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 윤동주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 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모든 것이 황폐된 식민지 조선에서 가치관의 혼란을 겪으며 고통스럽게 살아가던 젊은 지식인의 고뇌와 아픔, 상실과 모색을 다루고 있는 작품으로, 잃어버린 자신의 참모습을 찾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성찰의 시인 윤동주의 면모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상징적인 시어 ‘길’, ‘담’, ‘문’ 등의 소박하고 일상적인 시어를 활용하여 내면세계를 형상화하고 있으며, 차분한 고백적 어조를 통해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한 탐색과 결의. 자아 회복을 위한 진정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1연의 첫머리에서 시인은 ‘잃어버렸습니다’라고 고백한다. 이것은 참된 자아를 상실하고 있다는 뜻이다. ‘실은 무얼 어디에다 잃었는지 몰라’라고 고백하고 있으나, 시인은 민족의식을 지닌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자신이 지녀야 할 가치와 삶을 잃고 산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러므로,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라는 것은 화자의 내면에 잠자고 있는 잃어버린 자아를 일깨우는 행위로서 본격적인 자아 탐색의 ‘길’로 나선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길’은 잃은 것을 찾는 과정, 인생의 의미를 찾아가는 공간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2~3연에 보듯, 화자는 참된 자아를 찾아 길을 나서 보지만, 그 길은 끝없이’ 이어진 ‘돌담’이라는 장애물을 만나 고통을 겪게 되고, 굳게 닫은 ‘쇠문’에 의하여 내면의 본질적인 자아와의 단절됨으로써 좌절하고 만다. 여기서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있다는 반복적인 표현은 화자의 무거운 심리를 드러내어 자아 탐색의 과정이 길고 고됨을 드러내는 것이며, 쇠문을 굳게 닫은 돌담이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는 표현은 암울하고 절망적인 현실 상황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화자에게는 고난과 절망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4연에서는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이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계속되고 있음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는 화자는 5연에 와서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웁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절망작인 상황에서 참된 자아를 회복하는 것이 힘겹다고 느끼며 화자는 ‘하늘’을 쳐다본다. ‘하늘’은 화자에게 자신이 처한 현실 상황을 일깨워 주는 지고한 존재이며 순수한 존재로, 화자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이 부끄러움은 화자에게 자기 성찰을 통해 새로운 의지를 북돋우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그러나, 이 부끄러움은 자괴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후 현실 극복의 의지를 보이게 된다.
그래서 6~7연에서 화자는 ‘풀 한 포기 없는’ 삭막하고 황폐한 길을 걸으면서도 이 길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기 때문이며, 또 내가 사는 이유 역시 ‘잃은 것’을 찾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담 저쪽에 남아 있는 나’는 내가 잃은 것이며, 반드시 내가 찾아야 할 참된 자아(이상적인 자아)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길을 멈출 수가 없다. 이것은 잃은 것을 다시 찾고야 말겠다는 자아 회복의 염원이며, 참된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결의와 의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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