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불어
- 윤동주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어디로 불려 가는 것일까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을까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
바람이 자꾸 부는데
내 발이 반석 위에 섰다.
강물이 자꾸 흐르는데
내 발이 언덕 위에 섰다.
-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시》(1948)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일제 강점기의 부당한 시대 현실 앞에서 방관자로 남은 자신의 처지를 슬퍼하는 시인의 마음을 상징적 시어와 반어적 표현을 통해 드러낸 작품이다.
화자의 독백 형식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시적 화자가 자신이 처한 괴로움의 이유를 찾으려고 고뇌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1~2연에서 화자는 바람을 맞으며 까닭 모를 괴로움에 사로잡혀 괴로움의 이유를 찾고자 내면으로 향한다. 먼저 화자는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어디로 불려가는 것일까’라고 의문을 제기한다. 여기서 ‘바람’은 자아 성찰의 매개체로서 화자의 괴로움을 깨닫게 해주는 대상일 수 있다. 바람이 저렇게 불어오고 불어 가는데 시적 자아는 까닭 모를 괴로움에 잠겨 있다. 그런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라고 진술한다. 이 진술은 모순이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말 원이 없다고 단언한다면, 3연에서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을까’라고 자문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무리 원인을 찾아보아도 찾을 수 없어서라면, ‘괴로움의 이유를 모르겠다’라는 표현이 옳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유가 없다’는 것은 괴로움의 이유를 알면서도 화자 자신이 적극적,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방관자로서의 자괴감 때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4연에서 화자는 자신이 겪는 ‘괴로움’의 근거를 탐색한다. 이 대목에서 화자는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를 슬퍼한 이유도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괴로움의 이유가 실연도, 시대적 상황에 대한 슬픔 때문도 아니라고 뜻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강한 부정은 괴로움의 원인이 이 둘과 관계가 있다는 반어적(反語的)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 여자’는 개인적인 삶이지만, ‘시대’는 화자가 살아가는 시대, 곧 식민지 시대를 이르는 것이다.
그런데 5, 6연에서는 안타깝게도 ‘바람’이 불고 ‘강물’은 자꾸 흐르는데 화자는 ‘반석’ 위에 ‘언덕’ 위에서 변하지 않고 머물러 있는 모습이다. 이 두 연은 동일한 구조를 취하여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바람’과 ‘강물’이 방향성을 가지고 움직이는 대상으로 제시되는 것과 대조적으로 ‘반석’과 ‘언덕’은 목표 없이 정체된 삶을 나타내고 있다. 이를 통해 괴로움의 근거가 정체된 자아에 대한 고뇌임을 알 수 있으며, 화자는 이와 같은 자기 응시를 통해 자신의 무력감, 나아가서는 시대와 역사를 외면할 수 없는 책임감으로 괴로워하고 있다.
결국, 이 시는 식민지 청년으로서의 슬픔과 괴로움을 느끼면서도 어려운 현실 속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고 방관적인 자세로 사는 자신의 처지를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작자 윤동주(尹東柱, 1917~1945)
시인. 북간도 출생. 연희전문 졸업. 일본 도시샤 대학 영문과에 재학 중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이듬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1941년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19편의 시를 묶은 자선 시집(自選詩集)을 발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가 사후에 햇빛을 보게 되어, 1948년에 유고 30편이 실린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간행되었다. 주로 1938~1941년에 쓰인 그의 시에는 불안과 고독과 절망을 극복하고 희망과 용기로 현실을 돌파하려는 강인한 정신이 표출되어 있다. 작품으로 <서시>, <자화상>, <참회록>, <또 다른 고향> 등이 있다.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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