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측량(側量)
- 한용운
즐겁고 아름다운 일은 양*이 많을수록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의 사랑은 양이 적을수록 좋은가 봐요.
당신의 사랑은 당신과 나와 두 사람 사이에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사랑은 당신과 나의 거리를 측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당신과 나의 거리가 멀면 사랑의 양이 많고,
거리가 가까우면 사랑의 양이 적은 것입니다.
그런데 적은 사랑은 나를 웃기더니, 많은 사랑은 나를 울립니다.
뉘라서 사람이 멀어지면, 사랑도 멀어진다고 하여요.
당신이 가신 뒤로 사랑이 멀어졌으면, 날마다 날마다
나를 울리는 것이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여요.
◎시어 풀이
*양(量) : ① ‘분량·식량(食量)·국량(局量)’의 준말. ② 수량·무게·부피의 총칭.
*측량(測量) : 기계를 써서 물건의 깊이·높이·길이·넓이·거리 등을 잼.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사랑’의 양을 당신과 떨어져 있는 거리와 연관 지어 나타낸 것으로 사랑하는 대상과 거리가 멀수록 그리움이 더해져 사랑의 양이 많아짐을 드러내고 있다. 다시 말하면, 당신과 멀리 있을수록 커지는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이 시에서 화자인 ‘나’는 사랑하는 당신과 이별한 상황에서 사랑하는 양을 측정하는 방법을 통해 당신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내고 있다. 추상적인 대상인 ‘사랑’의 양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경어체를 사용하여 여성적 어조를 형성하고, 사랑에 대한 역설적인 인식을 통해 주제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1연은 당신과 ‘나’의 거리에 따른 사랑의 양을 드러내고, 2연은 당신이 가신 뒤에 더 커진 사랑의 양을 표현하고 있다. 이 시에 나타난 ‘거리’는 당신과 ‘나’ 사이의 공간적으로 떨어진 간격으로 사랑의 양을 알 수 있게 한다. ‘나’는 거리가 가까우면 사랑의 양은 적지만, ‘나’를 웃기‘는 것이라고 여겨, 당신과 멀리 떨어지지 않고 가까운 거리에 있기를 바란다. 즉 ‘나’는 당신이 가까이 있어서 당신을 그리워하거나 슬퍼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서두에서 ‘즐겁고 아름다운 일은 양이 많을수록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의 사랑은 양이 적을수록 좋은가 봐요’라고 진술한다. 앞의 문장은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이며, 뒤 문장은 사랑에 대한 화자의 생각으로 역설적인 인식이다. 이어서 당신의 사랑은 당신과 ‘나’ 사이의 사랑의 거리이며, 따라서 당신과 ‘나’ 사이의 사랑의 양을 아는 방법은 ‘당신과 나 사이의 거리를 측정할 수밖에 없’음을 밝히고 있다. ‘그래서 당신과 나의 거리가 멀면 사랑의 양이 많고, 거리가 가까우면 사랑의 양이 적을 것입니다’라고 진술한다. 이것은 역설로서 단번에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사랑 또한 내 외부에 존재하는 대상이고, 그것에 대한 집착을 '양이라고 가정해 보면, 사랑하는 이가 멀어졌을 때 나의 집착은 커지고 따라서 내가 가진 사랑의 양이 증가하는 것이며, 반대로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두었을 때는 ‘사랑’ 자체를 연연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둘이 가까이 있어 사랑이 충족되었기에 굳이 집착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사랑의 양이 적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그런데 적은 사랑은 나를 웃기더니 많은 사랑은 나를 울립니다’라는 짧은 문장에서 사랑의 역설은 빛이 난다. 거리가 가까운 ‘적은 사랑’은 나를 기쁘게 하더니, 거리가 먼 ‘많은 사랑’은 나를 슬프게 한다고 외친다.
그래서 화자는 2연에서 ‘사랑이 멀어지면, 사랑도 멀어진다’라는 사랑에 대한 사회적인 통념과는 달리, ‘당신이 가신 뒤로 사랑이 멀어졌으면, 날마다 날마다 나를 울리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어요’라는 설의법을 사용하여, 이별 뒤에 그리워하며 슬퍼하는 화자의 슬픔도 임에 대한 사랑임을 드러내며, 결국 당신이 가신 뒤에 더 커진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이 시의 담긴 생각은 표면의 논리와 이면의 논리가 배치된다. 말하자면 표면과 이면이 모순 관계에 있는데 표면적인 사고의 전개 과정은 오히려 논리적인 모습을 보인다. 당신과 나의 사랑은 당신과 나와의 사이에 존재한다. 당신과 나의 거리가 멀면 그사이에 사랑이 많이 들어갈 것이니 사랑의 양이 많고, 거리가 가까우면 그사이에 들어갈 사랑의 양이 적을 것이다. 그러나 즐거움은 당신과 가까이 지낼 때 얻을 수 있다. 당신과 멀어지면 사랑의 양은 늘어날지 모르지만 괴로움은 커진다. 그러니 당신과 가까이 있는 것은 즐거움을 주기는 하지만 사실은 사랑의 양은 적어지는 것이다. 당신과 멀리 떨어지는 것은 괴롭기는 하지만 사랑의 양은 커지는 것이다. 한용운이 말하고자 하는 속뜻은 바로 이것이다.
이처럼, 만해는 사랑의 정의를 기존과 다르게 함으로써, 자신의 통찰을 진술하는 방식을 취했다. 거기에 상식적 진리의 부정(否定)에서 출발하여 고차적 진리를 말하는 불교식 화법을 이용한 것이다.
▲작자 한용운(韓龍雲, 1879~1944)
시인 · 승려 · 독립운동가. 속명은 유천(裕天). 호는 만해(萬海). 충남 홍성 출생하여 1905년 불교에 입문했으며, 1918년 불교 잡지 《유심(愉心)》을 창간하여 편집인과 발행인이 되었다. 이때 《유심》에 시 <심(心)>을 발표함으로써 문단 활동을 시작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으며, 일제에 체포되어 3년 형을 받았다. 1940년 창씨개명 반대 운동과 1943년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 일제의 극심한 탄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비타협적인 독립사상을 견지하다가,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기 싫다며 북향으로 지은 성북동 집에서 지내다 66세의 나이로 죽었다.
1925년에는 한국 근대 시사의 불후의 업적인 <님의 침묵>을 펴내어 민족의 현실과 이상을 시적 이미지로 형상화했다. 불교 사상을 바탕으로 철학적 사색과 신비적 명상 세계를 형상화한 철학적·종교적 연가풍의 시를 주로 썼고, 김소월과 함께 한국 근대시의 정초를 놓았다. 시집 《님의 침묵》(1926) 외에 《조선 불교 유신론》, 《불교 대전》 등의 저서를 남겼다.
►해설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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