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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서울

강남 중심권에 있는 선정릉(선릉, 정릉)을 가다

by 혜강(惠江) 2006. 7. 24.


선릉과 정릉

강남의 중심권에 있는 선정릉(宣靖陵)을 찾아

조선 제9대 성종과 제11대 중종(中宗)의 능원

 

 

·사진 남상학


 

    

  지루한 장마가 이어지는 오후, 어디 먼 곳을 찾아갈 형편이 못 되어 집에서 멀지 않은 선정릉을 찾아보기로 했다. 분당선 개포동역에서 네 정거장만 가면 선릉역에 닿는다. 이런 가까운 곳에서 시원한 숲 한 자락을 만난다는 건 행운이다. 더구나 이 숲이 조선 시대 왕들이 잠들어 있는 능원(陵園)이어서 역사공부하기에도 얼마나 좋은가.

   나는 역사공부를 해야 할 고등학교 시절에 국사공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권력 투쟁과 살육으로 이어지는 역사가 싫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으로 나는 성인이 되어서도 역사를 이야기하는 자리에 끼질 못했다. 선정릉 탐방은 단편적인 역사의 한 단면이지만 역사공부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탐방에 앞서, 기본적인 정보를 얻기 위하여 선정릉 홈페이지에서 간단한 자료를 뽑았다. 그리고는 카메라를 넣은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섰다. 선정릉까지는 선릉역에서 내려 5분 정도 걸으면 되는 거리다. 몇 번 다녀간 곳이긴 하지만 숲으로 우거진 선정릉이 반갑게 다가왔다.  

   급작스런 산업화 과정에서 공원이나 숲을 확보하지 못했을 것 같은데 도시 한 가운데에 궁궐이 있어 문화 공간을 마련한 셈이 되었으니 조상들에게 고맙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만약 이런 능원이 아니었다면 어찌 값비싼 서울 땅에 수십 만 평에 이르는 숲을 확보할 수 있었을까?  

    조선시대는 왕릉을 쓰는데 한양에서 100리를 벗어나지 않도록 했다. 그러다보니 지금 조선시대 왕릉은 넓어진 서울 안이나 경기도 일대에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서울 시내 곳곳에도 조선의 왕릉이 남아 있다.  100리라고 하기에는 조금 먼 여주에 세종대왕과 효종의 영녕릉이 있고 귀양 가서 죽은 단종의 장릉이 멀리 떨어져 영월에 있긴 하지만 그건 특수한 경우에 속한다. 그런 면에서 서울은 ‘운이 좋은 도시’다. 아니, 서울에 사는 것이 ‘운이 좋은 일’일 수 있다.  

 

 

 


  그렇다면 서울지하철 2호선 ‘선릉’역의 ‘선릉’은 누구의 묘일까? 그리고 선정릉이라고 하는데 무슨 때문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사적 제199호로 지정되어 있는 선정릉(宣靖陵)은 성종(成宗, 9대)과 그 계비 정현왕후를 모신 선릉(宣陵)과 그분들의 아들 중종(中宗, 11대)이 누워 있는 정릉(靖陵)을 합하여 선정릉이라고 부르는데, 일반적으로 선릉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입구로부터 처름 만나는 능원이 정릉, 맨 뒤쪽에는 선릉이 있고, 그 중간에 정현왕후의 능까지 모두 3개의 능이 있어 ‘삼릉공원’이라고도 한다. 동선에 따라   입구에 가까운 정릉부터 돌아보기로 하고 몇 걸음 걸어가니, 나이가 지긋한 해설사인 듯한 분이 말을 건넨다. 그리고 친절히 설명을 해주었다.


  ‘능(陵)’이란 위아래 구분이 뚜렷했던 왕과 왕비의 무덤을 이르고, 세자의 무덤은 ‘원(園)’이라 하고, 대군 이하 평민의 무덤은 ‘묘(墓)’로 구분한다. 그러므로 ‘-릉’이라 했을 때는 왕이 없는 왕비의 무덤만 있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중종의 제1계비인 문정왕후의 단독 무덤은 태릉이다. 또 우리 같은 사람 무덤은 특별한 일(?)이 없다면 그냥 ‘묘’가 된다.

  먼저 왕릉 영역으로 들어가면 홍살문을 만나는데, 이는 잡귀를 막고 신성한 공간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붉은색과 화살모양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정자각까지 길이 이어져 있다. 그런데 잘 보면 길은 두 줄로 되어 있고, 오른쪽에는 작은 돌 판이 있다. 돌 판은 판위 또는 배위로 불리는 것으로 왕릉에 왔음을 알리고 네 번 절을 하는 곳이다. 두 길은 각각 신도(神道)와 어도(御道)로 신(神)과 임금이 지나는 길임을 알려 준다. 이 길을 따라 가면 정자각에 이른다. 

  정자각(丁字閣)이란 말은 건물이 한자의 정(丁:고무래 정)자 모양으로 생겼다고 붙은 이름으로 제물을 올리는 곳이다. 또 정자각 뒤에 보면 신이 내려오는 다리란 뜻으로 신교(神橋)가 있다. 자세하게 보지 않으면 놓칠 정도로 작다. 


  정자각 옆에는 조그마한 수복방(守僕房)이 있다. 수복방은 능을 관리하는 사람이 야간에 머무는 건물이다. 지금의 숙직실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가까운 곳에 비각(碑閣)이 서 있다. 왕릉에 대한 대강의 설명을 듣고 나서 능으로 오르는 오른쪽 좁은 길을 통해 성종을 모신 선릉으로 발길을 옮겼다.


중종(中宗)을 안장한 정릉(靖陵)
  

 선릉에서 야트막한 언덕 하나를 넘으면 성종의 둘째 아들로서 연산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중종의 정릉(靖陵)이 있다. 이 능은 단릉(單陵)으로 정비(正妃)가 셋이나 되면서도 제 각각 뿔뿔이 흩어져서 외로이 혼자 누워있는 능이다.

   중종은 성종과 정현왕후의 사이에서 성종 19년(1488) 3월 5일 성종의 둘째 아들로 탄생하여 성종 25년(1494) 4월 6일 진성대군에 봉해졌다가 1506년 9월 2일 연산군이 폐위되자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하였다.

   연산군의 이복동생이었던 그는 박원종(朴元宗), 성희안(成希顔) 등이 반정(反正)을 일으켜 연산군을 폐위시키면서 열아홉 나이에 왕으로 추대되어 이미 7년 전에 결혼한 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 愼氏)와 나란히 왕과 왕비로 등극했던 것이다. 그러나 연산군의 처남이면서 중종의 장인이기도 한 신수근(愼守勤)이 반정과정에서 제거 되면서 조강지처마저 버리게 되자 새로 맞은 왕비가 파평 윤씨 윤여필(尹汝弼)의 딸 장경왕후(章敬王后)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계비 윤씨는 원자를 낳고 그 후유증으로 열흘 만에 25세의 나이로 승하하고 말았다. 그 뒤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제2 계비가 되었다.

  중종은 새로운 왕도 정치와 이상 정치를 실현하려고 애를 썼으나 당파싸움으로 각종 옥사들이 일어나 무산되고 말았다.  ‘신중동국여지승람’, ‘속동문선’ 등을 간행하였고, 신병으로 1544년 11월 15일 창경원 환경전에서 재위 39년, 57세에 세 왕비와 후궁에게서 9남 11녀를 두고 병으로 57세에 승하하였다.

   다음해 2월 3일 중종은 제1계비인 장경왕후 윤씨 능인 희릉(禧陵)의 오른쪽에 모셔졌다가,  7년 후인 명종 17년(1562) 9월 4일 제2계비인 문정왕후 윤씨(명종의 모후)가 봉은사 주지 보우(普雨)와 의논하여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그러나 이곳의 지대가 낮아 여름철에는 재실까지 강물이 들어 보토(補土)하기에 많은 비용을 낭비해야 했다.

 

 

 

세 왕비 두고도 홀로 잠든 중종(中宗)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죽자 윤여필의 아들이요 죽은 장경왕후의 오라비인 윤임(尹任)의 집안에는 비상이 걸렸다. 자기 집안 규수를 왕비로 보내고 원자까지 탄생한 마당에 승하하고 말았으니 어찌한단 말인가. 어떻게 해서라도 핏덩이 원자를 끝내 지켜서 세자로 책봉하고 왕위로 이어지게 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다음 계비도 자기 집안의 규수로 책봉되도록 했다.

   그러나 의도와는 달리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제2 계비가 된 문정왕후(文定王后)는 총명하여 중종의 총애를 받았고 드디어 왕자를 낳았다. 그러자 문정왕후는 물론 그의 오라비 윤원로(尹元老), 윤원형(尹元衡) 형제는 생각이 달라져서 사랑 받는 문정왕후의 아들이요 자기들의 생질로 왕통을 이어가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세조비 정희왕후의 친정 후손들이었던 이들은 집안 간의 피나는 싸움을 벌이게 되었고, 세상은 이들 윤임 일파를 대윤(大尹), 윤원형 일파를 소윤(小尹)이라 일컫기에 이르렀으며, 끝내는 후일 소윤이 대윤을 몰아내는 과정에서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로 이어졌다.

    처음에는 대윤이 천신만고 끝에 기나 긴 31년 동안이나 세자를 지키는데 성공하여 보위까지 이어짐으로써 쾌재를 불렀으나 이 또한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그토록 어렵게 등극한 왕이 8개월 만에 후사도 없이 세상을 뜨고 말았으니 이가 곧 인종(仁宗)이다. 그렇게 되자 인종의 이복동생이요, 문정왕후의 아들이 등극했고 이가 곧 명종(明宗)이다. 그 때 나이 열 두 살이었으므로 교활한 문정왕후가 이후 8년간 수렴청정하면서 오라비 윤원형 등을 끌어 들여 권력을 휘두르면서 대윤 일파를 몰아내고 국권을 어지럽혔다.

   그 문정왕후가 온갖 영화를 다 누리고 나니 죽은 후에 자기 남편 중종의 곁에 눕고 싶은 욕심이 생긴 것이다. 중종의 능은 원래 고양 원당의 서삼릉(西三陵) 안에 있었다.

   첫째 부인은 폐비가 되었을 뿐 아니라 중종이 죽을 때까지 살아 있었고, 인종을 낳은 두 번째 부인 장경왕후의 희릉(禧陵)이 서삼릉에 있었으니 중종은 당연히 그곳에 가 묻혔다. 그런데 합장이거나 쌍분이 아니고 왕릉에 흔히 있는 동원이강(同原異岡: 나란히 내려온 두 능선에 각각 쓰는 형태)이었던 것이 문정왕후에게 구실을 주었다.

   장경왕후의 능은 자리가 괜찮은데 중종의 능은 길지(吉地)가 아니어서 천장(遷葬)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문정왕후는 선릉 근처의 봉은사(奉恩寺)에 신임하던 승려 보우(普雨)를 미리 주지로 보내 놓고, 그와 의론하여 중종의 능을 부모의 능역으로 옮긴다는 명분하에 일단 이장해 놓았는데, 이는 후일 자기가 함께 묻히려고 했던 술책이었다.

   그러나 하늘은 그토록 교활했던 문정왕후의 뜻을 이루게 하지 않았다. 원래 지대가 얕았던 이 자리에 문정왕후가 죽었을 때는 공교롭게도 홍수가 져서 한강물이 범람하여 묘역에까지 이르렀고, 그렇지 않아도 문정왕후가 밉던 대신들은 그의 뜻에 따르지 않았다.

   그리하여 제1 왕비 단경왕후는 폐위되었다가 200년이 지난 숙종 때 복위되어  장흥에서 송추로 넘어가는 산마루의 온릉(溫陵)에 잠들었고, 제1계비 장경왕후는 자기 아들 인종의 능이 있는 원당 서삼릉 안의 희릉(禧陵)에, 뜻을 이루지 못한 제2계비 문정왕후는 역시 자기 아들 명종의 능이 있는 육군사관학교 근처의 태강릉(泰康陵) 안의 태릉(泰陵)에 누워있다.

   반정세력에 떠밀려 왕위에 올랐으나 그 세력들을 견제하려고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등의 신진사류를 등용하여 지치주의(至治主義)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애를 썼으면서도 뜻을 이루지 못했던 중종은 결국 그가 죽어서도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이곳에 이렇게 외로이 누워있는 것이다.

   이런 내막을 알고 나서 나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절대권력 주변에서 기생하며 자기 세력을 확대시키고자 한 정치모리배들, 그리고 죽어서까지 왕의 환심을 사기 위해 갖은 간교를 부리던 여인네들이 우리 역사를 권력 투쟁과 살육으로 몰아간 장본인들이 아니었던가.

 

 

 

 

선릉 동쪽에 자리한 정현(貞顯)왕후의 능

 

  1495년에 성종의 능인 선릉을 세웠고, 그 뒤 1530년에 성종의 제2 계비인 정현(貞顯) 왕후를 선릉의 동쪽에 안장하였다. 이는 왕과 왕비의 능을 정자각 배후 좌우 두 언덕에 각각 한 봉분씩 조성한 경우로 동원(同原) 이강(異岡) 형식이라 한다. 왕비의 능은 병풍석이 없이 난간석만 둘렀고 나머지 상설물은 왕릉과 비슷하다.

   성종과 함께 묻힌 정현왕후 윤씨는 영원부원군 윤호의 딸로서 세조 7년(1462) 6월 26일 출생하여 성종 4년(1473)에 숙의에 봉해졌다가 성종 7년(1476) 윤씨(연산군 생모)가 폐위되자 1480년 11월 8일에 왕비의 자리에 올랐다.

   왕비가 된 윤씨는 질투가 심하여 궁녀들을 엄히 다스렸고, 오랜만에 왕비의 처소에 든 왕에게 앙탈을 부리다가 용안에 손톱자국을 내는 실수를 범했다. 이 사건으로 하여 스무 살 꽃다운 나이에 청상과부가 되었던 무서운 시어머니 인수대비의 노여움을 받아 드디어 원자까지 낳아준 정비는 쫓겨나게 되고, 세 살 난 어린 원자는 다시 들어온 계모(정현왕후) 밑에서 계모를 자기 친 어머니로 알고 자라게 했고, 폐서인(廢庶人)이 된 윤씨는 3년 후에 사약을 받고 죽는다. 그리고 그 아들이 자라서 후일 폭군으로 알려진 연산군이 되었다.

  여기에 성종과 함께 묻힌 정현왕후는 연산군을 자기 아들로 기른 현숙한 왕비였고, 후일 연산군이 쫓겨나면서 왕위에 추대된 중종의 생모로서 성종의 세 번째 부인이요 마지막 왕비였다. 그는 중종 25년 (1530) 8월 22일 경복궁에서 69세로 승하하여 같은 해 10월 29일 왕릉 동족에 묻혔다.

 

 

 

 

조선 제9대 성종의 선릉(宣陵)

 

  선릉에 묻힌 성종은 세조의 손자이다. 의경(懿敬) 세자와 소혜 왕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469년 1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뛰어난 천품과 도량으로 세조의 사랑을 받았으며, 25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1494년 12월 24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38세를 일기로 승하하여 이듬해(1495년) 4월 6일 장례를 지냈다.


   그간 선릉은 임진왜란 때 왜병(倭兵)에 의해 왕릉이 파헤쳐지고 재궁(梓宮)이 불타는 변고를 겪었다. 1625년에는 정자각에 불이 났고, 다음 해에는 능위에 두 번이나 화재가 발생했다고 인조 실록에 전할만큼 수난이 심했다. 그러나 현재 든든한 모습으로 서울의 한쪽을 지키고 있다. 사적 제199호이다.

   선릉은 높다란 언덕처럼 되어 있는 사초지 위에 봉분이 있다. 정자각이 있는 곳이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의 공간이라면 봉분 위는 죽은 왕을 위한 공간이다. 왕의 무덤이기에 각종 장식물이 있어 왕의 권위가 느껴지지는 곳이다.

   '석실이 유해무익하니 석실과 병풍석(屛風石)을 쓰지 말라'는 세조의 유언에 따라 석실은 쓰지 않았으나, 병풍석은 여전히 봉분의 아랫부분에 둘러져 있다. 병풍석의 중앙 면석(面石)은 12면으로 되어 있는데, 각각의 면에는 방향에 맞게 12지(支) 신상(神像)을 양각하였다. 
얼굴은 동물, 몸은 사람의 형상인데, 거의 비슷하게 생겨 구분하기 어려울 뿐더러 마모가 심해 육안으로 확인하기 힘들다. 12신상 둘레에는 구름 문양을 새겼고 양옆으로 꺾인 면석인 우석(隅石)에는 이와 비슷한 문양을 새겼다.

   병풍석을 감싸고 있는 난간석(欄干石)은 봉분을 다시한번 둘러 보호하고 있다.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되는데, 제일 높은 기둥을 석주(石柱)라 한다. 석주 사이에 가로질러져 접근을 막는 기둥을 죽석(竹石)이라 하고, 이를 중간에서 받쳐 주는 기둥을 동자(童子) 석주라 한다. 석주와 죽석은 8각이고, 동자 석주는 원형으로 그 위에 연잎 모양의 돌을 받치고 있다.

   봉분 앞 중앙에 혼유석(魂遊石)이라고도하는 상석(床石)이 있다. 상석 아래에는 북 모양으로 다듬은 고석(鼓石)이 있다. 둥근 면에 아래위로 영락 장식이 있고, 4개의 험상궂게 생긴 귀면(鬼面)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주변에는 문인석과 무인석이 서서 임금의 명을 받들고 있다.

   그 옆에는 문인과 무인이 탈 말이 대기하고 있다. 문인이 무인보다 높은 곳에 있어 조선시대 상황을 보여준다. 또 망주석도 있다. 세호라고 하는 동물이 새겨져 있는데 원래는 호랑이지만 토실토실한 꼬리 때문에 다람쥐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또 어떤 이는 도롱뇽이라고도 한다. 그 뒤로 담장이 보호하듯이 둘러쳐진 것을 볼 수 있다. 담장과 봉분 사이에 돌 호랑이와 양이 무덤을 지키고 있다.

 

 


성종(成宗)은 어떤 왕인가?



   조선의 9대 왕인 성종은 의경세자와 소혜왕후의 사이에서 1457년 7월 30일 경복궁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아버지 의경세자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으나 어려서부터 영특했다. 그래서 재위 1년 만에 승하한 숙부 예종의 뒤를 이어,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과 자기 친형인 월산대군을 제치고 1469년 11월 28일 1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20세가 될 때까지 7년 동안 할머니 정희왕후의 수렴청정(垂簾聽政)을 받았고 어머니 인수대비의 자문을 받았다. 효성이 지극하고 영민했으며 학문을 숭상했던 왕은 재위 25년 동안 많은 업적을 남겼다.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완성하여 통치의 기반이 되는 법제를 정비했으며,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동국통감(東國通監)’,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등을 간행하고, 세조 때의 공신을 중심으로 한 훈구세력(勳舊勢力)을 견제하기 위하여 신진사림세력(新進士林勢力)을 등용함으로써 사림정치의 기반을 조성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성군의 반열에 오르기도 하는 성종이지만, 그도 역시 처복은 없었던지 열 살의 어린 나이에 자기보다 두 살 많은 한명회의 딸과 혼인하였으나 열아홉에 소생 없이 승하하자 원자(후일 연산군)를 낳아 준 후궁 숙의 (淑儀)윤씨를 계비로 맞았다.

성종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반에 걸친 국정의 체제와 기반을 완성시켰으며, 1494년 12월 24일 창덕궁에서 16남 12녀의 소생을 두고 38세로 승하하여 이듬해 4월 6일에 장례지냈다.

 

 

 

 


선정릉에 딸린 재실(齋室)  

 

   선릉과 정릉을 돌아 나오다가 마지막으로 선릉과 정릉의 능에 딸린 재실(齋室)을 둘러보았다. 재실은 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집을 통틀어 말하며, 재각(齋閣)·재궁(齋宮)이라고도 한다.

   이곳은 제관들이 제사 준비와 왕의 휴식을 위하여 사용되었으며, 능을 관리하는 능참봉의 집무실로 사용하였다. 원래는 성종대왕릉과 중종대왕릉에 각각의 재실이 있었으나 대한제국 시절에 2개의 재실을 현재의 재실 즉 1개소로 합쳐지었다.  

   2005년 4월 22일~11.28일까지 대보수를 하여 현재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선릉, 정현왕후릉, 정릉의 제향을 모시는 향대청으로 이용하고 2006년 4월 1일부터 일반 관람객들에게 재실의 모습을 관람시키고 있다.  

  돌계단을 올라 ‘ㄷ자형’으로 된 재실의 솟을 대문 같은 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능참봉의 집무실이 있고, 왼쪽으로 향대청이 있다. 그리고 3면을 빙 둘러 여러 사람이 기거할 수 있는 방과 부엌을 이어달았다. 보수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깨끗하게 단장된 모습의 재실은 왕가 제례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복잡한 도심에서 시원한 숲 한 자락을 만나 소풍하듯 둘러보던 지난날의 방문과는 달리 역사의 한 단면을 공부했다는 부듯함이 일었다. 사적을 통해서 배우는 역사공부는 무엇보다 흥미가 있다. 

 

 

 

선릉·정릉 역사문화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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