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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충청북도

청주 상당산성(上黨山城), 양반 고을의 그 역사의 숨결

by 혜강(惠江) 2005. 11. 15.

 

청주 상당산성

양반고을의 숨결, 청주 상당산성(上黨山城)

- 거대한 포곡식(包谷式) 화강암 석축산성 -

 

·사진 남상학

 

 

 

상당산성의 남문인 공남문

 

 

   충청북도 청주시(淸州市) 산성동(山城洞)에 있는 상당산성(上黨山城: 사적 제 212호)은 고도 청주역사의 산 증인이자 파수꾼이다. 신석기 시대부터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 조선말까지 청주 역사의 이모저모를 품에 안고 있기 때문이다.  

   바람소리, 물소리 맑은 선비의 고장 청주를 한 눈에 조망하려면 상령산(上嶺山) 정수리를 감싸고도는 상당산성에 올라야 한다. 신라, 고구려, 백제의 바람이 뒤엉켜 불어오던 이곳은 삼국의 문화를 고스란히 담은 청주 역사의 질그릇이다.

   마파람(동풍), 높새바람(북동풍), 하늬바람(서풍)이 번갈아 불어오다 돌연 역사의 가지에 부딪치고, 산자수명한 충청도 정취에 취해 또다시 정제되어 청풍명월이란 새 바람을 탄생시킨 것이다. 삼국의 문화가 충돌하고 융합하면서 이룩된 충북의 문화는 그 자체가 여타지방과 다른 충북만의 정체성으로 작용한다.  

 

 

 

 

 

  성벽은 네모나게 다듬은 화강암으로 쌓았으며, 4.2㎞의 유구가 남아 있는 서벽과 동벽의 높이는 3∼4m 정도이다. 성벽의 안쪽은 돌을 깨뜨려 틈을 메운 뒤 흙을 채우고 다지는 공법을 사용하였다.

 

   그러면, 이 상당산성은 과연 누가 쌓았을까. 김유신 장군의 아버지 김서현 장군이 쌓았다는 설도 있고, 김유신 장군의 셋째 아들인 원정공(元貞公)이 쌓은 '서원술성'이 다름 아닌 상당산성이라는 설도 있다.  또 <상당산성고금사적기(上黨山城古今事蹟記)>에 의하면 궁예가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옛 성은 최초의 축조 인물을 밝히기가 꽤 어렵다. 더군다나 청주 일대는 삼국의 각축장이어서 성의 주인이 자주 바뀌었다. 성을 빼앗은 자가 자기의 용도에 따라 성을 개축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상당산성 서문 일대에서 발굴조사 작업을 마친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은 그 결과를 발표하였는데 참으로 충격적이었다.

   즉 상당산성은 한 시기에 걸쳐 축조된 것이 아니라 통일신라 말, 고려 말, 조선후기 등 여러 시기에 걸쳐 축조되었다는 사실이 이번에 밝혀진 것이다. 발굴조사결과 서문 밖에서 숙종 이전에 쌓은 고(古)상당산성이 진면목을 드러냈다. 궁예가 야망을 꿈꾸던 시대에 축조된 성벽도 상당수 나타나 상당산성 고금사적기의 신뢰도를 높이고 있다. 

 

 

 

 


  이 산성은 백제의 상당현(上黨縣)에 속했으나 그 후에는 신라에 빼앗긴 듯하다. 백제의 상당산성은 역사의 부침을 따라 낭비성(娘臂城), 낭자곡성(娘子谷城) 등으로 호칭되었으나 오늘날에는 상당산성으로 통칭되고 있다.

   현재의 상당산성은 조선 숙종 42년(1716)에 쌓은 석성이다. 물론 이전에도 성이 존재하였는데 숙종~영조 연간 대대적으로 개축하였다. 그러므로 이 성을 두고 삼국시대 쌓은 성이라고 설명하는 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삼국시대부터 고려를 거쳐 조선 후기까지 쌓은 성이라고 설명해야 옳다. 전국적으로 수많은 산성이 존재하고 있으나 이만큼 옛 모습을 간직한 산성도 매우 드물다.

   성의 돌 틈 이끼에서는 아직도 삼국시대의 이야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그 역사의 체취는 산성의 역사를 알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만 느껴진다. 이곳은 단순한 등산코스가 아니다. 등산과 더불어 우리고장의 역사를 배우는 복합적 문화공간이라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산성 밖으로는 20~40m 정도 벌목을 했다. 멋모르는 사람들은 왜 나무를 베느냐고 할는지 모르지만 나무를 그냥 둘 경우 멀리서 산성이 보이지 않고 또 나무뿌리가 성 밑을 파고들어 성을 훼손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간격으로 벌목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산성은 그 형태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한고 한다. 하나는 계곡을 둘러싼 듯한 모양새로 이를 '포곡식(包谷式)산성' 이라고 하고, 운동선수가 이마에 머리띠를 두르듯 쌓은 성은 '테뫼식 산성' 이라 부른다. 상당산성은 전자에 속한다. 포곡식 산성은 일반적으로 퇴뫼식 산성보다 규모가 크다. 어떤 경우엔 포곡식과 테뫼식을 겸비한 양식도 발견된다.

 

 



   상당산성엘 가려면 산성 입구까지 승용차를 타고 가서 주차를 한 후, 남문으로 올라 성 둑을 한 바퀴 도는 코스가 적합하다. 대개 노약자들은 산성을 한 바퀴 도는 것으로만 해도 운동이 충분하다.   


  상당산성 남문(控南門) 앞에 이르면 잔디밭이 잘 조성돼 있고, 그 중심부에 김시습(金時習)시비(詩碑)가 길손을 맞는다. 2000년 7월 문협  주지부와 청주시가 공동으로 세운 시비다.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은 세조가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책을 불살라버리고 전국을 유랑하고 때로는 세상을 조롱하며 미치광이처럼 살다 생애를 마쳤다. 수많은 시인 묵객이 이곳서 시를 남겼으나 그중 김시습의 시‘유산성(遊山城)’이 가장 유명하다. 김시습 시비에는 바로 ‘유산성’이 새겨져 있다.


    꽃다운 풀이 헤진 짚신에 파고드는데
    날개이니 풍경이 청량하여라
    들꽃에는 벌이 와서 꽃잎에 입 맞추고
    살찐 고사리에 비 내려 향길 더하네. 
    멀리 바라보니 산하는 웅장하고
    높이 오르니 의기는 드높아라. 
    사양 말고 저녁내 바라보시게
    내일이면 바로 남방으로 떠나갈 것일세.

 

 

   화강암과 오석이 한 쌍을 이룬 김시습 시비는 상당산성의 풍광과 자신의 천재성을 잘 말해주고 있다. 여기에서의 '유산성'은 일반적으로 '산성에서 놀며'로 해석되나, 문맥상 '산성에서 배우며'로 풀이하는 것이 옳다. ‘유(遊)’자는 대개 '놀 유'로 쓰이나, '배울 유'의 뜻도 갖고 있다.

 

 

 

 

   성으로 통하는 관문은 두말 할 것 없이 성문이다. 상당산성에는 3개의 큰 문이 있다. 흔히 남문, 동문, 서문으로 불리고 있으나 이런 식의 방위적 명칭은 일본식이어서 달갑지 않다. 원래 남문은 공남문(控南門) 또는 공작루(拱雀樓)로, 동문은 진동문(鎭東門)으로 서문은 미호문(ペ虎門)으로 불리었다.

   남문에 이르러 동쪽 성벽으로 가든, 서쪽 성벽으로 먼저 가든 탐방객의 발길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나 일반적으로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 형태를 취한 공남문을 통해 누각으로 올라선 후 서쪽 벽으로 올라가는 것이 순서다.

   남문에서 걷다보면 작은 문이 나타난다. 이것이 비밀통로 격인 암문(暗門)이다. 오늘날로 치면 비상구와 같은 것이다. 전시(戰時)에 외부와 연락을 취하고 물자를 공급하기 위한 특수 시설이다.

 

  따라서 암문은 비상시에 쉽게 폐쇄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적군이 이를 눈치 채고 암문을 통해 입성할 경우를 대비한 것이다. 암문은 남암문(南暗門)과 동암문(東暗門), 두 곳에 설치되어 있다.

 

 

 



   남암문을 지나 서쪽 벽으로 꺾어들면 청주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청주는 물론 증평, 오창, 미원으로 이어지는 벌판이 시원스레 펼쳐진다. 서문을 일컬어 미호문이라 부른 것은 이곳의 지형이 호랑이처럼 생겨 이를 제압하기 위한 것으로 전해진다.

   서쪽 성벽은 동쪽 성벽보다 훨씬 견고하다. 이로 보면 신라보다 오히려 백제, 고구려를 방어하기 위해 쌓은 듯하다. 율량동을 바라보는 북쪽 벽은 자연 지세가 워낙 험하여 성벽의 높이가 턱없이 낮다.


   동쪽 성벽 진동문 위쪽으로는 동암문이 있다. 이 역시 남암문과 더불어 비밀통로 역할을 하였다. 진동문을 지나 서행을 하면 동장대(東將臺)인 보화정(輔和亭)이 보인다. 장대란 일종의 지휘소다. 상당산성엔 동장대와 서장대가 있는데 지난 92년 동장대는 복원되었으나, 제승당(制勝堂)이라 불린 서장대는 확인만 되었을 뿐 아직 복원치 못했다.

 

 

상당산성의 서문인 미호문



   기록에 의하면 당시 성내에는 구룡사, 남악사 등의 절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자취가 없고, 성내에서 생산되는 쌀은 1만3천5백여 섬에 이르고 해마다 장을 담그는 것이 90여 단지에 1백 섬이며, 동서에 사는 주민이 50여 호에 이른다고 했다.

 

   이로 보아도 상당산성은 삼국초기서부터 후삼국,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청주지역을 방어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청주시는 '상당산성 사적공원화사업' 을 추진하고 있는데 그게 보통 일이 아니다. 사적 지정면적은 5만4천7백 평인데 이중 국, 공유지는 2만3천1백11 평이고, 사유지는 3만1천5백83 평이다. 이 사업을 추진하려면 우선 사유지부터 매입한 연후 발굴조사를 실시하는 게 순서다.

   지금까지는 성곽과 더불어 진동문(동문), 미호문(서문), 공남문(남문) 및 치성, 동장대 등을 복원하였지만 옛 모습을 그대로 갖추기 위해선 할 일이 태산이다. 그래서 상당산성 사적공원화 사업은 오는 2010년까지 10개년 사업으로 모두 3백87억 원을 들여 추진된다.

 

 

상당산성의 산책길

 


   관아는 물론이고 병기고, 포루, 민가, 절(구룡사, 남악사) 등이 복원될 예정이며 이외에도 전통무예관, 전통놀이마당, 씨름장 등을 마련하여 역사의 산 교육장과 휴식 공간으로 활용한다는 청사진을 펼쳐놓고 있다. 

 

  현재 32가구가 모여 사는 산성 안의 한옥마을은 대부분 음식점을 경영하여 생활하고 있는데, 대체로 토종닭과 오골계ㆍ꿩요리 등을 전문으로 하고, 반주로 이곳 명산물인 대추술을 함께 내놓고 있다.

   또한, 매년 4월에 있는 시민의 날 행사 때는 국운융성ㆍ청주발전ㆍ가정화평을 기원하는 "성돌이 행사"를 하고 있으며, 평상시에도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역사의 산교육장이며, 시민의 대표적인 시민 휴식공간이다.

   산성 인근의 명암약수는 초정약수와 부강약수 등과 함께 충북의 3대 명천(名泉)으로 꼽혀오며, 철분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서 위장병ㆍ피부병 등에 효험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명암약수에 이르기 전에는 국립청주박물관, 우암 어린이회관을 거치게 되므로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 드라이브 코스로도 더없이 알맞다. 

 

  상당산성 일원은 봄철의 경치가 빼어나다. 특히, 5월에는 산 벚꽃이 주변에 만발하며 상당산성의 정문인 남문(공남문)에 이르는 도로 양옆에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다. 또 산성 입구의 넓적한 돌계단을 따라 공남문에 이르는 오솔길 주위에 펼쳐진 봄꽃들의 향연이 화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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