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山上)의 노래
- 조지훈
높으디 높은 산마루
낡은 고목(古木)에 못 박힌 듯 기대어
내 홀로 긴 밤을
무엇을 간구하며 울어 왔는가.
아아 이 아침
시들은 핏줄의 굽이굽이로
사늘한 가슴의 한복판까지
은은히 울려오는 종소리.
이제 눈감아도 오히려
꽃다운 하늘이거니
내 영혼의 촛불로
어둠 속에 나래 떨던 샛별아 숨으라.
환히 트이는 이마 위
떠오르는 햇살은
시월상달의 꿈과 같고나.
메마른 입술에 피가 돌아
오래 잊었던 피리의
가락을 더듬노니
새들 즐거이 구름 끝에 노래 부르고
사슴과 토끼는
한 포기 향기로운 싸릿순을 사양하라.
여기 높으디 높은 산마루
맑은 바람 속에 옷자락을 날리며
내 홀로 서서
무엇을 기다리며 노래하는가.
- 출전 《역사 앞에서》(1957)
간구 : 간절히 바람.
시월상달 : ‘시월’을 예스럽게 이르는 말. 햇곡식을 신에게 드리기에 가장 좋은 달이라는 뜻에서 온 말
싸릿순 : 콩과의 낙엽 활엽 나무에서 새로 돋아난 싹.
사양하라 : ‘사양(辭讓)하다’의 명령형, 겸손하여 받지 아니하거나 응하지 아니하다.
이 작품은 높은 산마루의 고목에 기대어 생명력이 넘치는 모습을 통해 새로운 생명력에 대한 추구와 예찬, 그리고 광복 이후 펼쳐질 바람직한 조국의 미래에 대한 염원을 비유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시어의 대비를 통해 시적 상황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수미쌍관을 통해 형태적 안정감을 주고, 절제된 시어, 비유적 표현과 감각적 이미지를 사용하여 화자가 처한 상황과 정서를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1연은 결핍된 무엇인가에 대한 간구, 즉 일제 강점기에 광복을 간구하던 삶을 표현하고 있다. ‘높으디 높은 산마루’는 힘들고 고달팠던 인고의 극한적인 상황을 의미하며, ‘낡은 고목에 못 박힌 듯’은 극한적 상황에 부닥친 현재 화자의 모습이다. 그래서 화자는 암울한 상황인 ‘긴 밤’을 울며 간구하던 일을 떠올린다. 이 시에서 화자가 ‘간구’한 그 무엇은 결핍된 것을 채워달라는 것으로, 이것은 곧 민족의 해방일 것이다.
2연은 화자가 그토록 간구하던 대상의 도래를 표현하고 있다. ‘아침’은 앞 연의 ‘긴 밤’과 대비되는 것으로 간구하던 것이 이루어진 시간, 곧 광복을 상징한다. ‘시들은 핏줄, 사늘한 가슴’은 생명력을 잃었던 화자를 가리키는데, 그런 화자에게 들리는 ‘종소리’는 그동안 간구하던 시대가 도래하는 것으로, 조국의 광복을 알리는 기쁜 소식이다.
3연은 대상의 도래에 따른 위안을 노래하고 있다. ‘눈감아도 오히려/ 꽃다운 하늘이어니’. 이제 그토록 바라던 ‘꽃다운 하늘’을 맞이했으니, 울지 않아도(오랜 기다림을 그쳐도) 좋으니, ‘촛불’, 어둠 속에 나래 떨던 ‘샛별’과 같은 기다림의 슬픔은 ‘숨으라’라고 한다. ‘숨으라’는 ’가거라, 사라져라‘의 뜻이다. 슬픔의 끝이 왔으니, 이제 애태우던 영혼은 쉼과 안식을 얻어도 좋다는 위안이다.
이어 4연에서는 대상의 도래에 따른 환희를 노래하고 있다. 시월의 꿈과 같은 ’떠오르는 햇살‘은 간구하던 대상의 도래, 인간과 만물의 생명력을 주는 대상, 조국의 광복이 이루어져 가슴이 벅차오른다는 것이다.
5연은 상실했거나 위축됐던 생명력의 회복을 노래한다. ‘메마른 입술에 피가 돌아/ 오래 잊었던 피리의/ 가락을 더듬노니’는 입이 있어도 말 못 하고 침묵으로 일관했던 입술이 생기를 얻었으니, 마음껏 노래할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이다.
6연에서는 모든 생명의 환희에 대한 예찬과 경외를 표현하고 있다. ‘향기로운 싸릿순을 사양하라‘는 사슴과 토끼가 양식을 사양해도 좋을 만큼 아침을 맞이하는 기쁨이 크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다. 1연에서는 과거 일제 강점기의 암울했던 상황을 '긴 밤'이라는 시간적 배경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반해, 2연에서 알 수 있듯이 7연의 광복된 조국의 현실은 '아침'이라는 시간으로 설정되어 있다. '밤'은 어둡고, 차가운 이미지로써 고난과 시련의 시간을 상징적으로 드러낼 수 있기도 하지만, 자연적 순리로 인해 '밤'이 가고 '아침'이 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는 절대적 이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마지막 7연은 희망과 기쁨이 있는 기다림을 노래한다. 그것은 곧 광복 후 바람직한 조국의 미래에 대한 염원일 수 있다. 7연은 1연과 수미상관을 이루고 있지만, 1연과 7연의 시적 상황이나 의미는 큰 차이점을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하면, 1연의 상황이 ’낡은 고목’으로 표현된 일제 강점기의 상황이라면, 7연은 ‘맑은 바람’으로 표현된 광복된 조국‘의 상황이다. 그리고 화자의 심정이 1연에서는 ’울어 왔는가‘의 슬픔과 탄식이라면, 7연에서는 ’기다리며 노래하는가‘의 기쁨과 염원이다.
그러므로 시적 화자는 간절히 원했던 해방을 얻었지만, 아직 간구는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과거의 상처를 보듬고 새로운 세계를 건설해야 하는 민족사적 과제가 해방과 함께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자는 ’내 홀로 서서/ 무엇을 기다리며 노래하는가‘와 같이, 또다시 무엇인가를 간구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높으디 높은 산마루’에서 고고하고 정결한 자세로 미래의 이상을 염원하는 시적 화자의 모습에서 시인의 지사적 태도를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시인은 광복의 기쁨을 채 누리기도 전에 민족의 미래에 대한 또 다른 이상을 염원하고 있다. 광복 전의 화자의 모습을 '시들은 핏줄', '메마른 술' 등으로 표현하여 생명력을 상실한 모습으로 비유하고 있는데, 그러한 모습에 '종소리'와 '피'가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 하지만 화자는 이러한 광복을 기쁨을 채 누리기도 전에 또다시 '높이디 높은 산마루'에서 '무엇을 기다리며 노래'하고 있다. 과거처럼 울고 있지는 않지만, 민족의 미래에 대한 염원을 가지고 앞을 내다보는 선구자로서의 화자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시인. 경북 영양 출생. 본명 동탁(東卓). 1939년 《문장》지를 통하여 <고풍 의상>, <승무>, <봉황수> 등으로 정지용의 추천을 받아 등단하였다. 고전적 풍물을 소재로 하여 우아하고 섬세하게 민족 정서를 노래하였으며, 박두진, 박목월 등과 《청록집》(1946)을 간행하였다. 시집으로 《풀잎 단장》(1952), 《역사 앞에서》(1959), 《여운》(1964) 등이 있다.
<해설>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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