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사라봉공원 모충사
제주인의 정신과 혼(魂)이 깃든 곳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사라봉길 75 (건입동)
글·사진 남상학
제주항 인근 건입동에는 사라봉이라 불리는 명소가 있다. 제주항 위로 보이는 사라봉에 오르면 제주 성내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다. 아름다운 일몰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관광지인 동시에 운동 시설을 갖춘 시민공원으로 매일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는다.
높이 148m의 나지막한 사라봉은 동쪽으로는 화북봉(136m)과 연봉을 이루고 있다. 정상에 있는 팔각정에서는 제주 시내와 제주항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데, 특히 북동쪽 해안은 암석으로 되어 있어 절경을 이루고, 공원의 남쪽으로는 제주시와 제주도 전 해안을 연결하는 해안일주도로가 지나간다. 특히, 사라봉의 황혼은 제주10경 중에 하나로 사봉낙조라 하여 성산일출과 대비되는 경관으로 손꼽힌다.
사라봉공원의 경내에는 제주를 빛낸 사람들을 기리고자 제주 주민의 성금으로 건립한 모충사(사당)가 있다. 서울의 탑골공원이나 효창공원처럼 높은 공덕을 쌓은 인물이나 애국지사 등 제주 사람들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이들을 기리는 시설들이 여럿 설치되어있다.
먼발치에서도 보일 정도로 높게 우뚝 선 세 개의 탑이 그 정점을 이룬다. 순국 지시 조봉호 기념비, 제주 의병 항쟁기념탑, 조선 시대 김만덕 할머니의 구형 의녀 탑이 한곳에 모여 있다.
순국지사 조병호 기념비
모충사 정문을 들어서면 언덕 위에 높이 솟은 순국 지사 조봉호 기념비가 맞이한다. 조봉호는 1884년 제주도 한림읍 귀덕리에서 조만형의 맏아들로 태어나 19세에 서울로 유학을 떠난다. 그가 입학한 학교는 언더우드 선교사가 세운 경신학교였다. 이 학교에 재학하면서 조봉호는 일찌감치 기독교신앙과 함께 애국애족 정신을 받아들이게 됐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1904년 귀향한 조봉호는 제주 최초의 개신교 신앙공동체인 금성교회와 영흥학교를 세워 후진을 키우고, 한때 이기풍 목사를 도와 성내교회 조사(전도사)로 활동한다.
1919년 3·1운동이 벌어지자 조봉호는 3월 20일과 22일까지 제주읍성에서, 4월 8일에는 서귀포에서 만세시위가 벌어지고 있을 때, 상해임시정부 수립 소식을 국내에 전하고, 독립군 지원을 위해 군자금 모금 활동을 벌이던 김창규를 도와 모금 활동에 앞장서서 무려 1만 원의 군자금을 마련해 송금한다. 당시 쌀 반 가마니 가격이 2원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1만 원은 제주 사람들의 헌신이 담긴 실로 엄청난 금액이었다.
하지만 이 눈부신 행적은 얼마 안 돼 일제에 의해 발각되고, 선봉에 섰던 조봉호는 군자금 모금사건에 연루되었던 여러 목사님을 보호하기 위하여 홀로 이 사건을 책임지기로 한다. 자청해서 군자금 모금의 주동자가 본인이었다고 고백하고, 1919년 9월 25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열린 재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는다.
복역을 위해 대구형무소로 향해 떠난 길은 그의 마지막 행로가 되었다. 1920년 4월 28일 그는 옥중에서 34세의 아까운 나이로 타계했다. 시신조차 가족에게 인도되지 않아 묘소를 마련할 길 없었던 그의 처지를 안타까워한 제주 사람들은 1977년 ‘순국 지사 조봉호 기념비’라는 글자를 새긴 탑을 사라봉에 세웠다.
비문의 글귀 중 “조봉호 지사의 애국 충성은 기독교의 박애 정신을 바탕으로 더욱 굳건하였으니, 동지를 구하고 홀로 순국한 그 정신을 우리는 삶과 애국의 길잡이로 이어받으리”라는 대목이 눈길을 끈다. 제주 한림읍 귀덕리에는 조봉호가 나고 자란 생가가 남아 있으며, 그가 세운 금성교회도 지척에 있다. (2019.11.29.자 기독신문-“사라봉공원의 조봉호 기념탑 -박창건 목사의 제주교회이야기” 참조)
의병항쟁기념탑
‘순국 지사 조봉호 기념비’ 바로 위쪽에는 제주 ‘의병항쟁기념탑’이 서 있다. 1909년 2월 25일 의병장 고사훈 등 10명의 구국 지사들이 발의하여, 1909년 3월 3일을 기해 관덕정 광장에 집결, 일본 관리를 축출하고 국권을 회복하고자 했으나 비밀이 탄로 나 실패로 끝나버린 제주 의병 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은 의병 항쟁탑 앞에 서면, 일본 침략에 항거한 제주도민의 주체적 항쟁 의지가 가슴에 와 닿는다. 김만덕의 묘탑이 다. 또한 이곳에는 김만덕의 유품을 모아 전시해 놓은 만덕기념관이 있다.
'의녀수반 김만덕 의인묘'탑과 묘
또 하나는 ‘의녀반수 김만덕 의인묘’ 묘탑이 우뚝 서 있다. 20m 높이로 삼각형을 이루며 우뚝 솟아 있는 묘탑은 1700년대 말, 제주도 구휼(救恤, 구제사업)에 앞장섰던 김만덕 할머니의 추모하기 위한 것이다.
김만덕 할머니 (1739∼1812)는 제주에서 가난한 선비의 딸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부모와 사별하고 11살에 기적에 오르게 되었으나, 제주 목사에게 찾아가 부모를 잃고 가난으로 기녀가 된 것을 호소하여 기녀 명단에서 삭제되어 양녀로 환원되었다.
1790년부터 1794까지 제주도에 큰 흉년이 들어 약 18,000명이 굶어 죽게 되자 김만덕 할머니는 그때까지 번 전 재산으로 육지에서 식량을 사와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한편 관가에도 보내어 구호곡으로 쓰게 하였다. 이 이야기는 조선 정조 때의 문신인 채제공이 지은 《번암집》에 실려 있다.
1796년 만덕의 선행이 알려지자, 정조는 제주목사 이우현을 통해 만덕의 소원을 물어보는데, 만덕은 한양에서 궁궐을 보고, 금강산을 보고 싶다고 하였다. 대답을 들은 정조는 “관의 허락없이 제주도민은 섬밖으로 나가지 못한다.”라는 규칙을 깨고 만덕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또한 내의원 차비대령행수(內醫院 差備待令行首)로 삼아 정조를 알현할 자격을 주고 그녀의 선행에 대한 보답으로 김만덕에게 내의원 의녀반수(醫女班首)’직을 제수하였다.
1812년 73세를 일기로 별세한 한 달 뒤에 ‘구묘비문(舊墓碑文)’이 세워졌다. 김만덕이 사망한 지 30여 년이 지난 1840년(헌종 6)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김정희는 김만덕의 양손 김종주(金鍾周)에게 ‘은혜의 빛이 길이 빛나리’는 뜻의 ‘은광연세(恩光衍世)’라는 편액을 써서 주었다.
김만덕의 묘는 가운이마루 길가에 조성되었다가 1977년 정월 이곳 모충사로 이묘되었다. 묘비 전면에는 '행수내의녀 김만덕지묘'(行首內醫女 金萬德之墓)라고 씌여 있다. 김만덕 묘비(墓碑)는 제주특별자치도의 기념물 64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이곳에는 김만덕의 유품을 모아 전시해 놓은 만덕관이 있다. 매년 한라문화제 때에는 모충사에서 의녀 김만덕 할머니를 기리는 ‘만덕제’가 거행되며 이때 제주도 일원에서 사회봉사에 공헌한 여성을 선정해 만덕 봉사상을 수여하고 있다.
세 개의 탑 주위는 향나무, 소나무, 동백나무, 종려나무 등, 다양한 수종으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어 사라봉과 함께 제주 시민의 소중한 휴식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 세 개의 기념비(탑)가 모여 있는 모충사는 단순한 관광지의 차원을 넘어서 민족의 정기가 신성한 곳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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