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영로의 자취를 찾아 부천으로
민족혼을 노래한 불굴의 시인 변영로
글·사진 남상학
경기도 부천은 시인 수주 변영로(卞榮魯, 1898~1961) 선생의 고향이다. 변영로 시인의 호 ‘수주(樹州)’는 고려 시대 사용하던 부천의 옛 이름(樹州, 나무고을)에서 따온 것이다. 변영로 선생이 태어난 곳은 서울시 중구 회현동이지만, 선생은 공장공(恭莊公) 변종인(卞宗仁, 1433~1500)의 후손으로 500여 년을 대대로 고강동에서 살아왔다.
이렇듯 변영로는 자신의 호를 부천의 옛 이름을 따서 수주라 했고, 서울에서 거주할 때조차 주소를 부천에 두는 등 부천 사랑이 지극했다. 그리고 죽어서는 부천의 고향 집 뒷산에 묻혔다.
변영로의 문학적 성취를 기념하는 뜻으로 고향 집에는 문학 푯돌을 세우고, 고강선사유적공원 내에 수주도서관을 건립하여 수주 문학관을 설치하는 계획을 마련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변영로 묘역 아래와 중앙공원에 세운 시비와 그의 고향 동네에 건립한 기념 동상도 변영로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것들이다.
수주 변영로 선생 기념상
부천과 서울의 경계지점에서 가까운 부천시 오정큰길 '고강지하차도' 옆(봉오대로 494)에는 ‘수주 변영로 선생 기념상’이 세워져 있다. 동상 앞에는 <봄비>(《신생활》 2호, 1922. 3)가 새겨진 시비와 ‘樹州先生紀積'을 적은 표지석, 행복해 보이는 가족상이 있다.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졸음 잔뜩 실은 듯한 젖빛 구름만이
무척이나 가쁜 듯이, 한없이 게으르게
푸른 하늘 위를 거닌다.
아, 잃은 것 없이 서운한 나의 마음!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아렴풋이 나는 지난날의 회상같이
떨리는 뵈지 않는 꽃의 입김만이
그의 향기로운 자랑 앞에 자지러지노라!
아, 찔림 없이 아픈 나의 가슴!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이제는 젖빛 구름도 꽃의 입김도 자취 없고
다만 비둘기 발목만 붉히는 은실 같은 봄비만이
소리도 없이 근심같이 내리누나!
아, 안 올 사람 기다리는 나의 마음!
봄비 내리는 날 우수에 젖은 시인은 무엇인가를 괴로워하고 있다. “안 올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안 올 사람”은 주국의 광복으로 보아 무방할 것이다. 기념 동상 주변에는 자전거 도시 부천을 알려주는 다양한 구조물도 있어 재미있게 둘러볼 수 있다.
중앙공원 내의 ’수주변영로 시비‘
부천시 원미구 중동에 있는 중앙공원에는 1996년 12월 문인협회 부천지부에서 세운 수주 변영로의 시비가 있다. 시비에는 그의 대표작 <논개(논개(論介)>(《신생활》3호, 1923가 새겨져 있어 공원을 방문하는 이들의 발길을 잡는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蛾眉)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魂)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이 시에서 그의 서정성은 상징과 은유, 그리고 붉음과 푸름의 회화적인 색채대비를 통해 민족에 대한 일편단심을 노래하고 있다.
수주도서관(문학관) 건립
부천시는 2022년 개관을 목표로 수주도서관을 건립 중에 있다. 수주도서관은 고강선사유적공원 내 선사유적을 주제로 지어진다.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 도서관에는 '유네스코 문학창의도시 플랫폼'으로, 주요 시설로는 수주 변영로 선생을 기념하는 수주문학관을 비롯하여 유아자료실, 어린이자료실, 북카페, 종합자료실, 선사유적체험관, 시민학습원 등을 갖출 예정이다.
수주 변영로의 인생과 문학
수주 변영로는 1898년 5월 9일 서울 맹현(지금의 종로구 가회동)에서 아버지 변정상(鼎相)과 어머니 강재경(姜在卿) 사이에서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본적은 부천군 오정면 고강리. 서울 재동보통학교를 거쳐 1910년 중앙학교에 입학했으나 1912년 자퇴하고 만주 안동현을 유랑한다.
1915년 조선중앙기독교 청년회학교 영어반 3년 과정을 6개월 만에 수료하고, 모교인 중앙학교 영어교사가 되었으며, 이때 명예 졸업생으로 졸업했다. 1918년에는 청춘지에 영시 <코스모스>를 발표하면서 천재 시인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1919년 3·1운동 때는 YMCA에서 독립선언서를 영문으로 번역해 해외에 발송하는 일을 맡았고, 1920년에는 《폐허》의 동인으로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1921년 《신천지》에 〈소곡 5수〉를 발표한 데 이어 《신생활》·《동명》 등에 여러 작품을 발표했으며, 1924년, 첫 시집 《조선의 마음》으로 한국 문단에서 주목받는 시인으로 부상했다. 1923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로 영문학과 조선문학을 강의하기도 했다.
그는 《폐허》 동인이면서도 1920년대의 감상적이며 병적인 허무주의에서 벗어나 시를 언어예술로 자각하고 기교에 중점을 두었다. 오히려 《백조》류의 낭만성이 짙은 작품을 발표한 변영로는 비교적 건강한 서정성과 민족정신을 드러내고 있다.
우선 그의 아름다운 서정성은 초기의 자유시들과 후기의 시조들에서 볼 수 있다. 초기시에 속하는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로 시작되는 〈봄비〉(《신생활》, 1922) 등의 시나 “생시에 못 뵈올 임을 꿈에나 뷜까 하여/ 꿈 가는 푸른 고개 넘기는 넘었으나/ 꿈조차 흔들리우고 흔들리어/ 그립던 그대 가까울 듯 멀어라.”의 〈생시에 못 뵈올 님〉(《폐허 이후》, 1924) 등의 작품은 행의 반복에 따른 표현의 기교와 음수율로 인한 음악적 요소와 함께 그의 서정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서정성의 강화는 후기에 와서 시조 〈고운 산길〉(《시문학》 2호, 1930)·〈곤충 9제〉(《문장》, 1941)를 통해 더욱 정제되고 세련된 모습으로 드러난다.
비 끝에 개인 하늘 물들듯이 푸른빛을
나뭇잎 겨르며도 제철 일러 수줍은 듯
열부어 더욱 짙은 채 더욱 고와 뵈더라.
뫼 빛도 곱거니와 엷은 안개 더 고와라
고달퍼만 걸음 뜨랴 빨리 걸어 무삼하리
늘잡다 올 길 늦기로 탓할 줄이 있으랴.
골마다 기슭마다 뿌린듯한 붉은 꽃들
제대로도 고운 뫼를 헤팔리도 꾸몄고야
어느 뉘 집에 묻히랴 집 삼을가 하노라.
- <고운 산길> 전문
그러나 그의 서정성은 민족적 서정과 맞닿아 있다. 그의 대표시라 할 수 있는 <논개>의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마음 흘러라.”에서, 논개에 대한 찬양은 자신의 민족애를 반영한 것으로 민족혼의 되새김을 통해 좌절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보여 준다.
1924년 첫 시집의 <조선의 마음> 역시 주제면에서 〈논개〉와 일치한다. “조선의 마음을 어디 가서 찾을까/ 조선의 마음을 어디 가서 찾을까/ 굴속을 엿 볼까. 바다 밑을 뒤져 볼까/ 빽빽한 버들가지 틈을 헤쳐 볼까/ 아득한 하늘가나 바라다볼까/ 아, 조선의 마음을 어디 가서 찾아볼까/ 조선의 마음은 지향할 수 없는 마음, 설운 마음!”
이 시는 1924년 평문관(平文館)에서 상재된 수주 변영로 시집 《조선의 마음》의 표제시로, 나라를 잃은 애처로운 마음을 직설적으로 표현해 민족적 울분을 그대로 표현했다고 해도 무방하다.
이처럼 민족 시인의 길을 걸었던 변영로는 1930년 박용철과 김윤식이 이끄는 시문학파에 합류했으나 시문학파 활동과는 다소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었고, 오히려 전통문화의 계승과 고전문학 부흥운동을 시조창작으로 구체화했다.
1931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 산호세대학에 입학해 2년 동안 공부했다. 1933년 귀국해 동아일보사 기자, 《신가정》 주간, 《신동아》 편집장 등을 역임했으며, 문우회관(文友會館)을 운영하기도 했다. 이어 1939년에는 독립운동 단체인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일경에 체포돼 107일간 옥고를 치루기도 한다.
해방 후, 1946년 성균관대학교 영문학과 교수로 취임했다가 1955년 〈불감(不感)과 부동심(不動心)〉이 '선성모욕'(先聖侮辱)이라는 필화사건으로 사직했다. 대한공론사 이사장,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초대이사장을 맡기도 했다.
이 시기에는 주로 수필을 많이 썼다. 수필집 《명정 40년》(1953), 《수주수상록》(1954)을 냈다. 특히, 《명정 40년》은 그의 솔직한 심정과 풍자·해학·기지를 엿볼 수 있는 작품집이다.
1959년 《수주시문선》(1959) 출간한 변영로는 1961년 3월14일 서울 신교동 자택에서 인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에 수필집 《명정반세기》(1969), 《차라리 달 없는 밤이 드면》(1983) 등을 냈다.
변영로의 묘
변영로 선생의 묘는 부천시 고강동(산63-7) 밀양 변 씨 문중 선산에 있다. 선산의 변종인(卞宗仁) 묘와 신도비는 부천시 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선대의 변종인은 조선의 무관으로 병마절도사와 공조 판서를 역임하였다. 시호는 공장(恭莊)이다.
이곳에는 수주 변영로를 비롯한 형제들(법률학자인 변영만, 정치가이며 영문학자인 변영태)과 부모, 조부모의 묘가 모두 모여있다. 변영로의 묘소 앞에는 <생시에 못 뵈올 임>(《폐허 이후》, 1924)을 새긴 수주 변영태 선생 기념비가 서 있다.
생시에 못 뵈올 임을 꿈에나 뷜까 하여
꿈 가는 푸른 고개 넘기는 넘었으나
꿈조차 흔들리우고 흔들리어
그립던 그대 가까울 듯 멀어라.
아, 미끄럽지 않은 곳에 미끄러져
그대와 나 사이엔 만 리가 격했어라.
다시 못 뵈올 그대의 고운 얼굴,
사라지는 옛 꿈보다도 희미하여라.
'생시에 못 뵈올 임'은 누구일까? 여기서 그 임은 현실적으로 쉬 이루어질 수 없는, 또는 아득히 멀어져 가고 있는 것, 가령 잃어버린 조국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이리라.
*탐방일 2021. 9. 10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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