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 시민의 숲
도시 속 산림욕장, 양재 시민의 숲에 가면 ...
글·사진 남상학
서초구 양재동 일대에 자리 잡고 있는 시민의 숲은 가족단위로 나들이 공원으로 1986년 개장한 곳이다.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서울 올림픽대회를 개최하면서 서울의 관문인 양재 IC주변에 도시미관 개선과 시민들의 쾌적한 휴식공간 제공을 위하여 조성한 공원이다. 역에서 성남방향으로 가다보면 오른쪽에 넓게 펼쳐진 숲 을 볼 수 있다. 이곳이 바로 양재 시민의 숲이다.
1983년 발표된 서울시의 방침에 따라 같은 해 8월 양재동 236번지 외 3필지에 녹지사업소가 개발을 착수하여 1986년 완공되었다. 약 25만 8,992㎡의 면적으로 그 중 녹지대가 20만 5872㎡, 주차장이 5,972㎡, 광장이 7,211㎡, 기타 시설이 3만 9937㎡를 차지한다. 녹지에는 소나무, 느티나무, 단풍, 칠엽수, 잣나무, 감나무, 모과나무 등 70종 25만주의 수목이 울창하게 자리 잡고 있어 도심 속 산림욕장 구실을 한다.
꽃과 나무로 어우러진 4.8km에 이어진 산책길은 산림욕과 아울러 삶의 여유를 마음껏 즐길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오솔길을 따라 거닐어도 좋고 벤치에 앉아 맑은 숨을 쉬는 것으로도 상쾌한 시민의 숲으로 각 공간마다 색다른 분위기를 제공하며, 도시인에게 여유로움과 편안함을 제공하고 있다.
양재 시민의 숲에서 가장 중심은 윤봉길의사기념관인 매헌기념관과 높이 9.2m의 윤봉길의사상, 높이 2.14m의 윤봉길 의사 숭모비(崇慕碑)라고 할 수 있다. 매헌기념관 앞 우측에 세운 숭모비는 나라의 독립과 인류의 평화, 평등, 자유를 위하여 25세의 나이로 순국하신 매헌 윤봉길 의사의 상해 의거 제 61주년을 맞아 세운 것으로 의사의 뜻을 널리 전하고 우리의 후손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세웠다.
그 옆에 있는 매헌윤봉길의사상(梅軒尹奉吉義士像)은 1992년 4월 29일, 의거 60주년을 맞이하여 살신성인의 숭고한 애국독립정신을 후세에 전하고자 윤봉길 의사 제6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주관하여 세운 것이다. 동상기단에는 “홍구공원에서 푸른 풀을 밟으며”란 그의 유작시를 새겼다.
처처한 방초(芳草)여
명년에 춘색(春色)이 이르거든
왕손으로 더불어 같이 오게
청청한 방초여
명년에 춘색이 이르거든
고려(高麗) 강산에도 다녀가오.
다정한 방초여
\금년 4월 29일에
방포(放砲) 일성(一聲)으로 맹세하세.
이 글은 의거 현장을 답사한 뒤에 마지막으로 자신의 결의와 소망을 적은 의사(義士)의 유시(遺詩)이다. 고개를 들어 쳐다보는 순간 “사람은 왜 사느냐, 이상을 이루기 위하여 산다.”고 한 선생의 어록처럼 그 뜻이 동상의 높이만큼이나 까마득하다는 느낌이다.
2,000여 평의 대지위에 지하1층· 지상3층으로 건립된 윤봉길의사 기념관은 1988년 10월에 개관하였다. 매헌기념관에 들어서면 정면에 매헌 윤봉길의 좌상이 있고, 1층 전시실에는 윤봉길 의사가 수학기에 쓰던 서책류, 문방구류, 농민운동기의 저서인 <기사년 일기(己巳年日記)>, 월진회 창립취지서, <농민독본>, 의거 당시의 소지품류, 정부수립후의 추서훈장 등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으며, 윤봉길 의사의 수학기, 농민운동기, 상해 의거기로 나눈 생애도가 구분 전시되어 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6쪽 병풍에 쓴 그의 어록이 걸려 있고, 2층에 올라서면 독립운동 사진 전시실과 영상실이 있는데, 전시실에 걸린 사진들을 보면 조국을 되찾기 위해 만주벌판에서 외로운 투쟁을 벌였던 애국지사들의 무용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3층에는 강당으로 꾸며 매헌강좌와 세미나 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윤봉길(尹奉吉, 1908~1932) 의사는 1908년 충남 예산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우의(禹儀), 호는 매헌(梅軒)이며, 봉길(奉吉)은 별명이다. 1918년에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다음해 3·1운동이 일어나자 식민지 교육을 거부하며 자퇴하였다. 그 후 한학을 배우고 독학으로 국사와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야학을 세우고 월진회(月進會)를 조직하여 농민계몽운동과 농촌부흥운동, 독서회운동을 전개했고, 교재로 <농민독본(農民讀本)>을 저술했다.
1930년 3월에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사내 대장부는 집을 나가 뜻을 이루기 전에는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라고 쓴 편지를 남겨 놓고 망명길에 올랐다가 도중에 채포되어 잠시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나, 다시 만주로 탈출했다. 1931년에 상하이로 가서 직공 생활과 야채 장사를 하면서 노동조합을 조직하였고, 영어 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그 해 겨울에, 한인애국단을 이끌던 김구(金九)를 찾아가 독립운동의 의지를 밝히고 기회를 마련해 줄 것을 요청했다. 1932년 1월 8일 한인애국단의 이봉창(李奉昌)이 일본 도쿄[東京(동경)]에서 일본왕을 죽이려다 실패하자, 상하이 일대는 한층 복잡한 정세가 되었다. 또한 일본의 군벌은 상하이를 침공했는데 처음에 참패한 분풀이로 주택지에 무차별폭격을 가하는 만행을 자행했다.
일본은 자신들의 실패를 은폐하고 크게 승리한 것처럼 세계에 선전할 목적으로 일본왕의 생일인 4월 29일에 훙커우공원(홍구공원)에서 폭탄을 던지는 거사를 맡게 되었다. 김구·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조소앙(趙素昻) 등의 협의 끝에 윤봉길이 폭탄을 투척하기로 결정했다.
윤봉길은 폭탄이 장치된 도시락과 물통을 가지고 삼엄한 경비를 뚫고 축하식장에 미리 들어갔다. 그리고 행사가 시작되자 단상 정면에 폭탄을 던져, 일본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라 대장, 상하이 거류 민단 겸 행정 위원장인 가와바타 데이지를 즉사시키고, 제3함대 사령과 노무라 기치사브로 중장,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 중장, 중국 주재 일본 공사 시게미스 마모루 등에게 중상을 입혔다. 거사 직후 현장에서 체포되어 일본 오사카로 압송되어, 6월 21일 군법 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2월 19일에 총살당했다. 총살 직전 마지막 유언으로 남긴 말-
아직은 우리가 힘이 약하여 외세의 지배를 면치 못하고 있지만
세계대세에 의하여 나라의 독립은 머지않아 꼭 실현되리라 믿어마지 않으며,
대한 남아(大韓男兒)로서 할 일을 하고 미련 없이 떠나가오.
윤봉길 의사의 거사를 계기로 침체에 빠졌던 독립운동은 사기를 얻었고, 독립운동 단체들이 중국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 특히 윤봉길 의거를 주도한 김구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권위가 더욱 높아졌다. 유해는 1946년에 옮겨져 효창 공원에 안장되었고,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사람은 왜 사느냐 이상을 이루기 위하여 산다.
보라, 풀은 꽃을 피우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나도 이상의 꽃을 피우고 열매 맺기를 다짐하였다.
우리 청년시대에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도 더 한층 강의(剛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
나의 우로(雨露)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서라도
그 강의한 사랑을 따르기로 결심하여 이 길을 택하였다.
- 윤봉길 의사 어록 중에서 -
공원 안에는 물과 꽃, 그리고 나무들이 어우러진 화려한 햇살 아래 가족 모두가 이용할 수 있는 중앙광장에는 수경시설과 휴식공간, 야외무대, 어린이놀이터도 있다. 특히 수경시설은 계류, 연못, 바닥분수, 징검다리로 이루어진 가족 휴식공간 역할을 한다.
그리고 주변 야외예식장에선 야외결혼식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주변엔 파고라 (그늘막) 등이 있어 한결 운치가 있다. 그리고 운동시설로 배구장·배드민턴장과 실내 및 실외 테니스장이 있어 언제나 테니스를 즐길 수 있다.
또 건강걷기를 위한 맨발공원이 있다. 맨발공원은 화, 수, 목, 금, 토의 5가지 테마로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 것이 특징이다. 화는 해미석과 흙석 자갈로 조성되어 있고, 수는 계류형 포장패턴으로, 목은 수목터널과 원목으로 만들었다. 금은 철도레일을 본 따 만든 스테인리스로, 토는 황토흙으로 만들었다.
우리 발은 많은 경혈이 집결되어 있어 발바닥을 자극하여 혈액순환을 돕고, 면역기능을 회복시켜 신체의 자연 치유력을 강화시켜 준다. 지압보도의 중간중간 벤치가 많아 앉아서 쉬기에 좋다. 가운데 부분에는 벤치프레스, 싯업벤치 등의 운동기구들이 마련되어 있다. 관리실 옆에는 자연학습장이 있어 개미취, 둥굴레 등 20여종의 식물과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원두막이 있으며, 매점이 있다.
또 도로를 건너 남쪽 구역에는 6·25전쟁 당시 비정규군 전투부대로 참전하여 희생된 이들을 위로하고자 세운 높이 8.8m의 유격백마부대 충혼탑이 있다. 그 뒤로는 1987년 KAL기 미얀마상공 피폭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탑과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희생자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건립한 삼풍참사위령탑이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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