 령翎') 형상이었다는 데에서 연유했다.
서해 5도 중 하나인 백령도는 일제 말까지도 황해도 장연군 백령면이어서 북한이 생활 근거지였으나 해방을 맞은 백령도는 38선이 남북을 가르면서 옹진군 백령면에 속해 있다가 1995년 인천광역시에 편입되었다.
6.25 전쟁시 백령도는 피아의 격전지이다. 피아가 교차로 이곳을 군사적으로 점령했으나 결국 아군이 승리, 백령도가 우리의 땅으로 접수된 것이다. 북과 11㎞ 정도 떨어져 있어 군사적으로 요충지이다. 군 관계자들이 "백령도는 전략전술 정보수집, 조기경보기지, 공중 발진기지, 경제수역확장 등의 면에서 우리나라 국방요충지"라고 설명하는 것에서도 백령도의 군사적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다.
90년대 초까지 국내 13번째 큰 섬이었으나, 1993년 3년에 걸친 방조제 공사와 간석지 매립공사가 마무리됨에 따라 현재는 46.37㎢ 면적의 국내 8번째의 큰 섬이 되었다. 백령도민은 섬이면서도 어업활동이 부자유스러운 탓에 전체 가구 중에서 7%만이 어업에 종사하고 대부분 농민이다.
백령도에는 섬 전체를 통틀어 1,500여 가구, 5,000명 정도가 살고 있다. 백령도의 마을은 부두, 면사무소 주변, 두무진 해안가 등에 집중해 있는 취락형태를 띠고 있다. 집과 집 사이에는 담이 없다. 담이 없는 이유는 인심이 좋아서다. 남의 물건을 훔치는 도둑이 없다. 도둑이 남의 물건을 훔친다 해도 육지로 쉽게 달아날 수 없는 고립무원의 섬이기 때문이다. 백령도에선 어느 누구도 도둑이 되는 순간 독 안에 든 쥐 신세일 테니까.
또 지리적 특성상 주민의 반 이상이 군인이며, 여관, 시장, 다방, 노래방 등 기본적인 위락 시설이 백령도의 중심지인 진촌리에 잘 갖춰져 있다. 따라서 관광객은 대부분 진촌리에 머물게 되는데, 새벽에는 골짜기를 흔들어 깨우는 흑룡 사나이들의 쩌렁쩌렁한 함성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대낮에는 인근 사격장에서 들려오는 구령 소리와 사격 소리를 들을 수 있어 여행의 색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 따라서 백령도는 새벽닭소리와 해병대(흑룡부대) 장병들의 쩌렁쩌렁한 구호 소리와 함께 잠을 깨는 섬이다.
그러나 군사적인 요충지로서의 취약점 때문에 백령도는 낙후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 시멘트 포장길이 대부분이었다가 근년에서야 아스팔트가 깔리기 시작했다. 가장 큰 공장이 레미콘 공장 정도다. 발전이 더딘 곳이다. 관광자원으로는 북쪽 해안가에 서면 심청이가 몸을 던졌다는 인당수와 연꽃바위, 북한땅 장산곶이 손에 잡힐 듯이 보인다.
이탈리아 나폴리와 더불어 세계에서 단 두 곳밖에 없다는 천연비행장(사곶해안)이 있고, 까맣고 노란 자갈이 해안을 뒤덮고 있는 콩돌해수욕장이 있다. 그러나 백령도 관광의 진수(眞髓)는 아무래도 두무진의 기암괴석이라 할 수 있다.
천연 비행장 사곶 해수욕장
우리 일행은 미리 기다리던 버스를 타고 백령도 내륙 탐사에 나섰다. 먼저 용기 포구 옆에 있는 사곶 해안으로 향했다. 이 해안은 규조토(硅藻土)로 이루어진 해변으로, 이런 규조토 해안은 이탈리아 나폴리와 함께 세계에 단 두 곳밖에 없다고 한다. 규암 가루가 층층이 쌓이고 그 모래 사이에 뻘이 뒤섞여 형성된 이 해변은 '살아있는 모래'로 불린다. 어찌나 단단한지 밟아도 발자국이 나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다.
해안은 경사가 거의 없을뿐더러 물이 빠지면 길이 3.7㎞, 너비 300m의 단단한 규조토 백사장이 형성되는데, 피서철에는 한쪽은 장병들의 야영장으로 한쪽은 일반인 해수욕장으로 개방하고 있다. 모래 속에 비단조개, 게, 골뱅이 등이 서식한다.
그러나 그무엇보다 사곶해변이 지닌 큰 장점은 비행기가 자유자재로 이착륙할 만한 활주로가 된다는 것이다. 6·25 때 유엔군이 임시 활주로로 사용했던 천연비행장이며, 앞으로 유사시에도 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썰물 때는 300m 이상의 단단한 도로가 생겨 군수송기 이착륙이 가능하고 자동차가 시속 100㎞ 이상 달릴 수 있는 신비의 해변이다.
해변 뒤에는 해송과 해당화가 어우러져 휴식 공간을 제공하며, 주변에는 기암괴석이 절경을 이루어 천연기념물 제391호로 지정되었다. 이곳 해안 가까운 곳에 백령도에서 가장 오래된 사곶냉면집이 있다.
둥근 자갈마당 콩돌해안
사곶 해안을 둘러보고 백령대교를 건너 동남쪽에 있는 콩돌해안으로 이동했다. 백령대교는 사곶 해안 기슭과 화동마을을 메워 담수호를 만들고, 해안선을 잇는 양쪽 방조제 사이에 다리를 만들어 백령대교라고 부르는데 그 길이는 10m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대교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큰 것(대)’을 좋아하는 국민 성향 때문인지, 백령도에 하나밖에 없는 다리여서 애교로 붙인 것인지 아무튼 국내 '대교'라는 이름을 단 다리치고는 가장 짧은 셈이다.
백령대교 앞에 홀로 서 있는 바위로 바위 가운데 창의 모습같이 뚫려 있어 창바위라 부른다. 이곳에서는 7~8월에 학꽁치 낚시를 즐길 수 있다.
콩돌해안은 사곶해변과 함께 백령도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 해변이 둥근 자갈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자갈들의 모습이 마치 콩과 같다 하여 '콩돌'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1㎞ 해안에 깔린 이 둥근 자갈들은 0.5∼2㎝ 정도의 것으로, 이는 규암이 부서져 파도에 부딪히고 씻기기를 반복하면서 콩처럼 작은 돌이 된 것이다. 천연기념물 제392호로 지정.
특이한 것은 작은 자갈들이 백색, 갈색, 회색, 적갈색, 엷은 청색 등 형형색색을 이루고 문양이 새겨져 있다는 점이다. 옛날에는 이 콩돌로 반지를 만들었다고 전한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뽀드득뽀드득 소리를 내고, 밀려드는 파도에 자갈 구르는 소리가 매우 인상적이다.
더구나 햇빛이 반사되어 반짝반짝한 조약돌을 밟으며 넓은 바다를 바라보면 마음이 상쾌해진다. 콩돌이 매우 예쁘고, 또 악성 피부염에 좋다는 소문이 나 전에는 관광객들이 한 자루씩 퍼 가자 백령면에서 자연이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콩돌의 반출을 금지했다.
개흙층이 없이 돌들만이 파도에 밀려왔다가 밀려가기를 반복하는 이 해안을 해양학자들은 '단 구상 미지형 발달 해안'이라고 불렀다. 이런 단층 해변에서는 파도의 강도에 따라 수심이 달라짐으로 해수욕이 금지돼 있다.
한편 콩돌해안 앞바다에는 인천시가 천연기념물 331호로 지정한 물범이 200∼300마리가 살고 있으나 해마다 줄고 있어 이곳을 천연기념물 보호구역으로 지정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역사적인 중화동 교회(장로교회)와 기독교 역사관
백령도는 군사 관련 유적이 많은 곳이지만, 시간을 조금만 돌려보면 또 다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 땅에 평화와 사랑의 상징인 종교의 씨앗이 뿌리내린 곳이 백령도이기 때문이다.
백령도에는 200여 년 전인 1816년 처음 선교적 접근이 있었다. 영국 함대 2척이 중국 주재 대사를 수송하는 임무를 마친 뒤 한국의 서해안에서 해로탐사를 시행했던 것. 이를 계기로 16년 뒤인 1832년에는 최초의 내한 선교사 귀츨라프가 백령도를 찾았다.
백령도의 기독교 역사는 1898년 중화동교회가 설립됨으로써 완성된다. 우리나라 교회사에 있어서 1896년 솔내교회와 새문안 교회 다음으로 세워진 유서 깊은 교회로 유명하다. 그리고 솔내교회에 이어 두 번째 태어난 자생교회이다.
충남 공주 출신으로 정쟁에 휘말려 백령도로 유배당한 김성진은 뭍에서 가져온 신약성경을 자신이 머물던 집 주인인 허득(許得)에게 전하며 함께 예수를 믿기로 정하고 개화파 정치가 허득은 김성진, 황학성, 장지영 등과 함께 한학 서당이 있던 자리에 중화동교회를 세웠다. 이듬해에는 장로교의 공식적인 첫 한국 선교사였던 언더우드(한국명 원두우)가 배로 건너와 허득, 최영우(崔永佑), 허윤(許倫), 김흥보(金興甫), 허간(許侃)을 비롯한 7명에게 세례를 베풀고, 다시 한 해 뒤에는 첫 교역자인 한연일 전도사가 부임하며 중화동교회는 조직을 갖추기 시작했다. ...(허륜) 허간
이렇게 설립된 중화동교회는 백령도에 있는 모든 교회의 모교회(母敎會)로서 주민들에게 성경과 신학문을 전하고, 전도 사업에 힘쓰면서 주민들의 정신적인 지주(支柱) 역할을 담당했다.
이런 역사적 가치를 기리기 위하여 마련한 기독교 역사관은 19세기 초부터 백령도와 그 주변 지역에서 전개된 기독교의 선교역사를 모아 그 기록을 정리하고 이것을 현실감 있게 전시한 서북해안 유일의 기독교 역사 기념관이다.
또 백령도는 한국 천주교 역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한국인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가 1846년 백령도를 통한 선교사 입국 루트를 개척하던 중 관군에게 붙잡혔고, 새남터에서 순교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후 그가 개척한 루트를 통해 프랑스 선교사 17명이 입국하기도 했다. 1984년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맞아 내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김대건 신부와 당시 선교사 6명을 성인품에 올렸다. 백령면 진촌리에 있는 백령성당에는 김대건 신부의 유해 일부가 안치돼 있다.
연화리에 세운 '천안함 46용사 위령탑'과 통일기원비
"비록 육신은 죽었다 하나 그 영혼, 역사로 부활하고 국민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 자유대한의 수호신이 되리라." 천안함 희생 장병 46명의 원혼을 달래고 희생정신을 기리는 '천안함 46용사 위령탑'이 백령도에 2011년 23월 건립됐다.
천안함 피격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백령도 연화리 해안에 건립된 위령탑은 세 개의 삼각뿔이 8.7m 높이로 치솟아 있다. 주탑은 우리 영해와 영토, 국민을 언제나 굳건히 사수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중앙에 있는 보조 탑에는 46용사 얼굴을 담았으며 좌측에는 추모시, 우측에는 비문을 각각 새겼다.
김성찬 참모총장 이름의 비문은 "서해를 지키다 장렬하게 전사한 천안함 46용사가 있었다. 이제 그 고귀한 희생정신을 기려 여기 위령탑을 세우나니 비록 육신은 죽었다 하나 그 영혼, 역사로 부활하고 국민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 자유대한의 수호신이 되리라…. 46용사들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기에 오히려 '전우가 목숨 바쳐 지킨 바다, 우리가 사수한다'라는 해군 장병들의 해양수호 의지는 자손만대 계승될 것이다…. 꽃피지 못한 채 산화한 그대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희생정신은 이제 우리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 숨 쉴 것"이라"며 희생 장병을 추모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주탑 하단부 중앙에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을 설치해 북방한계선(NLL) 사수를 위해 산화한 장병들의 고귀한 희생을 기리겠다는 해군 장병들의 의지를 표현했다.
조국 수호 의지와 호국기상을 상징하는 위령탑을 바라보며, 그저 '장하다'라는 말뿐 다른 말을 잇지 못했다. 그들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기에 나는 이곳에 서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연화리의 위령탑에서 두무진 쪽으로 이동하면, 1992년 5월 백령도의 해병대가 통일을 기원하며 세운 통일기원비가 있다. 통일기원비 전면에 통일에 대한 간절한 소망과 뜨거운 마음을 담은 '통일기원' 네글자와 백령도 주둔 해병부대의 상징인 ‘흑룡’그림만을 새겨 넣어 통일의 그 날을 기원하고 있다.
"조국의 허리가 잘리워 지내온 지난 반세기는 온 민족의 아픔으로 점철된 각고의 세월이었습니다.
이산가족과 실향민들의 피맺힌 절규는 모든 이의 눈시울을 적시었고, 민족의 하나됨을 외치는 함성은 지금도 이 땅을 진동시키고 있습니다.
우리 이곳에 온 겨레의 간절한 소망과 뜨거운 해병대(海兵隊)의 혼(魂)을 담은 통일기원비를 세워 영광된 통일조국의 그 날을 기원하고자 합니다."
이와 같은 간절한 염원과 소망에도 불구하고 주변 해역에선 우리의 숭고한 생명들이 무고하게 희생당하고 있음에 서글픔을 금할 수 없으니, 언제까지 참고 기다려야 하는지 안타깝고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두무진(頭武津), 수천 년 풍상이 빚은 기암괴석
백령도의 백미는 누가 뭐래도 두무진이다. 두무진은 백령도 북서쪽 4km의 해안선의 바위 지대를 일컫는다. 바위의 모습들이 마치 투구를 쓴 장군들이 모여 회의를 하는 모습과 흡사하다고 하여 두무진(頭武津)이라 불렀다.
두무진항은 황해도의 서쪽 끝 장산곶과 불과 12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며, 수 억년동안 파도에 의하여 이루어진 병풍 같은 깍아지른 듯한 해안절벽과 가지각색의 기암괴석이 솟아 있어 서해의 해금강이라 불린다. 해상관광객들을 위한 유람선들이 운항하고 있다.
제2의 해금강 또는 금강산의 총석정을 옮겨 놓았다고 할 만큼 기암절벽으로 절경이다. 백령도가 군사지역이면서도 해양관광의 진면목을 자랑하는 곳이 된 것은 명승 8호인 두무진의 절경 때문이다.
두무진까지 걸어서 가려면 두무진 포구에서 해당화가 곱게 핀 서쪽 길을 따라 조금만 가면 된다. 북녘 땅 장산곶이 건너다 보이는 백령도 두무진포구의 아담한 해안선 자락에 ‘통일로 가는 길’이라고 써놓은 작은 비석이 있다. 1995년 해병대 흑룡부대 장병들이 관광객들을 위해 절벽 해안으로 넘어가는 오솔길을 만들면서 최북단 도서에 근무하는 해병대 장병들과 주민들의 통일 염원의 뜻을 담아 건립하고 '통일로 가는 길'이라고 명명하였다고 한다.
"통일로 가는 길
민족의 자존심 백령도!
이 섬에 겨레의 소망 통일의 길이 열리리라
통일로 가는 길은 대한민국이 가야 할
과거와 오늘과 내일의 길이요
세계로 가는 길이 되리라"
굳이 이 길을 '통일로 가는 길'이라고 명명한 것은 이곳에서는 12㎞ 남짓 떨어진 장산곶과 몽금포 해안의 모습이 손에 잡힐 듯 가깝기 때문이다. 이 길에서 두고 온 고향을 그리며 실향민들이 그리운 부모형제를 만날 수 있다는 소원을 품었을 것이다.
‘통일로 가는 길'을 지나 작은 계단을 오르고 또 고갯마루를 넘으면, 기암괴석들이 푸른 바닷물과 조화를 이룬 두무진의 절경이 눈 아래로 펼쳐진다. 수억 년 동안 파도에 의해서 이루어진 병풍같이 깎아지른 듯한 30∼40m 높이의 해안절벽과 가지각색의 기암괴석이 바다 위로 솟아 있다.
유람선 타고 해상에서 절경 감상
도보 관광은 관람로를 따라 두무진 안에 들어가 절경을 가까이서 느낄 수 있지만, 두무진 관광의 배미는 유람선을 타고 해상에서 절경을 둘러보아야 두무진과 해안 절벽의 묘미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두무진 포구에서는 이곳을 유람하는 배가 수시로 뜬다.
유람선을 타고 두무진 해안가를 돌 때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유람선은 대중가요를 요란하게 틀고 운행하는 남쪽 바다의 그런 풍경과는 사뭇 달랐다. 온통 기암괴석들로 바다에 병풍을 치고 있는 해안을 돌면서 선장은 갖가지 모양의 바위를 가리키며 구수한 해설을 쏟아낸다.
깎아지른 듯한 해안 절경과 풍랑에 깎인 채 60m나 치솟아 있는 선대암을 비롯, 형제바위, 코끼리바위, 장군바위 등으로 이름 붙은 각종 기암괴석이 푸른 바닷물과 어울려 아름다운 비경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두무진 절벽은 흑산도 홍도와 거제도 해금강, 거문도 백도의 기암절벽과는 또 다른 맛을 드러낸다. 사암 또는 변성도가 매우 낮은 규암으로 구성되어 있어 바위층이 잘 발달되고 바위 결에 물결자국의 모양새가 아로새겨진 것이 특징이다. 수 천 년 동안 비바람에 깎이고 다듬어져 짙푸른 바다와 함께 다듬어진 것들이다. 문일석은 두무진의 경관에 감탄하여 <두무진 해안가에서>라는 시를 남겼다.
“겹겹이 쌓은 듯/ 층층이 다른/ 바위 결을 바라다보면/ 용틀임하던/ 용암의 기(氣)가/ 우주의 신비를 몰고/ 밀려온다./ 억겁의 풍상 속에서/ 해안을 응시하며/ 스스로를 뽐내 온/ 기암괴석들, 바위들의 나라./ 안으로 안으로/ 자신을 담금질하며/ 수평선 일렁이는/ 먼바다를 응시하길 수억 만년/ 보아도보아도 침묵으로 버티고 선/ 형형색색 두무진 바위들은/ 바다 속에서 막 솟아오른 불상(佛像)인양/ 근엄한 법문(法問)을 설한다./ 두무진 해수를/ 멀리멀리 자락으로 깔고 앉아/ 오늘도/ 어제처럼/ 내일을 향해/ 무게 잡고 서 있는/ 두무진 바위들의 오순도순 행렬/ 그대들/ 수 억 만년 가슴에 품어 온/ 은은한 미소 속에/ 내가 서 있다네./ 어느새 폐부까지 스며든/ 청정공기 더불어./ 바다 풍파와 싸워 이겨낸, 지킴이의 상징/ 바위들의 나라, 기(氣) 받으며/ 그대들 호위 받으며/ 내가 서 있다네./ 두무진 해안가에.”
두무진의 절경에 빠져있을 때, 유람선 선장은 확성기로 "아홉 시 방향을 보세요. 저기 저 절벽 초소에 군 장병들이 근무 중"이라고 말했다. 높다란 절벽 위에 보일까 말까한 해안초소가 있어 그곳에서 이 땅의 젊은이들이 북녘을 응시 중이었다. 정희성 시인은 <몽유백령도>라는 시에서 저 초소 풍경에서 느낀 분단의 아픔을 이렇게 노래한 바 있다.
"구멍 속에는 초병이 하나 서서/ 장산곶 하늘이 매를 감시하고 있다/ 제 몸에 얹힌 온갖 것 훌훌 털고/ 크고 흰 날개 퍼득여 하늘로 오를 날/ 오기는 올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백령도가 황해 바다 한가운데 서 있을 수 있겠는가“
장산곶 매 한 마리를 응시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은 시인, 분단의 아린 상처 훌훌 털고 날아오를 그 장산곶 매를 기다리는 초병이라고 믿고 싶은 이 낯선 풍경은 분단 조국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하고 각별한 풍경일 것이다. 가슴 저미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 낯설음이 사라지고, 남북한계선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통일의 바다를 꿈꾸어도 좋으리라. 이곳 물개바위에서 물개들이 바위 위에 올라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처럼 그런 평화의 날 말이다.
이곳에는 실제로 물범과 가마우지 서식지인 물개바위가 있다. 이곳 앞바다는 노랑부리백로, 물가미우지, 괭이갈매기, 백로 등 희귀 조류의 서식처이기도 하다. 물범은 경계심 때문인지, 아니면 생태환경이 나빠져서인지 좀처럼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가마우지들만 보고 오는 것이 보통이다.
심청이 환생한 설화와 심청각
백령도에서 바라보이는 장산도 앞바다는 효녀 심청이 빠졌던 인당수로 역사적 고증을 받은 곳인데, 백령도 서쪽에는 심청이 다시 소생했다는 마을 연화리가 있다. 옛날부터 이 마을 앞에는 연꽃이 피는 조그만 연못이 있었다.
한때 이 연못이 매몰되기도 했지만 그후 다시 복원하였다. 연화1리 연지동에는 7, 8월 연꽃이 장관을 이룬다. 또 연화리에서 보이는 남쪽으로 바다 한가운데 연꽃바위(연봉)가 있어 백령도 주변이 심청전의 무대가 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고 공양미 삼백 석에 인당수 푸른 물에 몸을 던진 심청이는 이 연꽃 바위에서 인간으로 환생, 눈을 뜬 아버지와 재회한다. 종교에서 말하는 환생과 부활의 환희가 묻어 나오는 현장이다. 효심 지극한 딸이 맹인의 한을 푼 아버지를 만나는 전래 문학 작품의 무대인 것이다.
이곳이 심청전의 무대였던 사실을 기리기 위해 인당수와 연봉바위가 동시에 내려다보이는 곳 고봉포구 산자락에 심청각을 건립하였다. 지상2층으로 건립된 심청각은 북한 땅이 바라다 보이는 진촌리 산(진촌리 백령면사무소 위쪽) 위에 서 있다.
전통문화를 발굴 계승함과 아울러 '효' 사상을 함양하고, 망향의 아픔을 가진 실향민에게 고향을 그리는 대책사업으로 심청이 환생 장면 등을 전시하고 심청전에 관련된 판소리, 영화, 고서 등을 전시하고 있다. 전남 곡성에도 심청전의 무대로 주장되는 곳이 있으나 백령도가 더 유명하다.
인당수는 북한이 바라다 보이는 접경 지역에 위치에 있다. 인당수는 심청이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는, 종교적으로는 환생과 부활의 현장이다. 두고 온 고향을 그리는 실향민들은 인당수를 바라보며 다시 올 통일의 날을 기다릴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심청전의 무대인 백령도는 문화 상품적인 가치로 우리 곁에 다가서고 있다. 진촌리 북쪽 해안에는 국내 유일의 물개 서식지인 물개바위가 있다.
흑룡부대 방문에서 느끼는 안보의식
우리 일행 단체는 백령도 해발 184m 산기슭에 자리 잡은 해병대 흑룡부대로 이동했다. 부대가 있는 곳은 북한을 향해 자리 잡은 천혜의 요새였다. 북한의 미사일 공격으로부터도 까딱하지 않고 방어할 수 있는 아군의 진지와 적정(敵情)을 읽어내는 첨단 관측시설의 일부도 보여주었다.
참모장의 브리핑을 받고, 북한과 인접한 최북단 OP 관측장교로부터 적정현황에 대하여 설명을 들으면서 안보의 중요성을 다시 실감할 수 있었다. 참모장은 1999년과 2002년에 벌어졌던 서해교전, 천안함 피격사건 등을 설명하면서 군사위험의 화약고임을 강조했고, 비록 육지와 고립된 섬이지만, 농사철이 되면 군인들이 농사일을 거들고, 비상시에는 민간인들이 군사작전에 참여하는 철통 방위체재를 갖추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참모장은 이곳의 부대는 해군과 공군이 함께 주둔 중이고,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완벽한 군사 조직과 무기를 갖추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백령도 부대를 '작은 국방부'라도 부르기도 한다는 것. 최근 어민들의 생활이나 남북 대치 상황을 묻자, "늘 군사적으로 긴장 지대이고 좁은 어업한계선 때문에 어민들이 고기잡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하면서 "어민들이 조금만 방심하면 어선이 북쪽으로 밀려갈 수 있기 때문에 보호 차원에서 경비정과 지도선이 늘 따라붙는 가운데 조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더구나 꽃게가 많이 잡히는 백령도는 5~6월이 성어기이고 건너편 연평도는 4월이 제철인데 어민과 군인들이 가장 긴장하는 시기란다. 이런 까닭에 이 지역에서는 야간조업을 할 수 없다. 매년 8만여 명의 여행객들이 찾는 백령도이지만 이런 대치상태 때문에 섬 곳곳이 지하벙커 등으로 요새화되어 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60일 동안 전투할 수 있는 무기와 식량을 보유하고 있는 것도 육지와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란다.
OP에서 내려다 본 북한 땅은 지척이었다. 동쪽으로 11㎞ 맞은편이 북한의 유인도 월래도였다. 서쪽 방향 17㎞ 해상에는 몽금포타령의 무대 북한의 장산곶이 있다. 장산곶의 닭 우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깝다는 거리를 사이에 두고 남과 북의 장병들이 서로를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백령도가 긴장과 평화가 동시에 출렁이는 섬이란 생각이 들었다.
흑룡부대가 백령도에 주둔하기 시작한 것은 1951년 4월 23일, 6·25 전쟁 당시 전략도서 확보작전을 펼치면서부터다. 북한의 장산반도와 마주한 최접전 지역인 데다 이웃 중국과 동남아시아를 향한 해양 진출의 길목인 백령도서는 지상, 해상, 공중에 대한 경보기지의 역할을 한다. 지금까지도 군사적 긴장감이 높은 지역이기에 흑룡부대는 특히 경계 근무에 집중한다. 2010년 천안함 피격 사건과 연평도 포격전 이후에 조직된 서북도서방위사령부에서도 흑룡부대는 핵심 전력으로 사명을 다하고 있다.
그날 부대 앞 숙소에 머물면서 나는 백령도 방문 소감을 이렇게 적었다. 긴장과 평화가 동시에 출렁이는 이 섬이 안개 걷히듯 긴장이 걷히고 평화와 안식이 찾아드는 날이 속히 오기를 염원하면서.
"섬은 잠들지 않았다. 낮에도 밤에도 결코 잠들 수 없었다. 안개 덮인 새벽 미명 마을을 깨우는 전령처럼 어둠을 걷어 올리는 새벽닭 울고, 낯선 사람의 그림자를 좇아 숨죽이며 뜬눈으로 밤을 새운 개들이 경계의 시선을 풀지 않은 채 컹컹 아침 점호를 시작한다.
쩌렁쩌렁 야성(野性)의 소리로 골짜기를 흔들어 깨우는 흑룡 사나이들의 구령 소리가 낮은 산언덕을 넘으면, 어느 새 깃발이 산등성이에 내걸리고 햇살이 파편처럼 덮이는 대지는 나른한 낮잠에 취할 새도 없이 온통 콩 볶는 소리로 자욱하다.
어느 덧 땅거미 지고 낮은 포복으로 어둠이 기어들어 암흑의 바다 해안선을 따라 게, 고둥, 까나리 들이 떼 지어 몰려들어 손에 손잡고 철책을 치고, 온갖 풀벌레들이 두 눈에 서치라이트를 번뜩이며 사방을 검색하는 사이 하늘의 별들마저 잠들지 않고 불침번을 서서 날밤을 새운다.
삼백예순 날 낮에도 밤에도 잠들지 않는 섬, 그 어느 날 풍랑이 멎어 이 섬에 물안개 같은 안식이 찾아들까?
- <졸고> '섬은 울고 있었다-백령도·1' 전문
섬 전체가 천혜의 낚시터, 청정 해산물의 천국
백령도는 섬 전체가 천혜의 낚시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갯바위낚시, 바다낚시 모두 조황이 좋다. 주요 어종은 서해에서 잘 물리는 우럭, 놀래미, 가자미, 광어 등이며, 5월 중순부터 10월 말까지 가능하다.
미끼는 갯지렁이보다 백령도에서 많이 잡히는 까나리와 꼴두기를 많이 쓴다. 백령도는 어민들의 생활 근거지인 용기포, 오군포, 고봉, 사항 등 7개의 포구 외에 모두 선박 출입이 금지돼 있다. 단, 부두인 용기포 해안을 제외하고는 오후 5시 이후에는 해안 출입이 금지되며, 낮이라도 군사 초소에 신분증을 맡겨야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다고 한다.
특히 백령도의 가을은 가히 청정 해산물의 천국이라 할 만하다. 전복, 해삼, 바다장어, 팔랭이, 가리비, 성게 등이 푸짐하다. 관광은 차치하고 먹거리만으로도 여행객들을 유치하기에 충분하다. 대부분의 해산물이 인근 청정 해역에서 채취한 자연산이라는 점도 큰 매력이다.
청정 지역의 특산품들
백령도는 육지와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런 데다 자유스러운 출입이 한동안 제한된 지역이었다. 고립은 곧 때가 묻지 않은 청정지역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백령도의 특산물인 까나리 액젓, 자연산 해산물, 쑥으로 만든 건강식품 등은 이미 유명해졌다. 청정식품의 보고라는 점에서 백령도의 미래를 엿볼 수 있다. 백령도 안보 견학하고 나오는 길에 백령도 청정식품 영농조합법인에 들렀다.
해풍을 호흡하며 자란 쑥차를 마셨다. 첫맛은 썼으나 뒷맛은 두고두고 깨끗했다. 몸에도 좋다고 했다. 혈액 순환, 피로 회복, 신경통에 좋다는 백령도 약쑥은 서해의 최북단의 해풍과 해무를 맞으며 자생한 무공해 쑥이다.
나는 뜻깊은 백령도 탐방을 마치고 돌아와 탐방의 느낌을 다음과 같이 한편의 시로 적었다.
”섬은 울고 있었다. 밤이 깊어갈수록 잠을 못 이루고 물길을 따라 몇 번씩 고달픈 몸을 뒤척이다가 온몸에 안개를 휘감고 북으로 북으로 노를 젓고 있었다.
두고 온 형제 그리운 얼굴 지척에 두고 우리의 사랑이 언젠가는 다시 이어질 것을 믿으며 심청이 몸을 던진 인당수 소용돌이 물길을 건너 장산곶을 향해 거친 파도에 흔들리며 가고 있었다.
바람을 곱게 빗질하던 하얀 갈대 머리도 북으로 따라가고 뜨거운 사랑 안고 숨진 넋인 듯 길가에 흐드러지게 핀 코스모스도 마치 열병식(閱兵式)을 하듯 오직 한 방향으로만 손을 흔들고 있었다.
금강산의 총석정을 옮겨 놓았다는 두무진의 코끼리바위 장군바위 촛대바위 형제바위 신선대 사자바위 등 기암괴석들도 후려치는 해풍에 머리를 감으며 북으로 북으로 하염없이 달리고 있었다.
안개 짙은 그 날 새벽 이후, 거센 물살의 삼각파도에 휩쓸리며 한 걸음 더 나아가지도 못하고 팔자형의 물굽이 앞에서 길을 잃은 채 섬은 오늘도 인고(忍苦)의 세월을 망향가 부르며 팔순의 노인처럼 이명(耳鳴)을 앓고 있었다.“
- <졸고> 『 망향가-백령도·2 』 전문
〈여행 정보〉
○ 관련 웹사이트 주소
- 옹진군청 관광문화 www.ongjin.go.kr/tour
- 인천항연안여객터미널 http://dom.icferry.or.kr
- 청해진해운 www.cmcline.co.kr
- 제이에이치페리 www.jhferry.com
- 우리고속훼리(주) www.urief.co.kr
○ 문의 전화
- 옹진군청 관광문화과 032-899-2210
- 백령면 민원실 032-836-3000
- 인천항연안여객터미널 032-880-3400
- 청해진해운 032-889-7800
- 제이에이치페리 1644-4410
- 우리고속훼리(주) 032-887-2891
- 심청각 032-899-3087
- 백령여행사(렌터카) 032-836-6662, 6699
- 백령투어(렌터카) 032-836-8118
- 해송여행사(렌터카) 032-836-7400
○ 교통
1. 배편
인천항연안여객터미널에서 여객선 에에치해운의 ‘하모니플라워’호가 07:50분 출발 / 백령도 출발은 12: 50분(대청도, 소청도 경유) 소요시간 4시간, 요금(편도) 73,000원, 차량 선적 가능 // 고려고속훼리의 ‘코리아킹’이 08:30분 출발, 요금 66,500원, 차량 선적 불가 // 고려고속훼리의 옹진훼미리호‘는 13: 00 출발. 요금 68,600원
(주민등록증 소지. 기상변화 반드시 문의)
2. 섬내 교통 - 마을버스, 택시, 혹은 숙박업소 봉고차나 렌터카. 백령도는 펜션이나 모텔 등의 숙박시설이 렌터카를 함께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숙소를 예약할 때 렌터카를 포함하면 할인을 받을 수 있다.
○ 숙박
- 아일랜드캐슬 : 백령면 백령로, 032-836-6700
- 백령리조텔 : 백령면 백령로280번길, 032-836-3233
- 트윈스모텔 : 백령면 백령로264번길, 032-836-1100
- 그린파크 : 백령면 백령로297번길, 032-836-5551
○ 식당
- 궁전식당 : 아귀찜, 백령면 백령로, 032-836-7721
- 부두식당 : 자연산 활어회, 백령면 백령로, 032-836-0008
- 사곶냉면 : 수육․냉면, 백령면 사곶로122번길, 032-836-0559
- 선대횟집 : 자연산 활어회. 두무진 032-836-0755
- 두메칼국수 : 칼국수, 짠지떡. 032-8360245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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