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날 에워싸고
- 박목월
산이 날 에워싸고
씨나 뿌리고 살아라 한다.
밭이나 갈고 살아라 한다.
어느 산자락에 집을 모아
아들 낳고 딸을 낳고
흙담 안팎에 호박 심고
들찔레처럼 살아라 한다.
쑥대밭처럼 살아라 한다.
산이 날 에워싸고
그믐달처럼 사위어지는 목숨
구름처럼 살아라 한다.
바람처럼 살아라 한다.
- 출전 《청록집》(1946)
<시어 풀이>
들찔레 : 들에 피는 찔레.
사위어지는 : 불이 사그라져서 재가 되는.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의인화하여 ‘산’이 말한 것을 전달하는 방식을 취하여 자신의 소망을 표현한 시로, 화자는 자연 속에서의 소박한 삶을 토대로 현실을 넘어선 초월적이고 달관적인 삶, 즉 자연 속에서의 순수한 삶에 대한 소망을 표현하고 있다.
이 시에서 ‘산’은 화자가 지향하는 세계다. 그러므로 화자는 세속적인 욕망이나 구속에서 벗어나 순수한 자연 공간인 ‘산’에 둘러싸여 자연 속에서 욕심 없이 소박하게 살고 싶은 소망을 노래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시는 자연 친화적이다.
표현상의 특징은 ‘산이 날 에워싸고 ~ 살아라 한다.’를 반복하여 리듬감을 형성하고 자연과의 동화가 점층적으로 진행되게 함으로써 주제를 강조하는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 1연에서 산은 ‘씨나 뿌리며’. ‘밭이나 갈며’ 살라 한다. 이것은 인간의 최소한 상게수단을 뜻하는 것으로, 자연에 토대를 두고 살라는 것을 의미한다. 유사한 동사 구조의 반복은 운율을 형성하고 의미를 강조하는 것으로 2연, 3연에서도 마찬가지 역할을 한다. ‘산이 날 에워싸고’는 의인법을 구사한 것이다.
2연에서는 점층적으로 시상이 전개되어 자연의 모습대로 살라고 한다. 짧은 산자락에 집에서 아들딸 낳고, 호박 심고, 들 찔레처럼 쑥대밭처럼, 자연 그대로 사는 소박한 삶을 노래하고 있다.
마지막 3연에서는 안간은 그믐달처럼 사위어지는 목숨이라며 세속에 얽매이지 않는 달관의 삶을 살라고 한다. 정신적 달관의 경지이며, 자연과의 동화가 완전히 이루어진 삶이다. 이 때 ‘그믐달처럼’은 자연 질서에 따라 순리대로 살아야 하는 자연 일체적 삶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이 시에서 '산'으로 대표되는 자연은 시적 화자를 에워싸고 삶의 모습에 대하여 명령형의 권유를 하고 있다. 자연 속에서 욕심 없이 소박하게 살며 더 나아가 그믐달처럼 현실을 초월하여 살라고 한다. 하지만 이는 자연이 화자에게 직접 말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형식을 빌려 화자의 소망을 나타낸 것이다. 자연 속에서 자연과의 일체를 꿈꾸며 초월적이고 달관적인 삶을 꿈꾸는 화자의 소망을 드러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에 대한 시인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이 시에 나타나는 자연은 자연으로의 귀의라는 동양적 자연관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다.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 인간다운 삶을 빼앗긴 박목월의 '새로운 고향'으로서의 자연이다. 그렇기에 '아들 낳고 딸을 낳고, 호박 심고' 사는 자연으로 나오는 것이다.
이 작품은 1946년 3인 공동 시집 《청록집》에 수록된 작품으로 일제 강점기의 어두운 현실 속에서 시인이 자연을 대하는 태도가 잘 나타나 있다. ‘청록파’란 1939년 《문장》지의 추천으로 등당한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세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이들은 1946년 공동 시집인 《청록집》을 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모더니즘에 반발하고 영원한 생명의 고향인 '자연'을 추구하였다. 이들은 자연미의 재발견과 생명의 원천에 대한 추구 노력을 보여 주었다. 또한, 어두운 현실 아래 빼앗긴 고향과 자연을 찾아 노래하였으며 그 속에서 잃어버린 인간 생명의 원천과 역사의 전통을 발견하려 하였다. 그들의 이러한 노력은 일제 말 문학적 암흑기의 각박한 현실에 시달렸던 이들에게 힘을 주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박목월은 유난히 향토색이 감도는 자연을 소재로 하여 섬세하고 보드라운 심성의 세계를 표현한 시인이다.
<해설>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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