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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및 교회, 학교/- 가족

동생의 제주살이, 어른들을 모시고 농장을 가꾸며

by 혜강(惠江) 2022. 12. 8.

 

동생의 제주살이

 

어른들을 모시고 농장을 가꾸며 “제주에서 살리라”

 

 

 

  서울에서 경제를 연구하고 중견 경제인을 양성하는 일에 전념하던 막냇동생은 은퇴 후 제주도 생활을 택했다. 제주도 생활은 진작부터 계획된 일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평생 연구한 결과를 바탕으로 저술 활동을 하며 서울에서 지내리라 마음먹었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어 갔다. 일본에 사시는 장인 장모께서 고향인 제주도에 와서 살고 싶다는 의견을 보내온 것이다. 장인어른은 제주도에서 출생하여 젊은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가 어느 정도 사업에 성공하고, 딸 셋을 낳아 모두 조국 대한민국으로 보내어 대학을 졸업시킨 보기 드문 애국자였다.

 

  장인어른 내외는 연세도 있고 타국에서 고되고 힘든 생활을 했으니, 남은 생애는 고향에 돌아와서 여생을 마치고 싶었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랄까? 제주도에는 가까운 친척도 있고 이미 마련해둔 ‘나운농장’도 있으니 더욱 고향이 그리웠을 것이다. 나운농장의 ‘나운(拏雲)’은  ‘한라산에 걸린 구름’이라는 뜻으로 장인어른의 부친 호(號)를 딴 것이다.

 

  이런 소식을 전해 들은 동생은 맏사위이면서도 한국에 거주하는 유일한 사위로서 어른들의 생각을 만류할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환영하고 도와드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내와 함께 제주도로 내려가 어른들의 여생을 돕기로 합의하고 서울의 집도 정리하고 과감하게 제주도행을 택했다.

 

  제주도에 내려가 우선 할 일은 어른들이 거처할 집을 장만하는 것이었다. 아파트로 할까 아니면 단독주택으로 할까 고민하던 차에 마침 ‘코로나’가 터졌다. 코로나가 퍼져나가면서 국경이 봉쇄되고 여행도 금지되었으니 당장 집을 마련하려던 일은 뒤로 미루어졌다. 어쩌면 다행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분들이 돌아오기 전에 오랫동안 관리 부실로 황폐해진 농원을 정비할 시간을 벌었으니 말이다. 그동안 감귤 농장은 직접 운영할 사람이 없어 제주도에 사는 가까운 친척에게 관리를 맡겨두고 수십 년, 관리를 잘한다고 해도 일손이 부족하고 때에 맞춰 보수하지 못한 상태라 그 모습을 장인 장모에게 보여드릴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귤나무는 제멋대로 자라고, 울타리 격인 돌담은 이곳저곳 무너지고, 농장 내의 관리사(管理舍) 역시 퇴색해서 손 볼일이 너무도 많았다. 더구나 농원 한 가운데로 도로가 신설되면서 농장의 중간이 잘려나간 상태였기에 시급히 보수해야할 곳이 그만큼 많아진 것이다.  

 

  그런데, 그 일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평생 학자로 살아온 터라 감귤 농사에는 기초지식이 없을뿐더러 체력도 힘든 일을 감당할 만한 처지가 못 되었다. 그래도 선택한 일이니 어쩌겠는가? 동생 내외는 어수선해진 주변을 정리하고 보수하는 일에 동분서주했다.

 

  그러던 중 해가 바뀌고, 4월 초 어느 날 전화벨이 울렸다. 제주도 동생이었다. 귤나무에 새순이 돋았는데 전정(剪定)이 시급하니 두 형이 시간을 내서 내려와 도와달라는 요청이었다. 나는 둘째 동생과 함께 만사 제쳐놓고 제주도로 달려갔다. 삼 형제는 거의 한 달 가까이 식사를 스스로 해결하며 전정에 매달렸다. (이때 제수씨는 다른 일로 서울에 올라와 있었다.)

 

  제주도 동생은 인터넷을 통해 전정 요령을 출력한 것이라며 A4용지 몇 장을 내밀었다. 그 글을 읽어봐도 딱히 감이 잡히질 않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귤나무가 노목(老木)으로 제대로 관리가 안 된 상태라 필요 없이 웃자란 가지와 죽은 가지, 부러지거나 약해서 이상이 발생한 가지를 과감하게 제거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했다. 소위 강(强) 전정이었다. 그리고 가짓수가 많아 햇빛이 들어올 수 없이 겹쳐진 가지는 솎아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과감하게 잘라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자름 전정’과 ‘솎음 전정’을 거침없이 해 나갔다.

 

  그런데 전정이 다가 아니었다. 마치 지구라도 정복할 기세로 땅에서부터 본 줄기를 타고 올라간 각종 덩굴이 어느새 많은 귤나무를 덮고 있어 이를 제거하는 일이 시급했다. 줄기를 타고 올라간 덩굴은 나무 전체를 덮어 귤나무의 성장을 막거나 어떤 나무는 귤나무 자체를 고사(枯死) 직전까지 몰고 갔다. 나는 전정을 동생들에게 맡기고 온전히 덩굴식물을 제거하는 일에 매달렸다. 그냥 잘라내거나 걷어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씨를 말려야지!'라는 생각으로 근본을 제거하기 위해 돌부리를 헤치며 뿌리까지 뽑아냈다.

 

  마치 전쟁이라도 하듯, 작업은 하루에 다섯 시간 정도로 보름 넘게 계속되었다. 그러다 보니 1주일 정도 지나면서 손의 힘이 현저하게 떨어지면서 손이 부어오르고 작은 통증이 왔다. 그래도 물집이 잡히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작업을 계속했다. 평생 힘든 일은 안 하고 살아온 우리에게 ‘농사일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남에게 맡길 일도 아니고 동생 혼자 이 일을 감당해야 한다는 생각에 힘든 내색을 하지 않고 어느 정도 전정을 마칠 수 있었다.

 

  다음 해, 동생 내외는 우리를 다시 제주도로 초청했다. 귤을 딸 시기는 아직 이르지만, 지난해 제주도에 와서 일하느라 못한 여행이라도 하자는 것이었다. 동생의 제안에 따라 우리 내외는 제주도행 비행기를 탔다.

 

  우리는 공항에 마중 나온 동생 내외와 함께 바로 농원으로 향했다. 주렁주렁 달린 노란 귤밭을 보는 순간 눈이 번쩍 띄었다. 귤나무에 탐스럽게 달린 귤이 지난해 힘든 노력과 수고가 보태어졌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뿌듯했다. 사실 큰 줄기를 과감하게 자르는 강(强) 전정을 하다 보니 혹시나 나무들이 제대로 자랄 수 있을까 귤은 얼마나 열릴까 사뭇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새 가지에 귤이 생각보다 많이 열려 농원 전체를 환하게 장식한 것을 보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상품으로 만들어 팔 것도 아니었으므로 동생은 농약을 뿌리거나 화학비료도 주지 않고, 완전 무농약으로 키웠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잡초가 무성하고 벌레가 들끓었다. 풀 깎는 일은 주변의 도움으로 해결했으나 벌레 잡는 일은 두 내외의 몫이었다. 즐거운 마음으로 열심히 벌레를 잡고 나머지는 하나님이 잘 키워주실 것으로 믿었다고 한다.

 

  우리는 짐을 풀고 농원을 둘러보았다. 농원은 작년과는 너무나 다르게 잘 정돈되어 있었다. 벌레가 들끓고 거미줄을 쳤던 관리사 내부를 호텔급으로 새로 꾸미고, 진입로도 정비하고, 돌담을 새로 쌓고, 개장도 새로 짓고 한 해 동안 기울인 노력의 흔적들이 곳곳에 배어있었다. 이제는 장인 장모를 모셔도 될 만큼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이제 1주일쯤 뒤에는 본격적으로 귤 수확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수확한 귤은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상품으로 내보내지 않고 친척과 친지·이웃에 나누어주고, 어려운 형제들을 돕는 교회와 기관을 통해서 무상으로 보내줄 것이라고 했다.

 

  이 일을 위해서도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다. 귤을 따서 작업 장소로 옮기고, 포장 상자를 사서 상자에 담고, 탁송을 위한 절차를 거쳐 탁송료를 자비로 부담하는 일까지 모든 수고와 노력을 거칠 것이다. 넉넉한 형편도 아닌데, 이 일을 즐거움으로 감당하다니 이처럼 선하고 아름다운 삶이 또 있을까 싶다.

 

  “제주에서 살리라” 마음먹고, ‘나운농장’을 경영하며 제주살이를 시작한 동생 내외의 삶이 앞으로 부모에게 효도함은 물론 선한 이웃으로 세상을 밝힐 수 있기를 기원하며 박수를 보낸다.

 

                                                                                             (글·사진 남상학)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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