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2
- 정지용
바다는 뿔뿔이
달어나려고 했다.
푸른 도마뱀 떼같이
재재발랐다.
꼬리가 이루
잡히지 않았다.
흰 발톱에 찢긴
산호(珊瑚)보다 붉고 슬픈 생채기!
가까스로 몰아다 붙이고
변죽을 둘러 손질하여 물기를 씼었다.
이 앨쓴 해도(海圖)에
손을 씻고 떼었다.
찰찰 넘치도록
돌돌 구르도록
화동그라니 받쳐들었다.
지구는 연잎인 양 오므라들고……펴고……
- 《시원(詩苑)》(1935)
재재발랐다 : 재잘재잘 수다스러워 어수선하면서도 즐겁고 유쾌한 느낌이 있었다.
이 시는 파도치는 바다를 바라보며 생동감 넘치는 바다의 모습을 그려낸 작품으로, 파도가 밀려오는 푸른 바다의 모습을 놀랄 만큼 신선하고 신비로운 이미지로 나타내고 있다.
8연으로 된 이 시는 근경에서 원경으로 시선이 이동하면서 시상을 전개하고 있으며, 주관적 정서를 절제하고 자연 현상을 음성상징어(의성어)를 활용하여 인상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한편 대상에 대한 인상을 참신한 비유와 연상, 감각적 표현으로 바다의 신비로움을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다.
1~3연은 밀려왔다 밀려 나가는 역동적인 파도의 모습을, 4~6연은 바닷물이 밀려 나가고 드러난 해안의 모습을, 후반부인 7~8연에서는 해안선까지 확대된 시인의 시선을 통해서 바다의 전체의 모습을 총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우선 1~3연에서 화자는 끊임없이 밀려왔다가 밀려가는 파도의 모습을 '뿔뿔이 / 달아나려고'로(활유법), 파도가 뭍에 부딪혀 흩어지는 모습을 '푸른 도마뱀 떼'로(직유법), 재잘재잘 수다스러워 어수선하면서도 경쾌하게 흩어지는 모습을 ‘재재발렀다’로, 재빠른 파도의 움직임을 '꼬리가 이루/ 잡히지 않았다'로 형상화하였다. ‘푸른’, ‘흰’, ‘붉은’ 등 색채 이미지를 통한 비유적 표현이 시를 생동감 있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4~6연에서는 하얗게 부서지는 포말(泡沫)을 ‘흰 발톱’으로, 하얗게 부서져 기진한 듯 만들어 놓은 해안의 물골을 ‘산호보다 붉고 슬픈 생채기’로, 파도가 밀려 나가면서 해안의 곡선이 선명하게 드러난 것을 ‘변죽을 둘러 손질하여 물기를 씻었다’로,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 나가며 해안에 남겨놓은 흔적을 항해용 지도인양 상상하여 ‘해도에 손을 씻고 떼었다’로 묘사하고 있다. 핵심 시어가 ‘도마뱀 떼→생채기→해도’로 이어지는 감각적 표현과 비유는 바다를 생동감 있게 그려내고 있다.
시상이 정리되는 마지막 부분인 7~8연에서 화자는 마침내 ‘해도’의 총체적인 모습을 그려 보여준다. ‘찰찰 넘치도록/ 돌돌 구르도록’의 '찰찰'과 '돌돌'이라는 양성모음의 의태어(첩어)를 통해 충만하고 경쾌한 바다의 이미지를 제시하는 한편, 바다에 둘러싸인 지구를 바다가 떠받들고 있는 것으로 보고 ‘회동그라니 받쳐들었다’로, 또한 바다에 둘러싸인 지구가 마치 연잎처럼 오므라들기도 펴지기도 하는 것으로 보아 ‘연잎인 양 오므라들고……펴고……’로 묘사하고 있다. 말없음표는 오므리고 펴는 행위의 연속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시인은 바다에 대한 단순한 인식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은 시인다운 혜안(慧眼)으로 바다와 하나가 된 무아경(無我境)의 세계에서 바다를 응시함으로써 바다에서 '도마뱀'을 찾아내고 '꼬리'와 '흰 발톱', 나아가 육지를 떠받들고 있는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시는 <바다> 연작시 10여 편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으로 정지용의 초기 시 특징의 하나인 선명한 이미지를 중시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작자 정지용(鄭芝溶, 1902~1950)
시인. 충북 옥천 출생. 섬세한 이미지와 세련된 시어를 특징으로 하는 193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휘문고보 시절 습작지 《요람》을 발간하는 등 일찍부터 시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고, 1920년대 중반부터 모더니즘 풍의 시를 써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 무렵에 발표한 작품으로는 <향수>와 식민지 청년의 비애를 그린 <카페 프랑스>가 있다.
그러나 정작 정지용의 시가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은 1930년대 《시문학》의 동인으로 참여하여, 김영랑과 함께 순수 서정시의 개척에 힘을 썼다. 그러나 김영랑이 언어의 조탁과 시의 음악성을 고조시키는 일에 힘을 기울인 데 비해, 정지용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새로운 표현의 방법을 개척하는 데 힘을 쏟았다.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의 구축, 간결하고 정확한 언어 구사가 바로 그것이다. 이를 통해 그는 한국 현대 시의 초석을 놓은 시인으로 평가된다.
후기에는 동양적 관조의 세계를 주로 형상화하였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했던 이유로 보도연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한국전쟁 이후의 행적에는 여러 설이 있으나 월북했다가 1953년경 북한에서 사망한 것이 통설로 알려져 있다.
시집으로는 《정지용 시집》(1935), 《백록담》(1941) 등이 있고, 《문학독본(文學讀本)》(1948), 《산문(散文)》(1949) 등 두 권의 산문집이 있다.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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