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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인천. 경기

회암사, 지공·나옹·무학 삼대화상의 수행 성지

by 혜강(惠江) 2022. 10. 12.

 

양주 회암사

 

지공·나옹·무학 삼대화상 수행 성지

 

 

글·사진 남상학

 

 

 

▲회암사 일주문

 

  양주 회암사는 천보산 계곡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회암사지에서 동북쪽으로 약 600m 가량 올라가면 된다. 회암사는 고려 충숙왕 15년(1328) 원나라를 통해 들어온 인도의 승려 지공(指空) 선사가 창건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고려 명종 4년(1174년)에 금나라 사신이 회암사에 들렀다는 기록이 있어서 정확한 연대와 창건주는 알 수 없다.

 

  지공선사는 인도 마갈타국의 왕자로 태어나 8세에 동진 출가하였으며, 석가모니 부처의 수제자인 가섭존자의 법맥을 이은 정통파 선사다. 지공은 1326년 3월부터 1328년 9월까지 고려에 머물면서 여러 사찰을 방문하였는데, 그 중에서 회암사는 그가 불법을 펼친 중심도량이었다.

 

 

▲회암사 요사채

 

 

  그 후 고려 충숙왕 15년(1328) 지공선사(指空禪師)의 뜻에 따라 그의 제자인 나옹선사(懶翁禪師)가 크게 중창하였다. 나옹 선사는 경기 양주 회암사에서 견성(見性)하고 중국 옌징(베이징의 옛 이름)으로 건너가 인도에서 온 지공 선사에게서 법을 받았다. 귀국해 훗날 태조 이성계의 왕사가 된 무학대사에게 법을 전했다. 주로 양주 회암사에 주석했지만, 송광사에서 3년간 주지를 지내기도 했다.

 

  그는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라는 시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한국 불교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걸출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고려 말기 왕실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원증국사 보우(圓證國師 普愚, 1301~1382)도 제자인 무학대사 자초(無學大師 自超, 1327~1405년)와 함께 회암사를 크게 중창하였다.

 

  무학대사는 나옹선사의 법맥을 이어 조선 불교의 기틀을 마련한 고승이다. 태조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승려로, 옛 회암사가 온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을 때는 이성계와 함께 회암사에 머물렀다. 조선 건국 이후에는 태조에게 유교와 불교의 작용이 다르지 않음과 백성의 어버이로서의 태도를 설법하기도 하였다.

 

 

 

▲회암사 내의 4기의 공덕비

 

 

  당시 회암사의 규모는 전각이 총 262간이었고, 암자도 17개나 되었으며, 모셔진 불상도 15척이 7구나 있었다고 하며, 관음상도 10척을 모셨다고 한다. 고려말에는 전국 사찰의 총본산이었으며, 거주하는 승려의 수가. 3,000명에 이르렀고, 조선 초까지 전국에서 가장 큰 절이었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 회암사는 왕실의 후원을 받으며 크게 번창하였다. 태조 이성계는 나옹의 제자이면서 자신의 스승인 무학대사(無學大師, 1327~1405)를 회암사에 머무르게 하였고, 왕위를 물려준 뒤에는 자신도 회암사에서 수도 생활을 하기도 했다.

 

  또한, 불심이 깊었던 효령대군(孝寧大君),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貞熹王后), 명종 때 문정왕후 등 왕실 인물들의 후원을 받아 최대의 왕실사찰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로써 회암사는 크고 웅장하여 아름답기가 동국 제일로서 조선 중기까지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당대의 불교 사상과 문화를 주도하였다.

 

  그러나, 문정왕후가 죽은 뒤에 나라의 정책이 억불정책으로 변하면서 명종 20년(1565) 절이 불태워져 폐사되었다.

 

  그러면 지금의 회암사는 언제 어떻게 생겨났는지 궁금해 진다. 그 궁금증은 구한말에 태어나 격동의 세월을 겪은 운허용하(耘虛龍夏, 1892~1980) 대종사가 쓴 『천보산 회암사 창건기』에 드러넌다.

 

  지금의 회암사 자리에 1828년에 탑비를 다시 세우면서 조그만 암자를 지어 가람을 수호하고 옛 회암사를 잇게 했다는 기록으로 보면, 기존에 있던 회암사 인근의 암자 중 하나에 탑비를 다시 세우면서 폐사된 회암사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 지금의 회암사가 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회암사 오르는 길

 

▲회암사의 가람들

 

 

  더구나 1922년 봉선사 주지 홍월초(洪月初) 화상이 회암사에 새로 보전을 지어 불상을 봉안하고, 지공·나옹·무학 세 화상의 진영을 모신 것에서 그 사실이 더욱 분명해진다.

 

  이후 1967년 호선(昊禪) 대사가 서북쪽에 큰법당과 삼성각·영성각(影聖閣) 등을 중건하여 오늘의 회암사에 이르게 되었다.

 

  회암사의 정문이었던 일주문(一柱門)으로 들어서서 400m쯤 올라가서 산길이 끝나는 지점에 현재의 회암사가 있다. 현재의 회암사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관음전, 조사전, 범종각, 삼성각, 요사채, 종무소 등이 있다.

 

 

 

▲대웅전 건물과 내부

 

▲관음전(위)과 삼성각(아래)

 

▲범종각과 종

 

 

  조사전에는 조선 후기 목조여래좌상과 복장물이 봉안되어 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불상은 높이 50.2㎝, 무릎 폭 36.5㎝. 두 손은 따로 제작하여 끼워 넣은 상태이다. 복장물은 조성발원문, 여러 권의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여러 종류의 다라니(陀羅尼), 황초폭자(黃綃幅子)로 감싼 후령통(喉鈴筒) 등이 있다.

 

 

 

▲조사전 및 그 내부

 

  조사전 우측으로 조금만 발길을 옳기면 중요문화재인 보물 제388호인 회암사지부도, 보물 제389호인 회암사지쌍사자석등(檜巖寺址雙獅子石燈), 경기도 유형문화재로는 제49호인 지공선사부도 및 석등,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0호인 나옹선사부도 및 석등,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1호인 무학대사비(無學大師碑),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2호인 회암사지부도탑이 있다.

 

 

 

▲회암사지 부도와 회암사지 쌍사자 석등(보물 388와 보물 389호)

 

▲무학대사비(경기도유형문화재 제51호)

 

▲지공 선사 부도 및 석등(경기도 유형문화재 49호)

 

 

  그리고 삼각왕사비, 나옹화상 부도 및 석등은 회암사 언덕 위에 있다.

 

▲회암사지 선각왕 사비(보물387호)

 

▲나옹화상 부도및 석등(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50호)

 

 

◎상세정보

 

►주소 : 경기도 양주시 회암사길 281(화암동 1)

►전화 : 031-866-0355

►교통(대중교통)

1호선 덕정역에서 하차, 78번으로 환승하여 회암사지 정류장 하차 (약 10분 소요)

1호선 양주역에서 하차, 90번으로 환승하여 회암사지 주차장 하차 (약 30분 소요)

 

 

 

 

 

※탐방일 : 2020.10.10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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