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씌어진 시
- 윤동주
창(窓)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들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時代)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慰安)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握手).
- 《쉽게 씌어진 시》
<시어 풀이>
속살거려 : 자질구레한 말로 속닥거려.
육첩방(六疊房) : 다다미(일본식 돗자리) 여섯 장을 깐 일본식의 작은 방.
천명(天命) : 하늘이 내린 피할 수 없는 명령.
침전(沈澱) : 액체 속에 섞인 작은 고체가 밑바닥에 가라앉음. 또는 그 앙금.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윤동주가 일본에 유학 중이던 1942년에 쓴 작품으로, 암담한 현실 속에서 시대에 대한 치열한 고민 없이 ‘쉽게 씌어진 시’를 통해 일제 강점기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가려는 지식인의 자기 성찰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1연의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육첩방은 남의 나라’는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어둔 밤하늘의 별조차 볼 수 없으며, 이국땅에서 다다미 여섯 장의 넓이에 갇혀 있는 화자의 처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화자가 처한 아담한 상황이다. ‘밤비’는 자기 성찰의 계기를 마련하는 어둡고 괴로운 현실이며, 육첩방은 다다미(일본식 돗자리) 여섯 장을 깐 일본식의 작은 방으로 억눌리고 암담한 공간. 화자를 구속하는 시대 상황을 가리킨다. 2연에서, 시인은 글을 써야 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인 것을 알면서도 암담한 현실에 저항하지 못하고 시를 써야 하는 슬픈 운명을 인식하고 있다.
3~6연은 자신의 현재 삶을 우울하고 회의적인 시선으로 인식하는 자기 성찰을 표현한다. 부모와 가족, 혹은 조국의 도움을 받아 늙은 교수의 강의, 즉 시대 현실과 거리가 먼 지식을 공부하는 것도 그렇고, 어릴 때 친구를 잃어버리고 사는 것도 그렇다. 여기서 어릴 때 친구는 일제 탄압에 의해 죽거나 행방불명이 된 이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홀로 남아 옴츠리고 사는 ‘남은 자’의 모습, 삶에 대한 우울함과 회의가 잘 드러나 있다. 이런 삶의 회의는 7연에 와서 자기 행위를 통해서 부끄러움으로 드러난다. 암울한 시대에, 무기력하게 사는 삶이 힘들고 어려운데 그 속에서 시가 쉽게 씌여지다니 그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8~10연은 현실에 대한 재인식과 반성을 통해 이 암울한 상황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즉, 어두운 시대를 살아야 하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면서도 절망하거나 체념하지 않는다. ‘등불을 밝혀’와 ‘아침’은 새 시대를 밝히기 위한 노력. 현실 극복의 의지를 상징하는 말이다. ‘시대처럼 올 아침’, 즉 희망찬 미래(조국의 광복)을 기다리며 자신의 손을 잡는다. 이때 ‘나는 나에게’로 표현된 두 사람의 ‘나’는 현실에서 우울한 삶을 살아가는 현실적 자아와 그것을 반성적으로 응시하는 내면적 자아라고 할 수 있다. 두 자아가 내적 갈등을 해소하고 ‘악수’를 함으로써 내적 갈등을 해소하고 화해를 하여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작자 윤동주(尹東柱, 1917~1945)
시인. 북간도 출생. 일본 도시샤 대학 영문과에 재학 중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이듬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1941년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19편의 시를 묶은 자선 시집(自選詩集)을 발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가 자필로 3부를 남긴 것이 사후에 햇빛을 보게 되어, 1948년에 유고 30편이 실린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간행되었다.
주로 1938~1941년에 쓰인 그의 시에는 불안과 고독과 절망을 극복하고 희망과 용기로 현실을 돌파하려는 강인한 정신이 표출되어 있다. 작품으로 <서시> <별 헤는 밤> <자화상> <참회록> <십자가> <또 다른 고향> 등이 있다.
/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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