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가하는 새
- 황지우
새는
자기의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자기의 앉은 가지에
자기가 남긴 체중이 잠시 흔들릴 뿐
새는
자기가 앉은 자리에
자기의 투영이 없다
새가 날아간 공기 속에도
새의 동체가 통과한 기척이 없다
과거가 없는 탓일까
새는 냄새 나는
자기의 체취도 없다
울어도 눈물 한 방울 없고
영영 빈 몸으로 빈털터리로 빈 몸뚱어리 하나로
그러나 막강한 풍속을 거슬러 갈 줄 안다
생후의 거센 바람 속으로
갈망하며 꿈꾸는 눈으로
바람 속 내일의 숲을 꿰뚫어 본다
-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1983)
◎시어 풀이
출가 : ① 집을 떠나감. ② 세속의 집을 떠나 불문(佛門)에 듦.
투영 : 물체의 그림자를 비춤. 또는 그 그림자. 투사영(投射影).
동체 : 움직이는 몸
체취 : 몸 냄새
▲이해와 감상
황지우 시인의 시 <출가하는 새>의 소재는 물론 새이다. 새의 생태와 생리를 통해 세속적 가치에서 벗어나 진정한 삶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을 형상화하고 있다.
마치 ‘별’이 ‘장군’을, ‘밤손님’이 ‘도둑’을 환유하듯, 새는 ‘출가하는 사람’의 환유다. 출가란 원래 불교나 천주교에서 쓰이는 용어다. 이 세상에서 살아왔던 집을 떠나 종교에 귀의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새’는 세속적 가치에 연연하지 않고 삶의 목표를 지향하는, 집착과 욕망을 초월한 존재로서의 의미가 있다.
이 시의 표현상의 특징을 보면, 화자의 시선이 새의 외면에서 내면으로 이동하고 있으며, 화자가 중시하는 가치를 의인화된 대상인 ‘새’에 투영하여 형상화하고 있다. 그리고 ‘않는다’, ‘없다’ 등 부정 서술어를 반복하여 화자의 세속적 삶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드러냄은 물론 ‘자기의 ~ ’, ‘빈 몸으로 빈털터리로 빈 몸뚱어리’ 등 동어 반복을 통해 대상의 속성을 강조하고 있다.
전체 18행으로 연구분이 없는 이 시는 일단 내용에 따라 네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7행까지는 자신의 자취를 남기지 않는 새를, 8~12행까지는 지나간 흔적이 없는 새를, 13~15행까지는 무소유(無所有)로 바람을 거스르는 새를, 여기까지는 오로지 새의 생태나 생리 등 외면적인 서술적 소묘에만 충실하다가 마지막 16~18행에 와서는 내용의 반전이 있다. 즉, ‘내일의 숲’을 꿰뚫어 보는 내면적인 새를 표현하고 있다.
이를 다시 하나하나 간추려 설명해 보면, 우선 ‘새’는 ‘앉은 가지에’ ‘자기의 자취’를 남기지 않고, ‘앉은 자리’에 ‘자기의 투영’이 없다. 여기서 ‘투영’이란 자신의 모습이 비친 그림자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새’는 날아간 공기 속에도 통과한 기척이 없다. 이것은 자신을 드러내도록 일부러 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체취’는 물론 ‘울어도 눈물 한 방울’ 없다.
지금까지 ‘〜없다’, ‘〜없고’의 주어나 목적에 해당하는 ‘자기의 체취’, ‘자기의 투영’, ‘기척’, ‘자기의 체취’ 등은 ‘새’의 속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것은 모두 화자가 벗어나고 싶어 하는 세속적 가치로서, 화자는 이를 모두 부정하고 ‘영영 빈 몸으로 빈털터리로 빈 몸뚱어리 하나’, 즉 ‘새’의 탈속적(脫俗的)인 속성을 동의어를 세 번이나 반복하여 강조해 본다.
그리고 이어서 드디어 이 시의 핵심인 반전이 따른다. 이렇게 볼 때 이 시의 주제는 바로 다음 행으로 이어지는 ‘안다’와 ‘본다’라는 반전 내용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빈 몸, 빈털터리, 빈 몸뚱어리이지만 새는 바람의 속도에 맞서 ‘거슬러 갈 줄’ 알고, ‘거센 바람 속 내일의 숲을 꿰뚫어’ 본다는 것이다. 여기서 ‘거슬러 갈 줄 안다.’라는 저항적이며, 의지적인 태도를 의미하며, ‘거센 바람 속’은 극복의 대상인 고난, 시련, 역경을 의미한다. 따라서 ‘갈망하며 꿈꾸는 눈’은 미래를 꿰뚫어 보는 직관이며, ‘내일의 숲’은 화자가 추구하고자 하는 대상이자 목표로서 이상적인 세계, 곧 희망찬 미래를 상징한다.
이렇게 볼 때, ‘막강한 풍속을 거슬러 갈 줄 안다’가 일차적 긍정으로의 반전이고, 끝 연에 해당하는 ‘생후의 거센 바람 속으로/ 갈망하며 꿈꾸는 눈으로/ 바람 속 내일의 숲을 꿰뚫어 본다’가 마무리 반전이다.
결국, 이 시는 가진 것 없고 힘없는 민초들을 암시하는 ‘새’를 등장시켜 권력의 힘 앞에 굴하지 않고 새가 바람을 거슬러 날아가듯 권력에 저항도 할 줄 알면서 미래의 새날인 ‘내일의 숲’이 열리기를 꿈도 꾸어 본다는 것이다. 지난날 이 시인이 이른바 민중문학 측 시인임을 고려하면, 여기서 ‘출가하는 새’의 모습은 곧 앞으로 이렇게 살았으면 하는 자기 의지의 모습이요, 그 출사표이었을 것이고, 더 확대하면 바람직한 민중적 삶의 어느 일면을 담아낸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작자 황지우(黃芝雨, 1952 ~ )
시인. 전남 해남 출생.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연혁>이 입선하여 등단했다. 섬세한 감각, 아름다운 서정과 시대에 대한 분노가 교묘하게 결합된 시를 주로 썼다.
첫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1983)는 풍자시의 새로운 지평을 연 작품으로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이외에도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1984), 《나는 너다》(1987), 《소용돌이무늬 속의 연꽃》(1990), 《게눈 속의 연꽃》(1990),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1995), 백석문학상 수상작인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1998)가 있다. 시작 활동뿐만 아니라 극작 및 미술평론에서도 능력을 보였다.
*해설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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