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내여행기 및 정보/- 인천. 경기

갑곶돈대와 강화전쟁박물관

by 혜강(惠江) 2022. 9. 19.

 

 

갑곶돈대와 강화전쟁박물관

 

한강 길목에서 강화해협을 지키던 요새(要塞)

 

 

글·사진 남상학

 

 

 

 

 

  강화도는 역사가 시작된 섬이다. 단군왕검이 마니산 참성단에서 하늘 제사를 지낸 선사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숱한 역사가 펼쳐졌다. 또 외국의 문화가 바닷길을 통해 육지로 들고 나던 관문이기도 했다.

 

  서해안 한강 어구에 자리한 강화도는 지리적으로 수도 방어의 요충지였다. 삼국시대에는 한강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교두보였으며, 고려의 서울인 개성과 조선의 서울인 한양과 가까이에 있어 외세와 자주 충돌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고려 때는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겨와 39년간 항몽의 시간을 보냈으며, 조선 시대에는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겪고 구한말에는 병인양요, 신미양요를 거쳤다. 염하의 활약은 조선 말기에 빛을 발한다. 이곳에서 통상개방을 요구하는 서구 열강에 맞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런 이유로 강화도에는 54개 돈대, 5개의 진, 7개의 보가 있었다. 각각의 진과 보에는 약 4개소 정도의 돈대가 소속되어 있었다. 진과 보에 소속된 돈대는 장수가 간검(看檢. 두루 살피어 검사)하며 별장(別將 조선 시대 장교) 2명과 군졸 3명이 돌아가며 수직했고, 군졸 1명이 돈사에서 살면서 돈대를 맡아 지켰다.

 

 

 

 

세계금속활자발상중흥기념비와 비석군

 

  갑곶돈대 입구에 들어서자 오른편으로 커다란 돌비석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고려는 금속활자를 세계에서 맨 처음 발명하였다. 이것이 중국 아라비아 독일까지 퍼져나갔으며 이곳 강화는 13세기 금속활자 인쇄술을 중흥시킨 고장이다 ….‘ ’세계금속활자발상중흥기념비'에 새겨진 글자가 선명하다 

 

  고려의 인쇄술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1234년에 강화도에서 인쇄한  『상정예문』은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이용하여 인쇄한 문건이다.

 

  설명에 의히면, "1234년[고종21년] 에 펴낸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 책으로 고려 인종때 최윤등 17명이 왕명으로 고금의 예의를 수집 고증 하여 50권으로 엮은 전례서"라고 씌여 있다. 이것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인쇄보다 무려 200년이나 앞선 것이지만, 현전하지는 않는다.

 

 『상정예문』은 동서고금의 예를 수집해 '국가의 전례'를 집대성한 책이었다. 이 책을 인쇄한 활자의 성분을 금속활자로 보는 것은 '주자'(鑄字·금속활자)라는 용어가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현존하지는 않지만, 지금까지 밝혀진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라는 사실 역시 『동국이상국집』의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세계금속활자발상중흥기념비는 이러한 사실을 널리 알리기 위한 것이다.

 

 

▲세계금속활자발상중흥기념비

 

  그 뒤로는 강화지방의 비석들을 한자리에 모은 비석군이 있다. 이곳에는 조선시대에 선정을 베푼 유수·판관·경력·군수의 영세불망비 및 선정비와 자연보호의 일환으로 세운 금표(禁標), 삼충신(三忠臣)을 기리는 삼충사적비 등 총 67기의 비석이 모여 있다.

 

  조상들의 자연보호정신을 엿볼 수 있는 표석인 금표, 1636년(인조 14) 청나라가 침입하여 강화도를 공략하자 월곶진(연미정)에서 적과 분투하다 장렬하게 전사한 삼충신(강흥업, 구원일, 황선신)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삼충사적비, 그밖에 정유재란 때 수병을 통솔하여 강화도를 지킨 명나라 장수 오종도의 업적을 기리는 오종도비(吳宗道碑), 강화향교 앞에 세워졌던 하마비도 있다. 그리고 순국선열추모비도 있다.

 

 

▲강화비석군(위)과 순국선열추모비(아래)

 

사적 제 306호의 갑곶돈대

 

  갑곶돈대는 지금의 강화대교 입구에서 한눈에 들어오는 곳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를 잡았다. 한강으로 들어오는 길목이다. 성곽에 서면 염하(鹽河)의 물줄기가 거세게 흘러가는 모습이 보인다. 염하는 경기도 김포와 강화군 사이의 강화해협을 일컫는 말이다. 북쪽의 월곶과 남쪽의 황산도 사이의 해수면 높이차가 커서 물살이 빠르다. 이 해협 사이에 지금은 강화대교와 초지대교가 가로놓여 있다.

 

  ‘갑곶’은 삼국시대 강화를 ‘갑비고차 (甲比古次)’라 부른 데서 이름이 전해온 것이며, 바다를 향해 내민 땅이란 뜻으로 외적을 방어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1232년부터 1270년까지 19년간 고려가 도읍을 강화도로 옮겨온 후 몽골과의 전쟁에서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였다. 이곳에 설치된 갑곶돈대는 1679년(숙종 5) 5월 완성된 것이다. ‘돈대’는 작은 규모의 보루를 만들고 대포를 배치하여 지키는 곳으로, 갑곶돈대에는 대포 8문이 배치되었다.

 

  갑곶돈대에 서면 야트막한 성곽 밖으론 좁은 물길이 굽이쳐 흐른다. 외부에서 강화로 들어오는 관문과 가까워 병사들은 돈대 안에서 경계근무를 서며 외적의 척후 활동은 물론 각종 수상한 정황을 살피고 대처했다. 적이 침략할 때는 돈대 안에 비치된 무기로 방어전을 펼치기도 했다.

 

  수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공한 몽골군이 건너지 못하고 발만 구르다 되돌아간 곳이다. 오죽했으면 몽고군이 “우리 군사들의 갑옷만 벗어 메워도 물길을 건널 수 있을 텐데…” 하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이름을 갑옷 ‘갑(甲) 자’를 넣어 갑곶이라고 했다고 하나 신빙성이 없다.

 

  고종 3년(1866) 9월 병인양요 때에는 프랑스의 극동 함대가 6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곳으로 상륙하여 강화성과 문수산성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10월에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은 양헌수 장군의 부대에 패하여 달아났다. 그런가 하면, 1876년에는 일본의 전권 대신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가 이곳으로 상륙하여 강화 연무당(鍊武堂)에서 신헌(申櫶)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였다.

 

  지금의 갑곶돈대는 그동안 훼손되었던 것을 1977년에 강화의 다른 전적지와 함께 새로이 옛 모습을 되살려 보수, 복원이 이루어졌다. 지금 돈대 안에 전시된 대포는 조선 시대의 것으로 바다를 통해 침입하는 왜적의 선박을 포격하던 것이다.

 

  사실 지금의 갑곶돈대의 위치는 제물진 터이고, 갑곶돈대의 원래 위치는 구 강화교 입구 부근으로 추정하고 있다. 다리를 놓으면서 돈대가 훼손된 것으로 전해진다.

 

 

▲갑곶돈대에 설치된 불랑기와 소포 각 1문

 

▲갑곶돈대에서 바라본 염하(강화해협)

 

이섭정 정자와 포대, 그리고 탱자나무

 

 

  돈대 안에는 2층으로 된 정자가 있다. 고려 때 몽골과 외교교섭을 벌였던 이섭정(利涉亭)이다. 최초로 건축된 것은 1398년(태조 7) 강화부사 이성(李晟)이 세웠다고 한다. 고려 때 몽고와의 협상에서 우리 측이 이롭게 되기를 염원하고 외교 사신들을 영접, 교섭, 환송하기 위해 지은 강화도 관문의 팔각정이다.

 

  이섭정은 옛 진해루 옆에 있었는데 무너진 지 오래되어 1398(태조 7년)년 강화부사 이성이 현 자리에 복원하였으나 다시 무너졌고 현재 모습은 1976년 국난극복의 역사 전적지 복원사업의 목적으로 옛 건물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정자에 오르면 강화도와 김포 사이를 흐르는 염하 강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

 

  이섭정에서 내려와 위쪽으로 계단 위에 별도의 포대가 있다. 이곳에는 조선 영조 때부터 주조하여 사용하던 대포 1문이 전시되어 있다. 구경 100㎜, 길이 215㎝, 중량 1,800㎏, 사정거리는 700m이다.

 

 

 

▲갑곶돈대 높은 언덕에 자리한 이섭정

 

▲이섭정에서 바라본 풍경

 

▲포대와 포대에 설치된 대포

 

   포대를 둘러보고 이섭정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강화전쟁박물관 옆길로 내려오다보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탱자나무(제78호) 한 그루가 있다. 수령 400년을 넘어섰으나 나무의 높이는 고작 4m, 둘레는 1.2m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탱자나무는 주로 과수원과 집이나 학교의 울타리로 심어 귀신과 액운을 막는 역할을 했다. 그런 의미에서 강화도 탱자나무는 외적의 침입을 막는 호국의 상징으로 평가되고 있다.

 

  안쪽으론 산책로가 조성되어 여유를 즐기기에 더없이 좋다. 하지만 세월을 거슬러 오르면 이렇듯 아름다운 풍경 속에도 숨죽이며 긴장해야 했던 전쟁의 순간이 스며있다.

 

 

 

 

강화전쟁박물관

 

 

 

  갑곶돈대 내에는 호국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강화에서 일어났던 전쟁을 주제로 각종 전쟁 관련 유물을 전시, 연구, 보존, 수집하기 위해 설립된 강화전쟁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기존의 강화역사관을 리모델링한 강화역사박물관은 지하 1층, 지상 2층, 건축 총면적 993㎡, 부지면적 3,475㎡의 규모로, 300점 이상의 전쟁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주요 전시실로느 1층의 제1~2전시실, 2층의 제3~4전시실이 있다.

 

  제1전시실은 영상을 통해 강화의 전쟁 및 호국 역사를 주제별로 다루며, 각종 무기를 전시해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의 강화의 전쟁사를 살펴볼 수 있다.

 

 

 

 2전시실은 강화 천도를 중심으로 고려 시대의 전쟁사를 보여준다. 몽골의 침략에 대응해 민족 주체성을 지킨 강화 천도 내용과 강화의 전쟁 역사를 소개한다.

 

  강화 중성의 모습을 디오라마로 재현하였으며, 몽골장수와 고려 장수의 대결 모습을 실물 크기 모형으로 전시하여 실감 나게 하였다.

 

 

 

  제3전시실은 정묘호란, 병자호란,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의 조선 시대, 제4전시실은 의병 전쟁, 6·25전쟁을 포함, 조선 시대 말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강화의 전쟁사를 모형과 유물을 통해 소개하고 있다.

 

 

  제4전시실은 조선 말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강화의 근현대 전쟁 역사를 소개한 공간이다. 초지진의 수비대가 운요호와 교전하는 모습이 디오라마로 연출되어 있으며, 의병 및 6·25 전쟁에서 사용된 다양한 무기류와 조선 말에 개발된 방탄조끼인 면갑이 전시되어 있다.

 

 

  주요 전시품으로는 1871년 신미양요 때 강화도 수비대장이었던 순무중군(巡撫中軍) 어재연이 사용했던 군기(軍旗)인 수자기(帥字旗)가 있다. 당시 미군이 노획하여 미국 해군사관학교박물관에 보관하던 것을 2007년 장기대여 형식으로 반환하여 보관 중이다.

 

 

 

  강화도는 99km에 이르는 해안선마다 역사의 굴곡만큼이나 많은 역사적 흔적으로 남겼다. 지금도 강화도는 북한과 인접한 접경지역으로 군사적 요충지의 역할을 묵묵히 담당해 오고 있다.

 

 

 

 

◎상세정보

 

 

 

◎상세정보

 

►갑곶돈대 주소 :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 해안동로1366번길 18 (강화읍 갑곶리 1040)

►갑곶돈대 전화 : 032-930-7076

►강화전쟁박물관 주소 : 인천시 화군 강화읍 해안동로1366번길 18 (강화읍 갑곶리 1006)

►강화전쟁박물관 전화 : 032-930-7076

►가는 길

<대중교통>

3000번 : 신촌-강화 / 88번, 영등포-강화 / 60-5번, 김포공항-화도

60-2번 : 양곡-화도 / 90번 : 부평-강화 / 96번 : 일산-강화 서문

70번, 700번, 700-1번, 800번 : 인천-강화

<자가운전> 올림픽대로 개화IC(48번 국도)→김포→강화읍

<투어버스> 1호선 인천역 출발 / 매주 토 · 일요일 운행(4월~10월), 10시 출발, 코스 : 인천역-초지진-광성보-전등사-농경문화관-강화인삼센터-인천역

 

►맛집

프랑스백반(가정식, 4.4) : 강화읍 강화대로 98 (갑곶리 1075-4), 010-8846-6604

진해식당(추어탕, 매운탕) : 강화 해안동로1366번길 9 (갑곶리 982-4), 032-932-0338

메주꽃이랑 (연잎 정식, 곤드레밥, 열무 보리밥) : 강화읍 갑곶리 971-8, 032-933-1237

 

 

 

▲프랑스백반에서 몇 컷

 

 

 

 

<끝>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