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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충청북도

제천, 중부내륙 산악지대에 터 잡은 청풍명월의 본향

by 혜강(惠江) 2008. 2. 10.

 

충북 제천

 

중부내륙 산악지대에 터 잡은 청풍명월의 본향

 

 

글·사진 민병준

 

 

 

 

▲ 충추댐을 막아 생긴 호수를 제천 주민들은 특별히 청풍호라 부르며 아낀다. 

 
 

  제천 가는 길. 고민이 참 많았다.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제천의 심장부인 시내로 곧장 들어갈까, 아니면 중부내륙고속도로를 타고 충주쪽에서 접근할까. 현대의 도로교통지도와 조선시대의 대동여지도를 놓고 궁리하던 끝에 후자를 택했다. 충주의 목계나루에서 38번 국도를 타고 제천의 관문이랄 수 있는 박달재를 넘어 제천으로 들어서는 게 옛 분위기를 조금 더 느낄 수 있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박하사탕’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을 찍은 백운면 진소 마을 기찻길을 구경한 후 다시 되돌아나와 박달재를 넘는다. 입에서 저절로 흘러나오는 노랫가락.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

    물항라 저고리가 궂은비에 젖는구려 

    왕거미 집을 짓는 고개마다 구비마다 

    울었소 소리쳤소 이 가슴이 터지도록


   중년 이상의 나이라면 고향 생각 절로 나게 만드는 대중가요 ‘울고 넘는 박달재’다. 이 노래 배경지인 박달재는 충북 제천에 있다. 높이는 해발 453m로 그리 높은 편은 아니지만, 고갯길은 조금 험한 편이라 몇 년 전 터널이 뚫리기 전만 해도 휴일이면 제법 정체가 심했다. 

 

  펑퍼짐한 정상에 자리 잡은 박달재공원에는 조선시대 복장을 한 남녀 한 쌍이 애틋한 자태로 먼 산을 바라보고 있다. 이들이 바로 ‘울고 넘는 박달재’ 노래의 주인공인 박달 도령과 금봉 낭자다. 박달재란 유래를 알 수 있는 가사 2절을 한번 들어보자. 

 

    부엉이 우는 산골

    나를 두고 가는 님아

    돌아올 기약이나

    성황님께 빌고 가소

    도토리묵을 싸서

    허리춤에 달아주며

    한사코 우는구나

    박달재의 금봉이야

 

 

 

▲ 대중가요 ‘울고 넘는 박달재’의 배경지인 박달재. 정상의 공원에는 박달과 금봉의 이별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서있다.

 

 

 

옛 전설은 이렇다. 조선 중엽 영남의 젊은 선비 박달은 과거를 위해 한양으로 가던 중 이 고개를 넘게 되었다. 마침 저물어 한 민가에서 묵게 되었는데, 그 집의 과년한 딸 금봉 낭자와 눈이 맞았다. 청춘남녀는 금방 가까워 졌다. 며칠 뒤 박달은 과거에 급제한 후 금봉과 함께 살기로 약속하고, 그녀가 싸준 도토리묵을 허리춤에 매달고는 고갯길을 넘어갔다. 박달은 한양에 도착했으나 공부는 뒤로 한 채 밤낮으로 금봉이 생각만 했다. 결국 낙방하자 금봉 볼 낯이 없던 박달은 그녀에게 돌아가지 못하고 이 고을 저 고을을 떠돌았다. 

 

 

 

▲ [좌] 배론성지의 황사영 토굴. 조선 말기 황사영은 옹기 저장소로 위장한 이 토굴에 숨어서 백서를 썼다고 한다. [우] 박달재 고갯마루에 있는 성황당. 박달과 금봉의 넋을 달래기 위해 세운 것이다.

 

 

한편, 박달을 떠나보낸 금봉은 날마다 고갯마루 성황당에서 박달의 장원급제와 무사귀환을 빌었다. 그러나 과거가 끝나고도 박달이 돌아오지 않자 금봉은 그리움에 사무쳐 고갯길을 오르내리다 한을 품은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금봉의 장례를 치르고 난 사흘 뒤 박달은 초라한 모습으로 금봉의 집을 찾았으나 그녀는 이미 저승 사람이었다. 땅을 치며 울던 박달 도령이 얼핏 고개를 들어보니 금봉 낭자가 너울너울 춤추며 고갯마루로 달려가는 게 아닌가. 박달은 벌떡 일어나 뒤쫓아 갔다. 고갯마루에 이르러 겨우 금봉을 따라잡은 그는 금봉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 순간 금봉의 환영은 허공으로 사라지고 박달은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 이런 일이 있은 뒤부터 사람들은 이 고개를 박달재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현재 박달재 정상에는 슬픈 연인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1997년에 세운 성황당이 길손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우리말 어원으로 살펴보면 박은 밝다, 크다, 하얗다, 높다, 성스럽다 등의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며 달(達)은 산이나 언덕 등을 의미한다. 박달재는 아득한 옛날 하늘에게 제사를 올리던 성스러운 곳이었다. 한편, 이 고개는 1217년(고려 고종 4) 7월 거란이 10만 대군으로 침공해 왔을 때 김취려 장군이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물리친 전승지이기도 하다. 박달재 정상에 있는 역사관은 이를 기리기 위해 건립한 것이다.


박달재 정상에서 제천쪽으로 내려와 38번 국도를 만난 뒤 500m 정도 가면 오른쪽으로 자양영당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여기서 우회전해 한적한 시골 풍광을 즐기며 5km 정도 들어가면 구한말 풍전등화의 위기에 있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떨치고 일어섰던 조선 의병의 뜨거운 넋이 살아있는 자양영당(紫陽影堂)이 반긴다.

자양영당이 있는 장담 마을은 참 한적한 농촌이다. 소란스럽지 않고 정겨움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 깊은 산골에서 뜨거운 정신이 발현되고 유지되었다는 사실을 되새기면 온몸이 짜릿해진다. 그러나 인적은 드물었다. 휴일임에도 답사 나온 듯한 대학생들 두엇 외에는 너무도 한적했다.

조선 후기에 주리론(主理論)을 크게 일으킨 대학자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1792-1868) 학맥의 적통이 경기도 양평에서 이곳까지 뻗치게 된다. 즉 화서의 수제자인 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1821-1893)가 제천의 이곳 장담 마을에 들어와 자양서사(紫陽書社)라는 아담한 서당을 세우고 학문을 강하자 이곳은 위정척사를 따르는 지식인들의 중심이 되었던 것이다. 

 

 

나중에 성재가 세상을 뜨자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1842-1915)이 뒤를 이어 위정척사의 영수가 된다. 그리고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선포되자 의암은 조선 8도 유림 600여 명을 모아 변고의 시기에 선비들이 처신해야할 ‘강령 3조’의 통문을 돌렸다. 이를 처변삼사(處變三事)라 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소탕하라’는 거의소청(擧義掃淸)이요, 둘째는 ‘국외에 망명하여 국체의 옛 모습을 그대로 지키라’는 거지수구(去之守舊)요, 셋째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자정치명(自靖致命)이다. 당시 의암은 선비임에도 왜적을 소탕하는 길을 택하고 의병을 조직하니 모인 자 모두 3,000명이 넘었다고 한다. 1만 명이 넘는다는 자료도 있다.


제천시 문화관광과에서 파견 나왔다는 젊은 직원은 청하지 않았는데도 길손에게 다가와 자양영당과 제천의병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곁들여주었다. 뜨거운 햇살 아래에 서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그의 표정은, 아무래도 한직(?)일 텐데도, 의병의 진원지에 근무한다는 자부심이 철철 넘쳤다.


“당시 이 근처에는 아름드리 스무나무가 가득했다고 합니다. 향음례를 가장해 그 나무 숲 아래에서 모임을 가졌던 것이지요. 장담 마을에는 화서학파들이 모여서 의병봉기를 결의하고, 원주 안창에서 첫 의병을 일으켜 단양지역 전투에서 첫 승리를 얻게 되지요. 이듬해 유인석 선생을 의병장으로 추대한 제천 의병은 충주와 제천을 넘나들며 일제에 항거했고, 이 항거가 시발점이 되어 뒷날 무장독립군 창설의 모태가 되지요.”
 
그의 말대로 제천 의병은 충주성을 목표로 삼았다. 중부 내륙의 정치적 중심지라는 충주의 상징성 때문이었다. 당시 진군로를 보면 주력부대는 주포~박달재~다릿재를 넘어 충주성 북쪽을, 별동대는 청풍~황강을 거쳐 충주성 측면을 공격했다. 그 결과 1896년 2월17일 충주성을 함락시킨다. 이 전투는 제천 의병의 명성을 전국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제천 의병은 일본군의 총공격을 받고 20여 일만에 제천으로 물러서 방어전선을 편다. 제천 시내 화산동, 지금의 교육청 남산 자리가 제천 의병이 주둔한 곳이고, 그 뒤쪽 아후산(衙後山)이 지휘소였다. 그러나 일본군은 맹공세를 펼친다. 결국 1896년 5월 전투에서 패해 제천을 잃은 유인석은 정예부대를 추려서 서북행을 결행한다. 강원도, 함경도, 평안도를 지나는 기나긴 장정을 어렵사리 거쳐 평북 초산에 이르러, 조정의 관리들에게 나라를 회복하기 위하여 의병을 일으켰음을 밝히는 재격백관문(再檄百官文)을 보내고 두만강을 건넜다.

나중에 의암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안중근, 홍범도 등과 함께 활약하면서 국내외 통합의병기구를 추진한다. 그리고 1910년 13도의군이 조직된 후 류인석은 도총재로 추대되었고, 안중근은 13도의군 연해주지방 책임자가 되었다. 8도의병이 연합한 서울진공계획을 세우기도 했던 의병장 의암 유인석. 비록 그 작전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선열들의 그런 정신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존재하는 것 아닌가. 이렇듯 의암은 구한말에서 일제 강점기에 이르는 의병 역사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 자양영당 한쪽에는 의병항쟁과 의병정신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의암이 떠난 뒤 제천에서 일어난 재봉기도 치열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1907년 군대가 해산되자 제천 지역에서는 원용팔, 정운경, 이강년 등이 다시 의병운동을 일으켰다. 을미의병운동에서 군대를 이끈 경험이 있던 의병지도자들은 문경 출신 이강년을 도창의대장으로 추대하고 군세를 정비했다. 이강년부대는 여러 전투를 통해 일본군에 타격을 주었으나 1908년 이강년이 제천 작성산에서 부상을 입고 붙잡힌 후 순국하면서 급속히 세를 잃고 만다.


이 와중에 제천은 초토화가 되었다. 일제는 1907년 8월에 제천을 완전히 불태우고 만다. 영국 데일리메일 신문사의 매킨지 기자가 쓴 <대한제국의 비극>에는 ‘다 불타고 지도상에 없는 마을이 되었다’고 제천을 묘사하고 있다. 당시 상황을 찍은 사진은 자양영당 옆에 있는 의병전시관에 걸린 채 일제의 만행을 생생하게 고발하고 있다.

 

 


▲ [위] 구한말 풍전등화의 위기에 있는 나라를 구
위해 일어섰던 ‘조선 의병’의 뜨거운 넋이 살아
자양영당. [아래] 자양영당 가는 작은 개울에
슬기를 잡고 있는 주민들. 평화로운 광경이다.
 

 

 

제천시에서 발간한 홍보물에도 설명되어 있지만, 의암이 의병을 이끌 때도 훗날 이강년이 의병을 이끌 때도 제천 주민들의 참여가 없었으면 의병운동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제천 주민들은 집집마다 의병활동에 필요한 비용을 부담하고, 성 쌓는 작업에도 손수 참여했다고 한다. 결국 제천에서 장기간에 걸쳐 이루어진 의병운동은 제천 주민들의 의로운 피와 땀으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아둔한 이 길손, 이제야 알겠다. ‘청풍명월의 고장’은 단지 자연 풍광의 아름다움만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요,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의연히 일어설 줄 아는 기질까지 포함되어 있음을, 그리고 제천 주민들이 ‘청풍명월’이라 할 때 왜 표정이 의연해지는 줄을.


선열께 머리를 조아리고 자양영당을 뒤로 한다. 38번 국도로 되돌아나온 뒤 봉양읍에서 5번 국도를 타고 원주 방면으로 10리쯤 달리면 탁사정(濯斯亭)이다. 치악산 남쪽에서 발원해 구학산과 감악산 사이로 흐르는 용암천이 휘돌아 흐르는 암봉 위에 자리 잡은 이 정자는 1568년(선조 19)에 제주 수사로 있던 임응룡이 처음 지었는데, 나중에 허물어진 것을 후손 윤근이 1925년에 다시 세웠다. 그 때 올파 원규상이 탁사정(濯斯亭)으로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 [좌] 중국 초나라 때 굴원이 지은 어부사의 ‘맑은 물에 갓끈을 씻고 흐린 물에 발을 씻는다’에서 이름을 따온 탁사정. [우] 석회암 덩어리로 이루어진 금월봉 관광지. 기묘한 분위기 덕에 무술영화 등의 배경지로 많이 쓰인다.

 

 

 

이는 중국 초나라 때 굴원(屈原)이 지은 ‘초사’ 어부사(漁父辭) 마지막 부분의 ‘창랑의 맑은 물에는 갓끈을 씻고, 창랑의 흐린 물에는 발을 씻는다’(淸斯濯瓔 濁斯濯足)에서 따왔다. 후세 사람들은 이를 창랑가(滄浪歌)라 했는데, 이 노래에 나오는 ‘탁영(濯纓)’과 ‘탁족(濯足)’이라는 말은 여러 뜻으로 해석된다. 우리 선비들은 ‘창랑의 물이 맑다는 것은 도의(道義)가 살아있는 정의로운 세상을 말함이고, 창랑의 물이 흐리다는 것은 도의가 무너진 어지러운 세상을 비유한 말’이라고 해석했다. 즉, 세상이 올바르면 나아가 벼슬을 하고, 어지러우면 은거해 자신을 닦는다는 것이다. 정자 난간에 앉아 소나무 너머의 까마득한 물길을 내려다보려니 바람이 묻는다. ‘지금 창랑의 물은 어떻습니까?’

 

이제 드디어 의림지(義林池·명승 제20호)다. 의림지는 삼한시대에 만든 저수지로, 본래의 이름은 임지(林池)로서, 김제의 벽골제(碧骨堤), 밀양의 수산제(守山堤)와 더불어 고대 우리나라 3대 저수지의 하나로 손꼽혀온 수리시설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삼한시대에 처음 쌓았다고도 하며, 또 신라 진흥왕 때인 550년경 가야에서 귀화한 우륵이 쌓았다고도 한다. 이외에도 조선시대 초기에 박의림(朴義林)이라는 사람이 축조한 것이라고는 기록도 있다. 하지만 충청도 지방의 별칭인 호서(湖西)란 말도 의림지 서쪽에 있는 지방이란 데서 유래한 것이라는 의견도 있으니 의림지의 상징성을 짚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의림지의 영향 아래에 있는 제천 고을의 평균 해발은 240m로 높은 편에 든다. 평균 40m인 서울보다 200m쯤 더 높고, 겨울과 여름의 기온차도 평균 31.3℃로 대구나 청주보다도 높다. 게다가 겨울에는 대륙의 차가운 북서풍을 막아줄 커다란 산줄기가 없고, 여름에는 동쪽의 백두대간을 넘어오는 건조한 높새바람 때문에 가뭄이 드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이렇듯 모진 자연환경을 극복하고 농사에 쓸 물을 얻기 위해 오래 전에 노력한 결과물이 바로 이 의림지인 것이다.

 

 정확한 축조시대는 알 수 없지만, 제천의 옛날 이름인 내토(奈吐), 대제(大堤), 내제(奈堤) 등이 모두 큰 둑이나 제방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 의림지의 역사가 기원 전후의 시기까지 오르는 것으로 믿는 이들도 있다. 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제천은 산 위에 터를 잡았는데, 안으로 들판이 펼쳐진데다 산이 낮아서 훤하고 명랑하며 대대로 사는 사대부 집안이 많다. 북쪽에 의림지가 있는데 신라 때 큰 둑을 쌓고 물을 막아서 온 고을의 논에다 물을 대었다”고 그 내력을 기록하고 있다. 현재 의림지의 둘레는 2km쯤 된다.


이렇듯 1,500여 년에 이르는 세월을 견뎌온 의림지는 현재도 농사에 필요한 물을 댈 뿐만 아니라 주변의 영호정·경호루 같은 정자들과 수백 년 묵은 소나무, 버드나무 숲이 어우러진 풍경이 아름다워 철마다 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때는 바야흐로 폭염의 계절. 잠시 더위도 식힐 겸 엄동설한의 의림지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보자. 의림지에는 공어(空魚)가 산다. 몸이 투명하여 속이 훤히 비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데, 다른 지방에서는 빙어라 부르는 물고기다. 의림지 공어는 조선시대 고종 황제에게 별미로 진상했던 품목에 속하기도 했다고도 한다. 조선시대 서유구가 쓴 임원경제지에는 ‘이 고기는 한겨울인 동지 앞뒤로 나타나며 입춘이 지나면 빛깔이 점차로 푸르게 되고 드물어져서 얼음이 풀리면 사라진다’고 쓰여 있다.

 

 

 

▲ 한겨울의 의림지 풍경. 얼음이 꽁꽁 얼면 공어(빙어)를 잡으려는 강태공들이 물려든다.

 

 

겨울에 가보면 의림지엔 언제나 공어를 낚는 사람들이 꽝꽝 언 얼음판 위에 옹기종기 모여 얼음구멍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다. 의림지엔 오래 전부터 공어가 자라고 있었지만, 겨울에 얼음을 뚫고 잡기 시작한 지는 지금부터 40년쯤 전이라 한다. 마을 노인들은 어느 해 겨울 한 대학생이 의림지 얼음 위에서 공어를 낚는 것을 보고 저수지 주변에 사는 주민들도 그걸 따라 하기 시작했다고 기억하고 있다.


요즘엔 소양호나 화천호 빙어가 널리 알려졌지만, 제천 주민들은 의림지 공어가 소양호 빙어의 원조임을 한 목소리로 주장한다. 길손도 10년쯤 전에 낚시를 한 적이 있는데, 강원도 말씨 같은 충청도 말씨의 아저씨는 길손에게 이렇게 말했다. “공어는 비늘도 없고 맛이 쓰지도 않아 소양호 빙어보다 몇 등급 위래요.” 어쨌든 막 잡아 올린 팔딱거리는 공어를 깻잎과 쑥갓에 싸서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 맛이 별미 중 별미였다. 여느 호수의 빙어와 달리 1,500년 역사를 지닌 저수지에서 건져 올린 물고기는 아주 특이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마치 몸속에 그 역사가 들어가는 것 같은. 

 

의림지를 한 바퀴 산책한 뒤 남쪽으로 내려가기 전에 영월 가는 쪽으로 눈길을 돌려 잠시 관란정(觀瀾亭)을 들러본다. 한적한 산길을 올라가다 만난 정자에서 내려다보면 휘돌아가는 서강 물이 한눈에 들어온다. 경치 참 좋다. 하지만 이 정자는 풍치를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육신인 원호(생몰년 미상)의 충의를 기리기 위해 후손과 유림들이 1845년(헌종 11)에 세운 것이다. 수양대군이 황보인·김종서 등의 대신을 죽이고 정권을 잡게 되자 원호는 병을 핑계로 고향인 원주로 돌아가 은거하였다. 그러니 원호는 제대로 탁족을 한 셈이다.


나중에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 청령포에 안치되자 청령포로 흐르는 서강가에 단종을 추모하여 초막을 세우고 아침저녁으로 울며 임금을 생각하였다 한다. 그런데 정성이 얼마나 깊었는가 하면 남모르게 준비한 음식, 의복을 글을 쓴 풀잎과 함께 함지박에 함께 넣어 강물에 흘려보냈다 한다. 그러면 함지박은 청령포 앞에서 빙글 빙글 돌며 더 흘러가지 않고 머물렀다고 하며, 원호는 함지박이 어소에 닿을 무렵이면 강기슭에서 단종이 있는 청령포를 향해 배례하였다고 한다.


그러다 단종이 죽자 삼년상을 치르고 원주로 돌아와 문 밖을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아 다른 사람들이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한다. 당시 원호가 지었다는 시조 한 편 들어보자. ‘간밤에 우던 여울 슬피 울어 지내었다 / 이제야 생각하니 님이 울어 보내도다 / 저물어 거슬러 흐르라저 나도 울어 보리라’

 

 

 

 

 

 

당시 세조의 왕위찬탈 때 의리를 지킨 인물은 사육신와 생육신으로 대표되는데, 살아남아 절개를 지킨 생육신의 길도 멀고 험했다. 단종폐위 소식을 듣고 읽던 책 다 불사르고 조선팔도를 떠돈 김시습이 분기를 참을 수 없어 구름처럼 떠돌았다면, 원호는 단종 가까운 곳에 머무르며 그를 그렸던 것이다.


원호의 정성이 대단해 글을 쓰며 그의 자료를 살펴보니 생몰년 미상으로 되어 있다. 그 까닭을 알아보니 절개 한 번 굳세다. 손자인 숙강(叔康)이 사관이 되어 직필로 화를 당하자, 자기의 저술과 소장(疏章)도 모두 꺼내어 불태워 버린 후 아들들에게 다시는 글을 읽어 세상의 명리를 구하지 말라고 경계하였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집안에는 그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고, 따라서 행적도 전하는 것이 없다고 한다. 너무도 굳센 의기가 아닐 수 없다.

 

 

 

▲ [좌] 청풍문화재단지 안에는 제천의 청풍명월의 본향임을 알리는 큼직한 표석이 세워져 있다. [우] 청풍호반에 있는 번지점프장과 인공암벽장.

 

 

제천으로 되돌아나와 남행이다. 차를 타고 달리다보면 아름다운 호반의 정취가 두 품에 안겨온다. 이 땅 깊은 곳에 자리한 내륙의 바다로서 역사의 무게도 더불어 느낄 수 있는 청풍호 찾아가는 길이다.


조선시대까지 제천과 독립된 하나의 고을이었던 청풍은 제법 유서 깊은 곳이었다. 마을의 관문인 팔영루 앞엔 역대 관리들의 송덕비가 즐비했고, 강가 언덕엔 날아갈 듯한 한벽루(寒碧樓)가 있어 시인묵객을 불러들이곤 했다. 이런 영화는 20세기 중반까지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1985년 충주댐이 완공되어 물이 차게 되면서 충주와 제천, 단양 지역의 지도는 몰라보게 변했다. 강가를 따라 나있던 길과 유적들은 물에 잠겨버렸고, 거기에 누천년간 피를 이어오며 살던 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기록에는 이때 3군 13면 114리의 66.48㎢가 수몰되었으며, 49,627명의 이주민이 생겼다 한다.

 

 

 

▲ ① 월악산을 등지고 자리 잡은 송계계곡의 마을. 마치 조선시대로 돌아간 듯하다. ② 청풍문화재단지 내에 있는 한벽루. 원래 청풍면 소재지에 있었으나 충주댐이 생기면서 물이 들어차자 이곳으로 옮겨 세웠다. ③ 청풍문화재단지 안에 조성한 청풍 동헌. ④ 청풍석조여래입상 발치에는 소원을 들어주는 돌이 있다.

 

 

당시 댐이 생기고 마을이 물에 잠기자 청풍면 일대에 있던 수많은 유물들을 옮겨와 옛 고을을 재현한 것이 바로 청풍문화재단지다. 조선시대 청풍의 영화를 기억하는 제천 사람들은 청풍 고을의 이름을 따서 충주호 중에서 이 주변을 특별히 ‘청풍호’라 부르며 아낀다. 충추댐을 막아생긴 인공호수의 공식 명칭은 충주호이지만, 길손도 여기서만큼은 청풍호라는 예를 갖춘다. 

 

 

 

▲ 청풍문예단지에서 바라본 SBS 촬영장. 청풍호 주변은 각종 드라마나 영화의 배경지로 자주 등장한다.

 

 


이곳의 유물들은 여느 민속촌이나 영화촬영장의 세트처럼 전시용으로 만든 게 아니라 사람의 손때가 수백 년간 묻어 있어 여간 정감이 가는 게 아니다. 어느 집이든 처마 밑과 부엌에는 옛 농가의 모든 살림이 가지런히 정리돼 있다. 지게, 키, 바가지, 멍석, 광주리, 사기그릇, 놋숟가락…. 그리고 화단의 수목은 계절마다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니 어느 계절에 들어서도 좋기만 하다. 

 

                                   

▲ [위] 청풍호의 경비행기. 제천에서는 청풍호 주변을 내륙 최고의 레저 공간으로 꾸미려 노력하고 있다. [우] 19세기 초기에 지었다고 전해오는 양반집인 정원태가옥. 주변 환경이 아름답고 전망이 좋다.  

 

 

 

여름이라면 매미 울음소리가 따갑게 귀에 박히는 고샅길을 올라 옛집으로 들어서면 금방이라도 툇마루에서 장죽 물고 담배 태우던 어르신이 “뉘신가?” 하며 반겨줄 듯한 착각에 빠져드는 곳이다. 그렇지만 그건 환영일 뿐이고, 시원한 냉수 한 사발 건네주는 아낙의 온정도 느낄 수 없으니 아쉬울 따름이다. 청풍호 전망 좋은 마을이라 이런 안타까움이 더 큰지도 모르겠다.


이 마을에선 청풍호 푸른 물 너머로 금수산(1,016m) 자락의 붉은 바위들이 수놓은 절경과 162m짜리 ‘청풍호반 수경분수’가 물을 뿜는 장관을 여유롭게 바라볼 수 있다. 그러나 나그네에게는 청풍호 풍광을 즐기기에 좋은 곳이지만, 고향 잃은 수몰민들은 이곳에서 물끄러미 호수를 바라보며 물에 잠긴 추억을 낚는 곳이기도 하다. 마치 휴전선 부근의 통일전망대들처럼.


이곳에서 제일 격(?)이 높은 문화재는 한벽루(보물 제528호)다. 여느 누각과는 달리 날개가 하나 더 달려 있어 생동감이 넘치는 한벽루는 고려 충숙왕 때인 1317년에 연회장소로 사용하기 위해 지어졌고, 이후 풍류객들에게 꾸준히 사랑을 받아왔다. 

 

길손이 어느 해 여름인가 올라보았더니, 글쎄, 뜨거운 여름 뙤약볕 들지 않고 산들산들 호수 바람이 불어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을 누각에서 늙수그레한 한 남자가 낮잠을 즐기고 있는 게 아닌가. 보물에 기대 호수를 바라보다 낮잠을 자는 남자. 문득 그의 고향은 분명 청풍 저 푸른 물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의 행동이 마치 동네 모정이나 정자에서 낮잠에 빠진 농부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에게서 안타까움과 부러움을 동시에 느꼈다. 그리고 옛 고향을 떠나지 못한 수몰민들이 고향이 그리울 때면 이곳 청풍문화재단지를 찾아오곤 한다는 사실도 나중에 알았다.

청풍문화재단지를 내려와 다시 청풍교를 건너가 우회전하면 호젓하게 청풍호 비경을 살필 수 있는 능강리다. 담쟁이덩굴 엉겨 붙은 바위가 길을 안내하는 초입서부터 가슴은 기대감으로 설렌다. 산허리를 감도는 꼬불꼬불한 길도 맑은 호수와 제법 잘 어울린다. 능강리에 이르러 호수를 따르던 길에서 벗어나 한적한 산길을 얼마쯤 오르면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정방사(淨芳寺)다. 얼마 전 목조관음상 뱃속에서 제작연대를 알 수 있는 복장기가 나와 학계의 관심을 끌기도 했던 작은 절집이다.

 

 

 

▲ 정방사에서 바라본 청풍호 풍경. 호수 너머로 솟은 월악산 산줄기가 장하다.

 

 

 

정방사는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남한강변의 벼랑을 끼고 돌아서 3시간쯤 걸어야만 찾아갈 수 있는 곳이었다. 의상이 터를 잡은 절집답게 법당 뜨락에서 내려다보면 발아래 펼쳐진 잔잔한 호반 너머로 월악산(1,094m)이 높이 솟았고, 첩첩이 펼쳐진 백두대간 산줄기가 장쾌하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물줄기를 막아 생긴 팔당호는 수종사에서 바라보는 풍광이 좋고, 금강이 머물다가는 대청호는 현암사요, 섬진강은 구례 사성암에서 봐야 맛이 나듯이 여기 청풍호에서는 이 정방사를 요지로 꼽을 수 있다.

 

 

 

▲ 의상대라는 웅장한 암벽 아래에 터를 잡은 정방사. 청풍호 조망이 아주 좋은
암자다.

 

 

 

정방사를 나와 고향 같은 산골마을들을 지나다 솟대공원에 들러 소원도 빌면 이내 옥순대교다. 청풍호의 속살이면서 단양팔경에도 속하는 옥순봉·구담봉을 훔쳐보는 즐거움에 마음은 넉넉하다. 호숫가에 비쭉 솟은 옥순봉(玉筍峰)은 희고 푸른 바위가 비 온 후의 죽순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 깎아지른 듯한 바위봉우리는 거북을 닮아 구봉(龜峰)이고, 물속에 있는 바위는 거북무늬를 띠고 있어 구담(龜潭)이라 불리니 합해서 구담봉이 되었다. 겸재 정선(鄭敾·1676-1759)과 단원 김홍도(金弘道·1745-?)도 이곳 풍광을 그렸는데, 다리 위를 거닐다보면 마치 그 화폭 속의 주인공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옥순봉은 조선 초 청풍군(현 제천시 청풍면)에 속해 있었다. 단양 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이 옥순봉을 단양팔경에 넣으려고 하였으나 청풍 군수가 이를 허락지 않자 옥순봉이라 이름 짓고, 석벽에 ‘단구동문’이라 새겨 단양의 관문이 되었다고 전한다.

 

 

▲ 송계계곡과 월악산 등지에는 덕주산성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옥순봉 구경 후 한참을 휘돌며 들어선 월악산 기슭의 송계계곡은 전설의 공간이다. 월악산 서쪽 한수면 송계리를 거쳐 충주 미륵리 경계까지 이어진 8㎞의 이 계곡은 짧지만 깊다. 옹골찬 월악 때문이다. 문경에서 하늘재를 거쳐 충주 수안보를 잇는 큰 길에서 송계계곡으로 들어서려면 샛길로 닷돈재를 넘어야 한다. 거기에 계곡 하류는 남한강과 곧바로 연결되고, 사방으론 험한 산들이 솟아있으니, 좁은 길에 성벽만 있다면 그야말로 천혜의 요새가 된다. 그래서 쌓은 게 덕주산성(德周山城)이다. 

 

 

 

▲ [좌] 덕주계곡에서 바라본 덕주산성 남문. 천혜의 요새 역할을 든든히 해냈다. [우] 제천 장락리의 칠층모전석탑. 기단만 화강암으로 마련하였고, 그 위로는 점판암 벽돌로 이루어진 7층의 탑신을 올렸다.

 

 

통일신라시대에 둘레가 9.8km에 이르렀던 성벽은 거의 무너졌으나 조선시대에 쌓은 남문·동문·북문 이렇게 3개 성문이 남아 있는 송계계곡 길을 지나다 보면 뭐랄까, 마치 과거의 한때로 들어서는 느낌, 뭐 그런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 더군다나 세 개의 성벽 안쪽에는 빈신사지 사자석탑, 덕주사 마애불 같은 문화유산도 여럿 흩어져 있다. 천연기념물인 망개나무도 소중한 보물이다. 

 

동문을 거쳐 덕주사를 지나 덕주사 마애불(보물 제406호)을 뵈러가며 이번 제천 여정의 처음을 박달재로 하고, 마지막을 이곳 송계계곡으로 잡길 잘 했다는 생각을 열 번도 더했다.

 

 

 

▲ [좌] 덕주사에서 올려다본 월악산. 처마 밑의 풍경과 성하의 산봉우리가 잘 어울린다. [우] 월악산 중턱에 있는 덕주사 마애불. 신라의 마지막 공주인 덕주공주 상이라는 전설이 전해온다.

 

 

주사 마애불은 고려 초기의 작품이지만, 오늘은 역사적, 예술적 가치보다는 전설이 더 가슴에 와닿는다. 민초들은 신라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와 누이 덕주공주 남매가 망국의 한을 품고 금강산으로 가던 도중 하늘재를 넘다가 충주 미륵대원지의 대불과 이 덕주사 마애불을 세웠다고 믿었다. 그래서 석불입상은 마의태자 상이요, 월악산 덕주사 마애불은 덕주공주 상이라 여겼다. 마애불은 남향이고, 석불이 북향인 까닭은 두 남매가 마주보기 위해서라는 그럴 듯한 해설까지 덧붙이면서.


인적도 드문 깊은 월악산 중턱. 마애불 발끝에 서서 남쪽을 고즈넉이 바라본다. 그러나 기대했던 하늘재의 미륵대원지 대불은 뵈지 않는다.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덕주봉과 용암봉 때문이다. 아쉽게도 전설과 달리 두 남매는 결코 마주보고 있지 않았다. 그래도 길손이 펼치는 상상의 나래엔 마의태자가 닷돈재를 넘어와 덕주공주를 만나러 이곳으로 올라오는 모습이 펼쳐진다. 월악의 짙푸른 녹음 속에 서있는 마의태자. 그는 슬픈 표정이지만 분명 웃고 있었다.

 

 

길에서 만난 별미

약초순대

 

 

제천은 전통적으로 약초의 고을로 꼽혀온 명성대로 약초를 재료로 한 음식이 여럿 있다. 그중에서 제천 중앙시장 근처의 개미식당은 황기·당귀·천궁 등 10여 가지 약초로 맛을 낸 약초순대로 30년째 가업을 이어오고 있는 식당이다.


약초 추출액과 신선한 야채가 어우러져 순대 특유의 누린내가 전혀 없다. 뿐만 아니라 이 집만의 비법으로 약초 냄새도 없앴기 때문에 비위 약한 어린이나 여성도 맛있게 먹을 수 있다. 약초순대를 시키면 순대국이 딸려 나오는데, 걸쭉한 국물맛이 아주 일품이다. 여름철에 먹으면 속도 든든하다. 약초순대 1인분 5,000원, 순대국밥 5,000원. 전화 043-643-5093 

 

 

채묵밥

 

 

 

산 깊은 제천은 예전부터 도토리나무가 많았다. 도토리는 위와 장을 튼튼히 하고 혈액순환개선, 중독치료, 피로숙취, 허약체질 등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 무엇보다 중금속을 정화하는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물 맑고 공기 좋은 청정 산간지대에서 수확한 도토리로 쑨 묵을 가늘게 썰어 양념 육수를 붓고 신김치·양념고추장·절인 고추·깨소금·김 등을 얹어 따뜻한 조밥을 말아 먹는다. 맛이 깔끔하고 담백해 미식가의 입맛을 사로잡는다. 제천에는 묵밥을 차리는 식당이 여럿 있는데, 이 중에 박달재 동쪽 봉양 읍내의 묵마을이 유명하다. 도토리채묵밥 5,000원, 묵무침 7,000원. 전화 043-647-5989.

 

 

●가 보아야 할 곳들

 

 


제천 의림지
제천시 모산동에 있는 의림지(義林池)는 원삼국시대에 만들어진 저수지로 본래의 이름은 임지(林池)다. 김제의 벽골제, 밀양의 수산제와 함께 오랜 역사를 지닌 대표적인 수리시설이다. 호반둘레 2km, 만수면적 151,470㎡, 저수량 6,611,891㎡, 수심 8~13m의 대수원지로 289정보의 농지를 관개한다.
저수지 둘레로는 아름드리 소나무, 버드나무 숲이 울창하고 전나무, 은행나무, 벚나무 등이 함께 자라고 있다. 주위에는 1807년(순조 7)에 세워진 영호정(映湖亭)과 1948년에 세워진 경호루(鏡湖樓)를 비롯해 연자암·용바위·홍류동·홍류정지 등이 있다.
의림지 주변 산책로는 △제1코스(9.1km, 2시간50분 소요)=솔밭공원~용담사~용두산~864m봉~제2의림지~솔밭공원 △제2코스(5.7km, 2시간10분 소요)=의림지 주차장~용담사~Y자 갈림길~급경사길~용두산~682m봉~용담사~솔밭공원 △제3코스(7km, 3시간20분 소요)=의림지 주차장~용담사~Y자 갈림길~급경사길~용두산~안부 갈림길~무당골~의림지 등이 있다. 
 

 

 


청풍 문화재단지
1985년 충주댐이 생기면서 마을이 물에 잠기게 되자 유적들을 옮겨놓고 옛 고을을 재현한 곳이 청풍 문화재단지다. 보물 2점(한벽루, 석조여래입상), 지방유형문화재 9점(팔영루, 금남루, 금병헌, 응청각, 청풍향교, 고가 4동), 지석묘, 문인석, 비석 등 42점과 생활유물 2천여 점이 보관되어 있으며, 명실상부한 옛 남한강 상류의 화려했던 문화의 산실로 자리 잡고 있다.
관람시간 하절기(3~10월) 09:00~18:00, 동절기(11~2월) 09:00~17:00. 입장료 어른 3,000원, 청소년 2,000원, 어린이 1,000원. 주차 무료. 전화 641-4301-4302.
 

 

 


박달재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면 원박리와 백운면 평동리의 경계를 이루는 고개. 38번 국도가 제천시와 충주시를 연결하고 있으며, 1970년 도로확포장이 이루어졌다.
최근 터널이 뚫렸다. 구학산(九鶴山·917m)과 시랑산(侍郎山·691m)의 안부에 해당한다. 요즈음에는 천등산(天登山·807m) 박달재로 알려져 있으나 천등산과 박달재는 원서천을 사이에 두고 있다. 1217년(고려 고종 4)에 김취려 장군이 거란병을 크게 물리친 곳이다.
 

 

 

 

월악산


월악산(1,094m)은 충북 충주시·제천시·단양군과 경북 문경시에 걸쳐 있다. 주봉인 영봉(靈峰)에 걸린 달이 아름답다하여 ‘월악’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삼국시대에는 월형산(月兄山)이라 불렸다. 한국의 5대 악산(嶽山)으로 1984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바위로 이루어진 영봉을 중심으로 등산로가 여럿 뻗어 있다. 이중 덕주공주의 전설이 서려있는 덕주사 코스가 가장 인기 있다.
덕주골~덕주사~마애불~960m봉~영봉(정상)~동창교를 돌아오는 데 4시간30분 정도 걸린다. 동쪽에서 오르는 수산리~보덕암~하봉~중봉~영봉~마애불~덕주사~덕주골 코스는 6시간 소요. 전화 043-653-3250.
 

 

용하구곡
월악산 동쪽을 흐르는 16km의 계곡으로 곳곳마다 기암절벽과 소, 숲이 절경을 이루고 있다. 이중에서 아홉 절경을 골라 용하구곡이라 한다.
수직 높이 35m, 길이 100m 가량 되는 수문동폭포, 물굽이가 마치 용이 꼬리를 튼 모양을 이루고 있는 수곡용담, 계류에 솟은 높은 바위가 일품인 관폭대, 5개의 큰 암석이 층계를 이루고 맑은 물이 소를 이룬 청벽대, 옛날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했다는 선미대, 부녀자가 많이 찾아와 몸을 청결히 하던 수룡담, 주변에 산삼이 많다는 활래담, 옛날 선비들이 글을 읽고 쓰던 강서대, 신륵사에서 500m 위 넓은 바위로 흘러내리는 폭포가 장관인 수렴선대가 그것이다.
 

 

 


송계계곡
월악산 서쪽 한수면 송계리를 거쳐 충주 미륵리까지 이어진 8㎞의 송계계곡은 깊은 계곡을 흐르는 맑은 계류가 있고, 사찰·성문·불상·석탑 등 유물이 산재해 최고의 피서지로 꼽힌다. 인근의 아홉 절경을 꼽아 송계구곡이라 한다.
월악산의 최고봉(1094m)인 월악영봉, 넓은 암반과 깊은 소가 절경을 이루는 송계계곡 입구의 자연대, 30여m의 3단으로 이루어진 월광폭포, 신라시대부터 월악신사를 설치하고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수경대, 한 쌍의 학이 월악산을 오가며 살았다는 학소대, 덕주산성 남문과 한쪽 맥이 이어져 있는 곳으로 기암줄바위와 고무서리계곡을 굽이도는 맑은 물과 어울린 절벽인 망폭대, 용이 승천하였다고 하는 와룡대, 하늘나라 공주가 하강하여 목욕했다고 전해지는 팔랑소가 그것이다. 

 

 

 


옥순봉
수산면 괴곡리에 있는 옥순봉(玉筍峯)은 가까이에 있는 단양의 구담봉(龜潭峯)과 함께 단양8경에 속하기도 한다. 옥순봉은 조선 초 청풍군(현 제천시 청풍면)에 속해 있었다.
단양 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이 옥순봉을 단양팔경에 넣으려고 하였으나 청풍군수가 이를 허락지 않자 옥순봉이라 이름 짓고, 석벽에 ‘단구동문’이라 새겨 단양의 관문이 되었다고 전한다.
김홍도는 정조의 초상화를 잘 그린 공로로 충청도 연풍의 현감에 임명되었는데, 이 무렵인 1796년 옥순봉도(玉筍峯圖)를 남겼다. 옥순봉은 등산로도 정비가 잘 되어 있어 1시간 정도면 다녀올 수 있다.
 

 

제천 점말 동굴유적
송학면 포전리 점말에 있는 구석기시대 동굴유적이다. 굴 앞쪽이 남동쪽으로 열려있고, 동굴 주변의 크고 작은 가지굴에서 끊임없이 흐르는 맑은 물은 구석기시대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마련하기에 알맞았던 것으로 보인다.
굴을 채웠던 쌓임층의 두께는 4∼5m에 이르며, 7개 지층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 쌓임층 안에서 제4기 짐승뼈 화석과 구석기인들이 남긴 뼈연모·석기·치렛거리·예술품 등 여러 문화유물이 발굴되었다.
 

 

 

 

제천 입석리 선돌


송학면 입석리 입구 길 옆 가장자리에 세워져 있다. 선돌 축조와 관련된 전설과 함께 기자사상에 관련된 이야기가 전하여오고 있다.
마을에서는 주민의 무사태평을 기원하는 선돌제를 1986년부터 매년 음력 10월 중에 지내고 있다. 선돌의 기능·구조·학술적 의미 등에서 중원지방의 대표적인 선돌로 평가된다.  
 

 

 

 

사자빈신사지 석탑


한수면 송계리의 사자빈신사지 석탑(보물 제94호)은 빈신사터에 세워져 있는 고려시대의 탑이다. 상·하 2단으로 된 기단 위에 4층의 지붕돌을 얹은 모습인데 원래는 9층이었다.
아랫기단은 글이 새겨져 있어 탑의 조성 경위를 알 수 있으며, 윗기단은 사자 4마리가 탑신을 받치고 있다. 네 모서리에 한 마리씩 배치한 사자의 안쪽 공간에 비로자나불상을 모셔 두었다. 앉은 모습의 비로자나불상은 특이하게도 두건을 쓰고 있으며 표정이 매우 흥미롭다. 이러한 양식은 통일신라시대의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국보 제35호)을 모방한 것이다.
기단의 기록에 의해 1022년(고려 현종 13)에 만들어진 이 탑은 연대가 확실하여 각 부의 구조와 양식, 조각수법 등 다른 석탑의 조성연대를 추정하는 데 기준이 되는 중요한 탑이다.
 

 

 

 

덕주사 마애불


월악산 덕주사의 동쪽 암벽에 새겨진 덕주사 마애불(보물 제406호)은 고려 초기의 작품이다. 거대한 화강암 바위 남쪽 면에 조각한 불상은 전체 높이가 13m로 얼굴 부분은 도드라지게 튀어나오게 조각하였고, 신체는 선으로만 처리했다. 이와 같이 얼굴을 과장되게 표현하는 것은 고려시대의 거대한 불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법이다.
살찐 얼굴과 하체로 내려갈수록 간략해진 조형수법, 입체감이 거의 무시된 평면적인 신체 등은 크기에 비해 작품의 질을 떨어뜨리고 있다.
 

 

장락리 칠층모전석탑


모전석탑이란 돌을 벽돌 모양으로 깎아 쌓은 탑으로, 흙벽돌을 쌓아 올린 전탑을 모방하였다 하여 모전탑(模塼塔)이라고 한다.
제천시 장락동 들판에 있는 장락리 칠층모전석탑(보물 제459호)은 통일신라 후기에 세워진 탑이다. 탑을 받치는 기단만 화강암으로 1단을 마련하였으며, 그 위로 회흑색의 점판암 벽돌로 이루어진 7층의 탑신을 올렸다. 탑신 전체에는 표면에 회를 칠했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높이는 9.1m에 이른다.
1967년 무너지기 직전에 탑을 해체하여 보수했는데, 7층 지붕돌 윗면에서 꽃무늬가 조각된 청동조각이 발견되었다.
 

 

 

 

청풍 한벽루


청풍 문화재단지 내에 있는 한벽루(보물 제528호)는 1317년(고려 충숙왕 4)에 처음 지은 건물이다. 원래는 청풍면 읍리에 있었으나 충주댐을 세우면서 1983년 청풍면 물태리로 옮겨 세웠다. 구조는 앞면 4칸, 옆면 3칸의 2층 누각과 앞면 3칸, 옆면 1칸의 계단식 익랑건물이 이어져 있다. 기둥 사이는 모두 개방하였으며 사방에 난간을 둘렀다.
건물 안에는 송시열·김수증의 편액과 김정희의 ‘청풍한벽루’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밀양의 영남루(보물 제147호), 남원의 광한루(보물 제281호)와 함께 본채 옆으로 작은 부속채가 딸려 있는 조선시대 누각 건물의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청풍 석조여래입상
청풍 석조여래입상(보물 제546호)은 당당한 어깨, 양감 있는 표현 등에서 통일신라 불상의 힘을 느끼게 하고 있지만, 목의 형식화된 주름이라든지 비사실적인 손의 표현과 괴체화된 신체 등을 볼 때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충주댐 건설로 수몰지인 청풍면 읍리에서 1983년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매우 작아서 우뚝해 보이며 사각형의 얼굴은 후덕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가늘면서도 두툼한 눈, 넓적한 코, 뚜렷한 인중, 양 어깨까지 길게 드리워진 두 귀는 자비로운 부처의 풍모를 잘 나타내고 있다.
  

 

 

 

신륵사 삼층석탑


월악산 동쪽에 있는 신륵사 삼층석탑(보물 제1296호)은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하나씩 본떠 새겼고, 탑신에서도 역시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노반, 복발, 앙화, 보륜, 보개(지붕 모양의 장식) 등이 있으며, 머리장식부의 무게중심을 지탱하기 위한 찰주(쇠꼬챙이)가 뾰족하게 꽂혀 있다. 각 부재를 만든 솜씨도 세련되었는데, 이처럼 머리장식이 잘 남아있는 예는 드문 편이다.
1981년 탑을 해체·복원할 때 기단 내부에서 흙으로 빚은 소형 탑 108개와 사리함 조각이 발견되었다. 통일신라의 석탑양식을 잘 계승하고 있는 고려 전기의 탑이다.

 

 

 

덕주산성


한수면 송계리 월악산의 남쪽의 덕주산성(德周山城)은 돌로 쌓은 통일신라시대의 산성이다. 문경과 충주를 잇는 도로를 차단하는 요충지이기 때문에 차단성의 기능을 지니고 있다.
둘레가 9,800m에 이르렀던 성벽은 거의 무너졌으나, 조선시대에 쌓은 남문·동문·북문의 3개 성문이 남아 있다. 남문은 동창으로부터 문경으로 통하는 도로에 무지개 모양으로 만든 홍예문으로 되어있고, 덕주골 입구에 있는 동문은 남문과 비슷하다.
새터말 민가 가운데 있는 북문은 내외에 홍예가 있으며, 홍예 마룻돌에는 태극 모양이 조각되어 있다. 덕주산성은 내외 5겹의 성벽이 있는데, 축조연대가 각기 달라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자양영당


봉양읍 공전리 자양영당(紫陽影堂)은 조선 후기 성리학자인 유중교(1821-1893)가 후진을 양성했던 곳이다. 1889년(고종 26)에 창주정사로 세웠는데, 1906년 유림에서 자양영당으로 새롭게 세웠다. 1895년(고종 32)에는 의병장 유인석(1842-1915)이 팔도 유림들을 모아 비밀회의를 하던 곳이다. 유중교는 이항로와 김평묵의 제자였으며, 그들의 영향을 받아 위정척사론을 주장한 인물. 유인석 역시 이항로의 문하에 있었으며, 위청척사론자이자 의병장으로 적극적인 항일운동을 전개시켰다.
제천의병전시관은 제천의병의 활약상을 자세히 살필 수 있는 공간이다. 이곳에는 주자·송시열·이화서·유중교·유인석·이직신의 영정을 모시고 있으며, 해마다 봄·가을에 제사를 지낸다. 경내에는 ‘화동강목’ 판목을 보존하고 있다.
 

 

황강영당
한수면 송계리의 황강영당(黃江影堂)은 조선 주자학의 대가인 우암 송시열(1607-1689)을 비롯하여 그의 제자인 수암 권상하(1641-1721), 권상하의 제자인 한원진, 윤봉구, 권욱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곳이다. 1726년(영조 2)에 세웠고 다음해에 황강서원으로 승격되었는데,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황강영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지금 있는 건물은 충주댐 건설로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1983년 지금 있는 자리로 옮긴 것이다. 수암사(遂庵祠)는 권상하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관란정


송학면 장곡리 관란정(觀瀾亭)은 생육신인 원호의 충의를 기리기 위해 후손과 유림들이 1845년(헌종 11)에 세운 정자다.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 청령포에 안치된 후 관란 원호(생몰년 미상)가 청령포로 흐르는 서강가에 단종을 추모하여 단을 세우고 조석으로 바라보던 곳이다.
원호는 청령포로 흐르는 물줄기 상류인 이곳에 초막을 짓고 새벽과 저녁에는 단종이 있는 곳을 바라보고 울며 임금을 생각하였다 한다. 또 남모르게 음식과 의복을 바치고 풀잎에다 글씨를 지어 함지에 함께 넣어 강물에 흘려보내면 함지박은 청령포 앞 용수지는 곳에서 빙글 빙글 돌며 더 흘러가지 않고 머물렀다고 하며 원호는 함지박이 어소에 닿을 무렵에 강기슭에 나아가 단종이 있는 곳을 향해 배례하였다고 한다.

 

 


탁사정
제천전 상류인 봉양읍 탁사정(濯斯亭)은 1568년(선조 19)에 제주 수사로 있던 임응룡이 고향에 돌아올 때 해송 여덟 그루를 가져와 심고 정자를 지은 뒤 팔송정이라 하였다. 세월히 흐르면서 허물어진 정자를 후손 윤근이 다시 세웠고 원규상이 탁사정이라 하였다. 팔송은 모두 죽고 지금은 한 그루도 남아있지 않으나 1999년도 10월에 팔송 마을 및 제방둑에 20그루의 해송을 심었다.
 
탁사정은 중국 초나라 때 굴원(屈原)이 지은 어부사(漁父辭)의 ‘맑은 물에 갓끈을 씻고 흐린 물에 발을 씻는다’(淸斯濯瓔 濁斯濯足)에서 이름을 따왔는데, 바위·소나무·물이 잘 어우러져 있어 여름이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더위를 식히는 피서지로 이름 높다.

 

 

 

배론성지


봉양읍 구학리의 배론성지는 한국 천주교 전파의 진원지로 천주교사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성지다.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 때 많은 천주교인이 배론 산골로 숨어들어 살았는데, 그들은 옹기장사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당시 황사영은 조선의 천주교도 박해 상황과 천주교 신도의 구원을 요청하는 백서를 토굴 속에 숨어 집필하였다.

백서는 가로 62cm, 세로 38cm 되는 흰 명주 비단에 한 줄에 110자씩 122행 13,384자로 작성되었으며, 원본은 로마교황청 문서보관소에 보관중이다. 경내에는 황사영이 백서를 썼던 토굴 외에도 1855-1866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인 성요셉 신학교, 우리나라 두 번째 신부가 된 최양업 신부의 묘가 있다.
 

 

정방사
금수산(1,016m) 산자락인 신선봉(845m)에서 청풍 방면 도화리로 가지를 뻗어내린 능선 상에 위치한 정방사(淨芳寺)는 662년(신라 문무왕 2)에 의상이 도를 얻은 후 절을 짓기 위하여 지팡이를 던지자 이곳에 날아가 꽂혀서 절을 세웠다는 전설이 있다.
속리산 법주사의 말사로서 ‘동국여지승람’에는 산방사로 소개되어 있다. 경내에는 1825년에 세워진 법당을 비롯해 요사, 일주문인 현혜문 등이 있다.
법당 안에는 주존불인 관음보살상이 있으며, 불상 뒤로 후불탱화가 그려져 있다. 최근 법당 안에 신중탱화, 산신탱화, 독성탱화 등을 그려 넣었다. 법당 뒤에는 의상대라는 웅장한 암벽이 솟아있다. 법당 앞에 서면 청풍호의 절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금수산 입장료 1,000원. 전화 043-647-7399.  
 

 

 

 

정원태 가옥


금성면 월림리의 정원태 가옥(중요민속자료 제148호)은 19세기 전기에 지었다고 전해오는 양반집이다. 주변 환경이 아름답고 전망이 좋으며, 풍수지리상 아주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는 ㄱ자형의 안채와 ㄴ자형의 사랑채가 튼 ㅁ자형으로 조성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장식은 없지만 잘 짜인 건물이다.
 

 

 

 

박도수 가옥


금성면 구룡리의 박도수 가옥(중요민속자료 제137호)은 큰 농가 형식의 민가로 ㄱ자형 안채, 사랑채, 아래채, 중문채, 헛간 등이 일곽을 이루고 있는 집이다. 안채에서 발견된 기록으로 미루어 1864년(조선 고종 1)에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안채는 특색 있는 구성·배치와 오래되고 특이한 건축구조를 이루고 있어 우리나라 전통주택 연구에 좋은 자료로 주목받고 있다. 사랑채나 아래채는 20세기 초에 지은 것이라 한다. 원래는 초가집이었다고 전한다.
 

 

망개나무


망개나무는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등지에 드물게 자라는 희귀종으로 황색 단풍이 아름답다. 번식력이 약하지만 한번 싹을 틔우면 잘 자라난다. 한수면 송계리 충북대 연습림 내에 위치하고 있는 망개나무(천연기념물 제337호)는 나이가 약 150살로 추정되며, 높이는 17m, 가슴높이의 둘레가 2m다. 망개나무는 세계적인 희귀수종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이곳 외에 속리산, 주흘산, 주왕산 등지에서 볼 수 있다. 
 

 


능강 솟대문화공간 
솟대는 기러기나 오리 등의 새를 높은 장대 위에 형상화한 조형물로, 고조선 시대부터 이어져 온 희망의 매개체다. 수산면 능강리 솟대문화공간은 테마공원으로, 솟대 전문 조각가 윤영호씨가 자신의 작품 수백여 점을 들여와 오픈했다.
제천시는 능강 솟대문화공간을 관광명소로 가꾸기 위해 시유지를 제공하고 산책로와 전망대 등 편의시설도 만들었다. 능강 솟대문화공간은 160m² 규모의 솟대 전시관과 주차장, 원두막, 야외 솟대와 야생화 정원 등을 갖추고 있다. 전화 043-653-6160. 
 

 

박달재 자연휴양림
백운면 평동리 박달재 고갯길에 있는 박달재 자연휴양림은 수령 100년이 넘는 아름드리 소나무와 참나무 등 잡목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는 휴양지다. 깎아지른 바위와 소나무가 어우러진 풍광도 보기 좋다. 시설로는 족구, 배구장, 등산로 7km, 동물사육장 12종 116수(꽃사슴, 청공작, 백공작, 금계, 은계, 백한 등), 물놀이장 1,000㎡, 자연관찰원 곰솔 등 12종 224본, 화훼원 목수국 등 7종 2,424본, 생태연못 170㎡ 등이 있다.
숙박시설 사용료는 통나무집 5평/5동(30,000원), 6평/8동(40,000원), 13평/2동(80,000원), 황토방 8평/8동(50,000원), 단체 숙소 44평 1동(200,000원)이 있다. 야영장 4개소(2,000/5,000원)다. 입장료 1,000원, 주차료 2,000원. 전화 043-652-0910, 641-4814.

 

<출처> 2007. 7 / 월간산 45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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