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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서울

청계천(1) : 우리 곁으로 돌아온 청계천, 그 의미와 과제

by 혜강(惠江) 2005. 12. 27.

 

청계천(1) 

 

청계천, 생태환경으로 되살아난 현장

 - 역사, 문화, 생태 환경으로 살아나다

 


글·사진  남상학

 

 

 



1. 청계천 물길 열리던 날

 

  시인 정진규는 청계천 복원에 부쳐서 '새 물꼬 새물맞이 노래'라는 제목으로 축하시를 썼다.

 

   오늘 새 물고 트는 날 새 물길 열리는 날
   노자(老子) 선생이 방긋이 웃는다
   그날 개천(開川)하던, 처음 물길 트던 세종임금 영조대왕도
   좋다 좋도다 웃고 계시다
   그 물길 막히고 끊겼던 지난 나날들 
   서울의 복장이 왜 아니 답답했겠는가 
   염장 미역 같았어라, 어둠의 감탕들
   우리네 살림 곳곳에 아니 스며들었다 말할 수 없으리
   진작 열었어야 했다.
   開川(개천), 본래 이름 그대로 열었어야 했다.


   2005년 10월 1일 청계천 새 물길이 열렸다. 조선시대 개천(開川)으로 불렸던 청계천이 이름 그대로 청계천(淸溪川)이 되어 돌아 왔다. 1961년 콘크리트로 덮인 지 44만이다.

   열린 물길 따라 도심의 하늘도 열리고 사람들의 마음도 열렸다. 물길은 빌딩 숲속을 가로지르며 아스팔트 도시에 향기를 불어넣고 사람들의 삶도 바꾸고 있다. 맑은 물이 콸콸 흐르고 작은 폭포가 환호 소리를 지르며  떨어진다. 가난에 못 이겨 사랑하는 자식과  해어졌던 그 유장한 세월,  그리움과 애환을 함께 안은 채 돌아 온 어머니 가슴 같이 그는 성큼 우리 곁에 돌아 온 것이다.

   5.8km에 이르는 시원한 물길은 바람길을 열었고 바람길은 서울에 새로운 생명을 선사했다. 반세기 동안 묻혀 있던 서울의 역사와 문화를 복원한 청계천은 회색 콘크리트 고가도로와 자동차로 가득했던 서울 도심을 맑은 물이 흐르고, 물고기가 뛰노는 생명의 공간으로 바뀌었다.

   2003년 7월 1일 오후 2시20분 서울 청계고가도로가 시작되는 광교 앞 기공식장에서는 문정희 시인이 축시 ‘청계천이여, 서울의 푸른 혈맥이여’를 낭독하며 “청계천이여, 천년 미래를 살아갈 네 이름으로 오늘 새 생명의 역사를 다시 시작한다”고 외친지 2년 3개월간의 공사 끝에 드디어 제 모습을 드러냈다.

   청계천이 열리던 날, 이날은 날씨마저 화창한 가을이었다. 청계천 시작 지점인 청계광장에서 치러진 ‘청계천 새물맞이’ 기념식은 친환경 서울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날 기념식에 모인 수만 명의 시민들은 청계천 복원을 함께 기뻐했다. 

   백두산 천지, 한라산, 백록담, 두만강, 낙동강 등 전국에서 담아온 물을 하나로 담아 흘려보내며 절정에 치달았다. 이어 서울 시민의 소망을 담은 풍선이 청계천 상공에 떠올랐고, 청계천 전역에서는 화려한 불꽃놀이가 펼쳐져 생명의 탄생을 축하했다. 또한  2만여 명이 참가한 ‘청계천 시민 걷기대회’와 달리기 행사도 열렸고, 연휴 3일 동안 150만 명의 시민이 몰렸다. 가족끼리 연인끼리 손을 잡고 나온 시민들은 청계천의 아름다움과 시원스럽게 탁 트인 전경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어디 이것뿐인가. 청계천 주변에서는 아티스트들의 마술쇼, 마임과 같은 즉석 공연과 갖가지 문화행사도 줄이어 모처럼 도심 나들이에 나선 시민들을 즐겁게 했다. 축제의 분위기는 3일 저녁 서울광장 특설무대에 마련된 ‘70~80 추억 콘서트’로 무르익었다.

 


2. 지난 날 청계천은 어떤 곳이었나?

     

   인왕산과 북악산 사이에서 발원하여 여러 지천들을 품고 서울 중심부를 관통하는 청계천은 서민들이 고단한 삶을 꾸려온 생존의 현장이자 자연이 살아 숨 쉬는 생태의 공간이었다.  조선조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면서 조선조에서는 하천의 범람을 막기 위하여 몇 차례 하상을 파내고, 하폭을 넓히며, 양안에 석축을 쌓고, 수시로 준설공사를 실시했다. 그러나 청계천은 조선 말기에 이르러서는 골칫덩어리로 변해갔다.

   장마철이면 넘쳐 물에 잠기는 집이 많았고, 집에서 나오는 오물 탓에 전염병도 많이 발생했다. 그래서 한때 청계천은 ‘홍수’와 ‘전염병’으로 악명이 높았다. 당시 한양 주민 중 청계천에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일수록 사망률이 높았다는 기록이 있다.

   일제강점기나 광복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피폐한 농민들이 경성으로 올라오면서 이들이 지은 무허가 임시건물이 난립하기 시작했다. 또 청계천 다리 밑은 걸인들이 모이는 곳으로 저마다의 삶의 애환들로 얼룩진 터전이었다. 일용 근로자, 다방골 기생들 대부분도 천변에 자리를 잡았다. 집값이 싸 사람들이 몰리면서 전염병 감염률이 전국 최고였다. 

 

   조선총독부가 있을 때
   청계천변(川邊) 십전 균일상(十錢 均一床) 밥집 문턱엔
   거지소녀가 거지장님 어버이를 
   이끌고 와 서 있었다.
   주인 영감이 소리를 질렀으나
   태연하였다.

   어린 소녀는 어버이의 생일이라고
   십전(十錢)짜리 두 개를 보였다. 
  
     - 김종삼의 <掌篇 2>


   이 작품은 당시의 생활상의 단면을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다. 또 주택에 화장실이 없어 오물이 고스란히 흘러들었다. 주변을 지날 땐 코를 막고 다녀야 할 정도였다. 이런 위생의 문제와 교통의 문제로 청계천을 전면 복개해 도로를 만들고, 또 일부를 상업 지역으로 이용하려는 계획을 세운 바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는 10여 년 안에는 청계천을 관리하지 못한 채 방임 상태로 둬 토사 매몰이 극심했다. 거기다가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도 돈 없고 갈 곳 없는 피난민들까지 몰려들어 우후죽순 격으로 판자촌을 형성했다.  

 

 



  이후 청계천 양쪽으로 상권이 형성되고 교통량이 증가하면서 1958년 광교에서 오간수다리(평화상가 앞)까지 약 2㎞를 철근콘크리트로 복개되고, 1961년 오간수교~제2청계교, 오늘날 마장철교까지의 복개구간은 1978년에 완성됐다.

   이로써 흉물스런 천계천은 아스팔트로 복개함으로써 함몰되어 지하에 갇혔고, 그러다가 1971년 가파른 경제발전의 분위기를 타고 거대한 구조물인 청계고가도로가 세워졌다.

   날마다 달라지는 구호와 현수막 
   붙박이 간판들은 서슴없이 
   우리들의 공중마저 빼앗고 
   어느 날 새의 부리에서 
   끊임없이 흘러내린 폐수 
   여기서는 치료할 수 없다며 
   뿌리째 이사한 청계천 
   어디로 갔을까 우리들의 청계천은

 

      - 박라연의 <우리들의 청계천>의 일부 

   그러나 천계천의 복개와 그 위에 세워진 고속도로는 경쟁과 속도, 효율만을 추구하는 약탈적 근대화의 상징이었다. 한때 늘어나는 교통량을 해결하는 유일한 대안으로 평가되기도 했으나 어느덧 도시의 흉물처럼 변모되었다. 

 

  마구잡이 개발의 부작용으로 청계천 상실의 시대를 겪어야 했다. 가뜩이나 숨 막힐 듯 빽빽이 들어찬 빌딩 숲에 고가도로까지 시야를 가려 도시의 미관은 완전히 훼손되었고, 뿜어내는 매연으로 서울을 질식 직전으로 몰아갔다.  그나마 시설이 낡아 언제 붕괴할지 모르는 위험을 안고 있었다. 이제 보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엇을 정도로 노후되자, 특히 미군 당국은 청계천 지하에서 발생하는 일산화탄소, 메탄가스로 인해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위험을 경고하며 주한미군들에게 청계천 고가도로 통행을 금지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생활의 편의로 시작된 청계천은 그야말로 애물단지로 변해갔다.

 

 

 

3. 청계천 복원의 의미와 과제

 

(1) 역사 · 문화 · 생태 환경의 복원

 

   가파른 경제발전과 군사문화의 후유증으로 졸지에 아스팔트 도로에 함몰되어 지하에 갇혀 있었다. 1961년 도심의 청계천을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덮은 지 44년, 1971년 청계고가도로가 세워진 지 34년 만에 청계천이 새 단장을 하고 드디어 얼굴을 드러낸 것이다.

   그 동안 청계천의 복개와 그 위에 건설된 고가도로는 경쟁과 속도, 효율만을 추구하는 약탈적 근대화의 상징이었다. 우리는 그 동안 마구잡이 개발의 부작용으로  청계천 상실의 시대를 깊게 겪었다.

   그런 청계천이 복원되어 시민의 품으로 돌아오면서 사람보다 자동차, 시민 편의보다 효율을 중시하던 개발시대의 얼룩은 더 이상 자리 잡기 어렵게 됐다. 잊혀 진 삶의 역사가 되살아났다. 무리한 공사로 문화재 복원을 소홀히 하거나 다소 원형을 훼손시켰다는 지적도 있지만 묻혀 진 문화유산(유적)을 발굴하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다시 열린 청계천은 서울 도심의 빌딩 숲을 가로지르며 도심의 라이프스타일을 바꾸어 놓았다.

   또한 청계천 복원으로 쫓겨났던 자연의 친구들이 돌아왔다. 생태 환경의 큰 변화다. 도심 한가운데 유유히 흐르는 청계천엔 이미 물고기와 풀벌레, 새들이 바글댄다. 잉어, 피라미는 기본이고 송사리, 미꾸라지, 메기, 버들치 같은 어류가 관찰된다. 어류가 늘면서 먹이사슬이 형성돼 백로, 청둥오리, 황조롱이 등이 허물없이 어울린다.

 

  수변 녹지대에는 능수버들, 꼬리조팝나무, 키버들 등의 나무와 물억새, 벌개미취, 노랑꽃창포, 왕원추리, 달뿌리풀, 털부채꽃이 등이 자리를 잡았고, 석축을 타고 수세미 조롱박이 매달려 있고, 담쟁이, 능소화, 등나무가 기어오른다.  ‘환경 복원’ 효과도 크게 나타나고 있다. 우선 청계천에 물이 흐르면서 주변 기온이 낮아지는 ‘도심 에어컨’ 효과가 생겼다. 청계고가도로가 없어져 바람 속도가 빨라진 것도 도움을 줬다는 분석도 있다. 그야말로 환경 개선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이루어진 셈이다.

   어디 그것뿐인가? 연장 5.8km에 걸쳐 있는 22개의 다리가 제각각 특색 있는 이름과 모양을 뽐내는 가운데 김홍도의 지휘 아래 당대 최고의 화가들이 그려낸 폭 2.4m, 길이 192m의 정조반차와 같은 재생그림은 물론 도처에 도시 환경에 맞는 각종 문화 공간이 자리를 잡았다.

   이제 차들이 뒤엉켜 복잡하던 청계천이 맑은 물과 가로수, 산책로가 어우러진 친환경 공간으로 바뀌면서 새 상권이 형성되고 있다. 세종로 쪽 청계광장 주변에는 최근 패밀리레스토랑이 생기는 등 식당과 카페가 앞 다퉈 새로 문을 열고 있다. 이제 주변 정비가 되면서 청계천은 시민의 휴식처, 낭만의 거리로 조성되고, 머지않아 관광의 명소가 될 것이 틀림없다.

 

 

 

(2) 삶의 스타일을 바꾼 역사

 

   가장 중요한 것은, 이제 달라진 청계천으로 하여 도시 자체가 바뀌고, 이곳을 통하여 서울 시민들은 삶의 스타일을 바꾸어간다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한 자가 조금 넘는 깊이의 청계천이 거리와 거리, 사람과 사람, 세대와 세대,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소통의 실핏줄’로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그 동안 청계천이 복개되고 고가도로가 놓이면서 사람들의 마음의 흐름을 끊는 곳이 되었다. 교통체증으로 북새통을 이루는 짜증나는 곳이었다. 소화불량의 삭막한 도시에 갇힌 상태였던 마음이 열리면서 이제 청계천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다.  넥타이 차람의 직장인들은 점심을 먹고 삼삼오오 산책에 나서고, 주민들은 퇴근길에 가족과 나들이하는 장소가 되었다. 저녁을 먹은 시민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아이들의 손을 잡고 이곳을 찾아 여유를 즐기게 되었다. 또 젊은 연인들은 영화를 보거나 인근의 두산 타워와 밀리오레, 동대문 패션타운에서 쇼핑한 뒤 야경을 즐기며 데이트를 즐기는 명소로 바뀌었다.

   따라서 청계천을 따라 가득 메웠던 공구, 음향, 조명 업체들은 서서히 사라지고, 그 자리에 들어서는 노천카페나 패밀리레스토랑으로 주변 산책객들과 대화를 즐기려는 아베크족들을 불러들일 것이다.  청계천 24시는 조금도 손색이 없는 만남의 공간, 휴식의 공간, 대화의 공간으로 서울이라는 삭막한 도시에 생기를 돌게 하는 허파와 같은 역할을 할 것이다.


 

(3) 한 지도자의 결단이 이룬 성과 

 

  누가 뭐래도 청계천 복원은 이명박 서울시장의 작품이다. 그는 2002년 서울시장 선거에 나서면서 공약으로 내걸었고, 당선된 뒤 2003년 7월 청계고가도로를 없애는 것을 시작으로 복원공사에 들어갔다.

   청계천 복원 사업은 시작단계부터 국제적 관심사인 대역사(大役事)였다. LA타임스를 비롯한 세계 유수언론들이 청계천 즉 도심의 하천 복원에 관심을 보인 것도 도심 속의 자연생태환경복원과 그로인해 얻어지는 질 높은 삶의 공간 확보의 가능여부였다.

   그가 청계고가도로를 철거할 때만 해도 시민들은 청계천 복원이란 거창한 사업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 반신반의했다. 복개도로 주변에 산재한 각종 공구상을 비롯한 수많은 상가 와 이해관계가 얽힌 잡다한 재산권의 향방은 그만큼 첨예한 것이었고, 그로 인해 심각한 진통을 겪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무려 22만 명의 주변 상인들과 1500여 명의 노점상과의 갈등을 빚었다.

 

  그러나 그는 발로 뛰며 그들을 설득했고, 짧은 기간에 이 일을 마무리했다. 그가 가진 특유의 추진력이 이루어낸 결과였다. 착공한지 2년 3개월 만에 애물단지가 생명천으로 다시 흐르게 된 데에는 그의 공로가 매우 컸다. 또한 공사 시작 뒤 생업을 제한당하면서도 묵묵히 견뎌온 시민들의 협력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정치적인 목적으로 복원이 된 뒤에도 그의 공적을 깎아내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진정한 복원은 흙더미로 뒤덮인 본래의 모습이어야 한다는 궤변도 있었다. 또 청계천 복원이야말로 또 하나의 콘크리트 더미와 다를 것이 무엇이냐며, 평균 깊이가 30∼40cm 정도로 무슨 하천의 구실을 하겠느냐고 폄하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인공적인 면이 가미됐다 하더라도, 근대적 안목에서 하천도 변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쯤은 참을 만하지 않은가. 또 삭막한 도심 한복판을 유유히 흐르는 청계천 물이 비록 프랑스 파리의 센 강의 수량(水量)보다 적다해도 그것만으로 각종 희귀 새와 물고기가 찾아들어 시민들 마음을 촉촉이 적셔준다면 그 역할은 충분하지 않은가.

   거대한 흉물을 걷어내어 소통의 물길을 내고, 거기 묻혔던 역사유물을 발굴하고, 새롭게 조성한 경관에 알맞게 현대적인 조형물을 세우고, 비좁기는 하지만 휴식공간과 산책로를 만들어 누구나 찾고 싶은 곳으로 바꾸어 놓았다면 이처럼 엄청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청계천 복원은 지도자의 결단력과 추진력이 한 공동체의 성쇠를 가늠하는 중대한 요소임을 실감케 했다.

 

 

 

(4) 세계인이 주목하는 관광의 명소로 만들어야

 

   청계천은 비가 올 때를 제외하고는 늘 물이 없는 마른 하천이어서 다른 곳에서 물을 끌어와 흘려보내야 한다. 한강 취수장에서 끌어올린 물로 채웠으니 인공수로에 가깝다.

   북악산 인왕산 낙산 개운산 남산의 수많은 골짝에서 흘러나와 청계천에 물을 대던 지천들은 아직 지하에 갇혀 있으므로 앞으로 자연하천을 살려 내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생태 환경의 복원과 쾌적한 휴식 공간 확대를 위하여 가능한 한 수변 녹지대를 확보하고, 주변 교통 혼잡을 해결하기 위해 도로를 확장 정비하고, 청계천 환경에 맞게 상가를 정비하고 도심형 형태로 바꾸는 일이 시급하다.

   또 중요한 것은 청계천을 복원할 당시의 마음으로 잘 간수하고 보존하고 가꾸는 일이다. 이것은 청계천에 대한 애정과 이를 이용하는 시민의 문화 수준과도 연관된다. 진정으로 이 모든 시설을 사랑하고 아낀다면 이를 더럽히거나 파손하는 일이 없어야 하고, 센 강을 사랑하는 파리의 시민들처럼 모두가 남다른 애정으로 애착을 가지고 가꾸는 마음이 중요하다.

   나아가 청계천은 우리의 삶의 질을 바꾸는 공간이 되어야 하고, 외국인이 몰려오는 관광의 명소로 가꾸는 일이 중요하다. 단순한 하천이 아니라 서울의 역사와 미래를 관통하는 살아있는 물줄기가 되어야 하고, 외국인들까지 찾아와 즐길 수 있는 수준 높은 콘텐츠를 많이 만들어 가는 일이다. 

   멋진 건축물과 어우러진 파리는 센 강을 중심으로 1년 내내 특별한 이벤트와 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6월에는 ‘음악축제’, 7월에는 구별로 ‘동네축제’가 열리고, 8월에는 ‘달빛 야외 영화감상회’가 열린다. 그리고 가을이 되면 10월 첫 토요일의 백야축제(白夜祝祭, Nuit blanche)를 시작으로 각종 ‘문화유산의 날’을 정하여 듣고, 보고, 즐길 거리를 끊임없이 제공한다.

 

 


   앞으로 우리도 청계천을 중심으로 문화 민족의 우수성을 살려 주변의 고궁, 문화시설, 쇼핑가, 음식점을 망라하여 특색 있는 세계의 명소로 발전시켜야 한다. 거리화가를 유치하고,  각종 공연 및 전시회 등을 마련하여 볼거리, 들을 거리, 즐길 거리를 만들고, 인근의 상가와 연계하여 계절에 따라 특색 있는 각종 문화행사, 음식축제를 개최하여 누구나 찾아오고 싶은  공간으로 만들어 가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도시 중심에 복원된 청계천에 대하여 세계가 주목하고 전문가들이 찾아온다고 하지 않는가. 단순히 복원으로 끝나지 말고, 내킨 김에 세계인이 주목하는 관광의 명소로 발전시켜야 한다. 시민들의 예술 공간으로, 쉼터로, 만남의 장소로, 추억만들기 공간으로, 또 건강 다지기 공간으로 자리잡아 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청계천은 변화의 시작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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