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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문학기행(국내)

노작 홍사용 문학관 탐방

by 혜강(惠江) 2021. 9. 14.

 

'노작홍사용문학관'  탐방

 

일제강점기 낭만주의 문학을 선도한 대표 시인



글·사진 남상학

 

 

 

 

 

  노작홍사용문학관은 경기도 화성시 석우동에 있다. 노작(露雀)·홍사용(洪思容, 1900~1947)은 경기도 화성에서 자라고 생을 마친 화성의 자랑스러운 인물이다. 시인, 수필가, 희곡작가, 연극인 등 다방면의 문학가로 활동했다.

 

  노작 홍사용은 암울한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낭만주의 문학을 선도한 대표 시인이자, 신극 운동을 이끌며 민족의 울분을 대변하는 활동에 전념했다. 특히 그가 후대에 높이 평가받는 것은 그의 문학성뿐만 아니라 강인한 정신 때문이다. 그는 이른바 글을 통해 매국하지 않은 대표 작가였다. 노작홍사용문학관은 이를 기리고자 2010년 3월 개관했다.

 

 

 

 

 

열린 공간, 노작홍사용문학관

 

 

  전체면적 991㎡의 부지 위에 지상 2층으로 세워진 문학관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홍사용의 일생을 정리한 전시물이다. 노작 홍사용의 대표작인 <나는 왕이로소이다>를 비롯하여 그의 문학적 업적에 대한 전시물과 홍사용과 관련된 인물, 활동 내용 등이다.

 

 

 

 

 

  1층에는 산유화극장, 수장고, 작은 도서관, 제1전시실이 있다. 80석 규모의 소극장에서는 토월회를 통하여 신극 운동을 전개한 노작 홍사용의 정신에 따라 시민으로 구성된 산유화 극단에서 매년 가을 정기 공연을 한다. 수시로 세미나, 시낭송회 장소로도 활용된다.

 

  작은 도서관에는 13,000여 권의 도서가 비치되어 있고, 열람실을 갖추고 있어서 시민 누구나 자유롭게 책을 읽을 수 있는 열린 공간이다. 도서 대출도 가능하다.

 

 

 

 

 

  제1전시실에는 노작 홍사용의 유물 및 사료를 전시하여 홍사용에 대한 삶의 자취를 엿볼 수 있게 하였다. 2층에는 제2전시실과 강의실, 지역 문학관(기획전시실 겸용), 작가의 방, 강의실, 북카페 등이 있어 지역 주민을 위한 열린 공간으로서 누구나 자유스럽게 이용할 수 있다.

 

 

 

  특히, 2층 전시실은 문예지 ‘백조’의 이야기를 담은 방과 근대극 운동을 펼친 극단 ‘토월회’의 이야기를 담은 방, 기억의 방, 기억의 방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방에서는 홍사용의 문학 활동을 다양하게 접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라는 특수한 시대 조건 속에서 문학을 공부한 홍사용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조금이라도 가늠할 수 있는 장소이다.

 

 

홍사용의 인생

 

 

  1층 전시실과 2층 전시실을 통해 알아본 홍사용의 인생과 문학적 업적을 정리해 본다. 홍사용은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호는 노작(露雀)·소아(笑啞)·백우(白牛) 등이 있으나 주로 ‘노작’으로 작품 활동을 하였다.

 

  1900년 경기도 용인군 기흥면 농서리(용수골)에서 아버지 대한제국 육군 헌병 부위였던 홍철유(洪哲裕)와 어머니 능성(稜城) 구씨(具氏)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적지는 경기도 화성군 동탄면 석우리(돌모루) 492번지. 1908년 9세 때 일찍 돌아가신 백부 홍승유의 양자로 들어갔다. 양모는 한산 이씨(韓山李氏)다.

 

  그는 생후 100일 만에 서울 종로구 재동으로 옮겨 자랐으나, 아버지의 사망과 함께 경기도 화성으로 이사하여 휘문의숙에 입학하기 전까지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1919년 휘문의숙을 졸업, 기미 독립운동 당시 학생운동에 가담하였다가 체포되고, 3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고 풀려나 그해 6월에 고향에 돌아온다.

 

 

 

 

그의 문학 활동

 

 

  홍사용은 출소한 후 귀향하여 정백(鄭栢)과 함께 수필 「청산백운(靑山白雲)」과 시 「푸른 언덕 가으로」를 썼는데, 이 두 작품은 유고로 전해지다가 근래에 공개된 것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그의 최초의 작품에 해당한다.

 

  문단 활동으로는 박종화(朴鍾和)·정백 등 휘문 교우와 함께 유인물 「피는 꽃」과 서광사(曙光社)에서 『문우(文友)』를 창간한 것을 비롯하여 재종형 사중(思仲)을 설득하여 문화사(文化社)를 설립, 문예지 『백조(白潮)』와 사상지 『흑조(黑潮)』를 기획하였으나, 『백조』만 3호까지 간행되었다.

 

  그의 시작 활동은 『개벽』 · 『동명(東明)』 · 『여시(如是)』 · 『불교』 · 『삼천리』 · 『매일신보(每日申報)』 등에 많은 시·소설·희곡 작품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백조』 창간과 함께 본격화되어, 『백조』 창간호의 권두시 「백조는 흐르는데 별 하나 나 하나」를 비롯하여 「나는 왕(王)이로소이다」·「묘장(墓場)」 · 「그것은 모두 꿈이었지마는」 등 20여 편과 민요시 「각시풀」·「붉은 시름」 등 수 편을 발표하였다.

 

 

<백조의 방>

 

 

 

  홍사용의 초기 시의 경향을 잘 보여주는 「나는 왕(王)이로소이다」(1923.9, 『백조』)는 그의 대표작에 속하는 작품이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님의 가장 어여쁜 아들, 나는 왕이로소이다. 가장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서……. 그러나 시왕전(十王殿)에서도 쫓기어 난 눈물의 왕이로소이다.”로 시작되는 시는 전체 9연 45행으로 되어 있으며, 산문 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님의 가장 어여쁜 아들 나는 왕이소이다. 가장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서···.

  그러나 시왕전(十王殿)*에서도 쫓기어난 눈물의 왕이로소이다.

 

  “맨 처음으로 내가 너에게 준 것이 무엇이냐” 이렇게 어머니께서 물으시면은

  “맨 처음으로 어머니께 받은 것은 사랑이었지요마는 그것은 눈물이더이다.”하겠나이다. 다른 것도 많지요마는···….

  “맨 처음으로 네가 나에게 한 말이 무엇이냐” 이렇게 어머니께서 물으시면은

  “맨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드린 말씀은, ‘젖 주셔요’하는 그 소리였지요마는, 그것은 ‘으아-’하는 울음이었나이다” 하겠나이다 다른 말씀도 많지요마는···….

  이것은 노상 왕에게 들리어 주신 어머니의 말씀인데요

  왕이 처음으로 이 세상에 올 때에는 어머니의 흘리신 피를 몸에다 휘감고 왔더랍니다.

  그날에 동네의 늙은이와 젊은이들은 모두 “무엇이냐”고 쓸데없는 물음질로 한창 바쁘게 오고 갈 때에도 어머니께서는 기꺼움보다도 아무 대답도 없이 속 아픈 눈물만 흘리셨답니다.

  빨가숭이 어린 왕 나도 어머니의 눈물을 따라서 발버둥질 치며 ‘으아!’ 소리쳐 울더랍니다.

  그날 밤도 이렇게 달 있는 밤인데요.

  으스름달이 무리 서고 뒷동산에 부엉이 울음 울던 밤인데요

  어머니께서는 구슬픈 옛이야기를 하시다가요 일없이* 한숨을 길게 쉬시며 웃으시는 듯한 얼굴을 얼른 숙이시더이다.

  왕은 노상 버릇인 눈물이 나와서 그만 끝까지 섧게 울어 버리었소이다. 울음의 뜻은 도무지 모르면서도요. 어머니께서 좋으실 때에는 왕만 혼자 울었소이다.

  어머니께서 지우시는 눈물이 젖 먹는 왕의 뺨에 떨어질 때이면 왕도 따라서 시름없이 울었소이다.

  열한 살 먹던 해 정월 열나흗 날 밤 맨재더미로 그림자를 보러 갔을 때인데요, 명(命)이나 긴가 짧은가 보랴고.

  왕의 동무 장난꾼 아이들이 심술스러웁게 놀리더이다. 모가지 없는 그림자라고요.

  왕은 소리쳐 울었소이다. 어머니께서 들으시도록, 죽을까 겁이 나서요.

  나무꾼의 산타령을 따라가다가 건넛산 비탈로 지나가는 상두꾼*의 구슬픈 노래를 처음 들었소이다.

  그 길로 옹달우물*로 가자고 지름길로 들어서면은 찔레나무 가시덤불에서 처량히 우는 한 마리 파랑새를 보았소이다.

  그래 철없는 어린 왕 나는 동무라 하고 쫓아가다가, 돌뿌리에 걸리어 넘어져서 무릎을 비비며 울었소이다.

  할머니 산소 앞에 꽃 심으러 가던 한식날 아침에

  어머니께서는 왕에게 하얀 옷을 입히시더이다.

  그리고 귀밑머리를 단단히 땋아 주시며

  “오늘부터는 아무쪼록 울지 말어라”

  아 아, 그때부터 눈물의 왕은!

  어머니 몰래 남모르게 속 깊이 소리 없이 혼자 우는 그것이 버릇이 되었소이다.

  누우런 떡갈나무 우거진 산길로 허물어진 봉화(烽火) 뚝 앞으로 쫓긴 이의 노래를 부르며 어슬렁거릴 때에, 바위 밑에 돌부처는 모른 체하며 감중연(坎中連)*하고 앉았더이다.

  아아, 뒷동산 장군바위에서 날마다 자고 가는 뜬구름은 얼마나 많이 왕의 눈물을 싣고 갔는지요.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니의 외아들 나는 이렇게 왕이로소이다.

  그러나 그러나 눈물의 왕! 이 세상 어느 곳에든지 설움이 있는 땅은 모두 왕의 나라로소이다.

 

                          - 잡지 《백조(白潮)》(1923. 9) 수록

 

  이 작품에서 ‘왕’은 어머니의 가장 어여쁜 아들이며, 가장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서 ‘시왕전(十王殿)’에서도 쫓겨난 ‘눈물의 왕’이다. 어머니의 가장 어여쁜 아들은 비록 농군의 아들이라고 하더라도 동심의 세계에서는 절대적인 지존(至尊)의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시의 전반부에서는 ‘눈물의 왕’이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날 때 울부짖는 소리로부터 차츰 인생에 대한 허무를 의식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이때의 눈물도 인생의 죽음이나 허무를 의식한 눈물이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고 철없이 흘리는 눈물이다.

 

  ‘눈물의 왕’은 열한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이 우는 ‘눈물의 비밀’을 깨닫는다. 이 눈물은 인생에 대한 회의와 비극의식에서 점차 심화하여 간다.

 

  ‘눈물의 왕’인 화자(話者)가 비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그의 내면으로 향한 죽음이나 허무 의식 때문만이 아니었다. 여기에는 그 시대 우리 민족이 처하였던 암담한 현실과 실국(失國)의 한이 깔려 있다.

 

  감정의 과잉으로 표출되는 비애의 눈물과 허망함을 형상화한 사설적(辭說的)인 작품들은 3.1운동의 실패에서 온 절망감이 그대로 반영되어 애수와 한, 그리고 자포자기적인 영탄(詠嘆)과 유미탐구(唯美探究)의 경향이 뚜렷하다. 더구나 홍사용은 3·1운동 당시 학생운동의 선두에 섰다가 잡힌 적이 있었다. 이러한 민족적 정한(情恨)과 허무의 식을 기조로 한 비애와 서정은 이 시의 특색일 뿐만 아니라 백조파 동인들의 낭만적이고 감상적인 경향을 대표한다.

 

  그러나 홍사용이 한국시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낭만주의적 시를 썼다는 것 외에도 민요이론을 정리하고 민요시를 창작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 봄은 가더이다// "거져 믿어라 "/ 봄이나 꽃이나 눈물이나 슬픔이나/ 온갖 세상(世上)을, 거저나 믿을까?/ 에라 믿어라, 더구나 믿을 수 없다는/ 젊은이들의 풋사랑을// 봄은 오더니만, 그리고 또 가더이다/ 꽃은 피더니만, 그리고 또 지더이다 -  <중략> -  동무야, 비웃지 마라/ 아차, 꺾어서 시들었다고/ 내가 차마, 꺾기야 하였으랴만/ 어여쁜 그 꽃을, 아끼어 준들/ 흉보지 마라, 꽃이나 나늘/ 안타까운 가슴에, 부여안았지// 그러나 그는, 꺾지 않아도/ 저절로 스러지는 제 버릇이라네/ 아 그런들 그 꽃이 차마/ 차마, 졌기야 하였으랴만/ 무디인 내 눈에 눈물이 어리어/ 아마도, 아니 보이던 게로다/ 아 그러나, 봄은 오더니만, 그리고 또 가더이다"

                                                           - 「봄은 가더이다」에서

 

  「봄은 가더이다」·「해 저문 나라에서」 등은 민요의 율조를 바탕으로 토속적인 것에 바탕을 둔 민요시를 대표하는 작품들이다. 당시 대다수 낭만주의 시인들이 외국 풍조에 휩쓸릴 때 그는 민중의식이 스민 민요에 관심을 갖고 민족적 서정성을 끝없이 탐구하고 형상화하였다.

 

 

 

 

 

<토월회 방>

 

 

토월회, 신극 운동에 참여

 

  홍사용은 시, 수필, 소설 등에 관심을 보이며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1920년대 중반부터 연극 활동, 희곡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연극인으로서도 큰 몫을 했다.

 

  1923년 근대극 운동의 선구적 극단인 토월회(土月會)에 가담해 문예부장직을 맡았고 직접 서양극 번역과 번안 그리고 연출도 했다. 토월회는 1922년 2월 일본 유학생인 박승희가 중심이 되어 조직한 전문 극단으로서, 신파극에 대항하여 본격적인 근대극 운동을 펼쳤다. 1924년 제3회 공연 때 <회색 꿈>이라는 작품을 처음으로 번역하고 가끔 연출자로서 활동하는 등 ‘토월회’ 등의 극단을 이끌며 근대극 발전에도 이바지했다.

 

  당시의 희곡들이 관념적인 주제에 남녀 간의 애정, 가정불화 등을 다룬 것에 비해 그의 작품이 민족운동의 성격을 띠고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희곡사에서 선도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홍사용은 작품을 통해 민족의 아픔과 정한을 표출하며 일제에 저항하였다.

 

 

 

▲토월회 방 전시물

 

<기억의 방>

 

▲기억의 방

 

<추모의 방>

 

▲추모의 방

 

  지역 문학관(기획전시실 겸용)은 경기도 화성의 문인과 문학을 바탕으로 다채로운 기획전시를 실시하는 공간이다. 2021년 3월, 개관 기념 첫 기획전시로 ”화성 문학에 길을 묻다“라는 상실과 회복을 주제로 화상의 근현대사를 형상화한 작품을 전시하고 있었다.

 

 

<지역문학관>

 

 

 

 

<북카페, 노노카페>

 

 

  북카페에는 문학도서와 노노카페 등이 있어서 독서와 커피를 즐기는 공간이다. 벽면 가득 책장이 이어져 있고 시, 소설, 희곡, 비평 등 다양한 장르의 문학서적이 꽂혀있다. 책을 보거나 대여도 할 수 있다.

 

  북카페 내 계단을 올라가면 바로 노노카페가 있다. 책을 읽다가도 커피나 따뜻한 차로 휴식을 취할 수 있다. 또, 작가의 방은 지역 작가들의 집필 공간으로 활용된다.

 

  특히 노작홍사용문학관은 연중 끊임없이 시낭송회, 문예 강좌, 작가 특강 등 문학과 연계한 프로그램이 풍부하고, 음악회, 영화상영회 등 다양한 장르의 프로그램들이 부지런히 열린다. 문학관 벽면 가득 프로그램을 알리는 현수막들이 이를 증명해 준다.

 

  이렇듯 노작홍사용문학관은 지역민들과 문학 애호가, 작가 지망생들이 문학적 감수성과 교양을 쌓고 창작 역량을 높이는 데 이바지하고 있으며, 시민들의 다양한 문화적 욕구에 부응하고 있다.

 

 

▲북카페의 서적들
▲작가의 방

 

꺾이지 않은 마지막 길

 

  30세 무렵부터 5년간 홍사용은 미투리에 두루마기 차림으로 화류목 단장을 짚고 전국 곳곳을 방랑했다. 1932년 불교지에 희곡 《벙어리굿》을 발표, 1935년을 전후하여 세검정 근처에 자리 잡고 한의공부를 하여 한동안 한의사로 생계를 유지했다.

 

  작품을 통해 민족의 아픔과 정한을 표출하며 일제에 저항하던 그는 1939년, 희곡 《김옥균전》이 검열에 걸려 주거까지 제한받자 붓을 꺾고 병중에 전국의 사찰을 순례했다.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홍사용은 친일에 대한 글을 한 편도 쓰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강경·전주 등지에서 교편을 잡았으나 모두 오래 가지 못했으며, 1944년에는 이화전문에 잠시 출강했다. 해방 후 근국청년단에 가입, 청년운동을 전개하려 하였으나 지병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47년 1월 5일 48세에 폐 질환으로 별세했다. 유해는 노작홍사용문학관 뒤 노작공원에 안장되어 있다. 생존 시에는 작품집이 나오지 않았고, 1976년 유족들이 시와 산문을 모아 《나는 왕(王)이로소이다》를 간행했다.

 

 

 

 

노작문학상 제정

 

  노작 홍사용문학관에서는 〈나는 왕이로소이다〉 등 민족적 작품을 남긴 시인 노작(露雀) 홍사용을 기리기 위하여 2001년 제정되었다. 홍사용의 고향인 경기도 화성시 문화계 인사들이 주도해 설립한 '노작문학상운영위원회'가 주관하고 화성시가 후원한다. 매년 1회씩 수상자를 선정하여 시상하는데, 수상자에게는 1000만 원의 창작지원금이 수여되나, 후에 2000만 원으로 증액되어 운영 중에 있다.

 

  감상적인 서정시를 추구해 온 홍사용의 사상과 민족애, 그의 문학에 대한 열정을 대내외에 널리 알림으로써 문인들의 창작활동을 고양하고 문학을 통해 좀더 아름답고 순수한 사회를 조성하기 위해 제정되었다. 그 동안의 수상자는 안도현, 이면우, 문인수, 문태준, 김경미, 김신용, 이문재, 이영광, 김행숙, 김소연, 심보선, 이수영, 손택수, 장옥관, 신용목, 홍신선, 박철, 전동균, 박소란 등이다. 

 

 

 

노작공원과 홍사용의 묘 

 

  홍사용 문학관에서 조금만 걸어 나오면 홍사용의 묘역으로 가는 산책길 우측으로 노작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공원 이름은 그의 호인 노작에서 따서 지은 것이다. 이곳에는 그의 일대기와 문학 활동을 기리는 시비 등이 건립되어 있다. 

 

  묘로 가는 길에 그의 시 <나는 왕이로소이다> 중 일부를 되뇌어 본다. “할머니 산소 앞에 꽃 심으로 가던 한식날 아침에/ 어머니께서는 왕에게 하얀 옷을 입히시더이다./ 그러고 귀밑머리를 단단히 땋아 주시며/ “오늘부터는 아무쪼록 울지 말아라.”/ 아-, 그때부터 눈물의 왕은!/ 어머니 몰래 남모르게 속 깊이 소리 없이 혼자 우는 그것이 버릇되었소이다. (중략) 아-, 뒷동산 장군바위에서 날마다 자고 가는 뜬구름은 얼마나 많이 왕의 눈물을 싣고 갔는지요./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니의 외아들 나는 이렇게 왕이로소이다./ 그러나 그러나 눈물의 왕!/ 이 세상 어느 곳에든지 설움 있는 땅은 모두 왕의 나라로소이다."

 

  그의 묘는 부인 원주 원씨(原州元氏)와 합장묘이다. 봉분만 있을 뿐 아무런 석물도 없었으나 1984년 5월 그의 대표작 <나는 왕이로소이다>의 시비 건립을 계기로 묘표, 향로석, 혼유석, 상석 등을 갖추게 되었다. 2019년 10월 향토문화재 기념물 제4호로 지정되었다. 홍사용 문학관은 바로 야트막한 반석 산과 연결되어 주말에 가족과 함께 산책과 가벼운 등산을 할 수 있어서 좋다.

 

 

▲노작 홍사용의 묘

 

 

◎상세 정보

 

 

 

주소 : 경기도 화성시 노작로 206 (석우동 64)

전화 : 031-8015-0880

개관 : 화요일 ~ 일요일 09:00~18:00, *국경일 개관

휴관 : 매주 월요일, 명절, 선거일

교통

승용차 - 동탄신도시 방면 약 2km, 동탄라마다호텔 맞은편
버스 – 서울에서는 1551, 1552(1551B)/ 1311, 1550-3, 1553, M4108, M4403

 

 

* 탐방일 2021.9.14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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